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355
90 누군가의 잿불 (3)
“놀라게 한다니, 뭘, 뭘 하시려고.”
심상치 않은 말에 도채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김명철이, 그냥 자신을 건 것도 아니라 ‘붉은개’ 길드를 언급한 건 의미가 컸다. 도채희의 질문에 김명철은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악에 받친 얼굴로 김명철이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참 그렇지 않아요? 각성자의 일인데 여태까지 쭉 발을 뺐다는 게. 나는 헌터니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렸단 말이에요. 왜일까요. 헌터라고 해서 각성자가 아닌 게 아닌데, 어떤 특권층이 된 것처럼 선을 그어 버렸단 말이지.”
각성자를 차별하면, 당연히 헌터도 좋을 게 없다. 왜냐, 헌터 또한 각성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김명철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정부의 대처를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봤다.
답은 간단하다.
정부가 노린 것은 헌터가 되지 못한 등급이 낮은 각성자들 뿐이었고, 그 차별은 결국, 최전선에서 게이트 공략에 힘쓰고 있는 헌터들에게는 먼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자면 이거다. ‘나는 저렇게 밑바닥에 처박히지 않을 것이다’. 그래, 딱 그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알량한 우월감이라고 해도 좋고, 지독한 이기주의라고 해도 좋다.
그걸 깨닫는 순간, 김명철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난 말이죠. 언제나 헌터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재난지역에 자원봉사를 가고, 오지든, 어디든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길드원을 보내고. 근데 말이야, 안에서 이렇게 곪고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다고요. 아니, 모른 게 아니지. 관심이 없었던 거지.”
그 무관심 속에서, 진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천천히 물에 잠겨 죽어 가고 있었다.
아끼던 사람을 잃고 나서야, 김명철은 깨달았다.
사실상 정호산을 사지로 내몬 것은 자신이나 다름없다고.
“나는 내가 위선자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 싫다는 게 정답이겠지. 근데 그렇겠죠. 누군가에게는 나는 위선자인 거야. 위선자가 돼 버린 거예요.”
김명철의 말에 도채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김현기 사건 이전에는, 하급 각성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의 삶을 생각지 않는 법에 맞춰, 법을 어긴 이들을 잡아들이는 역할만 했을 뿐.
“지금 이 상황을 뜯어고치려면 나 같은 사람의 목소리가 필요하겠죠. 나 하나로만은 부족할 거야.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하겠지만, 상황을 바꾸기에는 부족하겠죠.”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길드의 길드장으로도 지금 이 상황을 바로잡기에는 부족했다.
“사람을 모은다고 하셨던 게…….”
도채희는 입을 벌렸다.
“길드장끼리 모임을 한 번 진행할 생각입니다. 거기에서 모두에게 지금 이 상황을 알리려고요. 지금은 하급 각성자의 숨통을 죌 뿐인지 몰라도 이걸 내버려 두면 언젠가 우리의 목까지 조르게 될 거라고.”
그 말에 도채희는 놀랐다. 그저 김명철 개인이 아니라, 붉은개 길드의 길드장으로서 힘을 실어 주겠다는 것까지는 이해했지만 다른 길드까지 이 논의에 끌어들이려 하다니. 확실히, 김명철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더는 정부도 이런 식으로 굴지는 못할 거다.
하지만 이 계획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도채희는 박철완의 두려움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택했다고 말했던 박철완의 얼굴에는, 자신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자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전부 해 줄 순 없겠지만, 상대방이 누구든, 위험한 힘을 가진 건 분명하다.
그에게 이렇게 모든 걸 걸고 맞서겠다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도채희의 말에 김명철이 말했다.
“호산이는 위험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놈이었어요.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무섭다고, 두렵다고. 잃을 게 있다고 내빼지 않는 놈이었죠.”
정호산을 떠올리니 새삼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김명철의 눈가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요, 위험해질 수도 있겠죠. 쉬운 일이라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하지만 내 이 망설임이, 호산이를 죽였잖습니까.”
