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07
306화. 흑과 백 (8)
살면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도 이렇게나 호의적인 시선을 받아 본 게 처음인 유리.
“음…….”
그는 잠시 볼을 긁적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유리의 걸음걸이에 좌중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가 나아가는 방향에 자리한 사람들이 좌우로 벌어지며 길을 텄다.
“…….”
걸음을 옮기는 내내 끈덕지게 따라붙는 시선에 유리가 결국 와락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아, 옘병! 고마우면 고맙다고 와서 말하면 되지, 뭔 쫄보처럼 눈치만 보고 있냐!”
그의 역정에 고마움은 씻은 듯 사라지고 수군거림이 퍼져 나갔다.
“젠장, 분명 고맙긴 한데…….”
“…난 그냥 나중에 알아서 보상해 주련다. 저 새끼한테 차마 고맙단 말은 못 하겠다.”
“목숨 한 번 구해 준 거로 퉁치기엔… 그간 내가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단 말이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볼멘소리에 유리는 대번에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야 자신에게 익숙한 분위기이지 않은가.
“흐흥~.”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편안한 얼굴로 걸음을 옮긴 유리.
그는 한쪽에 모인 일행에게로 향했다.
다가오는 그를 발견하고 율리아가 알은척을 해 왔다.
“왔어?”
“모두 몇 명이지?”
두서없는 질문에도 율리아는 고민하는 내색도 없이 답했다.
“319명.”
그건 유리가 구해 온 이들의 수였다.
그리고 이번 죄의 미궁 퀘스트에 참여한 기수는 400여 명.
다시 말해 족히 100명이 넘게 인원이 빈다는 뜻이었다.
죄수들에게 당했거나.
백검병에게 당했거나.
어쩌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이들.
“다 돌아본 거야?”
그런 율리아의 질문에 유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얼추? 시간상 완벽하게 다 돌아본 건 아니지만, 1층에 돌아다니는 흰둥이는 전부 처리했으니… 살아 있는 녀석은 알아서 살아남겠지.”
유리는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제 더는 미궁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자신은 할 만큼 했다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누구도 이에 반박할 수 없었다.
유리는 정말로 할 만큼… 아니, 그 이상을 해 주었으니까.
“그나저나, 입은 열었어?”
그리 질문을 던지며 한쪽을 향한 유리의 시선.
그곳에는 처참한 몰골인 두 사람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닌 듯싶었다.
그의 질문에 율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지독한 놈들이야.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입을 안 열어.”
그리 답하는 율리아의 얼굴에 살짝 초조함이 깃들었다.
둘 중 한 사람이 죽을 정도로 모질게 심문했음에도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유리가 백검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피투성이가 된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앉은 백검병.
그 앞에선 유리에게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니들 목적이 뭐냐?”
“…….”
“대체 이 밑바닥에 뭐가 있기에 그렇게 기를 쓰고 처내려온 건데?”
“…….”
돌아온 건 미약한 숨소리뿐이었지만, 유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질문을 이어 갔다.
“뭐, 좋아. 목적이 뭔지는 대답안 해도 돼. 대신 다른 거는 꼭 좀 알려 줘야겠는데?”
유리가 두 명의 백검병을 생포하면서까지 알아내기를 원했던 정보.
그중 하나는 백검병들이 죄의 미궁에 들어온 진짜 목적이었다.
과연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그걸 확인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리고 또 하나.
반드시 알아내야 할 또 다른 정보.
“니들, 대체 여기서 어떻게 나가려고 했냐?”
그건 바로 백검병들이 죄의 미궁에서 탈출하려는 방법이었다.
유리의 시선이 공동의 천장에 닿았다.
‘이 미궁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저기뿐이다.’
들어올 때 이용한 미끄럼틀이 올라간 상태로 굳게 닫힌 천장의 출구.
저 문이 다시 열리고 계단이 내려와야지만 이 미궁에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는 백검병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사항이었다.
‘이 새끼들도 분명 미끄럼틀을 이용해서 미궁에 침입했을 거다. 그럼에도 미끄럼틀을 회수했다는 건…….’
유리가 검을 백검병의 목에 바짝 가져다 대며 물었다.
“니들, 밖에 조력자 있지?”
“…….”
“여기 일이 잘 풀리면 그 조력자가 출구를 열어 주기로 했을 테고?”
