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48
147화. 공주가 마왕성을 탈출해 용사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 (3)
탁탁-.
새하얀 말과 검은 말이 막힘없이 자리를 뒤바꿨다.
프리츠와 율리아.
싱 가문의 어린 현자들은 조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수의 교환을 이어 나갔다.
주변 모두가 조용히 그들의 체스를 구경하니 적막이 이어졌다.
그때 율리아가 입을 열었다.
“진짜 재수 없어. 동생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어? 이번 일도 나 놀릴 생각으로 신이 나서 참여한 거지?”
그리 말하면서도 그녀의 손은 쉼 없이 말을 옮겼다.
이에 프리츠도 말을 옮기며 답했다.
“아암, 재밌지, 재밌고말고.”
“동생 놀릴 시간 있으면 파랑새 일이나 도와주지?”
“그 정도로 시간이 많은 건 아니고. 그리고 나도 오늘 놀러 온 건 아니다. 공적인 일로 온 거지.”
“이번 퀘스트에서 마왕군 졸개 역할을 맡은 거?”
“졸개라니. 보는 눈이 없네. 이 몸이 고작 그런 역할이나 맡았을 거라고 생각했냐?”
“응, 딱 봐도 마왕군 졸개인데?”
“졸개가 아니라 마왕의 오른팔 같은 역할이다.”
탁탁탁-.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말을 옮기는 둘을 보고 구경꾼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들 남매에게 이것은 일상인지 무덤덤하게 대화를 이어 나갈 뿐이었다.
“뭐, 좋아. 마왕의 오른팔 프리츠 씨? 그래서 이 퀘스트 오빠가 설계한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모를 줄 알아? 5년 차 수료 항목 중에 퀘스트를 직접 기획하는 항목도 있잖아?”
“있기야 하지. 필수 수료 항목은 아니지만.”
“그래서 묻는 거야. 이 공주님 구하기 퀘스트… 오빠가 설계한 거야?”
“글쎄다?”
“아냐, 됐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오빠가 설계했으면 이렇게 허술하지는 않았을 테니, 다른 사람이 하는 거 도와주고 있는 거겠지.”
“하하, 허술하다니. 그 친구가 들었으면 서운해하겠는걸?”
율리아의 예측이 맞았는지 프리츠는 그리 에둘러 표현했다.
탁탁탁-.
“그래서 오빠가 어디까지 도와줬어?”
“야 못난아, 언제부터 우리 집안 사람이 먼저 답안을 구걸했었냐? 문제를 풀고 채점해 달라고 하는 거라면 모를까.”
그건 자신에게 답을 구하지 말고 먼저 네가 푼 답을 제출해 보라는 소리였다.
이에 율리아가 살짝 입술을 삐죽이고는 율리아도 답안을 제출했다.
“내 예상대로라면 전체적인 설계는 친구가 했을 테고, 약간의 세부 사항만 오빠가 조금 다듬어 줬겠지?”
“그래? 내가 어떻게 다듬어 줬을까?”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이는 프리츠.
이에 율리아는 프리츠의 등장과 그가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답했다.
“시련… 뭐, 보나 마나 이상한 설정에 맞춰서 시련을 주는 관문을 만들었겠네. 여기 1차 관문은 머리를 쓰는 사람을 시험하는 곳이고?”
“그런가? 뭐, 그렇다 치고. 그런데 1차면, 그다음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네? 네가 생각하는 다음 관문은 뭔데?”
“뻔한 거 아냐? 당연히 몸 쓰는 거 아니겠어?”
정답을 확인하는 듯한.
혹은 답을 회피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서로에게 질문을 하는 듯한 이상한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몸을 쓰는 시련이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럼 다음 시련의 장을 주관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도 뻔하네. 당신 친구지 누구겠어? 이 이상한 퀘스트를 기획한 사람?”
“내 친구? 누구?”
그리 물으며 흑색의 룩이 빠르게 움직였다.
탁-.
프리츠의 룩이 율리아의 폰을 쓰러뜨렸다.
이를 지그시 바라보던 율리아는 무덤덤한 얼굴로 백색의 나이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흑색의 룩을 잡아 내며 답했다.
“반젤리스 애니스톤.”
탁-.
* * *
“…어쩌지?”
제리가 눈알을 굴리며 그리 물었다.
그 역시도 눈앞에 있는 반젤리스 애니스톤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모계 중심의 가문으로 이름 높은 애니스톤 가(家).
