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27
027화
“대사 외웠어? 대본 방금 받았잖아?”
“아까 오면서 잠깐 봤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외웠다고? V2까지?”
배우가 바뀌며 시즌1에서 따오면 됐던 회상 장면들도 다시 찍어야 해서 편의상 시즌1의 회상씬을 버전 1과 버전 2. 즉 V1과 V2로 나눠 부르고 있었다.
“V1, 이랑 V2가 비슷하다 보니까 금방 외워지더라고요.”
이정의 말에 듣고 있던 감독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리 몇 마디 안 된다지만 빠르네. 이정 씨.”
“좀 금방금방 외우는 편입니다.”
회귀 직후에는 짧은 대사도 대본을 보고 외웠지만, 뇌가 젊어진 탓인지, 아니면 몸에 아직 공부하던 습관이 남아있어서인지 이제는 쉽게 외울 수 있었다.
“V1까지 다 다시 찍어야 해서 걱정했더니…. 그럴 필요도 없었구나?”
“옷은 어떻게, 그냥 이거 입고 할까요?”
촬영 후 바로 현장에 온 이정은 고등학생 역에 어울리지 않는 세미 정장 차림이었다.
“오늘은 뭐, 연습이니까 대충 하고. 가기 전에 치수 재고가요. 아무리 제작비가 빠듯해도 박도혁이 입던 걸 입힐 순 없지. 그런데 이정 씨 몇 살이라고 했었지?”
“스물하나요.”
“고등학교 졸업한 지 2년밖에 안 됐네? 아직 교복이 어색하진 않겠어.”
사실은 20년 됐습니다. 이정은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삼키고 허허 웃었다. 이제는 교복이 어떤 느낌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오빠 안 추우세요?”
“좀 서늘하긴 한데, 괜찮습니다.”
“아니, 좀 서늘한 수준이 아닌데요.”
“처음 보시는 분들은 항상 물어보시는 데 정말 괜찮습니다. 안 추워요.”
“막 닭살 돋고 그러지 않아요?”
이정이 가만히 제 팔을 들어 솜털조차 올라오지 않은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와. 진짜 안 추우신가 봐.”
회귀 전 사고 이후 추위를 안 타게 된 뒤로부터 워낙 여러 사람에게 들어온 말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심지어 회귀 후에도 성연에게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추위 안 타는 사람이 지예 언닌데, 오빠는 더하네요. 전 교복 안에 붙여놓은 핫팩만 열 개쯤 되는데도 추워 죽을 거 같아요.”
마이를 들어 듬성듬성 붙여둔 핫팩을 보여준 희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내가 추위를 안 타는 게 아니라 네가 많이 타는 거야. 핫팩 그렇게 붙이면 카메라에 안 예쁘게 잡힌다니까?”
지예가 일부러 과장되게 행동하는 희인을 향해 새초롬하게 말했다.
“얼른 끝내고 안으로 들어가죠.”
이 PD가 본인의 옆을 툭툭 치며 말했다. 환상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녹화가 시작된 카메라인 듯했다.
“V2부터 자. 레디, 액션!”
‘규승’은 시즌1 내내 속을 알 수 없다는 평을 받아온 인물이었다.
그런 의문들을 모두 풀어주는 것이 바로 의 스핀오프, .
특히 여주인공 연홍에게 미묘한 행동을 하는 일이 잦아,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추측이 떠돌았지만 사실 그 중 완벽한 정답은 없었다.
“아. 싫어. 주세완 100일 선물을 내가 왜 골라줘. 유하은이랑 가!”
세완과 연홍 사이에서 항상 오작교 역할을 해왔던 규승은 사실. 누구보다 그들을 질투하며 열등감에 차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왜에! 나랑 세완이 연결해준 게 너잖아. 세완이 취향은 네가 더 잘 알고. 하은이는 오늘 못 간다고 했단 말이야 너라도 같이 가자아!”
“아 싫다고! 오늘 다른 애들이랑 PC방 가기로 했다니까? 그냥 주세완한테 고르라고 해!”
시즌 1 내내 조금 까칠하고 속 모를 행동을 많이 하긴 했어도 우정과 애정, 신뢰라는 감정이 기반이라 생각했던 시청자들에게는 충격적일 법한 반전이었다.
“규승아아~”
“말꼬리 늘리지 마라. 싫다고 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연홍의 손을 뿌리친 규승은 징징거리는 그녀를 피해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뀨!”
그런데 하필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불쑥 옆으로 다가왔다.
“매점 가?”
세완의 해맑은 낯짝이 이토록 꼴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 이런 애들 사이에 엮여서 오작교 취급을 받게 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짜증이 났다.
“신경 끄고 최연홍이나 챙겨라. 하도 징징거려서 아직도 귀에서 걔 징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으니까.”
“홍이가? 왜?”
천연덕스러운 세완의 대답에 규승이 순간 욱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빠르게 지워냈다. 당장이라도 짜증을 쏟아붓고 싶었지만, 아직 남아있는 이성이 그를 말렸다.
