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306
#306화
이주혁을 생포하면 그에 맞는 대가를 주겠다.
그 말에 화면 속의 이들이 각자 머릿속으로 저울질을 하는 듯 침묵했다.
하지만 한 사람이 곧바로 딴지를 걸었다.
-글쎄. 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은 아닌 것 같네만.
헨리는 눈을 굴려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이 망할 노인네가……!’
또 삼합회의 수장이었다.
“이유가 뭡니까?”
-자네는 이주혁을 생포해 달라고 요청하는 이유가 뭔가?
“우리 DS컴퍼니의 일원을…….”
-이주혁을 어떻게 할 거냔 말일세.
헨리는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마치 제 말이 틀렸다고 훈계하는 듯한 모양새에, 헨리는 순간 발끈할 뻔했다.
-자네가 말했듯, 이주혁은 어쨌든 선생을 몰락시켰지. 선생이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녀석뿐이란 뜻일세.
“당연히 그런 정보는 알아낼 생각입니다.”
노인은 그런 헨리의 대답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내가 만약 이주혁을 붙잡았다 치자. 그런데 이주혁이 나를 혹하게 할 능력이 있다면. 선생을 보내 버릴 만큼 대단한 무언가를 가졌다면. 그땐 그자를 굳이 자네한테 넘길 이유가 없지 않겠나?
“…….”
헨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자네는 친우를 잃었으니 깊은 원한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린 아닐세.
-그건 맞는 말이긴 합니다.
미국의 자금을 주무르는 JJ은행의 은행장이 동의를 표했다.
그에 헨리는 그를 노려봤으나, 은행장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저 망할 자식이…….’
거대 조직 삼합회의 수장이 그렇게 화두를 던지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도 썩 내키지 않는 제안인 데다, 서클의 원로 격인 노인의 의견이기도 하다.
혹여 이 제안을 내민 사람이 그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으리라.
꾸욱.
불쾌감에 주먹을 말아 쥐고 있던 헨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여러분들의 생각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도 있겠죠.”
헨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화면을 노려보며 말했다.
“혹시라도 의뢰의 보상이 궁금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연락하십시오. 보상은 기대한 것 이상일 거라고 약속하겠습니다.”
-크흠.
-알았네. 너무 기분 상하지는 말라고.
그 뒤로는 뻔한 이야기가 몇 번 흘러갔다.
의미 없는 인사치레, 공치사, 허례허식.
또는 서로의 정보를 캐기 위한 질문들이 오갔다.
당연히 명확한 대답은 없었다.
먼저 주제를 꺼낼 만큼의 힘이 있는 이도 썩 많지 않았기에, 별 소득 없이 회의는 종료됐다.
삑.
화면을 끈 비서가 눈치를 봤다.
“나가 있어.”
“예.”
비서를 내보낸 헨리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늙은 원숭이 새끼가, 나한테 이런 모욕을 줘?!”
헨리는 노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부서져라 악물었다.
“후우…….”
확실히 대표의 무게는 무거웠다.
기실 선생 정도의 능력이 없다면, 영향력은 나이에 비례한다.
쌓아 온 시간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리고 헨리는 쿠데타를 통해 대표 자리를 강탈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타닥. 탁.
헨리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내부에서 안 된다면 외부에 맡기는 수밖에 없나…….’
선생에게 부탁하면 일이 쉽게 해결될 수도 있겠지만, 벌써부터 그가 빚을 갚는 건 곤란했다.
그에 지금껏 조사한 대한민국 내부의 세력을 떠올렸다.
서울과 부산의 대형 조직은 둘 다 와해됐고, 신흥 강자로 떠오른 조직 하나가 서울을 쥐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인천과 부산에는 야쿠자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타 지역은 구심점 없이 군소 조직들만 존재했다.
타닥.
“제기랄.”
제이콥이 관리하던 한국지부만 멀쩡했어도 거기 인원을 사용했을 텐데.
그때, 아쉬움에 치를 떨던 헨리의 책상 위 모니터가 점멸했다.
“음?”
다가가자 메일이 하나 와 있었다.