반젤리스는 가주의 둘째 딸로, 장녀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재능과 실력이 출중하다고 알려진 존재였다.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는 단 한 번도 46기의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 반젤리스가 앞을 막아 섰으니 제리가 당황한 것도 당연지사.
반면 테레시아는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여길 통과하고 싶다면 선배와 놀아 줘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이죠?”
그 물음에 반젤리스가 웃으며 답했다.
“간단해. 누군가가 나서 나와 일(一) 합을 겨룬다면, 일 합당 한 명씩 통과시켜 주마.”
“그 일 합을 겨룬 사람은 한 번밖에 도전하지 못하는 겁니까?”
“아니, 얼마든지 재도전할 수 있다. 받아 낼 수 있다면 말이지.”
반젤리스는 여유 있는 미소를 보였다.
그 미소를 보고 테레시아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받아 보겠습니다, 선배의 공격. 안 그래도 한 번… 싸워 보고 싶었거든요.”
자세를 잡은 테레시아의 몸에서 짙은 기세가 피어올랐다.
반젤리스는 후배의 도발적인 기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순간적으로 둘 사이 분위기를 읽은 제리가 후다닥 옆으로 빠지자 반젤리스의 기세도 더욱 부풀어 올랐다.
“이거 우연이네. 나도 우리 후배님이랑 한판 제대로 해 보고 싶었는데. 그 위명이 자자한 윈체스터 가문의 창술이 어떤지 궁금했거든.”
오로지 창술 하나에만 매진해 온 윈체스터 가문.
반면 애니스톤 가문의 창술은 여러 개의 주력 절기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 때문에 창술만 놓고 보자면 애니스톤 가문이 윈체스터 가문에 비해 뒤처진다는 게 세간의 평이었다.
반젤리스는 그런 세상의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애니스톤의 창술이 윈체스터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압도한다고 확신했다.
‘여러 우물을 판 사람이 한 우물만 판 사람보다 깊이 팔 수는 없지만, 얻을 수 있는 물의 양은 훨씬 많은 법이다.’
깊게 판다고 해서 많은 물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물이 나올 깊이까지, 많은 우물을 파야지, 더 많은 물을 얻을 수 있는 법.
‘우리의 창술이 윈체스터보다 깊이에서 뒤질지는 몰라도 …….’
반젤리스의 두 눈에 형형한 빛이 일렁이고.
그녀가 지면을 강하게 박차며 테레시아를 향해 쇄도해 들었다.
‘…강함에서만큼은 절대 뒤지지는 않는다!’
쾅-!
거대한 폭음이 울리고.
순식간에 테레시아의 정면에 도달한 반젤리스.
그녀의 어깨에 반쯤 걸쳐 있던 창이 번개처럼 휘둘러졌다.
후황-.
달려온 속도 그대로.
그리고 강한 근력에 힘입어 반젤리스가 휘두른 창은 어마어마한 바람을 일으키며 테레시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위에서 아래.
정확히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창을 보고 테레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건 창날이 아닌 창대.
물론 창술이 꼭 창날만을 이용하여 공격하라는 법은 없었다.
얼마든지 창대를 활용한 공격이 있었다.
그런데 테레시아는 반젤리스의 창술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창이 마치 거대한 검처럼 느껴진 것.
그 이질적인 느낌을 조금 더 파헤쳐 분석하고 싶었지만, 빠르게 다가오는 공격의 위력이 심상치 않았다.
위기를 느낀 순간, 테레시아의 마나가 거친 물살이 되어 마나 로드를 힘차게 내달렸다.
그리고.
훙-.
반젤리스의 창이 테레시아가 서 있던 공간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타격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테레시아의 신형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고.
곧 그녀는 검은 그림자의 형상이 되어 우측 빈 공간에서 치솟았다.
그 순간 수직으로 내리쳐진 반젤리스의 창은 지면으로부터 1㎝를 남기고 정확히 멈췄다.
파항!
창이 멈춘 지점에서 발생한 강한 충격파.
우직-.
그에 의해 조금 전까지 테레시아가 서 있던 지면이 움푹 꺼졌다.
단순히 충격파만으로 지면의 일부분이 주저앉은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흠…….”
반젤리스는 별다른 고전 없이 손쉽게 자신의 공격권에서 빠져나온 테레시아를 보고 흥미롭게 눈을 반짝였다.
“그게 그 유명한 윈체스터 가문의 탄영인가?”
살짝 감탄한 그녀가 창을 거두며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훌륭하게 일합을 겨뤘으니, 한 사람을 통과시켜 주마. 누가 갈 거냐?”
