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84
28 머리를 박은 타조 (1)
엄청난 벼락이었다.
온 세상이 번쩍였다. 이 세상을 온통 새하얗게 물들인 빛이 사라졌을 때는 그 주변에 있던 모든 전자 기기가 순간적으로 먹통이 됐다.
공중에 떠 있던 헬기는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비상 착륙에 성공한 것도 있었지만, 추락한 헬기도 있었다.
“으아아악!”
그 파편이 주변으로도 튄 탓에 주변에 몰려 있던 구경꾼들은 비명을 질렀다.
난장판이었다.
도채희는 폭발을 피해 몸을 숙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현장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는 이미 그놈들은 떠난 다음이었다.
“뭣!”
도채희가 고개를 들고 독수리의 눈으로 사방을 훑는 동안 주변의 구경꾼들은 저마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 번개는 뭐였지?”
“벨츠머츠의 리더는 물 능력자 아니었나? 다른 놈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말이야. 저 정도의 번개를 불러내려면…….”
“7성급은 돼야 하는 거 아니야?”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헙, 하고 입을 닫았다.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숨을 집어삼킨 건 도채희도 마찬가지였다.
“허.”
확실히 벨츠머츠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떠올리지 못했는데, 저 정도 번개는 아무나 부를 수 없었다.
도살자의 몸에 얼음 창이 꽂히고 그의 머리가 땅바닥을 구른 순간, 퍼져 나온 안개.
그리고 그 안개가 사라지기도 전에 현장을 때린 그 엄청난 번개.
번개라니.
벨츠머츠 리더의 능력은 번개가 아니었는데. 분명, 물을 사용하는 능력자가 아니었나?
한서현, 그리고 육체계……라고 생각했던 덩치 하나.
현장에 있던 셋 중에 대체 누가 이 번개를 쓴 거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정신을 빼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정신을 차린 도채희는 무전기에 외쳤다.
“도살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곧바로 벨츠머츠를 쫓습니다.”
[추, 추적하실 생각입니까?]
“그럼 이대로 손을 놓고 있자는 소리예요? 일단 뒷산부터 수색해요!”
[예!]
추적 팀을 꾸려 보냈지만, 사실 도채희도 저들이 벨츠머츠를 잡아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마주치지 않는 게 이득이다.
도살자도 꺾어 버린 그들에게 추적 팀은 한입거리도 안 될 테니까.
“만약 그들을 발견하면 절대 가까이 접근하지는 말고요!”
혹시 모르는 걱정에 굳이 한마디를 덧붙인 도채희는 황급히 사람들의 틈을 넘어 현장으로 뛰어갔다. 현장에는 피비린내와 무언가 타들어 간 냄새가 뒤섞인 악취가 진동했다.
팔뚝으로 코와 입을 가린 도채희는 현장을 노려봤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벨츠머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그들의 실체와 마주친 건, 옥션 때 이후 두 달 만이다. 겨우 두 달 만이었지만, 그사이 벨츠머츠의 위상은 차원이 달라져 있었다.
설마하니 정말 도살자를 꺾어 버릴 줄이야.
도살자의 시체를 본 도채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시체의 꼴은 참 끔찍했다. 여기저기 얼음 창이 꽂히고, 머리는 저 멀리에 날아가 버리고. 벼락을 맞아 타들어 간 흉한 시체는 두 눈 뜨고는 보기 힘들 만큼 참혹했다.
마음 같아서는 뒷산으로 가서 벨츠머츠를 찾고 싶지만, 그녀에게는 이 현장을 수습할 의무가 있었다.
“현장 수습 팀은 늦습니까?”
[그게, 곧 간답니다! 거의 다 왔다는데 앞에 차가 좀 밀려서.]
“그리고 일단 현장에 있던 촬영 팀한테 협조 요청해서 뭐라도 찍은 거 있으면 달라고 해요. 벨츠머츠와 도살자의 전투가 찍힌 거면 뭐든.”
벨츠머츠와 도살자의 대결은 대중들에게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가 되었다. 물론 중간중간 날아드는 얼음 창이나 검붉은 마나 때문에 아주 가까이에 다가갈 수는 없었으나, 멀리서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을 정도로 화려했던 전투다.
검붉은 마기에 쉴 새 없이 바닥에 내리꽂히는 얼음 창. 거기에 마지막으로 내리꽂힌 번개까지.
이번 전투만큼 벨츠머츠와 관련된 정보가 이 세상에 뿌려진 적이 있었나. 그동안은 언제나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던 벨츠머츠였다. 물론 이번에도 전력을 다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모든 과정이 찍혔다는 게 중요했다.
