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71
270화. 비상 대책 회의 (1)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클라리스는 자신이 이미 죽어도 골백번은 더 죽었으리라 확신했다.
‘뭐… 뭐가 이렇게 살벌해?’
자신을 에워싼 49기를 비롯해 48기, 47기의 선배들.
견장은 다양한 색깔이었지만, 그들의 눈깔은 하나같이 시퍼런 색이었다.
선배들이 뿌려 대는 차가운 살기에 덜덜 떨며, 클라리스가 힘겹게 질문을 던졌다.
“저, 저한테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리 묻기는 했지만, 그는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 꼴로 붙잡혀 왔는지 말이다.
‘그거 때문이겠구나!’
클라리스도 눈이 있고 귀가 있었다.
그러니 지난 20여 일 가까이 요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평지풍파가 일어났는지 왜 모르겠는가.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기어코 그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자신의 불행을 남에게 덮어씌운, 그 대가를 치르는 날이.
그리고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음일까?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선배들이 더욱 농도 짙은 살기를 흘렸다.
“하?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십니까아아?”
“이 새끼가 지금 뚫린 입이라고 그냥 되는 대로 막 지껄인다 이거지?”
“정녕 네 죄를 모르겠냐?”
저벅-.
금방이라도 목을 조를 기세로 바짝 다가온 선배들을 보고 새파랗게 질려 버린 클라리스가 다급히 소리쳤다.
“지, 지, 진짜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대체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한 그 외침에도 선배들은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 눈깔이 회까닥 돌아갔을 뿐.
“몰라?”
“모른다고?”
“모르면…….”
“맞아야지!”
“뭐 해? 밟아!”
제리가 클라리스의 가슴을 발로 차 넘어뜨렸고.
퍽-!
“으어어?!”
의자째 나자빠진 클라리스에게 십여 개의 발이 내리꽂혔다.
쿵- 퍽-!
떡- 쿵-!
“시작이 너였다며?! 네가 그 새끼를 우리한테 보냈다며!”
“감히 모른 척을 해? 이미 파랑새에서 조사 싹 끝냈다 이 새끼야!”
“이 미친 새끼가 감히 우리한테 똥물을 끼얹어?!”
“말년에 이게 뭔 개고생이냐고!”
잔뜩 성난 이들의 발길질에 아무런 저항도 못 해 보고 밟히던 클라리스가 절규를 내질렀다.
“그마아아안!”
단말마의 비명과도 같은 절규에 발길질이 잠시 멈추자, 클라리스가 울분 가득한 눈으로 선배들을 노려보았다.
“당신들이… 당신들이 뭘 알아!”
“이게 미쳤…….”
“당신들은 한 달도 안 됐잖아… 고작 20일 정도였잖아!”
“…….”
“하지만 우린… 우리 50기는 그 개 같은 놈한테…… 1년 넘게 시달렸다고!”
“……?!”
슬픔과 분노, 애절함과 비통함이 가득한 외침에 선배들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걸 놓치지 않고 본 클라리스가 이번에는 울 거 같은 눈망울로 나직이 읊조렸다.
“그리고 우린… 앞으로 그 지랄 맞은 새끼랑… 3년 4개월 하고도 6일을 더 보내야 한단 말입니다…….”
“…….”
“저희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예?”
클라리스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겪은 걸 1년 넘게 겪은 것도 모자라, 유리가 수료할 때까지 시달릴 50기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일까.
선배들은 잠시 침묵했다.
이에 클라리스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됐다!’
유리의 굴림과 갈굼에 버티길 어언 1년 7개월.
그동안 주먹질, 칼질 솜씨보다 더 늘어난 건 화려한 미사여구의 욕설과 연기력이었다.
꾀병, 죽은 척, 아픈 척, 기절한 척으로 시작해.
온갖 상황에 대처하며 실전으로 단련된 연기력!
50기라면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는 이 기술이라면 선배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
클라리스는 그리 여겼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건 바로 유리의 폭격에 집을 잃고 길거리로 나앉게 된 이들의 분노가 생각보다 크다는 거였다.
남의 불행을 신경 쓸 여유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사그라지지 않은 흉흉한 살기에 당황한 클라리스가 또다시 소리쳤다.
“자, 잠깐! 아니! 난리를 친 건 유리 새끼인데 왜 저한테 이러는 겁니까!”
“…너 같으면 그 새끼한테 따질 수 있겠냐?”
“…아뇨.”
“답변 됐지? 다들 뭐 해? 다시 밟아!”
“으, 으아니! 꾸, 꾸엒! 자, 자, 잘못… 꿱! 혀, 혀… 씹었……!”