반젤리스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에 테레시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만약 조금 전의 일격이 반젤리스의 전력이 아니라면.
더 빠르고 더 강해진다면.
뒤따라올 49기 중 반젤리스의 일합을 받아 낼 존재는 없을 것이다.
하여 테레시아가 제리를 향해 말했다.
“내가 남을게.”
“어쩌려고?”
“일합을 견뎌야지 통과할 수 있다면 뒤에 따라올 동기 중 이곳을 통과할 사람은 없어.”
“…그럼?”
“내가 남아서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통과시킬게.”
그건 테레시아가 이번 관문 자체를 책임지겠다는 뜻이었다.
1차 관문에서 율리아가 프리츠와 체스를 두고 다른 사람들을 올려 보내는 것처럼.
테레시아가 확고한 눈빛을 보였다.
“첫 번째 관문에서 여러 사람을 모아 한 번에 올려 보낼 수 있음에도 율리아가 우리를 선발대로 먼저 올려 보낸 건 아마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일지도 몰라.”
확실히 율리아 싱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컸기에 제리를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럴지도.”
“그럼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
“그러니 먼저 가. 나도 다른 애들을 올려 보내고 뒤따라갈 테니까.”
테레시아의 확고한 목소리에 제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흑검병이 터 준 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리가 떠나가고.
둘의 대화를 들은 반젤리스는 홀로 남은 테레시아를 보고 반색했다.
“이거 기쁜걸? 앞으로도 너와 계속 싸울 수 있다는 거잖아?”
“…….”
“너도 느꼈겠지만, 아까 그건 그냥 가벼운 인사였다. 이제, 인사는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 하는데, 너 혼자 괜찮겠어?”
짙어진 반젤리스의 미소를 보고 테레시아의 입꼬리도 살며시 비틀렸다.
“원래 재밌는 건 혼자 즐겨야 하는 법이죠.”
어딘가 모르게 도발적인 테레시아의 미소.
그건 이상할 정도로 유리의 미소와 닮아 있었다.
* * *
2차 관문을 통과하여 홀로 숲길을 달려 나가는 제리의 표정은 조금 이상했다.
어딘가 모르게 조금 복잡하고, 고민이 있어 보이는 얼굴.
하지만 그래도 그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쭉쭉 길을 따라 올라가던 그를 멈춰 세운 건 두 개의 표지판이었다.
“이, 이건……?!”
표지판에 적힌 글을 확인한 제리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흔들렸다.
* * *
제리와 테레시아.
두 명의 선발대가 출발하고 나서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공터에 남은 사람의 수는 꽤 많이 줄어 있었다.
율리아가 흑색 말을 잡아 올려 보낸 것이다.
그에 따라 백색과 흑색의 말이 체스 판의 양옆에 몇 개씩 빠져 있었으니.
흑색 10개.
백색 8개.
잡은 말의 개수에서 율리아에게 뒤지고 있음에도 프리츠는 여유가 있었다.
탁-.
“제법이네. 실력이 많이 늘었잖아?”
그건 체스 실력에 관한 칭찬일지도.
혹은 이번 퀘스트를 율리아가 정확히 읽어 낸 것에 관한 칭찬일 수도 있었다.
프리츠는 흑색을 비숍을 들며 물었다.
“뭐, 그래서 네 말대로 머리를 쓰는 관문과 몸을 쓰는 관문이 있다 치고, 과연 몇 명이나 그 관문을 통과해 마왕성에 도달할 거 같냐?”
탁-.
프리츠는 들었던 비숍을 백색 킹의 사선에 내려놓았다.
체크.
자신의 킹을 노리는 비숍을 보고 율리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 음흉한 것 봐.”
“음흉? 내가? 이 세상에 나처럼 순수한 사람이 어딨다고?”
“뻔뻔하기도 하고. 내가 어디 한두 번 당해? 아무리 허술한 퀘스트라고 해도 오빠가 손댔는데 관문이 고작 두 개일 뿐일까? 분명 하나 더 있겠지?”
“오? 그게 뭘 거 같아?”
“이전 관문이 머리 시험하고, 육신을 시험하는 거였으면… 그다음은 뻔하지.”
율리아가 백색의 킹을 가볍게 들어 올리니.
“마음(心)을 시험하는 관문이겠지?”
탁-.
한 칸 옆으로 이동한 백색의 킹은 손쉽게 비숍의 체크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