“내가 알아? 너네 진짜 나 좀 빼고 놀아라. 제발.”
겨우겨우 평탄한 어조로 장난스럽게 말하는 데 성공했지만, 세완이 보지 못하는 등 뒤의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컷.”
이 PD의 말에 이정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줬던 주먹을 풀었다. 손바닥에는 네 개의 손톱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괜찮네. 잘하겠어.”
그가 깔끔하게 이정을 평가했다. 하지만 이정은 조금 전 연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너무 단순해.’
이정이 생각한 규승은 좀 더 복잡한 캐릭터였는데 직접 연기를 해보니 생각보다 잘 표현되지 않았다.
‘아무리 해석시간이 짧았다고 해도 너무 단순해.’
오히려 주어진 정보가 적었던 재민보다도 해석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야 회귀 전, 규승 역을 맡았던 다른 배우처럼 박도혁의 그림자에 짓눌릴 것 같았다.
“오늘 대본 받으셨는데 대단하시네요.”
“일정 안내는 받았을 거고, 이만하면 테스트도 해 봤으니까 다음에 보자. 치수 재 놓고 가는 거 잊지 말고.”
발랄하던 연홍을 내려놓고 다시 새초롬하게 돌아온 지예의 반응이나 지적 없는 PD의 태도를 보면 썩 나빠 보이지 않은 듯했지만, 뭔가 막힌 듯한 답답함이 이정의 가슴을 짓눌렀다.
‘모니터링을 해보고 싶은데….’
제삼자의 눈, 카메라를 통해 보면 뭔가 방향이 잡힐 것 같지만 카메라를 보려면 환상을 풀어야 하니 그럴 수 없었다.
“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이정은 일단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당장 풀 수 없는 문제를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지 않았다.
“다른 분들도 다음 주에 봬요.”
“잘 가요 오빠!”
“안녕히 가세요.”
인사가 끝나고, 옷 사이즈를 재고,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정의 머릿속에서 찝찝함이 떠나지 않았다.
‘어딘가 부족해.’
재민을 연기 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얼기설기 주어진 정보를 엮어 잘 쌓아 올리기만 하면 됐던 전과 달리 어느 정도 완성된 캐릭터를 이어받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 * *
그렇게 찝찝한 기분 그대로 의 촬영장에서 돌아온 지 1주일. 이정은 여유롭게 준비하라며 시간을 비워 준 이 작가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촬영 때문에 미뤄둔 모든 일을 한 번에 처리한 탓이었다.
정식 휴학신청은 다음 학기 개강 뒤에야 할 수 있겠지만 이정은 미리 교수님과 면담을 잡았다.
“휴학한다고?”
“형, 휴학해요? 설마 중도휴학은 아니죠?”
“이정아 너….”
“네. 휴학합니다. 해요. 중도휴학 아니고요. 다음 학기부터 쉴 거에요.”
한국대 한의학과는 그 명성과 역사에 비해 인원이 적은 편이라 원래도 소문이 빨랐다. 안 그래도 학과 내 유명인사던 이정이 학기 말이 다 되어 면담 신청을 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왜? 너 이번 학기 중간고사 망한 것도 그렇고, 무슨 일 있니?”
‘사고 나서 자퇴하고 찌질하게 살다가 또 죽어보니 회귀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엔 하고 싶었던 연기를 해보려고요. 라고 말하면 아픈 애 취급받겠지.’
이정이 말할 수 없는 진실에 그냥 조용히 웃었다.
“일이 있긴 있었죠. 나쁜 일은 아니에요.”
“1학기 휴학 면담을 지금 하는 것도 웃기는데, 너야 교수님들이 워낙 예뻐하시니까. 들어가. 유 교수님 안에 계셔.”
“네. 감사합니다.”
근래에 자주 간 서 교수의 교수실보다 훨씬 넓은 교수실에 담당 교수인 유 교수가 앉아있었다.
“이정이 왔구나.”
“교수님 안녕하셨어요.”
“나야 뭐. 앉아라. 어차피 얘기하자고 부른 거니까.”
회귀 전, 사고 이후 정식 면담조차 하지 않은 채 도망치듯 떠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사고 소식조차 알리지 않고 급하게 처리한 탓에 유 교수가 이정의 사고 소식을 접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래. 휴학을 한다고?”
따듯한 차를 내 온 유 교수가 이정에게 물었다.
“네. 이른 거 알지만, 미리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보통 1학기 휴학신청이 개강 이후인 2월 즈음부터 열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말고사 직전인 지금 휴학 면담을 하는 것은 퍽 웃긴 일이었다.
“이정아. 내가 정말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혹시 네 아버지가.”
“아니에요.”
하지만 이정이 두어 달 일찍 유 교수를 만나는 것은.
“아시잖아요. 저 집 나오고 한 번도 연락 안 한 거.”
그들이 평범한 대학 사제지간 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