그 말에 도채희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 안 죽이셨어요! 그 사람 멀쩡히 살아 있단 말이에요!’
차마 내뱉지 못한 진실이 도채희의 속을 짓눌렀다. 그 사이에도 김명철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미 그렇게 제 목숨을 불태워 옳은 일을 하려던 녀석이 있는데, 나 혼자 살자고 발을 뺄 수는 없죠.”
도채희는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쥐어뜯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났다. 제 앞에서 이제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본격적인 정호산 앓이를 시작한 김명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크흑, 호산아……. 어째서 그 좋은 녀석이…….”
‘아, 아아!’
도채희는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며 김명철의 시선을 피했다.
* * *
결국 도채희는 김명철에게 그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김명철을 말릴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응원할 수도 없는 복잡한 마음으로 도채희는 김명철을 배웅했다.
“천천히 고민해 보고 다시 연락해 줘요.”
합류 제안에 조금은 시간을 달라는 도채희의 말에 김명철은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도채희는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순간, 도채희는 곧바로 정호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모두 들은 정호산의 반응은 생각보다 심심했다.
[……그랬군요.]“그, 그 맥 빠지는 반응은 뭐예요! 이거, 이거 어떡하면 좋아요?”
상황만 놓고 보자면 도채희와 정호산에게는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아니,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하는 일이다. 붉은개 길드 정도의 거물이 그들을 위해 싸워 주겠다고 말한 셈이니까.
하지만 도채희 개인으로서는, 이 일을 마냥 반길 수 없었다.
왜냐. 자신이 한 말대로 이 일은 김명철을 무척이나 위험하게 만들 테니까.
게다가 김명철이 이 일에 참전한 이유도 마음에 걸렸다.
“길드장님은 호산 씨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이 모든 일을 벌이는 거잖아요.”
그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말에 수화기 너머 정호산 또한 앓는 소리를 냈다.
[그, 그야 그렇지만 지금 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알리면, 오히려 일이 복잡해지지 않을까요?]“죽음을 가장하는 게 얼마나 나쁜 일인지 잘 안다면서요! 나한테는 알렸으면서, 왜…….”
[형님은 거짓말을 더럽게 못 하시거든요.]“저, 저도 거짓말을 못 하는 건 마찬가지거든요!”
왜 이 사이에 끼어서 이런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걸까. 도채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정호산의 말이 이어졌다.
[경위님이랑은 상황이 다르죠. 형님은 길드장이시잖아요. 경위님께 가기 전에 이미 사람을 수십 명은 만났을 거라고요. 이 결정도 가벼운 게 아니니, 길드의 수뇌부들하고는 모두 이야기를 끝냈을 거고요. 그러니까…….]정호산 또한 김명철이 자신에게 얼마나 진심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편애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중이었으니. 가뜩이나 정이 많은 김명철이었으니, 정호산의 죽음을 전달받고 그가 느꼈을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지 대충 감이 왔다.
문제는 김명철이 그 충격을 그대로 두는 대신, 행동하는 행동파였다는 거다.
[지금 제가 살아 있다는 걸 밝히면, 형님께서 가장 곤란해지실 거예요. 음, 일단은 조금 감정을 추스른 다음에…….]“그래도 저대로 뒀다가는 정말로 불타는 차를 타고 정부를 들이박을지도 모른다고요!”
[저, 저도 그게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한 길드의 길드장이시잖아요. 다 생각이 있으실 거라고 봐요. 정말로 길드 전부를 불태울 만한 짓은 하지 않으실 거라고 믿어요.]“그, 그렇겠죠?”
[예. 그래서 말인데요. 정말, 정말로 죄송하지만, 당분간은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하…….]말을 잇던 정호산이 갑자기 헛웃음을 터트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웃음에 도채희는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왜 웃어요?”
