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309
#309화
어릴 때부터 그렇게 부족한 형편은 아니었다.
가끔은 엄해도 따뜻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유현은 나름 행복한 가정에서 살았다.
7살에 러시아로 이주한 후로 아버지가 자주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그만큼 어머니가 챙겨 줬기에 유현은 구김살 없이 커 갔다.
그러던 주말의 어느 날, 그날따라 부모님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딘가 불안한 듯한 눈빛에 유현도 자연스레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유현을 지하실에 숨겼다.
“엄마가 부를 때까진 절대로 나오면 안 돼? 알았지?”
어머니의 당부에 유현은 지하실에서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배가 너무 고파서 조심스럽게 나왔다.
“어, 어……?”
그런 그의 눈앞에 나타난 건, 시체가 되어 버린 부모님이었다.
그렇게 12살에 부모님을 묻은 유현은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먹을 걸 구할 방법도 없었고, 도심과 동떨어진 곳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탓에 경제관념 같은 것이 많이 부족했다.
사랑받는 아이에서 부랑아로 전락한 유현의 눈에선 점점 생기가 빠져나갔다.
“쿨럭.”
시간은 흘러 겨울이 되고, 유현은 쇠약해진 몸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어두운 골목을 걷던 유현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차라리 이대로 죽으면 부모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그의 귓가에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얘는?”
* * *
“허억!”
레이븐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숨을 거칠게 들이쉬며 주변을 둘러보니, 어제 데릭이 잡아 줬던 모텔방 안이었다.
“후우우…….”
이렇게 선명하게 그때의 꿈을 꾸는 건 오랜만이었다.
마른세수를 한 레이븐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쳤다.
오늘은 SA시큐리티를 오가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정보를 캐낼 요량이었다.
솔직히 그도 지금으로선 뭐 때문에 그런 짓을 하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여자와 만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 건지 머릿속에서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여전히 달라진 게 없군.’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일을 저지른다.
마치 10년 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간 듯한 모습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나마 달라진 건, 이 행동의 결과를 후회하지 않으리란 것 하나 정도일까.
레이븐은 실타래처럼 자꾸 풀려 나오는 감정들을 다시 가라앉히고 방을 나섰다.
.
.
.
“……!”
“…….”
SA시큐리티 건물에서 걸어 나오는 이들이 보였다.
다들 나이가 꽤 어려 보였다.
레이븐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뒤로 따라붙었다.
“후……. 긴장되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마. 걱정할 게 뭐 있노. 니 머리 잘 돌아가잖아.”
“내가 아무리 굴려 봐야 재서이 햄만치 하겠나. 이제 행님이 좀 넓은 곳으로 나갈라는 거 같든데, 혹시라도 나 때매 발목 잡히면 우야나 싶어서 이라지.”
“빙신. 행님이 니 하나 가꼬 발목 잡힐 사람이가? 씰데없는 걱정 말고 밥이나 처무러 가자.”
분명 한국어는 맞는데, 레이븐은 어쩐지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기 어려워 미간을 찌푸렸다.
‘방언인가……. 이건 예상 못 했는데.’
한국어는 표준어밖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조금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그래도 집중하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이븐은 그들을 미행하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엿들었다.
그러나 대화의 주제는 전부 시시콜콜한 것들이었다.
‘의뢰인처럼 보이진 않는데…… 그렇다고 실력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이놈들은 대체 뭐지?’
몇 시간 동안 레이븐은 그들이 밥 먹고 놀러 다니는 것밖에 구경할 수 없었다.
“하…….”
그렇게 허탕인가 생각할 무렵, 한 남자가 일행에게 아는 척을 하며 다가갔다.
“뭐야.”
“어. 황 인턴?”
“야. 시큐리티에선 잘렸는데 뭔 인턴이야.”
“맞네. 재서이 햄 있는 회사로 드갔구나.”
“그러니까 인턴도 아니고, 니들 후배도 아니다. 반말하지 마. 인마.”
