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47
146화. 공주가 마왕성을 탈출해 용사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 (2)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검은 인영들.
이에 놀란 49기들이 다급히 대형을 갖췄지만, 이미 그들은 포위당한 뒤였다.
그리고 난데없이 나타난 괴한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49기는 진땀을 흘렸다.
‘흑검병?!’
‘흑검병들이 어째서?’
사방에서 포위망을 구축한 이들은 다름 아닌 흑검병들.
이에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몰라 어리둥절할 때.
테레시아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흑검병을 향한 물음이었지만, 그에 대한 답은 흑검병의 뒤편에서 들려왔다.
“원래 마왕성으로 공주를 구하러 가는 용사에겐 시련이 깃드는 법이잖아?”
저벅저벅-.
작은 발소리와 함께 등장한 목소리의 주인.
5년 차인 46기를 상징하는 하얀색의 견장.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그리고 백발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사내.
어둑한 나무 그늘에서 나타난 귀공자를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다름 아닌 율리아였다.
“…오빠?”
율리아의 중얼거림으로 인해 49기 사이에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율리아의 오빠라고?”
“…프리츠 선배?”
프리츠 싱.
율리아 싱의 친오빠이자, 3년 먼저 요람에 들어온 싱 가문의 직계.
이를 증명하듯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율리아와 같은 은색의 고리가 보였다.
또한, 그는 율리아가 들어오기 전까지 파랑새를 운영하던 주인이었으나.
현재는 동생에게 파랑새를 물려주고 요람의 수료에 전념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프리츠의 등장에 모두가 놀랐지만, 가장 놀란 건 율리아였다.
그녀가 인상을 쓰며 오빠를 노려보았다.
“바쁘다고 얼굴도 안 비치던 인간이 여긴 어쩐 일이시래?”
“아무리 바빠도 우리 못생긴 동생 얼굴 보는 일인데 내가 빠질 수 있나.”
“제 얼굴에 침 뱉기죠. 내 얼굴이나 네 얼굴이나.”
“똑같은 상품이어도 급이 나뉜다는 걸 모르냐? 난 고급, 넌 저급… 아니, 저급도 아깝네. 너 정도면 딱 결함품이지. 그리고 네가 뭐냐? 하늘 같은 오라버니한테.”
“우리 사이 호칭은 12년 전에 정리된 거 아니었나? 야, 너, 이놈, 저놈, 이년, 저년으로?”
“아닌데? 너만 그렇게 정리한 건가 보지. 그리고 놈, 년이 뭐냐? 품위 없게.”
“응, 이거 너한테 배움.”
“응, 난 그런 가르친 적 없음. 네가 알아서 독학함.”
싱 가문 남매의 대화가 점점 길어질수록.
흑검병의 등장과 함께 치솟았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꺼졌다.
좌중의 얼굴이 어색하게 변했다.
‘현가의 사람도… 사람이었구나.’
‘남매간의 동족 혐오는 저 집안에서도 일어나는 거였네.’
똑똑한 집안의 남매라 그런지 서로서로 물어뜯는 공격이 물 흐르듯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다가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깨달은 남매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
“…….”
짧은 침묵.
곧이어 조금 전까지 투닥거리던 율리아의 얼굴에 기품이 서렸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이신데요, 프리츠 씨? 저기 저 흑검병 아저씨들은 왜 달고 오셨고?”
그 질문에 프리츠도 기품 있는 미소로 답했다.
“무릇 용사의 이야기라면 그들을 방해하는 마왕군도 등장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마왕군이 너무 센 거 아니야?”
율리아의 그 말에 49기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포위한 흑검병들을 긴장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흑검병의 숫자는 30여 명.
겨우 49기의 절반도 채 안 되는 인원이었지만, 30명이 아닌 10명으로도 49기 전원을 농락하고도 남으리라.
다시 말해 흑검병 서른 명이 마왕군이라면 용사들은 마왕성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전부 나가떨어질 게 분명했다.
그런 동생의 투덜거림에 프리츠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아아,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내 요구를 들어주면 무사히 여길 벗어나게 해 줄 거니까.”
“뭔데 그 요구가.”
그녀가 질문을 하기 무섭게 흑검병 둘이 움직였다.
척- 척-.
프리츠와 율리아 사이에 하나의 테이블과 의자가 놓이고.
다시 그 위에 낯익은 물건이 깔렸다.
이를 본 율리아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체스 판?’
난데없이 등장한 체스 전용 테이블과 말들.
프리츠는 의자에 유유히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가 검지를 까닥였다.
“내 요구는 간단해. 나와 체스를 두면 된다.”
“그게 끝?”
