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88
88화 오랜만!
“오셨군요!”
방송사에서 안내한 스튜디오에 도착하니 신정훈 피디가 우릴 반갑게 맞이했다.
예능 프로그램 ‘부부의 세상’.
클레어와 내가 참가하는 프로그램의 이름이었다. 부부가 생활하는 모습을 담는 일상 관찰 예능이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예.”
신정훈 피디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스튜디오에 온 것은 프로그램에 필요한 추가적인 촬영을 위해서였다. 집에 달아 놓은 카메라로 찍은 것외에도 필요한 단계가 있었다.
프로그램 촬영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 번째는 각 출연진들이 휴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이렇게 스튜디오에 모든 출연진들이 모여 각자의 촬영분을 보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었다.
“가편집을 해 놓은 상태니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신정훈 피디의 설명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전에도 안내받은 내용 중 하나였다. 휴일 내내 촬영했던 분량을 그대로 틀어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촬영한 분량까지 보기 위해 며칠씩 걸릴 테니까.
시선을 돌려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스튜디오는 밝고 따스한 분위기로 꾸며진 실내 공간이었다. 프로그램 타이틀이 걸려 있는 플라스틱 간판과 아마색의 벽지. 그리고 다양한 색의 가구가 놓여 있었다.
그 맞은편에 있는 검은 공간엔 카메라와 조명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 같은 촌놈에겐 마음이 위축되는 광경이었다.
“긴장했어요?”
클레어가 속삭였다. 우리는 평소보다 가깝게 붙어 있었다. 주변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스태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조금요.”
저쪽 세상에서, 여기서는 겪지 못할 생소한 경험들을 하고 오기는 했지만. 거기서는 결코 겪을 수 없었던 이곳만의 경험도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런 방송이다. 전국의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이 많은 사람들이 공을 들이고 있는 게 모두 내 모습을 담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러자 클레어가 즐거운 듯이 가볍게 말아쥔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었다.
“당신도 긴장이라는 걸 다 하네요.”
“그야…….”
나는 클레어를 흘깃 바라봤다.
이 방송에 참가하게 된 진짜 이유는, 클레어에 대한 대중의 인식 개선을 위해서니까.
단순히 재미나 경험 삼아 참가하는 게 아닌, 명확한 이유와 목표가 있는 이상 어느 정도 열심히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몰라도, 적어도 클레어 하나만은 잘 보일 수 있도록.
“당신 때문인데요.”
“네……?”
내가 그리 말하자 클레어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기, 무슨 뜻이에요?”
“말이 헛나왔어요. 잊어 줘요.”
“뭐가 헛나온 건데요?”
“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별거 아닌 게 뭐였는지 좀 말해 보라니까요?”
“까먹었어요.”
나는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도은이가 몰래 말해 준 건데 클레어한테 전달하면 의미가 없지.
“아, 진짜…….”
클레어가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봤다. 그래도 내 다짐은 흔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스태프와 이야기를 나누던 신정훈 피디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신경 쓰이게 만들었나.
안 그래도 바빠 보이던데.
“아무것도…….”
“이 사람이 긴장된대요.”
클레어가 나를 가리켰다. 내가 돌아보자 클레어는 시치미를 떼듯 시선을 피했다.
…남편을 팔아?
그에 신정훈 피디가 안심하라는 듯이 설명했다.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스튜디오 촬영 땐 중앙 모니터를 주로 보게 될 테니, 촬영 중이란 사실도 잊을 겁니다. 정 그러시면……. 아!”
신정훈 피디가 다른 누군가를 찾기 위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기, 다른 촬영자분들과 인사 나누시죠.”
신정훈 피디가 안내한 곳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한 쌍의 커플이 있었다.
신정훈 피디를 앞세워 가까이 다가가니 두 사람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정혜경이에요.”
“반갑습니다. 강종우라고 합니다.”
정혜경과 강종우. 예능인 부부로, 우리와 달리 결혼한 지 꽤 된 부부였다. 슬하에 아이가 넷이나 있어서 다둥이 부부로도 유명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이도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클레어 컴벨입니다.”
마주 인사하자 두 사람이 웃으며 호들갑스럽게 맞장구쳤다.