메일의 제목은 간결했다.
[그 건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헨리는 다급히 수신인이 누군지 확인했다.
“…….”
그런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떤 의뢰를 맡겨도 그에 맞는 돈만 제공하면 수락한다는 용병 집단.
인원수로 밀어붙이는 삼합회와는 달리, 동아시아에서 구성원 개개인의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그곳.
‘이놈들이라면…….’
헨리는 미소를 지으며 메일을 클릭했다.
딸깍.
* *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그곳에서 활동하는 마피아 조직, 드라콘의 거점 중 하나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악!”
쿵.
마피아가 한 명 더 바닥에 쓰러졌다.
검은 코트, 검은 장갑과 신발, 검은 마스크.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까지.
온몸이 검은색인 두른 남자가 무심하게 쓰러진 마피아를 내려다봤다.
남자는 코트를 휘날리며 나이프에 묻은 피를 휘둘러 털었다.
촤악.
그러자 안에서 소란이 일었다.
“뭐야?”
“밖에 무슨 일이야!”
총을 든 마피아들이 튀어나왔다.
이내 그들은 바닥에 싸늘하게 누운 동료 둘을 발견했다.
“제기랄! 침입……!”
탕!
뭐라 소리치려던 마피아의 뒤통수가 총알이 박혔다.
어느새 문 위에 올라가 있던 남자가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위……!”
탕! 탕! 탕!
침착한 사격에 마피아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소음기를 끼긴 했으나 그래도 총소리는 크다.
총성을 들은 이들은 지금쯤 침입자의 존재를 깨닫고 대비하고 있을 터.
남자는 기척을 최대한 줄인 채로 발을 놀리며 안으로 달려갔다.
.
.
.
잠시 후, 마피아 ‘드라콘’의 보스 드미트리의 사무실에 남자가 들어섰다.
남자의 얼굴과 복장에는 붉은 선혈이 묻어 있었지만, 그의 피는 아니었다.
저벅.
드미트리는 의자에 앉은 그대로 남자가 걸어오는 걸 지켜봤다.
그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나왔다.
“한국 거래가 틀어진 게 이렇게까지 흘러올 줄은 몰랐군.”
시가를 빨아들인 드미트리가 우물거리다 연기를 내뱉었다.
“그래도 어떻게 최고의 실력자를 보내긴 했어. 내가 원한을 많이 산 건가.”
뚜벅.
드미트리는 점점 좁혀 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서랍 안에 든 리볼버에 손을 가까이했다.
“레이븐. 누가 시켰나? 마지막 가는 길인데 그 정도는 알려 주지.”
시간을 끌기 위해 말을 건넸지만, 레이븐이라고 불린 남자는 침묵한 채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약간의 자비도 불가능한가.”
싸늘한 미소를 지은 드미트리가 리볼버를 빠르게 들어 올렸다.
타앙-!
굉음과 함께 총알이 발사됐다.
그러나 레이븐의 반응은 그보다 더 신속했다.
훅!
탄환은 상체를 비튼 그의 목 옆으로 지나갔다.
레이븐은 순식간에 드미트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간결한 총성과 함께, 드미트리의 몸이 들썩였다.
“컥!”
드미트리는 가슴에 총을 맞고 뒤로 쓰러졌다.
그걸 본 레이븐은 맹수처럼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개, 같은…….”
아니나 다를까, 드미트리는 방탄복 덕에 목숨이 아직 붙어 있었다.
레이븐은 거기에 대고 총알을 두 발 더 박아 넣었다.
탕! 탕!
“크악!”
비명과 함께 드미트리가 땅을 나뒹굴었다.
아마 갈비뼈가 부러져 숨만 쉬어도 고통이 느껴질 것이다.
콰직!
“끄아……!”
일어나려는 그의 발목을 분지른 레이븐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금고 비밀번호. 말해.”
* * *
회사로 돌아오는 길, 운전대를 잡고 있던 부장님이 나를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야. 근데 그런 것들은 미리 생각하고 간 거냐?”
“대충만요. 대본 보고 하는 타입은 아니라.”