다시금 신나게 먼지가 일어나며 돼지 멱 따는 소리가 한동안 들리고.
“꾸에에게!”
미쳐 날뛰는 그들을 멈춘 건 한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만들 하고 오세요.”
잔잔한 여성의 음성에 클라리스를 밟던 이들이 동작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 뒤로 하얗게 게거품을 문 클라리스가 보였으나, 이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기절한 클라리스를 뒤로하고 걸어간 이들이 도착한 곳은 커다란 원탁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몇 명이 자리해 있었으니.
“어서 앉으세요.”
클라리스를 밟던 이들을 불러들인 여인.
율리아 싱은 모두가 자리에 앉은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이런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장소를 협찬해 주신 원주회와 원주회주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 말하는 율리아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한껏 굳은 얼굴의 안드레스 체이슈가 있었다.
그에게 짧게 목례를 한 율리아가 이번에는 원탁의 구성원들을 슥 훑어보았다.
49기부터 47기까지.
50기와 51기를 제외하고, 기수별로 각각 5명씩 뽑아 모은 대표들.
그들을 불러 모은 건 율리아였으며, 이번 소집의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비상 대책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바로 유리 홀랜드와 관련된 현 상황을 타개할 대책을 논하기 위함이었다.
율리아의 회의 선포에 원탁에 모인 이들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니.
그들의 귓속으로 낮게 가라앉은 율리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여기 모인 여러분 모두가 이번 사태의 피해자시니 딱히 상황에 관해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아! 안드레스 회주님은 어제 요람에 들어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찌, 상황 설명이 필요할까요?”
율리아의 물음에 안드레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필요 없다.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니까.”
‘수료 임무’를 완료하고 전날 요람에 도착한 안드레스.
별생각 없이 기숙사로 향했던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게 어찌 된 거냐?!]안드레스가 임무를 위해 밖에 나갔던 시간은 2달 남짓.
그간 이런저런 고생을 하다 돌아와 편히 쉴 생각이었던 그를 반겨 준 건 폐허나 다름없는 기숙사와…….
[으어어…….] [이건… 이건 아니야…….] [추, 추워…….]패잔병과 다름없는 몰골을 한 동기들이었다.
이후 그들을 통해 그간 있었던 일들을 알게 되었던 안드레스.
그가 어이없다는 듯 조금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고작 망종 하나가 날뛰는 걸 어쩌지 못해서 요람이 이 꼴이 났다라…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대책 회의까지 한다?”
안드레스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옅은 웃음기에 원탁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마치 너희는 고작 망종 하나가 날뛰는 걸 막지도 못하고 차례로 털렸냐는 듯한 비웃음.
이에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괴츠가 피식거렸다.
“고작 망종 하나가 아닙니다만?”
“……?”
“어어어엄처어엉 쎈 미친 망종 하나입니다만?”
안드레스가 어이없다는 듯 괴츠를 바라보았지만, 그를 제외한 대다수는 괴츠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안드레스의 옆에 앉은 수잔이 가장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분위기가 괴츠의 이야기에 동조하는 쪽으로 흐르자 안드레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걸 그리 포장하면 수치심이 덜어지기라도 하는 거냐?”
“하하, 덜어 낼 수치심도 없습니다. 털려도 아주 제대로 털려 버려서.”
“자랑이군.”
“자랑은 아니지만, 숨길 거리도 아니죠. 그리고…….”
실실 웃는 괴츠의 눈빛이 한순간 매서워졌다.
“선배가 있었다고 해도 딱히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아! 아닌가?”
“……?”
“선배는 제가 털린 것보다 더 심하게 털렸을 겁니다. 아주 탈탈탈.”
괴츠의 말속에 숨은 뜻은 단순했다.
너는 뭐 특별한 줄 아냐?
나보다 약하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괴츠의 눈웃음 속에 그런 뜻이 담겼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에 안드레스의 눈빛이 굳어지는 건 당연지사.
“네놈… 상당히 건방져졌군.”
원래 괴츠는 이런 존재가 아니었다.
여자가 아니면 큰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무슨 일이든 대충대충, 유들유들 넘어갔었다.
선배를 향해 이토록 날 선 대꾸를 하는 건 지금까지의 괴츠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 안드레스의 지적에 괴츠가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배운 게 있는데… 뭐, 정확히 말하자면 잊고 있던 걸 다시 떠올렸다는 게 옳겠군요. 뭔지 아십니까?”
안드레스는 답하지 않았지만, 괴츠도 답을 들을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 요람에서 통용되는 단 하나의 진리는 강한 ‘힘’이며…….”
