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79
27 십악(十惡) 도살자 (2)
“보스! 보스 봤어요?”
막 벽에 퍼티를 바르고 있던 나는 한서현의 급한 부름에 말했다.
“뭔데.”
“사람이 부르는데 고개는 좀 돌리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어떤 사람이 우리 이름에 대고 선전포고를 했어요.”
웬 선전포고?
우습지도 않은 단어지만, 그 말을 꺼낸 한서현의 표정이 영 심상찮았다. 나는 할 수 없이 도구를 내려놓고 한서현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나는 한서현이 건넨 스마트폰 안의 화면을 살펴보았다.
“허.”
절로 신음이 샐 정도로 그 안에 있는 풍경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내용은 심각했다.
하루아침에 마을 하나가 사라졌다. 마을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끔찍하게 살해당했고, 이 일을 저지른 범인은 도살자였다.
자신의 범행을 감추기는커녕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마을에 박아 넣었다.
선전포고라고 하는 말이 정확하다.
도살자는 희생자들의 피로 우리의 이름을 적어 놨으니까.
「벨츠머츠가 나보다 더 많이 죽일 수 있을까?」
“온 뉴스가 이걸로 난리예요. 이, 이게 무슨 일인지…….”
이런 일일수록 자극적인 보도를 금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썩은 언론은 그런 보도 지침 같은 건 집어치운 지 오래였다.
다른 지역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갔던 덕분에 화를 면한 학생에게 마이크를 내밀며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는데 지금 심정이 어때요?’라고 묻는 기자를 보며 나는 혀를 찼다.
젠장, 이런 때에도 기레기가 문제라니까.
하긴 단순히 저 기레기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를 기뻐하면서 뒤에서 불을 지피고 있을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하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자극적인 사건에 희생된 피해자일 텐데.
사망자만 232명. 시골 작은 마을이라 어디로 도망갈 새도 없이 그대로 당했다. 그동안 빌런에게 사상자가 나오는 경우는 꽤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마을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린 예는 없었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살육을 위한 살육을 위해 마을 하나를 습격한 경우는,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한서현은 주먹을 꽉 쥔 채 분노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선전포고하겠다고 저런 거래요. 진짜, 우리가 뭐라고.”
가뜩이나 테이카 쿠퍼랑 엮여서 정신도 없는데 웬 미친놈이 또 얽혔다. 내 머리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서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넌 좀 쉬다 와라.”
“지금 이걸 보고도 쉬고 오라는 소리가 나와요?”
“그래, 그러니까 더더욱 쉬어야지.”
한서현은 지금 너무 과몰입하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머리를 차게 식혀야 하는 법이었다.
내 눈을 본 한서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지금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차분히 나머지 기사를 확인했다.
━저 꼬맹이한테는 쉬다 오라면서 너는 그거나 보는 거냐.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적어도 나는 도망치면 안 되죠.’
내가 알기로 도살자가 이런 학살을 저지른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분명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230여 명의 사람이 ‘나’ 때문에 죽었다. 괜한 감상에 젖을 생각은 없다. 내가 원인이 됐더라도 어쨌거나 이 일을 저지른 건 도살자니까.
언제나 남 탓은 정신 건강에 좋다.
쓸데없이 현장을 자세하게 묘사한 기사들은 나에게는 퍽 도움이 되었다.
“시체들이 모두 반쯤 타들어 가 있었다고…….”
내가 알기로 도살자의 재능은 화염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발견된 시체들은 타들어 간 상태로 발견되었다. 완벽히 재가 돼 버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모양이다.
━본래 지닌 재능은 어떤 것이었는데?
‘내부로 스며들어 가 모든 걸 파괴하는 거였죠.’
그래서 도살자에게 당한 시체는 내부가 엉망진창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겉도 멀쩡하지는 못했고.
하지만 이렇게 불에 탄 듯한 흔적이 발견된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때쯤 도살자가 뭔가를 얻었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탑에 얽힌 빌런들은 내 담당이 아니었기에 기억이 희미했다.
내가 기사를 확인하는 동안 세수라도 하고 온 것인지,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며 나온 한서현이 내게 물었다.
“이 선전포고를 받아 줄 생각이에요?”
“거부할 이유는 없지.”
우리 이름을 걸고넘어진 이상 도살자를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저지른 짓도 있고. 도살자는 미래를 위해서도 살려 둬서는 안 되는 개놈이었다.
문제라면…….