언더커버 노릇 할 때도 몇 번 걸릴 뻔한 적을 임기응변으로 넘어갔었지.
솔직히 이번에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내가 큰 말실수만 하지 않아도 그 인간들은 일단 나를 두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이후로 아무 성과나 실적이 없으면 문제가 생기겠지만.
턱.
부장님과 함께 로비로 들어가자, 왜인지 고상미가 소파에 누워 배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뭐지?”
뒤를 돌아보니 부장님은 모르는 척을 하기로 했는지 먼 산을 보는 중이었다.
“저기요. 고상미 씨.”
“어, 왔냐?”
“백수 삼촌도 아니고,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하아암.”
고상미는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더니, 이내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휴게실에서 쉬면 되잖습니까.”
“에이, 귀찮아. 그리고 엇갈리면 내가 또 찾아가야 되니까.”
“무슨 용건이라도 있어요?”
“엉. 혹시 다음에는 누구 족치러 가냐?”
설마 저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가.
“족치다뇨.”
“아니, 또 어디 해외 나가서 사람 패고 총 쏘고 할 거 아냐.”
고상미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최근 들어 자기를 놓고 다니니 조금 섭섭한 모양이다.
“아닙니다. 당분간 내실을 다질까 생각 중이에요.”
“씁. 그래도 예정은 있을 거 아냐. 예정.”
“흐음.”
예정이라.
나도 서클 내에 있는 모든 세력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다.
해 봤자 DS컴퍼니, 삼합회 정도 될까.
아, 하나 더 있었지.
민지훈이 DS 다음 타깃으로 생각하고 있다던 놈들이.
“러시아 쪽 용병 애들도 서클 한 축에 있다는데, 혹시 아세요?”
고상미가 러시아에서 용병 일을 시작했으니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러자 고상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용병이라고?”
“네.”
“알지. 잘 알지. 우리 부모님을 죽인 놈들이니까.”
“아…….”
나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들도 조져야겠네요.”
“당연한 소리를. 동생은 그거 때문에 너한테 협력하는 거야.”
“알죠.”
이런 식이면 언젠가 충돌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고세운한테 물어서 관련된 정보를 숙지해둬야겠다.
녀석이라면 놈들을 어느 정도 조사해 놨을 테니까.
“그래도 마주치려면 시간이 좀 지나야 할 겁니다.”
“알았어.”
어차피 그쪽은 민지훈이 찍었다.
굳이 나까지 벌써 가세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회의실을 향해 이동했다.
* * *
저벅.
레이븐은 지원이나 경찰이 오기 전에 자리를 떴다.
그의 손에는 꽤 큰 꾸러미가 들려있었다.
짤랑.
그 안에 든 금괴와 보석들이 부딪히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어느 정도 떨어진 골목으로 이동하며 주변을 슥 둘러보니, 창문 곳곳에서 이쪽을 지켜보던 이들이 머리를 숨겼다.
총성이 꽤 많이 들렸으니 사람들도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다.
레이븐은 마스크를 매만지고선 걸음을 빨리했다.
여기 더 머물러서 좋을 건 없었다.
끼익-
그렇게 그는 은신처 중 하나로 돌아왔다.
짤그랑대는 꾸러미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레이븐은 방 한구석에 놓인 소파 위에 몸을 누였다.
“후.”
다친 곳도 없었고, 부수입도 꽤 짭짤했다.
만족스러운 의뢰였다고 할 수 있었다.
“아.”
멍하니 누운 채 시간을 보내던 레이븐이 몸을 일으켰다.
꾹. 꾹.
-어. 끝났어?
“끝났다. 목표는 사망했다.”
-오케이. 수고했다. 아아, 잠깐만.
통신을 종료하려던 레이븐이 멈칫했다.
-너, 그 사람 기억하지? 바바 야가.
“……그 여자 얘기가 왜 나오지?”
불쾌한 듯한 목소리에, 전화 너머의 상대는 다급히 덧붙였다.
-그게, 최근에 누가 봤다더라고.
“어디에서?”
-네 고향. 한국.
“…….”
그 말을 들은 레이븐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