잠시 그쪽을 지켜보던 레이븐은 이내 몸을 돌렸다.
“뭐 해 봤자 을마나 차이난다꼬…….”
“야. 내가 대표보다 나이 많아.”
“엇.”
“됐고, 요새 뭐 열심히 한다던데.”
“아, 그, 그지예. 부장님한테 열심히 배우고 있으예.”
이대로 이놈들을 지켜본다 해도 딱히 얻을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던 그의 귀에 한 마디가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그런 얘기를 했다고? 왜 나한테는 안 물어봐?”
“그건 모르겠는데예.”
“그, 마종석 그 사람이랑 여자분도 남아 있는 거야?”
“상미 누님예? 아마 그렇지 싶으예.”
‘상미 누님’이라는 말을 들은 레이븐이 다리를 우뚝 멈췄다.
그리고 싸늘한 얼굴로 그들을 노려봤다.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군.’
레이븐은 화목하게 대화를 나누는 이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살기가 느껴졌다고요?”
“어.”
고상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전에 바쁘다고 가놓고, 갑자기 돌아와선 이게 무슨 소린지.
그러긴 해도 감이 좋은 사람이니, 느꼈다는 살기가 영 없는 말은 아닐 거다.
“나가고 얼마 안 돼서 시선 같은 게 느껴졌다, 이거죠?”
“맞아. 그래서 바로 돌아봤는데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게 착각은 아니라는 거고.”
“확실해.”
“흠.”
저렇게까지 확신하는 걸 봐선 뭔가 있긴 한데, 고상미도 놓쳤을 정도면 쉽게 잡을 수 있는 놈은 아니다.
“혹시 원한을 산 사람이 있습니까?”
“원한?”
“예. 고상미 씨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하는 사람이나, 뭐 그런 거 있잖습니까.”
내 물음에 고상미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꽤 있을걸. 특히 러시아 킬러 놈들은 전부 나 싫어할 거야.”
“왜요?”
좋지 못한 이유로 거기서 떠나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말하기 싫은 눈치라 굳이 안 물어봤으니까.
하지만 불안요소가 생긴 이상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음. 내가 걔네들 있는 데 깽판을 놓고 왔거든.”
“뭔 짓을 했길래요.”
“꽤 죽이기도 했고, 병신이 된 애들도 많아.”
“이유가 뭡니까?”
고상미는 그 질문에는 대답을 꺼리는지 살짝 얼굴을 구겼다.
“그,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할 일이 있어서.”
“혹시 ‘글라자’인가 뭔가 하는 그 조직입니까?”
“어. 맞아.”
민지훈이 노린다고 했던 러시아의 용병 집단이다.
사실상 개개인의 전투력이 상당한 킬러들이 모인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제 생각인데, 고상미 씨가 그놈들과 마찰이 있었다고 했죠? 좀 크게.”
“좀 크긴 했지.”
“아마 그쪽에서 온 놈은 아닐까요? 저랑 부장님, 애들이 왔다 갔다 할 때는 그런 걸 전혀 못 느꼈거든요.”
만약 민지훈이나 DS컴퍼니, 또는 조병철 같은 놈이 사람을 보낸 거라면 살기를 내뿜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기척 없이 조용히 감시했겠지.
그런데 고상미를 보자마자 적대적인 시선을 보냈다는 건…….
“그쪽 애들이 한국에도 가긴 하는데, 정말 그놈들일까?”
“혹시 모르니 입국 기록을 좀 찾아봐야겠네요.”
“어차피 위조 여권이라 찾기 힘들걸?”
“고세운한테 맡기면 찾아 주겠죠.”
“음. 그렇긴 하네.”
자기 동생을 부려 먹겠다는데도 고상미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당분간 조심히 다니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에 해코지를 하진 않더라도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으니까요.”
“하. 이게 무슨 일이냐.”