‘탑’에 오른 만큼 도살자가 만만찮은 사람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일단 뒤를 쫓아 봐.”
철저하게 파 봐야겠다.
우리가 최근 맞서 싸운 상대와는 달리, 도살자는 진짜 강자니까.
━강하기로는 그 중국 여자애가 제일 강하지 않았냐? 아니면 그 미국 놈이나.
‘그래서 그들과는 싸우지 않는 편법을 쓴 거 아닙니까.’
엄밀히 말해 쑤어하오주와 테이카 쿠퍼는 내 적이 아니었다. 쑤어하오주는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녀를 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도살자는 다르다.
도발에 당하는 건 멍청한 짓일지도 모르겠지만, 당해 주지.
네놈은 철저하게 뭉개 버릴 거다.
이놈을 죽인대도 이미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이놈이 뻔뻔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백배 낫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 놔두었던 미장 장비를 챙겼다.
━으응? 뭘 하는 게냐.
일단 그 전에 퍼티부터 마저 바르고.
저거 굳으면 새로 사야 하거든.
* * *
도살자. 이름은 박상편. 나이는 올해 33세.
처음 빌런이 된 이유는 어이가 없다. 자신을 향해 잔소리를 하던 가족을 그 자리에서 죽인 거다. 첫 시작부터가 존속살해였다, 이놈.
그렇게 손에 피를 묻힌 이놈은 사람을 죽이는 일 자체에 재미를 붙였다.
도살자는 전형적인 쾌락 살인마였다.
탑에서 맨 끝에 있다고 해도, 놈은 상당히 강하다. 그냥 어중이떠중이로 볼 수는 없다.
일단 탑에 올라간 것 자체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박상편의 평가가 박한 것은 무력 때문이 아니다.
박상현은 그러니까, 속된 말로 탑에 오를 만큼의 카리스마가 없는 놈이었다.
탑에 오를 정도 되는 빌런이면, 뭐랄까, 저마다 추구하는 게 따로 있기 마련이다.
빌런에게 이런 걸 요구하는 것도 웃기지만, 확실히 탑에 있는 빌런들은 저마다 한 분야에서는 대가로 꼽힐 만큼 대단한 능력을 지닌 자들뿐이다.
다만 그 성취를 이룬 과정이, 혹은 그 성취로 이루려는 목적 자체가 세간의 눈으로는 끔찍할 만한 것들이라 빌런으로 정해진 것이지.
하지만 박상편은 그렇지 않다.
물론 그는 엄청나게 강하다. 한순간에 수십의 인간을 찢어 죽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특별하지 않다.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어 온갖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인형사’나, 피를 매개체로 한 마법을 만들어 낸 ‘혈마 추마걸’, 그리고 손을 댄 것은 무엇이든 접어 버릴 수 있는 ‘큐브’에 비해 박상편의 강함은 단조로울 뿐이다.
쌍둥이의 인격을 품고 두 가지 재능을 자유자재로 쓰는 ‘제미니’나 마음대로 공간을 넘나드는 ‘트릭스터’만큼 대중들을 놀라게 할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말이다, 박상편은 꼭…….
“왜 그런 캐릭터 있잖냐. 사천왕 중에 제일 약한 녀석. 인기도 없고, 좀 그런 애들.”
“사천왕씩이나 돼요?”
“너무 센가? 여튼 뭐, 그런 놈이야. 너무 심심하고 재미없어서, ‘아! 거기에 그런 놈도 있었지’하고 나중에야 생각나는 놈.”
어느샌가 은근슬쩍 리타이어되어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놈.
그냥 가끔 나타나 무차별적인 학살을 저지르고 사라지는 놈.
그러니 평가가 박할 수밖에.
탑에 끼기에는 너무 원시적이라고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그렇게 평가가 박한데도 결국 탑에 오를 만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만큼 ‘강한 놈’.
아무리 평가절하된 상태라고 해도 이제 막 빌런계에 발을 디딘 우리 벨츠머츠와 엮일 만큼 허접한 사람은 아니었다.
도살자가 이렇게 우습게 여겨진 이유는 그가 석 달간, 그 어떤 활동도 없이 잠잠했기 때문이다.
대충 짐작이 간다.
그 석 달간 박상편이 무엇을 위해 몸을 숙이고 있었는지.
“새로운 아티팩트를 얻었거나, 새로운 재능을 개화했거나.”
달라진 피해 현장이 그 증거다.
“그러니 기존의 그놈과는 접근 방식을 다르게 해야겠지.”