“…….”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 조력자에게 일이 끝났다는 신호를 줘야 할 텐데?”
미리 외부로 나가는 출구를 열어 뒀다가, 혹시라도 미궁에서 기수가 도망치는 일이 발생한다면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될 터.
그렇다면 출구를 닫아 두고 신호를 줄 때만 여는 것이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말해, 외부의 조력자에게 주기로 한 탈출 신호가 무엇인지.”
유리는 검을 백검병에 목에 바짝 붙였다.
그 탓에 피가 흘렀음에도 백검병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율리아와 테레시아를 비롯해 심문에 참여했던 몇몇 기수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유리가 조금 전 물어본 것들.
그건 이미 그들이 수도 없이 던진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소용없다. 절대 입을 열지 않을 생각인 거 같으니까.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할 바에는 차라리…….”
유리에게 구함을 받고 공동에 합류해, 심문에까지 참여했던 안드레스.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듯한 그의 눈에 살광이 흘렀다.
그러던 바로 그때.
“흐흐흐.”
고개 숙인 백검병에게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에 심기가 불편해진 안드레스가 이를 악물었다.
“이 새끼가!”
철컥-!
검을 뽑은 안드레스가 백검병의 목에 날을 가져다 댔다.
반면 유리는 오히려 검을 거두며 질문을 던졌다.
“왜 웃냐?”
“크흐흐.”
또다시 작은 웃음소리를 낸 백검병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유리를 바라보았다.
피에 젖은 앞머리 너머,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유리를 직시했다.
“알고… 싶더냐?”
오랜만에 입을 열어서인지 푹 잠겨 탁해진 목소리가 유리의 귀로 흘러들었다.
한편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던 백검병이 입을 열자 좌중의 관심이 집중됐다.
“말해. 약속된 신호가 뭐지.”
유리의 명령에 백검병의 입꼬리가 살짝 뒤틀렸고.
서걱-.
그가 스스로 안드레스의 검에 목을 그었다.
“헛?!”
당황한 안드레스가 검을 회수해 보았지만, 이미 백검병은 살아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은 뒤였다.
그륵-.
핏물을 게워 내며 백검병이 유리를 향해 미소 지었다.
“진… 혼…….”
털썩-.
그 짧은 한마디를 유언처럼 남긴 그는 이내 앞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지면으로 번져 나가는 핏물을 보며 유리는 작게 읊조렸다.
“진혼(鎭魂)이라…….”
유리의 미간이 살짝 모이며 굳어졌다.
그 옆에 선 테레시아도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으니.
“무슨 뜻일까? 진혼이라니?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어?”
그리 질문을 던진 테레시아는 되돌아오는 답이 없자 유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함께 그녀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으니.
“…유리?”
테레시아의 시야.
그곳에는 그녀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은 유리가 담겨 있었다.
고장이라도 난 듯, 한 번도 깜빡이지 않는 눈꺼풀.
툭 치면 그대로 금이 갈 듯 딱딱하게 굳은 표정.
파리한 안색과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식은땀까지.
지난 2년여 동안 함께하며 유리가 이토록 긴장한 모습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사실에 놀란 테레시아는 그가 뚫어져라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에 대체 뭐가 있기에?’
유리가 응시하는 곳은 수많은 동혈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테레시아는 도무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어?’
동혈의 입구, 마치 작은 점처럼 보이던 희끗한 그림자가 서서히 그 크기를 키워 나갔다.
이에 테레시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누군가 오고 있다!’
느리지도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유리가 바라보는 동혈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흰옷을 걸친 어느 한 노인이 입구를 빠져나와 공동에 발을 들인 순간.
쿠그그그그그긍-!
미궁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쿠그그그그그긍-!
밤늦은 시각, 미궁 깊은 곳에서 시작된 흔들림.
미궁이 자리한 중앙 섬은 요람의 중심축이었기에 그 진동이 삽시간에 요람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는 많은 이의 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뭐, 뭐야?”
“지, 지진?!”
난데없는 상황에 놀라 눈을 뜬 사람들.
모두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이들도 있었으니.
“미궁 쪽이다. 움직여라.”
단순히 진동만으로 그 방향을 감지한 듀란과.
“즉시 이동한다. 모두 따라와!”