안드레스가 노려보자 괴츠도 지지 않고 웃음기를 머금고 안드레스는 바라보았다.
“그 진리 앞에서는 선배고 뭐고 간에 공평하게 대가리가 깨질 수 있으니, 알아서 조심하자.”
괴츠의 말에 원탁에 앉은 이들이 살짝 움찔거렸다.
현재 요람을 뒤집어엎으며 저 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이의 환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괴츠와 안드레스가 눈싸움하고 있을 때.
똑똑-.
율리아가 원탁을 두드리며 이목을 끌었다.
“제가 우리끼리 싸우자고 여러분을 불러 모은 건 아닙니다만? 싸울 기력이 있으면 대책이나 생각해 보시죠, 선배님들?”
그녀의 힐난에 괴츠와 안드레스가 눈싸움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이에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지자 율리아가 다시금 회의를 진행했다.
“그럼 이번 사태를 진정시킬 만한 방안이 있으신 분은 주저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
하지만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는 이는 없었다.
다들 입을 꾸욱 다물고 있을 때.
살짝 손을 든 이가 있었으니.
“저기…….”
그는 다름 아닌 누구보다 열심히 클라리스를 밟았던 제리였다.
그가 자신에게 몰린 시선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리 홀랜드가 원주회 소속인 거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원주회에서 그 녀석을 제어하지는 못하는 겁니까?”
그런 제리의 지적에 원주회 소속의 몇몇이 표정이 굳어졌다.
반면 다른 이들은 눈을 빛냈다.
“마, 맞네? 그 녀석 원주회 소속이랬지?!”
“그 녀석이 원주회 회원이면 회주님이 고삐를 걸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요, 만약 원주회 차원에서 불이익을 준다고 하면……!”
좌중의 뜨거운 눈길이 자신에게 쏟아지자 안드레스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그것과 관련해서 유리 홀랜드를 만나 보긴 했는데…….”
“벌써 말입니까? 그래서… 어, 어떻게 됐습니까?”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군.”
권터 라이더를 견제하기 위해 원주회에 들어간 유리.
지금껏 권터 라이더가 나타나지 않은 탓에 원주회는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해 왔었다.
또한, 그가 원주회에 받은 혜택이라고는 처음 입회할 때 받은 특급 비약이 전부.
그러니 이제 와서 혜택을 가지고 유리에게 불이익을 주니 마니 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그가 차라리 명가의 자손이었다면, 알아서 원주회의 영향력을 두려워했을 테지만…….’
원주회의 영향력.
즉, 명가의 힘을 두려워했다면 애당초 유리가 그리 날뛸 리도 없었으리라.
그러니 그에게 원주회의 압박이 먹혀들 리 없었다.
안드레스에게 그런 사정을 들은 누군가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강제로 추방한다는 걸 가지고 협박하면 안 됩니까?”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딱히 원주회에 아쉬운 게 없으니 강제 추방을 가지고 협박한들 먹히지도 않을 거다. 그리고… 애초에 원주회주에게 회원을 강제로 추방할 권리는 없다. 회원 스스로 탈퇴를 원한다면 모를까.”
“…….”
마지막 희망이었던 원주회마저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다는 사실에 좌중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안드레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하다가는 원주회의 평판이 엉망이 되겠군.’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다른 기수들 사이에서도 유리 홀랜드가 원주회 소속이란 걸 가지고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분탕질을 쳐 대는 녀석이 원주회 소속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원주회의 평판이 깎여 나가리라.
아니, 정확히는 고작 회원 하나도 어찌 못하는 허수아비 회주라며 자신이 비난받을 것이다.
설사, 이 일이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모두가 알아도,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게라도 욕할 존재가 필요할 테니까.
자신을 바라보는 좌중의 실망스러운 눈빛을 보고 안드레스는 그리 생각했다.
‘쯧, 이렇게 되면 그놈이 권터 라이더랑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권터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불러들인 놈에게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게 된다니.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그놈을 어떻게 해서든 내보내는 게 맞다는 건데…….’
안드레스가 복잡한 고민으로 입을 다문 사이, 원탁에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이에 참다못한 수잔이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이쯤 하면 되지 않았나? 그래서 네 생각은 뭔데? 너라면 분명 현 상황을 타개할 방안이 있으니 우리를 불러 모았을 거 같은데?”
수잔의 재촉에 모두가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들도 알고 있었다.
말이 비상 대책 회의이지, 사실상 이 자리는 율리아의 의견을 듣는 자리일 것이란 걸.
“흐음, 뭐…….”
자신에게 쏟아지는 묘한 기대감 섞인 시선에 율리아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생각한 게 없지는 않죠.”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원탁의 분위기가 크게 술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