“알죠, 알죠. 그 유명한 클레어 컴벨 씨잖아요. 미인 헌터!”
“제가 개인적으로 팬입니다. 기사도 다 챙겨 봤다고요. 하, 결혼 발표를 했을 땐 제가 도율 씨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아마 모르실 겁니다…….”
“미쳤지?”
“아.”
정혜경이 강종우의 옆구리를 크게 꼬집었다.
강종우가 꼬집힌 자리를 문지르는 동안 정혜경이 대화를 주도했다.
“그나저나 이런 예능 프로에서 뵙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네요, 클레어 씨.”
“…안 어울리죠?”
클레어가 쓴웃음을 짓자 정혜경이 놀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녜요, 아녜요.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가 어디 있나요? 그리고 이건 관찰 예능이잖아요. 시청자들은 분명 궁금해할 거라고요. 최상위권 헌터인 클레어 씨의 일상이라든가…….”
정혜경이 음흉하게 눈매를 좁혔다.
“갑작스레 결혼을 발표했던 부부의 은밀한 사정이라든가…….”
클레어와 눈을 마주치고 마른침을 삼켰다.
정혜경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클레어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남들에게 밝히지 못할 비밀이라고 하면 찔리는 구석이 있는 일당이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한 정상적인 부부가 아닌, 마석의 양도를 위해 일시적으로 맺은 계약 관계에 불과하기에.
도은이가 팔팔하게 나은 지금도 이혼하지 않고 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건, 그런 클레어에게 헌터 협회의 감사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걸 피하기 위해 아직까지는 ‘사이 좋은 부부’를 연기하고 있는 건데.
‘…언제까지?’
그런 근본적인 질문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 생활이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만두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게 문제였다. 이 감정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뽑아낼 때 더 아프기만 할 걸 알면서도.
“…도율 씨?”
클레어가 그런 내 안색을 살폈다.
나는 상념을 털어 내고 웃었다.
“잠시 딴생각을 좀.”
그러자 정혜경이 짐짓 소리 높여 웃었다.
“아이, 참. 대체 무슨 생각을 다 한 거에요? 둘이 금슬이 얼마나 좋길래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해요? 아유, 부러워라.”
“우리도 그런 때가 있었지. 그립구만…….”
강종우가 치고 들어오자 정혜경이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왜 과거형이지?”
“아.”
강종우의 옆구리가 다시 한번 응징을 당하려는 순간.
그때 나머지 한 쌍의 부부도 등장했다.
여배우 같은 화려한 의상과 선글라스를 걸친 여자와 성공한 사업가 같은 차림을 한 사내였다. 두 사람이 촬영장 내부를 걸을 때마다 구둣발 소리가 교차해서 울렸다.
두 남녀가 우리 네 사람 근처로 다가왔다. 그들은 능숙하게 사교적인 미소를 지었다.
“여기 다 모여 계셨네요? 반가워요. 함께 촬영하게 된 주예린이라고 해요.”
“임지훈입니다. 다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주예린과 임지훈. 두 사람 모두 배우라고 해도 믿을 법한 부부였다.
주예린은 패션과 운동을 주요 토픽으로 삼는 유명 인플루언서. 그리고 그 남편인 임지훈은 젊고 유능한 검사라고 소개받았다.
“그럼 다들 모이셨으니 준비하겠습니다.”
신정훈 피디가 사람을 불러모았다.
* * *
긴장했던 것과 달리, 스튜디오 촬영은 크게 어려울 것 없었다.
제작진이 준비한 화면을 감상하거나, 정혜경이나 강종우가 주도하는 분위기와 맥락에 호응하기만 하면 돼서 비교적 편하게 따라갈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난 후.
다른 출연자들이나 제작진과 인사를 나눈 후 클레어와 함께 차로 돌아왔다.
조수석에 앉은 클레어가 말했다.
“고생했어요.”
“…고생은 같이 했는데요, 뭘.”
클레어가 자긴 별거 아니었다는 듯 고개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헌터로 활동한 기간이 있는 만큼 이런 일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출연진 리액션에 자막 효과 같은 것도 포함해서 방영된다 그랬죠?”
“네. 그리고 인터뷰 영상도 삽입해서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했었지.
