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47
46화. 용패갈이 (5)
불과 1초의 짧은 시간.
그 찰나에 유리와 테레시아, 뇌전과 그림자가 교차했다.
교차의 순간, 황금빛과 진홍빛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했고.
그 시간만큼은 유달리 느리게 흘렀다.
그러다 마침내.
“…….”
“……?!”
서로를 마주하던 두 시선이 어긋나며 멀어졌다.
콰릉-.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라졌던 두 사람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테레시아 윈체스터는 조금 전 유리가 서 있던 곳에.
유리는 개울의 반대편, 처음 테레시아가 나타났던 곳에.
서로 완전히 엇갈린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
짤그락 짤그락-.
“……?!”
테레시아는 뒤편에서 들려온 소리에 놀라 휙- 몸을 틀었다.
개울 건너편에 서 있는 유리를 발견하고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유리는 웃으며 굳어 버린 테레시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또 보자고, 텟샤 선배!”
짤막한 인사를 건넨 유리는 나무 상자를 어깨에 들쳐 메고 그대로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쫓아갈 생각조차 잊은 듯, 멍하니 그 뒷모습을 지켜만 보던 테레시아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와중에… 상자까지 챙겼다고?”
먼저 움직인 건 자신이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상대방은 그런 자신보다 훨씬 먼 거리를 움직였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나무 상자를 챙기는 여유마저 보여 주었다.
“…….”
아무런 말 없이 유리가 사라진 수풀을 바라보는 테레시아.
그녀의 뇌리에 짧은 순간 마주쳤던 황금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낙인찍혔다.
* * *
무참히 두들겨 맞은 예비 기수 소년이 처참한 몰골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끄흑…….”
더는 움직일 기운도 없는지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게 전부인 소년.
그 옆에는 사람을 넝마로 만든 가해자, 제리가 서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가 허리를 숙여 물었다.
“네가 에릭이란 놈이냐?”
“아으…….”
“표정을 보니 맞나 보네.”
에릭의 눈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가득했다.
“도… 도대체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이러는 거야!”
악에 받친 외침에 제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딱히 악감정은 없는데?”
오늘 처음 본… 아니, 조금 전 처음 본 놈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겠는가.
다만 볼일이 있을 뿐이지.
“보자, 보자…….”
제리가 에릭의 품을 뒤적거렸다.
그러자 조잡한 천 주머니 하나가 손에 걸려들었다.
철그럭-.
“그 새끼, 사기 친 건 아니었나 보네.”
묵직한 포인트의 무게감에 제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휙-.
제리의 손에서 포인트 주머니가 가볍게 공중으로 튕겨 오른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어느 한 미친놈과 나눴던 대화가 자연스럽게 흘렀다.
* * *
“용패갈이는 그렇다 치고, 포인트란 거에 대해서 좀 자세히 말해 봐.”
유리의 명령조에 제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식 완전 날로 먹으려고 하네!’
요람은 매우 불친절한 곳이었다.
정보를 파악하고 이를 활용하는 것마저 경쟁이자 실력의 일부라고 여기기 때문.
그런 까닭에 1년 차 기수가 초창기에 가장 애를 먹는 것이 정보의 부재였다.
요람의 교관들은 정말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하며.
무언가를 물어볼 선배들은 얼굴을 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아니, 선배들은 만나지 않는 게 좋았다.
요람에서의 기수는 계급이자 직급이고, 위 연차 기수는 후배들에게 있어 깡패나 다름없었으니까.
괜히 선배들과 마주쳐 봤자 탈탈 털릴 뿐이기에 아래 기수는 대개 선배 기수를 만나기를 꺼렸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신입 기수들은 요람의 초창기에 정보를 모으고 적응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건 제리라고 다르지 않았다.
‘난 그거 알아내느라 뭐 빠지게 고생했는데!’
자신이 한 수 개월의 고생을 이제 막 들어온 예비 기수가 날로 먹으려 하니 얼마나 마음에 들지 않겠는가.
제리의 얼굴이 부루퉁하게 변하자 유리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왜? 말하기 싫어? 아니꼬워?”
아니꼽다.
정말로 말해 주기 싫다.
당장에라도 일어나 저 얄미운 면상에 대고 아니꼽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은 여전히 땅에 묻혀 있고, 저 미친놈의 손에는 매우 훌륭한 협박용 무기가 들려 있는데.
으득- 으득-.
개미집을 잡은 유리의 손이 꿈틀거리는 것을 본 제리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하, 아니꼽긴… 고작 그거 알려 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얼마든지 물어봐. 궁금한 게 뭐야? 내가 다 설명해 줄게. 가문의 명예를 걸고 진실만을 말할 걸 맹세해!”
“아하? 저 새끼 실력을 보니 시험에서 떨어질 리는 없을 테고, 괜히 뒤끝 있어 보이는 놈한테 뻔히 들킬 거짓 정보를 말했다가는… 나중에 만났을 때의 후환이 두렵고.”
“…….”
“그런데 또 아는 걸 전부 사실대로 다 알려 주기는 자존심 상하니, 어차피 예비 기수여서 요람이 돌아가는 상황도 잘 모르는 놈일 테니까, 질문의 선택권을 나한테 넘겨서 그냥 대충 내가 물어보는 것만 답해 주고 끝내겠다?”
