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329
#329화
“저기요.”
한국에서 상주하는 글라자의 정보원, 데릭은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그의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기 누구 없나요?”
SA시큐리티의 대련실에 혼자 남겨진 데릭은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흔들었다.
“아니, 정말 다 간 겁니까?!”
철컹철컹.
무슨 고문할 것처럼 의자에 앉히고 양손에 수갑을 채우더니, 갑자기 볼일이 생겼다면서 다들 우르르 나가 버렸다.
그래서 데릭은 혼자 남아 외로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젠장…….”
무기나 통신 장비는 진작 압수당해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
그렇다고 이곳에 묶인 채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철컹!
통으로 된 수갑은 아무리 흔들어 봐도 꿈쩍하지 않는다.
엄지 관절을 뽑아 어떻게 손을 빼낸다 해도, 족쇄라는 관문이 남아 있었다.
‘대체 뭐 하는 곳이야?’
의자와 수갑은 저기 지하실로 보이는 곳에서 가져왔다.
이런 장비가 있는 걸 보아 아마 고문실 같은데, 그들이 돌아오면 데릭은 분명 저 장소로 끌려갈 것이다.
그 전에 여길 탈출해야 했다.
우선 이 족쇄부터 풀어야 나갈 수 있었다.
철컹! 철컹!
물론 허술하게 묶어 놓진 않았겠지만, 일단 시도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윽…….”
그러나 한참을 씨름했는데도 족쇄에 변화는 없었다.
그저 발목의 피부만 까질 뿐이었다.
“젠장. 젠장할!”
그렇게 데릭이 라세흠에 대한 증오와 원망을 키워 가던 도중, 대련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씨. 아직 해도 안 졌는데 저격이라니. 미친 거 아니냐?”
“그러게 말이다. 이번 회의는 무조건 참석하라는 이유가 있었네.”
다시 돌아온 남자들은 데릭을 힐끗 보곤 체력 단련을 시작했다.
“…….”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던 데릭이 속으로 인상을 구겼다.
‘빌어먹을. 볼일이 있다길래 적어도 몇 시간은 있다가 돌아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들이 일찍 복귀한 탓에 낭패감을 느끼던 데릭은,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음? 이 외국인은 누군데 여기 묶여 있어?”
“아, 부장님이 잡아 온 놈입니다. 러시아 킬러들 돕는 정보원이랍니다.”
“……러시아 킬러라고?”
저벅.
남자들 사이를 가르고 다가오는 여자를 본 데릭은 숨을 멈췄다.
여자의 미모 따위의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정체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
데릭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고상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내 정색하며 물었다.
“알아봤구나?”
“……네?”
“너, 나 알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크읍?!”
턱을 강하게 붙잡힌 데릭이 신음성을 냈다.
“진짜 몰라?”
“그으, 그게…….”
꾸욱.
“우웁! 아, 압니다! 안다고요!”
그 대답을 듣고서야 고상미는 데릭을 놓아줬다.
턱관절이 빠지지 않았는지 확인한 데릭이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까. 글라자를 반쯤 박살내 놓은 장본인을.”
어차피 다 분 마당에 굳이 모르는 척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데릭의 말에 고상미가 코웃음을 쳤다.
“됐고, 여긴 왜 왔어?”
“길 가다 붙잡혀 왔는데요.”
“그거 말고, 이 근처를 서성거렸으니까 잡혔겠지.”
“그건 아까 다 말했…….”
“뭐?”
꾸깃.
“이번에 한국으로 넘어온 킬러를 돕기 위해 온 겁니다.”
“레이븐?”
“예.”
“그놈 지금 러시아에 있댔지.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아?”
“모릅니다.”
꾸욱.
고상미가 주먹을 쥐었다.
“진짜 모릅니다! 정말이에요!”
고상미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는 데릭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듯했다.
“괜히 여기 애물단지처럼 처박아 놓은 게 아니네.”
“예.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많이 없답니다.”
배상훈의 말에 고상미가 고개를 저었다.
“처리하자. 데리고 있어 봤자 좋을 거 없어.”
“왜요?”
“인질극이 통할 놈들도 아니고, 괜히 뒀다가 정보만 새 나가지.”