그 영상 자료를 제대로 분석한다면,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벨츠머츠에 대해서도 알아낼 수 있을 터다.
그때 도채희의 귓가에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데이터가 몽땅 타 버렸잖아.”
“촬영분이 날아갔다고? 뭐, 뭐야! 내 것도 그렇잖아?”
그 말에 도채희는 곧장 카메라맨들이 있었던 곳으로 향했다. 영상이 모두 날아갔다고?
“이거 누구, 아니, 잠깐 당신은…….”
“데이터가 날아갔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게 말이죠. 마지막 번개 때문에 기기들이 다 먹통이 돼서 혹시나 했는데…….”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던 정보 기록 장치의 데이터가 모두 날아가 버렸단다.
“아까 번개가 일종의 EMP 효과를 낸 것 같은데요.”
하긴 주변에 떠 있던 헬기마저 추락시킬 정도로 강한 전자기력을 발생시킨 번개 아니던가.
아날로그면 멀쩡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날로그 촬영 장치는 이미 멸종한 지 오래니 이곳에서 그 촬영분을 얻을 확률은 제로였다.
“시, 실시간 방송분은 멀쩡하겠죠? 그걸 녹화한 사람이 어딘가에는 있을 테니까!”
도채희의 말에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실시간 방영분은 주변에 모인 마나에 오염되어 화질이 극도로 떨어지는데요.”
“그, 그래요?”
하지만 그게 어딘가 싶었다. 도채희는 팀원들에게 실시간 촬영분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남겼다.
결국 그날의 소득은 그게 전부였다.
현장에 출동했으나 결국 빌런을 놓친 각범 팀. 눈앞에 있는 빌런도 놓치는 각범 팀. 대충 그런 헤드라인을 단 뉴스가 오늘 저녁에 흘러나오겠지.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생각하니 어깨가 무거웠다.
하지만 비난에 축 처져 있을 수는 없다.
“잡아야지.”
도채희는 여기저기에서 뜯어낸 자료들을 가지고 사무실에 처박혔다. 그리고 분석을 시작했다.
도살자를 주로 상대한 건 벨츠머츠의 리더였다.
왜 굳이 세 사람을 데리고 와서 한 명과 주로 싸웠는지는 모르겠다. 박철완은 ‘자존심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렇다기엔 중요한 순간에는 도움을 받은 것 같은데.
어쨌거나 이번에 도살자를 주로 상대한 건 벨츠머츠의 리더, 가면이다. 호주에서 썼던 가명은 ‘이승준’.
그가 이번 전투에서 주로 보여 준 기술은 얼음 창이다.
수십 개의 얼음을 뽑아내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을 모두가 봤다. 물로만은 파괴력이 약하니, 얼음 창을 뽑아내 싸우는 거야 그러려니 했지만, 얼음 창을 뽑아내는 속도가 말이 안 됐다.
속성이 ‘물’이라면 그 물을 얼리고, 다시 창의 형태로 성형하는 시간이 필요할 텐데.
벨츠머츠가 부른 창은 애초부터 얼려진 상태로 등장했다. 도대체 얼마나 속성 친화력을 올려 뒀으면 그렇게 순식간에 변화시킬 수 있는 건지.
그가 움직인 마나의 질과 양으로 봐서 최소 6등급으로 추정, 섣부른 판단이지만 7성급까지도 고려해 보긴 해야 했다.
8성급……은 아니겠지. 8성급이라니. 대한민국에서도 셋밖에 없는, 현역으로 따지자면 둘밖에 없는 그런 괴물들과 동급일 리가.
그리고 현장에 나타났던 두 사람, 이라고 해야 할지 한 사람과 해골 하나라고 해야 할지.
벨츠머츠의 덩치는 호주에서도 본 얼굴이었다. 그때 쓴 가명은 ‘최세진’.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얼굴을 가렸던 긴 머리를 모두 잘라 버렸다는 게 차이점이었다.
그는 이번에 아이들을 안아다 날랐다. 아이들의 부모들이 목격자였다. 그들에게 협조를 구하면 아마 조만간 몽타주를 얻을 수 있을 테지.
도채희는 이 남자가 아마 실험실에서 주먹질로 사람들의 머리를 날려 버렸을 각성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에는 주먹이었지만, 이번에는 검이었다. 저번 길드 습격 사건 때 주범이 이놈인가.
그리고 마지막.
‘오혜성’이라는 가명을 썼던 한서현.
이번 현장에서 한서현의 모습은 거의 잡히지 않았다.
한서현의 재능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 네크로맨서.
