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7
7화 머리부터 발끝까지
클레어 컴벨은 오랜만에 옛날 꿈을 꾸었다.
‘10년 전… 이었나?’
파지직!
전조도 없이 나타났던 차원 균열은 그녀의 몸을 집어삼키려 했었다.
헌터들이 입장하는 던전이나 게이트는 모두 차원 균열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입장은 균열이 생성되고 안정된 이후에나 가능한 일. 생성 중인 균열에 닿는 건 위험했다.
변덕으로 놀러 온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잡고 내동댕이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불만을 토하기도 전에, 그 짓을 저지른 누군가는 반동으로 균열에 빨려 들어갔다.
─아저씨!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라고 불러, 인…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누군지 알 방법도 없었다.
목숨을 구해 준 빚을 누구에게 갚으면 되지?
그렇다면 그녀는 하다못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헌터가 되어 최전선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다른 누군가를 구하는 것이 그녀의 삶의 목적이 되었다.
‘…저 잘하고 있나요, 아저씨?’
이제는 얼굴조차 흐릿한 과거의 인영에 대고 묻는다. 돌아올 리가 없는 대답을 갈구하며.
“…세수나 하자.”
답지 않게 센치해졌다. 아마 그동안 오랜 기간 의지하고 지내 왔던 매니저가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나이는 그녀 자신보다 어리고, 늘 언니 언니 하며 따르기는 하지만 클레어는 도은에게 많은 심리적 안정감을 얻고 있었다. 그녀가 없어도 잘해 낼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걱정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이런 때일 수록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잘해야 한다.
다짐을 새기며 그녀가 방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욕실로 가려면 그쪽을 가로질러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원래 가려 했던 곳을 가기 전에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인은 냄새 때문이었다.
부엌에서 무언가 고소한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소리도 함께였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무언가를 굽는 듯한 소리와 냄새.
클레어는 자연스럽게 부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욕이라는 본능에서 기인한 진로 변경이었다. 그 외에도 자신밖에 없는 집에서 자신이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지글지글.
부엌에서 한 남자가 프라이팬을 쥐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는 식빵과 계란, 그리고 베이컨을 굽고 있었다.
뒤늦게 떠올렸다. 이도율. 10년 동안 실종되어 있다가 돌아온 도은의 오빠. 어젯밤부터 신세를 지게 된 매니저 대리.
그는 센터에서 지급 받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길었는데, 요리를 하기 때문인지 뒤로 묶은 상태였다.
“뭐예요? 이게.”
“뭐긴요, 아침이죠.”
시키지도 않은 짓을…….
그렇게 생각했지만 냉장고의 식재를 따로 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애초에 직접 요리해 본 적이 손에 꼽는다.
그렇다면 냉장고는 왜 차 있는가. 떠올려 보면, 참견하길 좋아하는 매니저가 사람 사는 집은 냉장고가 차 있어야 모양새가 그럴듯하다며 늘 채우곤 했었다.
도율이 변명처럼 내뱉었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은 거르지 마라. 우리 집 가훈이거든요.”
“전임자도 같은 말을 했어요.”
“같은 집에서 나고 자랐으니 당연하죠.”
미리 얘기했다면 쓸데없는 참견 하지 말라고 했을 테지만, 이미 저지른 상태에서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미 소리와 냄새에 이끌려 배가 고파졌다. 굳이 사양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준비는 다 됐습니다만…….”
“다만?”
“옷은 좀 갈아입고 오는 게 좋지 않을까요.”
도율이 가리킨 건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내려다보면 언뜻 몸 선이 보일 듯한 네글리제가 눈에 들어왔다. 침실에서 입는 옷이었다. 그걸 그대로 입고 부엌까지 걸어 나온 거였다.
“……!”
쾅!
클레어는 순식간에 방으로 되돌아가 문을 닫았다.
* * *
클레어 씨는 아침이라고 해서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있다거나 눈이 팅팅 부어 있는 추레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네글리제는 문제라고 본다.
지적 후에 옷을 갈아입은 클레어 씨와 함께 내가 준비한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티브이 소리 하나 없는 고요한 아침이었다.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바삭하게 구운 빵을 씹을 때 나는 소리 외에는 적막으로 가득했다.
말이 없는 클레어 씨에게 내가 먼저 물었다.
“제가 실수했나요?”
“아뇨. 실수는 내가 했죠.”
