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26
026화
“이정씨! 여기에요!”
이정이 카페에 도착하자 그녀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작가님, 잘 지내셨어요?”
계약에 대해 말을 나누려면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그동안 환상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던 그가 촬영장에 방문하기 전에 홍 작가를 카페로 부른 탓이었다.
“그럼요! 안 좋을 게 뭐 있나요.”
여간 신나 보이는 게 아닌 홍 작가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 뭐 마실래요? 제가 살게요!”
“어차피 금방 갈 거니까 안 마셔도 괜찮습니다.”
대단한 비밀을 말해주듯 속삭인 홍 작가가 맑게 웃었다. 처음 교수실에서 본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밝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뭐라도 마셔요. 어차피 이거, 활동비로 나가요!”
그렇게까지 권유하자 이정도 사양하지 않고 음료를 주문했다. 옆에서 마시멜로가 올라간 핫초코를 주문한 홍 작가는 한결같은 이정의 선택에 혀를 찼다.
“감사합니다.”
“날도 추운데 또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요?”
“따듯한 걸 잘 못 마셔서요.”
슬슬 눈 소식이 들려올 법한 12월이었지만 여전히 뜨거운 음료는 질색이었다. 몸 안에 뜨거운 액체가 들어오면 마치 불덩이를 삼키는 듯한 착각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가기 전에 먼저 계약 관련해서 얘기 좀 하고 갈까요?”
테이블에는 이미 서류들이 올려져 있었다. 종이 위에 정갈한 글자들. 계약서라면 신물 나게 많이 본 이정이었지만 그게 제 것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기분이 좋았다.
“일단 대본부터 받아요.”
홍 작가가 소책자 크기의 대본 5권을 그에게 건넸다. 알록달록한 색깔에 손바닥으로 다 가려질 정도로 자그마한 대본은 생각보다 더 얇고 가벼웠다. 이정이 대본을 훑는 사이 홍 작가의 손도 바쁘게 움직였다.
“일정부터 설명해 줄게요.”
계약서 만큼이나 두툼한 종이를 거침없이 넘기는 손길이 그녀가 얼마나 이 서류를 자주 봐 왔는지 알려주는 듯했다.
“지금 대본은 다 나왔고, 시즌2 안규승 부분만 빼고 촬영이 진행되는 중이에요. 이정 씨가 합류하게 되면 촬영부터 하고 다시 시즌 2 촬영으로 복귀할 생각이고요.”
어느 한 페이지에서 멈춘 그녀가 형광펜으로 표시된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12월 중순 촬영 시작, 늦어도 1월 초에 마무리될 거고, 바로 시즌2 촬영으로 이어질 거에요. 촬영본 어느 정도 확보한 상태라 업로드하면서 실시간으로 촬영하면 아마 1월 안으로 시즌2 촬영도 모두 끝나겠죠.”
벌써 12월 초입, 1월 말까지 잘해야 두 달가량의 시간밖에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꽤 빡빡한 일정이었다.
“이랑 병행해야 하는데 스케줄 조절 힘들지 않을까요?”
이정으로선 당연한 의문이었다. 늘어난 재민의 분량까지 고려한다면 거의 잠잘 시간도 없는 수준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웹드라마는 일반 드라마랑 다르게 촬영시간이 짧은 편이라 그렇게 오래 안 걸릴 거예요. 학교 대여문제로 대부분 주말에 촬영이 몰려있기도 하고요.”
자신만만한 홍 작가의 단언에도 이정은 미심쩍은 눈을 거두지 못했다. 촬영이 생각대로 굴러가는 것은 서울에서 한여름에 길가에 쌓인 눈으로 눈사람을 만든다는 것만큼이나 허무맹랑한 말이었다.
“어후, 그럼 제가 언니랑 수철 오빠 사이에 두고 거짓말하겠어요? 둘한테 크로스 체크받은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 일정에 차질 없게 하기로 약속했어요!”
“음…. 그럼 일단 이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이 작가와 박 감독을 증인으로 내세워 버리니 이정으로서도 더 할 말이 없었다. 일정이 겹치지만 않는다면 이제부터는 그의 영역이었다.
“대신… 좀 힘들지도 몰라요. 수철 오빠한테 일정 물어봤는데 하루는 여기, 하루는 저기. 이렇게 촬영해야 하는 날이 많더라고요.”
홍 작가는 제가 말하고도 살짝 미안했는지 민망한 듯 웃었다. 보통 연기에 집중하는 경우 아예 다른 서사를 가진 두 캐릭터를 번갈아 가며 연기하기 쉽지 않았으니까.
“그건 괜찮습니다.”
다만 이정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환상의 보조가 있다면 몰입도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계약서 좀 볼 수 있을까요?”
“아, 맞다. 계약서 말인데요.”
홍 작가가 계약서 2부를 이정이 보기 편한 방향으로 돌려주었다. 같은 내용일 줄 알았던 계약서에는 뜻밖에도 다른 제목이 쓰여있었다.
“랑 를 한 번에 묶어서 계약해도 괜찮을까요?”
“아시다시피 저희가 좀 데인 게 있어서….”
말끝을 흐린 홍 작가가 이정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얼굴 본 사이라지만 계약에 왜 작가님이 나오시나 했더니.’
를 원하는 시청자들로 인해 의 흥행은 당연지사.
이 상황에서 이정이 촬영 후 계약만료를 이유로 내빼 버린다면 그들 역시 곤란하니 미리 계약서를 쓰자는 의미였다.