현장에서 인질을 구출할 때 보였던 스켈레톤, 그리고 마지막에 도살자의 뒷다리를 물어뜯은 마수까지.
‘한서현이 확실해.’
도채희는 눈을 감았다.
이 중에 마지막에 사람들의 시선을 끈 번개를 쓴 사람은 누굴까.
물 재능을 가지고 있는 리더?
육체적인 능력만 보이고 능력을 사용하지 않은 주먹?
아니면…….
아니, 한서현일 리는 없다.
누가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7성급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 힘을 일찍 썼더라면 훨씬 빨리 도살자를 꺾을 수 있었겠지.
‘힘을 숨겼어.’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부터 도살자를 끝장낼 힘을 가지고서도 일부러 시간을 끈 거라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현장에서 벨츠머츠가 어린아이들을 구출한 것과 무관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벨츠머츠가 시간을 끈 이유는 인질을 제대로 구출할 만한 시간을 얻기 위해서라나.
‘우습지도 않아.’
빌런은 빌런이다.
인질을 구출한 건 분명 고마운 일이지만, 벨츠머츠는 여태까지 수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마였다.
어린애들을 해치지 않았을 뿐. 아니, 사실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았다.
실험실에서 사라졌던 아이들 열 명의 위치가 아직도 오리무중이었기 때문이다.
“개자식들.”
여전히 도채희는 벨츠머츠를 끔찍한 악당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르다, 저놈들과는 달리 좋은 빌런이다’라고 나서는 꼴이 역겹기만 했다.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도 결국 한다는 짓은 도둑질, 살인, 유괴, 납치 같은 범죄였으니까. 밝혀진 것만 이 정돈데 묻혀 있는 여죄는 어느 정도일지.
똑똑.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도채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오세요.”
“이러고 있을 것 같더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것은 잔뜩 초췌해진 얼굴의 박철완이었다. 오늘도 신나게 털리고 왔겠지. 도채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박철완은 소파에 멋대로 주저앉으며 말했다.
“아깝다, 그놈들 싹 다 잡을 수도 있었는데. 안 그래?”
“무슨 수로 잡아요. 헌터 지원 넣은 거 다 윗선에서 튕겼다면서요.”
“그래. 그래도 우리 정부가 있는데 사기업이나 다름없는 길드의 손을 빌리면 위신이 떨어진다나.”
“누가 온다고 하긴 했어요?”
“그 친구, 붉은개 길드의 정호산인가…….”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도채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라면 기억할 줄 알았다. 나도 어딘가 귀에 익은 이름이라 나중에 찾아보고 알았거든. 강이신 사건의 참고인이었지?”
“예. 그리고 전에도 그런 말을 하긴 했어요. 친구 수사 관련해서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돕겠다고요.”
“참, 정의로운 성격이란 말이지. 그러고 보니 그 강이신이라는 놈은…….”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사람이라면 으레 있을 생활 반응도 전혀 없었다.
“이 정도면 그냥 한국을 떴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긴 하네요.”
“그래. 쩝.”
벨츠머츠에 온 신경을 쏟느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도채희의 표정을 읽은 박철완이 재빨리 덧붙였다.
“요새 네 머릿속을 꽉 채울 만큼 사고를 치고 다니는 놈들이 있잖냐.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
“으음.”
“아, 맞아. 윗선에서도 이제 벨츠머츠를 좀 진지하게 생각하기로 한 것 같더라. 그 리더가 복합 재능 보유자일 수도 있으니까.”
“정말 복합 재능일까요?”
“아닐 수도 있지만, 확실히 복합 재능이면 골치가 아프긴 하니까 미리 대비를 해 두자는 거 아니겠냐.”
못해도 6성급으로 쳐야 하는 물 속성의 능력을 가졌는데, 거기에 못해도 7성급으로 추정되는 번개 능력까지.
이게 사실이라면 대한민국이 뒤집힐 정도의 각성자가 등장한 셈이다.
하지만 그게 빌런이라면?
욕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얼굴을 구기고 있는 도채희에게 박철완이 물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비밀로 할 생각이야?”
“네?”
“한서현.”
그 이름에 도채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알고 계셨어요?”
“그래. 웬만하면 네가 스스로 밝히길 바랐는데 어째 영 말이 없어서. 근데 알지? 이제 걔를 숨겨 주는 건 불가능하게 됐다는 거.”
모두가 보는 앞에 등장한 스켈레톤. 아무리 인질을 구하는 행동을 했다고 해도 그 벨츠머츠의 일원이었다.
도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각성자 범죄 전담부서는 공개적으로 ‘한서현’을 수배하기로 했다.
제8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