클레어와 함께 질문 인터뷰를 했을 때, 집에 같이 살고 있는 저 하얀색 털을 가진 동물의 정체가 뭐냐는 질문을 들었었다.
그에 클레어는 “네? 강아지잖아요?”라고 대답해 제작진들을 당황시켰다.
흰돌이는 엄밀히 따지면 강아지도 고양이도 아니니, 처음 보는 사람이 의문을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진 아무도 따지고 들지 않았지만, 방송을 타게 되면…….
-그, 클레어 씨가 던전에서 데려온 펫입니다.
-…네?
결국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을 클레어가 테이밍 스킬으로 데려온 걸로 결정했다. 전투에 참가할 정도는 안 되지만 일단 데려와서 키우는 걸로.
…물론 클레어에게 테이밍 스킬 같은 건 없지만.
오피스텔에 도착한 후, 클레어를 입구에 내려 주기 위해 차를 세웠다.
“먼저 올라가요.”
주차는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간 후에 가능했다. 나도 카드 키가 있었으니까 클레어까지 지하로 내려갈 필요는 없었다.
매니저 활동을 할 때는 대부분을 이런 식으로 먼저 내려 줬는데.
“…됐어요.”
오늘은 먼저 내리기를 거부했다.
“같이 가요.”
그런 거라면 입구에 세우기 전에 미리 말 좀 해 주지. 지하 주차장 바로 내려가는 길 있는데.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대려는 사이. 핸드폰으로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내용을 확인해 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큰일 났어요]발신인은 서지유였다.
며칠 전 찾아갔을 때 혹시나 해서 연락처를 교환해 뒀다. 하지만 피차 무의미한 안부는 묻지 않는 성격이라 지금까지 연락한 적 없었는데.
큰일이라니?
“왜 그래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던 클레어가 내게 물었다.
“저 가 봐야 할 데가 좀 생겼습니다.”
“가 본다니……. 지금이요?”
“예.”
날 빤히 바라보던 클레어가 시트에 몸을 기댔다.
“그럼 가요.”
“…네?”
그리고 다시 안전벨트를 멨다.
“같이 가자고요.”
“아니, 클레어 씨까지 갈 필요는…….”
“그냥 가요.”
클레어가 덧붙였다.
“바늘 가는 데 실 안 갈 수 있나요.”
“…….”
조금은 감탄했다.
“그런 어려운 말은 또 어디서 배우셨대.”
결국 조수석에 클레어를 태운 채 서지유의 가게로 출발했다.
클레어도 완전히 모르는 가게는 아니었다. 불야성에 방문했을 때 몇 번 갔던 가게였으니까. 물론 지금은 장소를 옮겼지만, 사장이 같았다.
가게는 다행히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금방 도착해 차를 세우고 외관을 보니 겉보기엔 크게 부서지거나 망가진 데는 없어 보였다. 불야성도 아니니 가게 비품을 함부로 부수는 놈은 쉽게 나타나지 않을 거다.
걱정인 건 그 불야성에서도 장사를 하던 서지유가 큰일이라고 내게 문자까지 보낼 정도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괜찮냐!”
딸랑!
가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가게 내부는 멀쩡히 장사 중이었다. 다른 손님들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등장한 내게 쏠렸다.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아! 아저씨!”
그때 서지유가 나를 불렀다. 어쩐지 속은 듯한 느낌에 괘씸했지만, 그래도 무사한 모습을 보니 다행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야, 인마. 넌 무슨 문자로 낚시를…….”
서지유가 떫은 표정으로 칸막이로 가려진 자리 중 한 군데를 가리켰다.
“응……?”
거기엔 손님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을린 피부에 검은 단발머리. 속이 비치는 듯한 반투명한 옷을 즐겨 입는…….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의 여자였다.
그녀가 날 알아보더니 손을 들었다.
“안녕, 자기. 오랜만!”
“…….”
내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참담한 심정인 것도 있었지만, 내 얼굴 위에 가면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어떻게 알아챈 거지?
그보다, 왜 온 거지?
그때 뒤따라오던 클레어가 뭔가 잘못 들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자기……?”
전방엔 샤디아, 후방엔 클레어.
진퇴양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