“그리고 방탄은 항상 차고 다녀요.”
러시아 애들이면 부산 쪽으로 총을 많이 들여왔을 거다.
예전에 민지훈이 밀수했던 총기도 전국으로 꽤 많이 풀렸겠지.
“아,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최대한 빨리 안 잡으면 활동에 브레이큰데.”
“나도 우리 애들한테 말해 놓을게. 수상한 놈 보이면 잡으라고.”
“위험하니까 무리시키진 마세요.”
괜히 죽기라도 하면 입맛만 쓰다.
“알았어. 난 다시 간다.”
“예. 몸조심하세요.”
고상미를 한 번 더 보내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뒤로 몸을 기댔다.
뭐가 좀 해결됐나 했더니, 또 별 이상한 일이 다 생기네.
뚜둑.
뻐근한 목을 꺾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이 불안요소부터 명백하게 밝혀야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런 뜬금없는 일에 인상을 구기며 핸드폰을 들었다.
“도대체 어떤 새끼야……?”
* * *
민지훈은 경호대와 함께 곧장 러시아로 향했다.
일행은 ‘글라자Глаза’의 본거지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했다.
부웅-
그들은 밴에 나눠 타고 목적지로 이동했다.
한국에서 활동할 때, 이렇게 될 것을 대비해서 여러 나라의 각 지역에 거점을 만들어 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외의 아지트에 도착했다.
육진모 대장은 밴에서 내려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찰리, 델타는 남아서 짐과 거점을 정리한다. 브라보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행동. 알파는 나를 따라온다.”
“예.”
복장을 정돈한 민지훈이 육진모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대신 고생 좀 해 줘요.”
“맡겨 주십시오.”
“예. 육 대장님 아니면 내가 누굴 믿겠습니까.”
육진모는 민지훈이 거점으로 향하는 걸 보며 알파 팀 대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대원들이 밴에 올랐다.
탁.
조수석에 탄 육진모가 운전석의 대원에게 물었다.
“길은 알고 있겠지?”
“예. 바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음.”
대원은 곧장 밴을 출발시켰다.
민지훈이 도착하기 전부터 미리 러시아에서 활동하며 정보를 모으던 대원이었기에, 길을 찾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
.
.
시간이 흐르고, 경호대는 한 술집에 도착했다.
이곳이 바로 글라자의 정보원과 접선하기로 한 장소였다.
육진모는 밴에서 내리며 대원들을 나눴다.
“너희 넷은 나를 따라온다. 나머지는 대기.”
“예.”
“가지.”
다섯 사람은 문을 열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끼익-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술집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낯선 사람, 동양인에다 탄탄한 몸을 가진 이들이 우르르 들어서니 손님들의 시선이 몰렸다.
그러나 육진모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부를 한번 슥 훑어봤다.
“저 사람인가?”
그 물음에 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른쪽 구석에 앉은 남자일 겁니다.”
육진모는 성큼성큼 걸어 대원이 말한 남자의 앞에 섰다.
그리고 영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미하일인가?”
“일단 앉지.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육진모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의자를 빼고 앉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할 이야기도 아닌 듯 싶다만.”
비꼬는 말을 들은 미하일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건 걱정 말게나.”
“왜. 여기 있는 모두가 당신 수하라서?”
“…….”
미하일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음에 드는군.”
삐걱.
의자에 기댄 미하일이 손짓하자, 웨이터가 거품이 가득한 맥주 두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잔에 손을 대진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미하일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들 사정은 전해 들었네. 보스가 그렇게 된 후로 꽤 난감한 상황이라고.”
육진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선생의 생사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복권을 위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뜸을 들이던 미하일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믿고 의뢰를 맡기려면, 그에 맞는 실력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하지 않겠나?”
그걸 들은 육진모는 곧장 시선을 돌려 미하일의 뒤에 있던 거한을 쳐다봤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에게 손짓했다.
“시간 없으니 빨리 나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