“물론 아니지. 내게서 폰을 잡아 내면 2명을 통과시켜 주마. 룩, 나이트, 비숍에는 각각 5명씩, 퀸은 20명, 마지막으로 내게서 킹을 잡는다면 인원에 상관없이 모두 올려 보내 주지. 그게 싫으면… 힘으로 뚫고 지나가든가.”
알아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그를 보고 49기는 동요했다.
조금 전 남매끼리 티격태격하여 위상을 깎아 먹기는 했지만, 프리츠는 현가의 사람이다.
일반인이 그와 체스를 두어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그의 말을 잡아 낼 수나 있겠는가.
다시 말해 이건…….
“그냥 대놓고 나랑 두고 싶다고 얘기하지?”
율리아보고 맞은편에 앉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저 여유로운 얼굴… 정말 싫다.’
프리츠 특유의 저 능글맞은 표정.
그게 승리를 확신하는 자신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율리아였기에 짜증이 확 치밀었다.
‘하아…….’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프리츠의 맞은편에 앉으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내 말이 잡혔을 때의 페널티는?”
“어린 동생을 상대하면서 그런 것까지 요구할 정도로 이 오빠가 양심 없지는 않단다? 원한다면 예전처럼 말 몇 개 빼고 시작해 줄까?”
히죽거리는 오빠의 미소에 율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됐어, 필요 없어.”
“이런…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닌 거 같은데? 우리 못난이가 나한테 체스로 이겨 본 적이 있었던가?”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야? 신경 끄시지? 오늘 지고 울지나 마.”
“하하, 우리 못난이 많이 컸네? 그래도 오빠로서 백은 양보해 주마.”
“그러시든가.”
율리아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백색 말들을 쓸어 갔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포진하며 계산했다.
‘킹을 제외한 모든 말들을 잡았을 때 통과시킬 수 있는 사람 총 66명.’
자신을 제외한 인원은 68명.
‘여러 변수를 고려했을 때, 안전하게 마왕을 잡을 수 있는 승률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최소 53명은 있어야 해.’
하지만 문제는 요람의 방해 공작이 이것뿐이냐는 거였다.
이후로도 또 어떤 방해 공작이 벌어질지 몰랐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빠르게 오빠를 이기고 모두와 다 같이 마왕성으로 가는 거야!’
율리아가 의지를 다지는 순간 눈동자의 은환이 빛나고.
이에 맞서듯 프리츠의 은환 역시 빛을 발했다.
그리고.
탁-.
율리아가 백색의 폰을 위로 움직였다.
탁-.
이에 대항하듯 흑색의 폰을 움직인 프리츠.
탁-.
그렇게 한 남매의 체스 경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탁- 탁-.
두 사람의 손이 체스 판 위를 바쁘게 오가며 말을 옮겼고.
그 속도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탁- 탁- 탁-.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는 두 사람이 손을 움직이는 속도가 일반인의 눈으로는 따라가기 힘든 수준까지 올라가 버렸다.
탁탁탁탁-.
빠르게 변화하는 체스 판의 진형.
체스 판을 사이에 두고 어린 두 현자가 벌이는 치열한 수 싸움에 관중들은 압도되어 눈을 떼지 못했다.
‘여, 역시 은환의 현가?!’
‘맙소사… 저게 다 상대의 수를 예상하고 놓고 있다는 거잖아?’
‘저걸 전부 어떻게 계산하는 거지?’
일반적인 사람이 1초에 몇 가지의 수를 예상한다면 둘을 수십, 수백 개의 수를 예측하였다.
치열한 공방은 한참이나 이어졌고.
그 끝에 먼저 말이 잡힌 건 프리츠였다.
탁-.
율리아의 룩이 프리츠의 폰을 쓰러뜨렸다.
이에 프리츠가 웃으며 체스 판에서 손을 떼었다.
“이런, 폰이 잡혔네? 약속대로 두 명을 보내 주지. 누구를 올려 보낼래?”
팔짱을 낀 채 은은한 시선을 보내 오는 프리츠에게 율리아는 빠르게 답했다.
“선발대는 테레시아 윈체스터와 제리 비.”
율리아의 호명에 테레시아는 무덤덤했지만, 제리는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나, 나를?”
선발대는 두 가지의 유형이 있었다.
앞으로 뭐가 나올지 모르니 이를 확인하기 위해 희생양으로 던져지는 선발대.
그리고 따라올 후발대를 위해 모든 장애물을 치워 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선발대.
‘테레시아를 고른 걸 보니 후자를 선택한 거 같은데… 거기에 날 끼워 넣는다고?’
자신의 실력은 49기 중 잘 쳐 줘야 중간 정도.
선발대로 뽑히기에는 실력 미달이었다.
