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308
#308화
탁.
말끔하고 이지적인 인상의 남자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흠…….”
청부업을 담당하던 J의 사망 이후, 그 밑에서 일하던 업자들은 떠나 버렸다.
DS컴퍼니보다 J를 따랐거나, 그 원수인 이주혁에게 개인적으로 복수하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새로 몸 둘 곳을 찾기 위해 다른 주나 타국으로 넘어갔다.
사실 진짜배기들은 떠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명 한 명이 써먹기 좋은 패라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러시아로 넘어간 자들을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직을 배신하고 떠난 이들을 단죄하러 왔다’라는 명분 말이다.
탁.
러시아의 용병 조직, 글라자.
DS컴퍼니와 비슷한 성격의 조직이다.
한마디로 돈만 주면 사람을 죽여 주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 개개인의 실력은 큰 차이가 있다.
DS컴퍼니는 처음엔 청부업으로 세를 키웠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사업에 치중했다.
‘그 때문에 J가 불만이 많았지.’
그리고 그들의 타깃은 보통 의원이나 기자 정도였다.
하지만 글라자는 살인에 이골이 난 마피아들을 상대하던 이들이다.
‘암살’과 ‘전투’의 차이였다.
‘뭐, 그것도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글라자는 서클을 장악하는 데 무력적으로 가장 큰 걸림돌이 될 만한 세력이다.
그래서 다음 목표로 그들을 선택한 것이다.
이용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기엔 너무 위험한 자들이다.
그렇다고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민이 많아 보이십니다.”
선생, 민지훈은 경호대장의 물음에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게요. 누구 덕에 계획이 한참 앞당겨져서.”
최소한 15년은 잡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주혁이 주요 인물과 자금줄을 다 박살내 놓은 탓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주혁을 이용하기로 한 것도 일단은 궁여지책일 뿐, 그 남자도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애초에 통제할 생각도 없고.’
이주혁은 민지훈과 방식이 다른 것이지, 궁극적인 목표는 비슷할 것이다.
스윽.
민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호대장에게 말했다.
“육 대장님.”
“예.”
“그 사람들의 위치는 파악됐습니까?”
“두 명은 찾았습니다.”
“그렇군요.”
DS컴퍼니에서 넘어온 청부업자들.
아마 신임을 얻기 위해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정보를 넘겼을 터.
“경호대를 모아 주세요.”
다시 아시아로 건너갈 때가 되었다.
* * *
레이븐은 지체 없이 한국으로 향했다.
글라자에서 제공하는 위조 여권이 있었기에 입국심사 정도는 가볍게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공항에서 나오는 레이븐을 한 남자가 맞이했다.
“오, 레이븐! 여기야!”
한국에 있는 글라자의 정보원, 데릭이었다.
데릭은 선글라스를 낀 채로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을 휘날리며 걸어왔다.
그 눈에 띄는 모양새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웰컴 투 코리아.”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하지.”
“아, 오케이.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자고.”
데릭이 넉살 좋게 어깨에 손을 올리자, 레이븐은 곧장 몸을 빼냈다.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구면이 아니라 넘어가겠지만, 난 누가 내 몸에 손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어어. 미안.”
데릭은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뭐, 그럼 바로 서울로 갈 건가? 목적지가 어디야?”
“서울로 간다.”
“오케이. 근데 혹시 몇 살인지 물어봐도 되나? 생각보다 어려 보이…….”
“안 된다.”
“어. 그래…….”
그렇게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
.
.
“한국어는 할 줄 알지?”
데릭의 물음에 레이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는 한국어로 하자고. 괜히 시선을 끌 수도 있으니까.”
노란 머리 외국인이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레이븐은 그리 생각했지만, 굳이 한 마디 더 얹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부웅-
운전만 하다 보니 심심했는지 데릭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거 참 영광이야. 그 전설의 레이븐을 직접 만나다니.”
“…….”
“단신으로 궤멸한 마피아 조직만 여러 개에다, 바바 야가 때도 그 여자를 혼자 막아섰다며? 존경한다. 진짜.”
“주의사항은 있나?”
레이븐이 바로 주제를 돌리는 걸 느낀 데릭은 핸들을 돌리며 설명했다.
“SA시큐리티 말하는 거지? 직원들이 다들 군인 출신이라, 근처에선 수상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게 좋아. 유심히 쳐다본다든가, 뭐 그런 거 있잖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것만 조심하면 된단 소린가?”
“일단은. 나머지는 너도 프로니까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어. 아, 도착했다.”
차를 길가에 세운 데릭이 고개를 쑥 내밀고 앞에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저 건물 보이지? 저게 SA시큐리티.”
“그렇군. 안내 고맙다.”
레이븐은 그 말과 동시에 글로브박스를 열어 안에 있던 권총을 꺼냈다.
“엉? 어, 잠깐…….”
“잠깐 빌리지.”
탁.
차에서 내린 레이븐은 좌우로 목을 풀었다.
그리고 품에 잠시 넣어 뒀던 권총집을 허리에 두른 뒤 총을 수납했다.
저벅.
레이븐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잘 닦인 도로 위를 다니는 수많은 자동차.
평화로운 얼굴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
오랜만에 돌아오는 한국은 그의 기억과 꽤나 달라져 있었다.
“…….”
레이븐은 어쩐지 불쾌한 기분을 가지고 SA시큐리티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 여자가 SA시큐리티의 대표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했지.’
정보로는 일가견이 있는 놈의 말이니 아마 맞을 것이다.
마스크를 쓴 그는 SA시큐리티의 맞은편 건물로 들어갔다.
옥상에서 쌍안경으로 내부를 한번 살펴볼 생각이었다.
계단으로 올라가던 레이븐은 옥상 문의 손잡이를 잡고 열었다.