“일단은 도살자를 찾는 게 먼저 아닐까 싶긴 한데요.”
한서현이 매를 띄웠지만, 수색 범위가 전국 단위라 그런지 찾기 쉽지 않았다.
지정된 장소에서 정보를 찾아오는 건 그 무엇보다 빠르지만, 이렇게 넓은 곳에서 사람 하나를 찾아내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도살자의 위치는 찬찬히 찾아봐야지.
“우리에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할 테니, 그놈도 바로 움직이진 않을 거야. 아마 다크웹이나 보면서 배를 긁고 있지는 않을까.”
다크웹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게 이 일에 얽힌 이름이 근래 가장 핫하게 다크웹을 달구고 있는 우리였으니까.
옥션에서 깽판을 쳐 놓고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납치하는 일들을 벌였음에도 우리는 단 한 번도 전력을 노출하지 않았다.
우리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연기였다.
이 연기 안에 있을 실체를 알고 싶은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과연 이놈들은 거품인가? 아니면 진짜인가?
뭔가 대단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능력은 잘 모르겠는데?
안 그래도 궁금했던 걸 무려 탑의 구성원이 나서서 직접 승부를 내 주겠다는데.
와, 세상에. 내가 구경꾼이어도 너무 재밌겠다.
문제는 내가 구경꾼이 아니고, 내가 그 연기 속에 숨은 실체라는 거지만.
이렇게 된 거 완벽하게 판을 깔아야겠다.
“그 전에 도살자에게 말해 줘야지.”
“뭐라고요?”
“네 방법 구리다고.”
도살자는 자신이 죽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걸 원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지.
“그렇다고 열이 받아서 괜한 사람들 더 죽이게 둘 수는 없으니, 확실하게 메시지를 전해야겠어.”
그놈이 한 짓을 치졸하다고 꼬집으면서도 엉뚱한 곳에 불티가 튀지 않게 하려면 딱 좋은 일이 있었다.
* * *
나는 언덕에 엎드려 입을 열었다.
“저기에 있는 놈들은 용병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쓰레기 같은 일을 한 용병이지.”
침을 꿀꺽 삼킨 한서현이 내게 물었다.
“무,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요?”
“음, 일단 일반적인 게이트 공략 팀으로 위장한 다음에 공략에 합류해. 실제로 공략이 끝나 갈 즘에 같은 팀이었던 사람들을 배신하는 거야. 그리고 그 공략 팀이 얻어야 했을 모든 걸 털어서 나오는 거지.”
아주 흔한 수법이었지만,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었다. 실제로 공략 팀의 사망 원인 2위에 이런 빌런들에 의한 살인이 올라와 있을 만큼. 공략된 게이트는 사라진다는 것 때문에 수사가 거의 불가능한 것도 문제다.
“아니면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게이트 속으로 몰래 들어가서, 공략 팀의 뒤를 노리고 있다가 덮치든가.”
뭐가 됐든 그런 식으로 공략 팀을 죽이고 그들의 전리품을 빼앗아 가지는 것. 그게 바로 눈앞에 있는 길드 놈들의 주 수입원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길드로 위장하고 있지만, 속을 까 보면 완전히 빌런 집단이라는 거다.
이번 일에는 한서현도 함께하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서현의 스켈레톤이 함께하기로 했다.
얘도 슬슬 실전을 뛰어야지. 나는 스켈레톤의 손에 단검을 쥐여 줬다.
김재호는 이미 안쪽으로 침투해 있었다. 김재호의 적성은 암살, 재능 또한 그림자에 숨어드는 것이니 대놓고 싸우는 것보다는 은밀하게 파고들어 단번에 급소를 노리는 쪽이 제일 잘 맞는다는 거다.
사실 맘 놓고 김재호가 저곳을 휩쓸면 솔직히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다.
하지만 오늘은 스켈레톤의 데뷔전이다. 내 눈짓에 한서현은 스켈레톤을 소환 해제한 뒤 김재호가 확보해 놓은 복도로 보냈다.
그다음부터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누가 뭐래도 내가 훈련한 두 사람이다. 이 정도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쉽게 당할 정도로 굴리진 않았다.
나? 나는 그냥 두 사람의 활약을 보며 부족한 부분을 체크하기만 했다.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니냐?
‘여기는 우리가 싸울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 방금 빈틈.
나는 한서현에게 할 잔소리를 머릿속에 새겼다.
제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