그 의견을 들은 남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데릭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황급히 그들을 설득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저는 레이븐의 상황을 여러분에게 알려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제가 없으면 지금 레이븐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겁니다!”
그의 항변에 고상미는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이놈을 제거하는 것보단 살려 두는 게 더 이점이 있었다.
그때, 덩치가 대련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해, 행님덜!”
“왜 또 호들갑이야? 뭔데.”
“갱찰이 왔다는데예.”
“뭐?”
그 말에 다들 당황했다.
“갑자기 경찰이 여길 왜 와?”
“아, 저격 때문 아니냐?”
“그렇겠네. 그럼 일단 이놈부터 치우자.”
데릭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시선들을 느끼고 침을 꿀꺽 삼켰다.
덥석.
“잠깐,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아늑한 지하실.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라.”
“예? 조, 조용히 있겠습니다!”
“시끄러.”
의자 채로 허공에 들린 데릭이 몸을 비틀었다.
지하실이라면, 분명 이들이 족쇄와 수갑을 들고 나왔던 저 고문실을 뜻하는 것이리라.
“저곳만은 제발……!”
그렇게, 데릭은 단말마의 비명만을 남긴 채 지하실로 끌려 들어갔다.
* * *
끼익-
목적지에 도착한 걸 확인하고 차를 세웠다.
“부산은 오랜만이네. 안 그러냐?”
“그러게요.”
부장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러시아 마피아들과 국제파가 항구에서 거래하는 걸 방해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우웅-
그때, 배상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어. 무슨 일이야?”
-경찰이 총격 사건 조사차 찾아왔다는데, 따로 주의사항 있냐?
“적당히 사건 설명해 주면서 조사에 협조해. 부장님은 출장 갔다 하고.”
-오케이. 알았다.
이전에 연락했던 박건이 수사를 위해 경찰 인력을 보낸 모양이다.
“야. 주혁아. 근데 정말 그렇게까지 해서 효과가 있을까? 정작 당사자인 내가 멀쩡하잖아.”
“그건 딱히 상관없습니다. 부장님이 생명의 위협을 당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지.”
나는 이번 저격 사건을 공론화할 생각이다.
내가 혹시 하는 마음에 방탄유리를 설치해 놓지 않았다면, 부장님이 잘못될 수도 있었다.
우리 회사로 따져도 중요한 인재지만, 무엇보다 나한테 많은 걸 가르쳐 준 소중한 사람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부산에서 마피아 놈들의 씨를 말려 버려야지.’
엮을 수 있는 상황이 있고, 적절한 인맥도 있으니 내 목적을 이루기엔 충분했다.
몇 개월 전에는 언론에게 내가 당했었지만, 지금은 그 언론에 입김을 넣을 수 있는 자리가 됐거든.
경찰 조사가 끝나고 난 후엔, 이번 저격 사건과 지난 항구 사건을 엮어 러시아 마피아들을 규탄하는 기사가 나올 거다.
그렇게 놈들에게 나쁜 인식을 심어주고, 예전에 삼합회 놈들이 일으켰던 종로구 칼부림 사건을 가져온다.
그리고 마피아, 삼합회와 함께 야쿠자들에게 마약을 넘기던 놈들을 붙여 버리면 끝.
깡패 수준으로는 이 상황을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최소한 줄줄이 감옥행일 테니까.’
김대국이었나, 그 국민당 의원에게 부탁해 국회의 여론을 그쪽으로 몰아갈 거다.
알아보니 발언권이 좀 센 사람 같더니만.
내가 조용히 덮어도 될 일을 이렇게까지 키우는 이유가 있다.
‘이 나라에 외국 깡패들이 너무 많아.’
야쿠자에, 삼합회, 러시아 마피아까지.
우리나라 조폭은 주철수과 정광제 같은 거물들이 차례로 죽음으로써 세력이 많이 줄었다.
그러나 근처 국가의 범죄 조직들이 이 틈을 타려는지 자꾸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야쿠자들도 지금은 협력을 구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타도해야 할 상대 중 하나다.
그걸 위한 빌드업을 지금부터 하고 있는 거다.
‘거기다 명분 문제도 있고 말이지.’
스미요시카이의 사이토 회장이 말한, 본인이 ‘서클’과 함께할 명분.