“하긴, 그렇죠? 그대로 쭉 말 안 하고 몰래 훔쳐보는 것도 그림이 영…….”
클레어 씨가 째릿한 눈빛을 쏘았다. 나는 그 즉시 입을 다물었다.
그 얘기는 꺼내지 말라 이거지. 접수했다.
“식사는 입맛에 맞으시나요?”
“그럭저럭.”
“그죠? 클레어 씨는 서양인이니까 그쪽 풍으로 해 봤어요. 한국에서 10년이나 살았다곤 하지만, 김치도 물에 씻어 먹을 정도니까 입맛이 아직…….”
클레어 씨가 다시 한번 눈빛을 쐈다. 이 이야기도 금지란 말이지.
다른 얘기 주제를 찾는 대신 나는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아무래도 세 번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걸 선호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잘 먹었어요.”
클레어 씨는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성공적인 아침 식사였다. 이 맛에 요리하지.
“뒷정리, 바로 해야 하나요?”
클레어 씨가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서서 물었다.
나는 사용한 접시를 싱크대로 나르는 중이었다. 생활감이 없는 싱크대엔 설거짓거리가 단 하나도 밀려 있지 않았다. 정리를 제때 했다기보다는 애초에 치울 일을 만들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까짓거 미루지, 뭐.
“아뇨. 괜찮아요. 시키실 일이라도?”
“외출 준비를 하죠.”
“네.”
외출 하니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런데 운전은 안 하시나요? 거실에 보니 차 키가 몇 개 있던데.”
내가 본 클레어 씨는 택시만 타고 이동했다. 처음 나를 데리러 온 후에 병원으로 이동했을 때도 그렇고, 아버지 집에서 이곳으로 올 때도 그렇고.
운전면허나 자가용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 집 거실에 보란 듯이 비싸 보이는 차 키가 진열되어 있었다. 면허가 없는데 굳이 차를 살 이유도 없고, 차가 있는데 안 타고 다닐 이유도 없다. 왜 안 타고 다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내 물음에 클레어 씨는 딱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왜 타야 하죠?”
“…예?”
“내가 뛰는 게 더 빠른데 왜 네 발로 구르는 짐덩이를 끌고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 말이에요.”
S급 헌터 정도 되면 축지법이라도 쓸 수 있나?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인 것처럼 들리긴 하는데, 그럼 애초에 차 키가 없어야 하지 않나? 하나도 아니고 저렇게 여러 개가 있을 이유가 있나? 진열하려고 샀나?
“클레어 씨, 운전 못 해요?”
“잘하거든요? 시속 200도 밟을 줄 알거든요?”
가벼운 질문에 돌아온 건 날 선 대답이었다.
“…혼자 달리는 걸 선호할 뿐.”
그게 못 한다는 거잖아.
속도 조절 못 해서 액셀 밟으면 밑도 끝도 없이 밟고, 시야도 좁다 이 말이지. 애써 사 둔 차를 썩혀 두는 이유를 알겠다.
나는 차 키를 하나 낚아챘다.
“그럼 오늘은 제가 모시죠.”
히죽 웃음이 나왔다. 비싼 차를 몰 생각에 벌써 기분이 들떴다.
클레어 씨는 그런 나를 못 미더운 눈길로 바라봤다.
“당신 면허는 있어요?”
“스무 살 되자마자 바로 땄죠.”
“…산업 혁명의 산물을 얕보지 않는 게 좋을걸요.”
내가 무슨 정글에서 살다 온 타잔인 줄 아네.
동생은 내가 할 일이 로드 매니저에 가깝다고 했다. 로드 매니저가 하는 일이 뭐가 있나 떠올려 보면, 제일 중요한 건 운전이다. 괜히 이름에 로드라는 말이 붙는 게 아니지.
나는 차 키의 고리에 손가락을 넣고 돌렸다.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한번 해 보세요, 그럼.”
* * *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주차까지 무사히 마친 후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첫 시운전은 성공적이었다. 10년 만에 잡은 운전대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실제로 저쪽 세계에서 지낸 시간이 정확히 10년이 아니라는 걸 고려하면 훨씬 더 선방했다.
“차가 좋아서 그런지 잘 가네.”
조수석에서 내린 클레어 씨는 차 지붕에 이마를 박고 있었다.
“왜 그래요? 멀미해요?”
“…아뇨, 그냥.”