철컥.
아니, 열려고 했다.
“…….”
레이븐은 문이 잠긴 걸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꾸욱.
그에 손아귀에 힘을 주고 당겼다.
우득. 콰지직!
뜯겨 나간 손잡이를 바닥에 던지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레이븐은 품에서 접이식 쌍안경을 꺼내 펼쳤다.
그러자 창문을 통해 SA시큐리티의 내부가 보였다.
남자들이 서성이며 돌아다니고 있었고, 사무실 같은 곳엔 몇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흠.”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이주혁은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비운 건지, 안에서 다른 일을 하는 건지.
결국 수확 없이 내려가려는데, 건물 바깥으로 나오는 한 여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
그걸 본 레이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이내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탓!
레이븐은 바닥을 박차고 계단을 내려갔다.
쏜살같이 달려간 그는 어느새 멀어진 여자를 보며 권총을 빼 들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어쩐지 가벼워 보였다.
‘……왜지? 뭐가 그렇게 좋은 거지?’
자신이 떠난 후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는 과연 알까.
아니, 알면서도 떠난 것이리라.
철컥.
핏발 선 눈으로 레이븐은 그녀의 등에 총을 겨눴다.
“…….”
그의 손가락이 얹힌 방아쇠가 차갑게 빛났다.
* * *
고상미는 SA시큐리티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듣기론, 이제 앞으로 정말 위험한 일이 있을 거랬다.
그에 대비하기 위해선 실전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벼려 둬야 했다.
지금도 나쁘진 않지만, 나이도 먹었고 요즘 들어 꽤 평화로웠기에 감이 좀 떨어진 느낌이었다.
‘정말 위험했던 것도 한 번뿐이었지.’
용병 일을 하던 시절엔 거의 일주일에 한 번은 죽을 고비를 넘기곤 했었다.
적어도 그때의 8할 정도는 실력을 복구해야 했다.
“에휴.”
고상미는 심란함을 한숨으로 내뱉었다.
언젠가 러시아의 용병들이랑 붙을 수도 있다는 이주혁의 말 때문이었다.
‘……잘 있으려나.’
과거의 인연들이 고상미의 머릿속을 스쳤다.
‘거기 나 보면 총부터 꺼낼 애들 많을 텐데.’
떠나기 전에 제대로 깽판을 친 탓에, 아마 그녀를 보면 죽일 듯이 덤비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내 고상미는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게 일단 동생들을 패면서 수련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음?”
순간 등골이 짜릿하며 솜털이 솟아올랐다.
홱!
고상미는 몸을 숙이며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
날아오는 건 지나가던 행인들의 따가운 시선들뿐이었다.
그러나 고상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경계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훑어봐도 방금 날아온 살기의 주인을 찾을 순 없었다.
“기분 탓인가…….”
중얼거리던 고상미가 고개를 저었다.
“……라고 말한 새끼들은 다 뒈졌지. 대체 누구야?”
고상미는 목을 빼며 이리저리 살폈다.
석연찮긴 하나 감에 제대로 걸리는 건 없었다.
‘일단 대표한테 말해 줘야겠네.’
사소한 것이긴 해도, 이런 일 하나하나가 나중에 크게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인상을 구긴 고상미는 이내 다시 건물 안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 * *
“헉……. 후우…….”
레이븐은 근처 골목으로 들어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제기랄…….”
그 여자를 보자마자 감정이 조절되지 않았다.
그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부동심도 지금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힌 레이븐은 권총을 다시 집어넣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도심 한복판에서 사람을 쏴 죽일 순 없는 노릇이다.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 차치하더라도, 대한민국은 치안이 좋고 총기에 민감한 나라이기에 쉽사리 도주하지도 못할 것이다.
꾸욱.
어쨌든, 그 여자가 이주혁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알아냈다.
그렇다고 여기서 대놓고 그녀를 쫓아가면 무조건 알아챈다.
일단은 이주혁의 주변인에 관해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여자와 독대한 뒤, 왜 그런 건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레이븐은 길게 한숨을 내쉬곤 걸음을 옮겼다.
.
.
.
탁.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데릭의 차에 탔다.
“알아낸 건 좀 있고?”
그 물음에 레이븐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지금부터 알아봐야겠다. SA시큐리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작년에 만들어진 경호업체야. 근데 알아보니까 조금 이상한 점이 있긴 해.”
“이상하다고?”
“어. 우선 직원들이 적은 건 아닌데, 받은 의뢰의 수가 상당히 적어. 거기다 지금은 아예 영업을 하지 않고 있더라고?”
휴업 중이라.
눈을 가늘게 뜨는 레이븐에게 데릭이 계속 설명을 이어 갔다.
“또 마약 거래하던 놈들을 잡아서 경찰에 넘긴 적도 있어.”
“흠.”
경호업체라면서 경찰 노릇이라니, 확실히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제일 미심쩍은 게 뭔지 알아?”
“뭐지?”
“예전에 기사가 떴는데, SA시큐리티가 살인 혐의를 쓴 적이 있었어. 결국 아니라고 밝혀지긴 했지만.”
“죽은 사람이 누군지는 밝혀졌나?”
“부산의 갱단 두목 하나랑, 무슨 사이비 한 명이라도 듣긴 했지.”
분명히 뭔가 있긴 한데, 그게 뭔지는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일단 SA시큐리티라는 경호업체가 위장이라는 건 확실했다.
레이븐은 인상을 굳히며 물었다.
“혹시 근처에 숙소를 구할 수 있나?”
“숙소? 물론. 며칠 정도 머무를 생각인데?”
“일단 기한은 없다.”
레이븐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어쩌면, 꽤 오래 있을 수도 있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