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76
275화. 유리 vs 반(反) 유리 연합 (3)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그 속에서 안드레스는 고심했다.
‘소원이라…….’
친구 혹은 지인, 그도 아니면 연인끼리 가볍게 내기를 즐기면서 자주 하는 말이기는 했다.
내기에서 이기면 상대방의 소원 들어주기 같은… 장난스러운 조건.
하지만 그걸 입에 담은 사람이 저 유리 홀랜드라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쉽사리 승낙할 수 없는 거였다.
결국 혼자 결정을 내리지 못한 안드레스가 뒤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
도움을 구하는 듯한 안드레스의 눈빛에 율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다른 조건으로는 안 되겠어?”
“흠, 글쎄? 지금은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일단 그쪽 의견은 잘 알겠어. 내기의 조건을 우리 쪽이 훨씬 무겁게 올려놓았다는 것도 동의하고.”
“그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로 합의 볼까?”
“그건 안 돼.”
“왜?”
“소원이라는 단어 속에 담긴 범주가 너무 넓어. 그 대상조차 불확실하고.”
“당연히 대상은 너희들 전부.”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니니? 우리 수백 명한테 한 명, 한 명 소원을 다 따로 말하게? 내기 한 번에 소원 수백 개를 공짜로 먹겠다는 심보네?”
“쯧, 하여간 눈치는… 아까 빨강 대가리 나왔을 때 후딱 대충 넘겼어야 했는데.”
입술을 삐죽 내민 유리의 투덜거림에 ‘아까 빨강 대가리’인 안드레스가 살짝 살기를 내비쳤다.
그사이 율리아는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하아… 좋아, 이렇게 해.”
“말해 봐.”
“소원 들어주기… 조건으로 인정할게.”
“오!”
“대신 네가 소원으로 말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흠……?”
“그리고 소원의 대상은 우리 전부이며, 우리 중 80% 이상이 들어줄 수 있는 것이어야지 소원으로 인정하겠어.”
율리아의 말에 유리의 눈매가 게슴츠레 변했다.
“…옘병, 까다롭게도 구네.”
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 데 반해 율리아의 뒤편에 있는 이들의 얼굴은 도리어 환히 변했다.
‘저 정도 조건이라면… 괜찮네!’
‘단 한 번의 기회로 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뜻이잖아?’
예를 들어 유리가 ‘모두 나에게 1포인트씩 내놔!’라는 소원을 빈다면 소원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겠지만.
나에게 1만 포인트씩 가져오라는 소원을 말한다면 수중에 1만 포인트가 없는 이들이 20%만 넘어도 소원은 이뤄지지 않는 거였다.
이른바 딱 한 번뿐인 조건부 소원.
‘역시 율리아 싱!’
‘과연 현가!’
모두가 율리아의 역제안을 마음에 들어 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흠…….”
유리가 살짝 고민하는 듯싶자 율리아가 눈을 빛냈다.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아마 이 정도면 여기 있는 모두가 동의할 거야.”
그러면서 율리아는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안드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난 동의하겠다.”
그리고 그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동의한다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는 들불처럼 군중으로 퍼져 나갔으니.
“우리도 동의한다! 내기를 받아들여라, 유리 홀랜드!”
“우린 동의한다!”
“내기를 받아들여라!”
“한판 붙자!”
“한판 붙자!”
“한판 붙자!”
곧 군중심리에 휩쓸린 이들이 ‘한판 붙자!’를 동시에 연호하며 유리를 자극했다.
“한판 붙자!”
“한판 붙자!”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
이를 정면에서 마주한 유리는…….
“재밌네.”
거만하게 웃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는 곧 자신 앞에 선 대중을 향해 선언했다.
“그래, 제대로 한판 붙어 보자.”
우오오오-!
승낙이 떨어지며 군중의 괴성을 내지를 때.
“좋아, 그럼… 바로 시작할까?”
살기를 폴폴 풍기는 유리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한 발 앞으로 내딛자, 괴성은 씻은 듯 사라졌다.
이에 율리아가 다급히 손을 들었다.
“잠깐!”
“뭐야, 왜? 한판 붙자며?”
“오늘 말고!”
“그럼 내일?”