그러면서 나를 힐끗 보는 게, 내가 이렇게 운전을 매끄럽게 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얼굴이다. 티 내지 않으려 해도 이미 다 눈치챘다. 운전할 때 전방밖에 못 보는 누구와 달리 난 곁눈질할 여유도 있거든.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땐 잘난 듯이 이런저런 훈수를 두던 클레어 씨는, 점점 말수가 줄더니 마지막엔 내 주차를 감탄한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물었다.
“앞으로 운전은 맡겨도 문제없을 것 같죠, 사장님?”
“…그러네요.”
사장님께 잘 보였더니 기분이 좋군. 비싼 차를 마음대로 몰아 볼 수 있는 건 덤이다. 주차장에 보니 다른 것도 많던데.
떡고물 생각은 치우고, 주변을 둘러본 내가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딘가요?”
네비게이션 목적지는 클레어 씨가 찍었기 때문에, 나는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운전해 온 셈이다.
가게 이름으로 유추하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르 피앙셰 어쩌고 하는 프랑스어 느낌이 나는 이름이었다.
다만 건물 모양을 보니 상당히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새하얀 색의 벽이 곡선 형태로 지어져 있었다. 게다가 서울시 중에서도 내가 이름을 들어 본 부자 동네에 위치했다.
“내가 가는 숍이에요.”
“샵?”
클레어 씨는 충분히 설명했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애석하게도 내가 숍 한 단어에서 떠올릴 수 있는 건 없었다.
어차피 거부권은 없으니 따라가면 알게 되겠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화사한 냄새가 풍겼다. 더불어 조용하고 은은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 소리. 그와 동시에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었다.
‘미용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어떤 여성이 반갑게 말을 걸었다.
“클레어 님! 예약 시간보다 좀 더 빨리 오셨네요?”
“네, 원장님.”
얘기를 들어 보니 이곳의 원장님인 모양이다. 게다가 클레어 씨와는 이미 면식이 있는 상황으로 보였다.
“차를 끌고 와서요.”
“…직접 운전했다면 늦으면 늦었지 일찍 올 리가 없는데.”
“네?”
“아니, 아니에요.”
원장님이 손을 저으며 부인했다.
클레어 씨가 빤히 쳐다보는 걸 노골적으로 피하며, 원장 선생님이 화제를 돌렸다. 그 표적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그래서, 같이 온 이분은 누구? 설마~ 남자친구?”
“남자친구가 아니라 남…….”
남편, 이라고 말하려던 클레어 씨가 간신히 뒷말을 삼켰다. 나도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서류상으로는 사실이지만, 남들 앞에서 밝힐 만한 건 아니니까.
내가 다급히 끼어들어 말을 받았다.
“나, 남남입니다. 이번에 새로 고용된 신입 매니저입니다. 원래 일하시던 선배님이 건강 문제로 현장 뛰기가 어려워지셔서, 알바로.”
“아, 그러시구나.”
다소 부자연스러운 연결에도 원장님은 웃으며 대화를 받아 줬다.
“그렇게 자주 오는 편은 아니면서 금방 다시 왔다고 생각했더니, 새로 오신 분 때문이었구나?”
“네, 맞아요.”
“확실히 이건 심각하네요.”
심각하다니, 뭐가? 내 상태가?
미용실 아니랄까 봐 거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예 어떤 벽면은 댄스 연습실처럼 통으로 거울로 되어 있었다.
거울면에 비친 내 모습은 평범했다. 머리는 좀 길었지만 요리를 하다 와서 깔끔하게 올백으로 묶은 상태였고, 옷도 단정한 트레이닝 복이었다. 가슴팍엔 각성자 지원 센터라는 문구까지 새겨져 있었다. 공무원 같아서 성실해 보이는 인상이 더해졌다.
신발은 어제 집에서 대충 가져온 도은이의 슬리퍼. 핑크색인 데다가 좀 작아서 발가락이 세 개밖에 안 들어가는 게 흠이긴 했다.
“그럼 어떻게 진행해 드릴까요?”
원장님의 물음에 클레어 씨가 삐딱하게 서서 내 모습을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이윽고 눈을 딱 감고 고민 따윈 필요 없다는 듯이 손을 쭉 뻗어 내 정수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아래를 향해 그으며 말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부대로!”
허락이 떨어지자 원장님은 먹잇감을 앞에 둔 야수처럼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