내가 벌이는 이 일은 그 명분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쓰읍. 네가 그렇다면야 뭐 그런 거겠지. 그럼 우린 그냥 조폭들 혼내 주면 되냐?”
“일단은요.”
설령 왕근철이 야쿠자들에게 마약을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고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범인은 ‘왕근철과 국제파의 잔당’이 될 테니 말이야.
“여기네요.”
나는 이름 없는 상가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씨익.
이제 범인이 되어 줄 사람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 * *
-일은 어떻게 되어 가지?
그 물음에 글라자의 수뇌부 중 한 명, 알렉산더가 답했다.
“실력자를 파견해 놨소. 머지않아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요.”
하지만 상대는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퉁명스러운 투로 말했다.
-내 동료를 쓰러뜨린 놈이다.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텐데.
“머리로 총알이라도 튕겨 낼 수 있다는 말이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자라도 총을 맞으면 죽소.”
-……확실하게 처리하길 바라지.
“걱정 마시오. 의뢰한 대로 주요 간부진까지 제거해 줄 테니까.”
-알겠다.
통신을 종료하고, 알렉산더는 인상을 구기며 혀를 찼다.
“빌어먹을.”
조금 전, 그로선 상당히 좋지 않은 소식을 보고받았다.
바로 저격에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이번 의뢰의 목표, 이주혁의 동료인 라세흠.
회사 내부에 있는 그에게 저격을 시도했으나, 방탄유리에 막혀 실패했다고 들었다.
실패를 상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한번 성공하지 못한 이상 다음은 더 어려울 터.
‘자신 있게 이야기하긴 했는데 말이지…….’
어쩌면 예상했던 것보다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번 의뢰는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그 돈이면 이 지긋지긋한 러시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릴 땐 비행 청소년이었고, 청년일 적엔 마피아였다.
그리고 지금은 킬러 집단의 수뇌부다.
그의 삶은 항상 불법과 피로 얼룩져 있었다.
물론 그가 선택한 길이었으나, 돈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글라자는 5년 이상 가지 못해.’
그 전에 노후 대책을 세우기 위해 이주혁 암살이라는 의뢰를 받은 것이었다.
미하일, 니콜라이 모두 진작 미래를 대비하고 있을 테니까.
찰칵.
알렉산더는 시가의 끝을 자르며 과거를 회상했다.
글라자가 재정난에 처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바 야가. 그 여자 때문이지.’
중책을 맡고 있던 자들을 살해하고, 주요 시설들을 파괴했다.
그 일은, 한창 커지고 있던 조직의 성장세를 꺾기에 차고 넘쳤다.
사건 이후로 글라자는 각자 다른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수뇌부에 의해 이리저리 분열했다.
결국 알렉산더를 비롯한 지금의 수뇌부들이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세력을 불리긴 했지만, 자금이 뒷받침되지 않는 확장은 당연히 재정의 문제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치이익-
시가에 불을 붙인 알렉산더가 연기를 깊게 흡입했다.
‘둘 중에 누구일까.’
마리아가 계속 조사 중인 마스트 코퍼레이션.
알렉산더는 마스트 코퍼레이션이라는 유령 회사를 만든 이가 수뇌부 중 한 명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유령 회사를 통한 살인 청부는 주로 정부의 관료나 마피아들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마피아들의 냉전 상태를 반기는 정부의 인사들이 이런 짓을 저지를 이유는 없었다.
그럼 남은 건 마피아들인데, 만약 그들이 범인이라면 마피아가 쓰는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 멍청한 놈이 배후일 리가 없지.’
마피아처럼 보이기 위해 마피아들이 한 것처럼 일을 꾸몄다.
그렇다면 그런 계획을 꾸밀 사람은 지금의 사정을 잘 아는 내부의 인물이다.
그것이 알렉산더의 생각이었다.
끼익-
알렉산더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들어오지 말라고 얘기했을 텐데.”
“그랬나? 미안하게 됐군.”
뻔뻔하게 들어온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알렉산더의 주름이 더욱더 깊어졌다.
“당신은…….”
뚜벅. 뚜벅.
그의 앞에 걸어온 남자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경호대의 대장, 육진모의 눈빛이 시가 연기 사이로 차갑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