[하, 꼭 이신이가 저한테 했던 짓 같아서요. 상황이 지금은 좋지 않으니 비밀로 해 둬야겠다니, 진짜 비겁하고 못됐잖아요.]알고는 있구나, 비겁하고 못된 짓이라는 거. 누군가를 속인다는 기분에 도채희 또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정호산의 말대로 지금 당장 정호산의 생존을 밝히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긴 했다.
아니,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정말 이대로 비밀로 할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님’이잖아요.”
[한 가지만.]정호산이 말했다.
[정 마음에 걸리신다면, 형님께 하나만 물어봐 주세요. 그 대답을 듣고 경위님께서 마음이 가는 대로 해 주셔도 돼요.]“선택을 저더러 하라고요?”
[저는 일단 죽어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 대한 판단은 오히려 경위님께서 잘하실 것 같거든요. 감정을 제외한 채, 정말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제가 살아 있다는 걸 밝히든, 밝히지 않든. 형님을 말리든, 말리지 않든.]“그 질문이 뭔데요?”
뒤이은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는 귀를 기울였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도채희는 생각했다.
확실히 그 질문이라면, 제 마음을 정할 수 있을 것 같다고.
* * *
붉은개를 이끄는 김명철은, 오늘 대한민국의 거대 길드 다섯 개를 모두 소환했다. 워낙 명망 있고 주변의 평가가 좋은 김명철의 부름이라, 거대 길드의 길드장들은 모두 시간을 내어 이곳을 방문했다.
짧게 숨을 내쉰 김명철은 테이블을 채우고 있는 화려한 얼굴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도통 긴장하는 일이 없는 김명철 또한 긴장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게스트였다.
길드 순위 2위, 도화의 박연수 길드장. 그 뒤를 잇는 3위의 뭇별, 4위의 하오로비의 길드장.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는 시리우스의 진연화 부 길드장까지.
한 자리에 모으려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얼굴들이었다.
오늘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 김명철은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끌어왔다.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까지 해 가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모여 주십시오.’
그 말에 누군가는 비소를, 누군가는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모두가 이 자리에 와 있었다.
김명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막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는 순간, 김명철은 방향을 바꿔 구석으로 향했다.
“예, 경위님.”
[제 마음을 정하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도 될까 싶어서요.]“그게 뭔가요?”
[만약 호산 씨가 살아 있었다면요. 그래도 같은 선택을 하셨을까요?]생각지도 못했던 그 질문에 김명철은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곧 생각해 보니, 이보다 더 적당한 질문은 없을 것 같았다.
“그 녀석의 죽음은 분명 내게 계기가 됐습니다. 나는 바보 같은 사람이고, 시야가 좁아요. 살핀다고 살폈지만, 아래까지 고개를 숙여서 보진 않았죠. 그러니 아마도 호산이가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겁니다.”
[그 말은…….]“그래요, 분명 그 녀석이 내 생각을 바꾼 건 맞죠. 하지만 인생은 모르는 거잖습니까. 호산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게 그런 계기를 줬을지도 모르고. 그러니 확답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요, 이건 말하죠. 내가 말했던 대로 나는 호산이의 복수를 바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제일 바라는 건, 오늘보다 내일 더, 조금은 누군가가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거예요.”
김명철이 반짝이는 조명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을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이들과 함께 보내는 거였다고요. 그러니까, 답은 예. 호산이가 살아 있었대도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지금보다 조금은 더 행복해졌을지는 몰라도…….”
그 말에 도채희가 말했다.
[길드장님이 그리는 그 길, 따라갈게요. 그리고 전 알아요. 호산 씨는 길드장님의 이런 선택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한다는 걸요.]그 말에 김명철이 미소를 지었다.
“고맙네요, 지금 딱 듣고 싶은 말이었어요.”
통화를 끊은 뒤, 김명철은 굳은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자신을 맞이하는 거대 길드장들의 날카로운 눈초리 속에 김명철은 입을 열었다.
“오늘 제가 여기에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제35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