“조건도 조금이지만 수정되긴 했어요.”
“좀 읽어 볼게요. 둘 다.”
확실히 의 조건보다 의 조건이 더 좋긴 했다. 그래 봤자 둘 다 평균 금액을 조금 넘어서는 정도라 크게 티가 나진 않았지만.
‘돈 보고 웹드라마를 하는 건 아니지 확실히.’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일정 이상 뜨지 않는다면 돈이 되지 않는 직업이었다. 오히려 일해서 버는 돈보다 일하기 위해 쓰는 돈이 더 많을 수도 있는 이상한 직업.
“내가 하자고 졸라놓고 그만큼밖에 못 해줘서 미안해요. 이정 씨.”
차라리 홍 작가가 사무적인 태도로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면 그 역시 동시 계약을 하지 않을 이유를 하나하나 이유를 들어 설명했을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죠.”
어깨를 으쓱한 이정이 다 훑은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계약, 진행하시죠.”
* * *
계약서가 든 에코백을 신줏단지 모시듯 껴안은 채 걸어가는 홍 작가의 모습에 이정이 피식 웃었다. 20대 후반이라고 하기엔 너무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여기가 저희 촬영장이에요. 아까 말했듯 대여문제 때문에 학교 내부 촬영은 주말에만 가능하고, 오늘은 운동장 씬.”
실눈을 뜨고 홍 작가가 가리킨 곳을 보자 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인원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비교적 단출한 촬영팀이었다.
‘역시나 힘드네.’
비교적 덜하긴 하지만 여전히 환상 없이 현장에 있는 것은 꽤 부담이었다. 빨리 배우들과 말을 트고 이름을 불러 환상을 덧씌워야 했다.
“컷, 오케이!”
“끝났나 보다. 희인아! 지예야! 민우야!”
운 좋게 딱 끝난 촬영에 홍 작가가 배우들을 불렀다. 하이틴 드라마답게 세련된 교복을 입은 세 사람이 웃으며 다가왔다.
“수희 언니!”
“인사해 인사. 이쪽은 앞으로 안규승 역을 맡아 줄 이이정 씨.”
“와 대박. 잘 부탁드려요! 드디어 촬영 제대로 들어가는구나.”
하이텐션으로 대답하는 권희인과 다르게 최지예와 윤민우의 반응은 다소 딱딱해 보일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호감 덕에 배척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최지예입니다. 최연홍 역을 맡고 있어요.”
“주세완 역의 윤민우입니다.”
“전 권희인이에요! 유하은 역!”
속 썩이던 박도혁 대신 들어온 사람인 만큼 반갑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웃으며 대답한 그가 본명 대신 그들의 배역을 불렀다. 성연과 주린에게 그랬듯 개인적인 습관이라고 덧붙이자 다들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다들 인사하세요!”
주연 배우들과의 인사가 끝나자 홍 작가가 나서서 스태프들에게 이정을 소개했다. 일반 드라마보다 작가의 현장 참여도가 높은 만큼 여느 스태프 못지않게 현장에 익숙한 태도였다.
“이쪽이 PD님. 우리 팀 최고 연장자예요. 완전 노땅. 노땅.”
“나이 서른셋에 노땅 취급이라니…. 서러워서 정말. 반가워요. 이정 씨. 이관식입니다.”
수염 때문에 실제 나이보다 5살은 더 많아 보이는 이 PD가 이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말 편하게 해도 되죠? 잘해봐요. 앞으로.”
“어때요? 저희 현장?”
한바탕 인사를 끝내고 다시 촬영이 시작되자 운동장 벤치로 그를 이끈 홍 작가가 물었다.
“좋네요. 다들 즐거워 보이고, 보다 여유로운 거 같아요. 전에 현장이 좋다고 하신 게 이해가 돼요.”
도 강현을 빼면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는 차원이 달랐다.
“일정 조율도 자유롭고, 여러모로 장점이 있으니까요. 물론 단점도 있지만!”
나이대가 다양하고 선후배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방송계와 달리 연령대가 낮고 출연자 대부분이 신인 연기자, 혹은 연기에 처음 도전하는 아이돌들인지라 분위기가 밝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엄청 힘이 넘치네요. 다들.”
컷 사이사이마다 절대 쉬지 않고 진짜 고등학생처럼 노는 세 사람을 본 이정이 어색하게 웃었다. 체감 나이로는 여기에서 가장 나이 많은 PD보다도 연장자라서인지 그 생기발랄함이 못내 부담스러웠다.
“이정 씨!”
“네?”
주연 배우들과 얘기를 하던 이 PD가 이정을 불렀다.
“그래도 그냥 가면 섭섭하니까 연기 한번 해보고 갈래? 대충 합 맞춰본다는 느낌으로. 대본 리딩도 안 해봤으니까.”
“그럴까요?”
캐릭터 분석은커녕 아직 대본을 제대로 읽어 보지도 못했지만, 이정은 갑작스러운 제의에도 당황하지 않고 응했다.
마침, 조금 전 카페에서 대본을 훑으며 기억해 둔 대사도 몇 개 있겠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오빠가 봐 둔 씬 있으시면 그걸로 해요. 저희는 대본 거의 다 외웠어요.”
“그러면 이거 어때요?”
이정이 대본을 펼쳐 한 씬을 가리켰다.
규승이 세완과 연홍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질투하는 장면. 의 핵심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