“아니, 날짜는 8월 3일, 장소는 나중에 알려 줄게. 그리고 모처럼 제대로 붙는 건데… 시시해서는 안 되잖아?”
“호오?”
율리아의 도발적인 눈빛에 유리도 살기를 가라앉히고 눈을 빛냈다.
“그럼?”
“내가 이번 싸움의 새로운 방식을 생각해 봤거든, 들어 볼래?”
“해 봐.”
유리의 승낙에 율리아가 자신이 구상해 온 내용을 마나를 담아 설명했다.
유리뿐만 아니라 그녀의 뒤에 있는 이들까지 전부 들을 수 있게끔 말이다.
차분한 목소리가 또박또박 듣기 좋은 발성으로 대중의 머릿속에 담기고.
“…그렇게 해서 승부는 단판으로 끝내자고.”
율리아가 마침내 설명을 끝냈다.
이에 그녀의 뒤편에 있는 이들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유리는 턱을 쓸었다.
“이야, 거…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닌가?”
조금 전 율리아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유리.
이에 율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거봐, 양심 없는 거 맞잖아?”
“다 너의 업보지.”
“쯧.”
유리는 어이없는 심정을 담아 혀를 찼다.
‘이런 구상을 짜 올 줄이야.’
율리아가 제안한 싸움 방식.
그건 유리가 생각해도 제법 재밌는 ‘놀이’였다.
문제는 자신이 그 놀이에서 이길 수 있냐 없냐일 뿐.
‘어디 보자…….’
머릿속에서 열심히 자신의 승률을 계산하며 유리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며 윤곽이 나타났다.
‘불리하긴 하지만… 질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특히 능력 있는 조력자가 몇 명만 있다면 그 승률은 더욱 커질 터.
그리 계산을 끝낸 그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자!”
우오오오-!
드디어 성사된 정면 대결에 다시금 수백 명이 광란의 함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속에 섞여 똑같이 만세를 부르고 있는 뽀삐와 무치를 보고 유리는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저것들은 글렀네.’
군중심리가 무섭다더니.
무식한 근육 돼지 두 마리는 이미 저들에 완전히 동화된 모양.
이에 유리가 혀를 차고 있을 때.
슥-.
그의 옆으로 한 그림자가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코끝을 스치는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에 유리가 눈을 끔뻑인 사이.
저벅-.
테레시아가 율리아의 옆에 섰다.
그녀는 유리를 단호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유리, 난 이번만큼은 이쪽 편이야.”
당연히 유리 쪽 진형일 줄 알았던 테레시아의 갑작스러운 배신.
이에 반(反) 유리 연합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상황을 깨닫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오오-!
테레시아 윈체스터!
우리 편!
이곳에서 테레시아의 실력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런 강한 전력이 적을 떠나 아군에 합류했으니 어깨가 들썩이는 것도 당연했다.
한편 등 뒤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에 율리아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너, 진짜 왜 이쪽으로 온 거야?”
그녀 역시도 테레시아의 변심은 예상 못 한 모양이었다.
“있어, 그런 게.”
어물쩍 율리아의 질문을 넘긴 테레시아.
그녀의 변심은 개인적인 사유였다.
‘이건… 기회야.’
테레시아의 눈이 빛났다.
‘이쪽이 이기면 유리가 원주회에서 탈퇴하게 된다는 거지?’
그리고 그의 탈퇴는 곧 자신의 탈퇴로도 이어질 터.
테레시아가 노리는 건 바로 그거 하나였다.
‘미안, 유리. 난 네가 원주회를 탈퇴해 줬으면 좋겠어.’
어차피 이 내기에서 유리가 진다고 해도 그의 페널티는 기껏해야 ‘다른 연차 괴롭히기 금지’와 ‘일찍 잠자리에 들기’ 정도이지 않은가.
이에 테레시아는 한결 부담감 없이 유리가 아닌 반대편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테레시아의 변심을 바로 코앞에서 목격한 유리.
‘어라? 잠깐?’
그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근육 돼지 둘이랑 창잽이가 절로 가 버렸으니…….’
현재 남은 자신의 조력자는 도련님이랑 푼수뿐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게 그의 생각일 뿐이라는 거였다.
유리가 뒤로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군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야, 이 자식 어디 갔냐?”