그런 듀란의 명령에 즉시 인원을 꾸려 행동에 나선 엠마까지.
한밤중에 일어난 이변임에도 흑검병들의 조치는 신속했다.
한편, 그 시각 미궁의 관리실에서는…….
“와, 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호에 노심초사 관리실을 지키고 있던 젊은 흑검병… 아니, 젊은 백검병이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내질렀다.
“선배님!”
그의 부름에 페터는 신속하게 옆의 레버(Lever)를 잡아당겼다.
쿠긍-.
미궁에 설치된 기관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한 페터는 젊은 백검병을 돌아보며 말했다.
“잘 지키고 있어라.”
“선배님께서는?”
그 물음에 페터는 한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손님맞이를 해야지 않겠냐.”
그 말을 남긴 그는 신속하게 관리실을 벗어났다.
* * *
쿠그그긍-.
갑작스러운 지진에 기수들의 몸이 휘청거렸다.
또한, 쩍쩍 금이 가기 시작한 지면과 벽면은 기수들에게 두려움을 선사했다.
“으아악!”
“무, 무너진다!”
여기저기서 내질러지는 공포로 물든 비명.
그 아비규환 속.
철컥- 쿠그긍-.
갑자기 천장에서 들려온 소리에 테레시아의 고개가 위를 향했다.
‘설마?!’
그녀의 시선이 향한 천장.
그곳에는 활짝 개방된 출입구에서 미끄럼틀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를 본 테레시아는 깨달았다.
‘이게… 신호였다고?’
미궁을 흔드는 이 진동이 바로 백검병들이 외부 조력자와 약속한 신호였던 것이다.
‘다만 의문인 건 이게 진혼과 대체 무슨 연관이 있냐는 건데.’
설마 우리 전부를 매장시키는 걸 진혼이라고 말했던 건가?
테레시아가 그리 고민하는 사이, 빠르게 하강한 미끄럼틀은 순식간에 계단으로 변해 있었다.
드르르륵-.
때맞춰 하늘에서 내려온 희망.
무너지기 시작한 미궁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로의 등장에 기수들은 환호했다.
“계, 계단이다!”
“드디어 나갈 수 있다!”
그렇게 기수들이 계단을 향해 달려 나가려던 순간.
“모두 움직이지 마!”
마나가 담긴 유리의 경고가 공동 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에 놀란 이들이 움찔하며 멈춰 유리를 바라보니.
정작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공동에 들어선 노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눈싸움을 하듯 노인만을 응시하는 유리.
“움직이면… 죽는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나직한 경고가 다시 마나를 타고 기수들에게 전달되었다.
만약 지금이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평소와 다른 유리의 진심 어 린 경고는 먹혀들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드드드드-.
쿠그그긍-.
시시각각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균열에 조급해진 기수들에게 유리의 경고는 닿지 못했다.
“지, 지금 그딴 소리를 할 때가 아니라고! 무너지고 있잖아! 당장 빠져나가야 해!”
“그래요, 움직이지 않으면 이대로 생매장당한다고요!”
다급한 외침과 함께 계단에 가까이 자리한 기수 둘이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사락-.
기수들은 무언가 산들바람이 분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이에 바람이 흘러간 곳으로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고.
곧 그들은 얼이 빠지고 말았다.
“어……?”
“아?”
기수들이 시선이 닿은 곳.
가장 먼저 계단을 향해 달려갔던 두 사람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어어?!”
“힉?!”
상체가 거의 날아가다시피 한 거대한 구멍.
이에 두 사람은 결국 그 자리에 그대로 허물어졌다.
철퍽-.
시체가 흩어지는 소리가 기수들의 귀에 유달리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 속으로 섞여 든 늙수그레한 목소리.
“친우의 걱정 어린 경고를 무시하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란다.”
인자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였지만, 이를 들은 기수들은 하나같이 등 뒤로 오스스 소름이 돋아 올랐다.
한편 유리는 다른 의미에서 소름이 돋아 올랐으니.
‘아…….’
남들은 전부 산들바람이 분다고 느꼈던 순간.
오직 유리만이 모든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옘병.’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 두 기수의 가슴에 구멍을 뚫고 사라진 그것.
‘그거 분명… 화신이다.’
그리고 그건 다시 말해, 눈앞의 저 노인네가…….
“…명인.”
절대의 강자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