하여 제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하고 있을 때, 율리아가 일어나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
그리고 율리아의 귓속말이 이어질수록 제리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한참 만에 율리아가 귓속말을 끝내며 제리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부탁할게. 넌 할 수 있어!”
“…….”
과연 율리아는 무엇을 이야기한 것일까.
그녀의 응원 아닌 응원에 제리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자, 갈 사람은 얼른 가고. 다시 시작해야지?”
프리츠의 재촉에 율리아는 테레시아와 제리를 한 번 힐끗거리고는 다시 체스 판 앞에 앉았다.
“먼저 가서 기다려. 다른 사람들도 내가 금방 올려 보낼 테니까.”
두 사람을 향해 그리 말한 율리아는 체스 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탁탁탁-.
빠르게 변화하는 체스 판의 진형.
이를 잠시 지켜본 테레시아가 제리를 이끌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가자.”
“그… 그래.”
떠나려는 두 사람의 앞을 막아 선 흑검병이 냉철한 얼굴로 말했다.
“보이는 길만을 따라가라. 괜히 있지도 않은 샛길로 빠지는 엉뚱한 선택을 한다면… 그에 따른 책임은 너희의 몫이다.”
그 섬뜩한 경고에 제리와 테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흑검병들은 길을 터 주었다.
그렇게 떠나온 두 사람은 마왕성을 향해 달려 나갔다.
* * *
테레시아와 제리는 빠르게 길을 따라 달렸다.
타닥- 타닥-.
두 사람의 뜀박질 소리만이 숲길에 울리고.
그렇게 아무런 대화 없는 동행이 한참을 이어졌다.
그러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테레시아였다.
“아까… 율리아가 뭐라고 했어?”
율리아가 자신이 아닌 제리에게만 이야기를 전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참고 참다가 질문을 던진 거였다.
“아… 그거?”
테레시아를 따라 뛰면서 제리는 턱을 쓰다듬었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게 역력한 표정.
그러다가 그는 테레시아에게만큼은 말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게 말이지…….”
하지만 테레시아가 질문한 것도.
그리고 제리가 말을 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린 것도.
조금은 늦고 말았다.
사사사삭-.
조금 널찍한 공터가 나옴과 동시에 일전과 마찬가지로 공중에서 검은 인영이 우수수 떨어져 두 사람을 막아 섰다.
‘또 흑검병!’
일 차 때보다는 조금 적지만 그래도 열댓 명의 흑검병에게 포위된 상황.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길쭉한 창을 어깨에 걸치고 걸어오는 신장 170㎝ 정도의 여인.
어깨의 하얀색 견장이 유달리 돋보이는 그녀는 프리츠 싱만큼이나 유명한 존재였으니.
특히 테레시아는 그녀의 이름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반젤리스 애니스톤.”
명가 애니스톤의 혈족이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창을 다루는 여인.
또한, 46기의 수석.
쿵-.
창으로 땅을 내리찍은 반젤리스가 매서운 눈빛을 보내 왔다.
“프리츠 녀석이 맡은 지(智)의 관문을 통과한 게 너희냐?”
‘너희’라고 말하였지만, 반젤리스의 시선은 오로지 테레시아에게 향해 있었다.
“여기는 체(體) 관문. 이곳을 통과하고 싶다면…….”
척-.
테레시아를 향해 창을 겨눈 반젤리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둘 중 한 사람은 나와 놀아 줘야 할 거다.”
순식간에 피어오르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테레시아는 창을 말아 쥐었다.
* * *
힘의 결정을 보고 두 눈 가득 광기를 품었던 유리.
이를 지켜보았던 괴츠는 유리가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그런 확신이 무색하게 유리는 잠잠했다.
아주 잠시.
그는 10분 정도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 오더니 그냥 벽을 바라보고 누워 버린 것이다.
마치 이제는 관심이 사라졌다는 듯 말이다.
그의 행동에 살짝 의문을 품은 괴츠가 유리의 주변을 알짱거려 보았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자려는 듯.
혹은 정말로 잠든 듯,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에 괴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내가 잘못 본 건가?’
분명 사고를 칠 듯싶었던 그 미친 눈깔은 그저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갔던 일시적인 현상이었던 걸까?
웅크리고 누운 유리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의자에 앉은 마왕을 보았다.
근엄한 분위기를 풍기며 턱을 괴고 있는 마왕.
“…….”
그를 보며 무슨 생각에 빠진 것인지 괴츠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때문에 그는 보지 못했다.
꿈틀꿈틀-.
조용히 웅크리고 누운 유리가 꼬물거리는 모습을 말이다.
살짝살짝.
바들바들.
유리가 괴상한 미동을 보였다.
그러다가.
달칵-.
기괴한 소리와 함께 유리의 등이 바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