유리의 물음에 조용히 턱짓하는 아린.
그녀의 턱이 가리킨 곳을 보니…….
“그래서, 야유는 또 언제 하는 거지?”
대체 언제 자리를 옮긴 것인지, 군터가 군중들 틈에 파묻혀 무언가 기대 서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유리가 눈을 끔뻑이는 사이, 아린이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안 내면 진 거, 가위, 바위, 보!”
난데없이 가위, 바위, 보를 걸어온 아린.
살짝 정신이 나가 있던 유리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내밀었고.
“아? 내가 이겼네?”
보자기를 낸 아린이 배시시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아쉽다, 네가 이겼으면 네 편 들어주려고 했는데.”
“…….”
“그리고 솔직히… 이번에는 저쪽이 더 재밌을 거 같아! 헤헤.”
그 말을 끝으로 아린은 총총거리며 뛰어가 버렸다.
“이예, 우오오오!”
그러고는 무치와 뽀삐 옆에 쪼르르 달라붙어 똑같이 양손을 치켜들며 괴성을 내지르는 게 아닌가.
“…….”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본 유리가 잠시 자신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휑하니 텅 빈 공간.
이에 그는 볼을 긁적이며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으음…….”
…이러면 계산 다시 해야겠는데?
* * *
8월 3일.
금발의 까까머리, 권터는 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3시부터 시작이라고 했던가.’
중천을 살짝 넘어간 태양.
이는 곧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뜻했다.
“유리 홀랜드…….”
그 이름을 읊조린 순간 권터의 뇌리에 지난 51기의 백보 의식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아득바득 앞으로 걸어 나가는 유리 홀랜드.
그런 그의 육신에 떠오른 선명한 황금빛 선.
분명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흑혈’임을.
아니, 정확히는 그가 자신에게서 도둑질한 흑혈임을 말이다.
‘네놈이 어떻게 그걸 훔쳐 간 것인지는 모른다.’
또한, 어떻게 그것을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건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유리 홀랜드, 그의 재능이 자신을 뛰어넘음을 말이다.
‘그가 흑혈을 본 건 두 번뿐.’
작년 1~3년 차 연합 퀘스트와 무룡대전.
고작 그것만으로 유리 홀랜드는 라이더 가문의 비기인 흑혈을 모방해 냈다.
비록 온전한 흑혈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러한 천고의 재능을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놈을 꺾을 수 있다!’
홀로 수련하며 수백, 수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자신은 도전을 받는 입장이 아니다.
도전을 해야만 한다.
바로 그 유리 홀랜드에게!
‘나를 뛰어넘은 이를 꺾고… 다시 그 위에 서겠다!’
그가 자신을 보고 흑혈을 도둑질했듯.
자신 역시 그를 보고, 그의 것을 훔쳐 오리라.
그리 다짐하며 권터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 * *
“얼추 시간 됐네.”
시간을 확인한 유리는 시계를 다시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피식거렸다.
“그렇게 싫은 내색을 내더니만, 결국 하는 짓은 자기 오빠랑 똑같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율리아를 향한 말이었다.
“장소를 골라도 여길 또 골라 오냐.”
그러면서 주변을 슥- 둘러보는 유리.
그의 두 눈에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 담겼다.
바로 1년 전쯤.
테레시아를 도와 함께했던 49기의 퀘스트.
‘공주 구하기’를 진행했던 바로 그 장소였기 때문이다.
당시 그 퀘스트를 설계했던 건 반젤리스 애니스톤이라 했다.
하지만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반젤리스를 도와 퀘스트를 전부 뜯어고친 게 바로 율리아의 친오빠인 프리츠 싱이란 걸 말이다.
‘재밌네.’
작년 자신의 친오빠가 만든 퀘스트 구역을 재활용하는 여동생이라니.
맨날 티격태격하면서도 제법 우애 좋은 남매지 않은가.
‘그리고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이름 짓는 감각도 비슷한 거 같고.’
실실 웃으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유리.
“어디 슬슬 가 볼까. 공주님 납치하러?”
파측-.
곧 그의 신형이 뇌전에 휩싸여 사라졌고.
그렇게 유리 대(對) 타도 유리 연합의 단판 정면 승부.
이른바 ‘공주님 납치하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