“…미친놈이 눈치까지 더럽게 빠르네.”
바스락-.
후득 후득- 후드득-.
“흐캭! 개, 개미 떨어진다! 훅- 훅- 훅- 훅- 훅-! 마, 말할게! 말할 테니까 손에서 힘 빼라고! 훅- 훅- 훅-!”
괜히 꿍얼거렸다가 미친놈의 화를 돋운 제리는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도 입바람을 불어 댄 탓에 산소가 모자라 얼굴이 시퍼레진 제리.
헥헥거리는 그를 보고서야 유리는 개미집을 거뒀다.
잠시 숨을 돌린 제리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좋아. 내가 아는 걸 전부 말해 줄게. 그리고 네가 궁금해하는 걸 알려 주는 것에도 아낌없이 협조할게.”
“그럼 안 그러려고 그랬어?”
“…이 새끼가 꼭 토를 달… 아, 아무튼 네가 원하는 걸 전부 알려 줄 테니… 대신 약속해. 날 풀어 주겠다고. 그러지 않는다면, 그 개미집을 부수든 말든, 난 절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야.”
“응, 그래. 약속할게.”
너무 쉽게 승낙이 떨어지자 도리어 제리가 당황했다.
“…정말?”
“응.”
“…진짜로?”
“싫어?”
“시, 싫기는!”
무언가 찝찝함이 들기는 했지만, 우선은 풀려나는 게 우선이었다.
풀려나고 나서의 일은 그 이후에 생각하면 될 일.
흠흠- 작게 목청을 다듬은 제리가 입을 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포인트는 화폐이자 요람에서 성적 순위를 가르는 유일한 지표야. 포인트의 용도가 두 가지니만큼 그에 따라 선택을 잘해야 해.”
“무슨 선택?”
“내가 가진 포인트를 생활 유지에 사용할지, 아니면 성적 점수를 올리는 데 사용할지.”
“그 말은 성적을 올리는 데 사용한 포인트는 회수할 수 없다는 뜻인 건가?”
“그래, 성적 점수를 올리는 것 역시 ‘포인트 사용’의 범주에 들어가거든.”
“성적 점수를 올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
“포인트 점수를 가지고 매달 월말 평가를 진행해서 하위권에는 불이익이 발생해.”
“어떤 불이익?”
“그때그때 달라, 하위권 성적자 몇 명을 골라 벌칙을 수행하게 하거나 심한 경우… 요람에서 영구 추방되지.”
“재밌네.”
“너처럼 실력 있는 놈들이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다. 하위권에 머무는 놈들에게는 월말 평가는 그냥 처형식이나 다름없어. 이번 달에는 그냥 가볍게 벌칙으로 끝날까? 아니면, 추방될까? 게다가 추방된다 해도 그게 한 명일지 두 명일지… 그 어떤 것도 요람은 확답해 주지 않거든.”
“흠……?”
“월말 평가가 있는 마지막 주를 하위권 녀석들은 지옥주라고 불러.”
“거기까진 내 알 바 아니고. 그런 거까지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건가? 굳이?”
“냉정하네.”
“경쟁 끝에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건 당연한 이치야. 내가 이기기 위해 짓밟은 상대를 동정하는 게 모순이라고는 생각 안 해?”
“그건…….”
제리가 말끝을 흐렸다.
현재 49기 내에서 제리의 위치는 딱 중간이었다.
중위권 내에서도 정확히 중간 정도.
때문에 그는 매달 고통스러워하는 하위권들을 보며 종종 생각하고는 했었다.
지금처럼 하위권이 추방되고 탈락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이 하위권으로 내려가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자신 역시 추방되는 게 아닐까?
그런 불안감을 품고 있었기에 제리는 하위권을 동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고마워했고, 응원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버티길.
그로 인해 자신이 하위권으로 내려가는 날이 오지 않기를 말이다.
유리는 그런 제리의 속내를 짐작이라도 했는지 정곡으로 찔러 온 것이었다.
제리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인정했다.
“하아… 그래, 네 말이 맞네.”
“알면 됐고. 그래서 포인트는 어떻게 하면 모을 수 있는 건데?”
“퀘스트를 통해서.”
“퀘스트?”
“요람에서 내주는 임무 혹은 과제라고 생각하면 돼. 주어지는 퀘스트를 완료하면 보상으로 이것저것 받게 되는데 보통은 포인트로 지급되거든.”
“퀘스트 난이도에 따라서 지급되는 포인트의 양이 달라지기도 하고?”
“당연하지. 정말 높은 난이도의 퀘스트라면 포인트 외에도 각종 기물(奇物)이 보상으로 지급돼. 예를 들면… 질 좋은 무구(武具)나 희귀 영약 같은?”
그러나 평이한 난이도를 가진 퀘스트는 포인트만 지급된다는 게 제리의 설명이었다.
유리는 턱을 쓰다듬었다.
‘대충 요람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감은 잡히네.’
용의 요람이란 거대한 체계가 굴러가게 만드는 중심축은 포인트와 퀘스트였다.
생산과 소비.
경쟁 활동과 경제활동의 장려.
그 모든 게 포인트와 퀘스트를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퀘스트가 어떤 방식인지는 나중에 직접 겪어 보면 알 거 같고.’
그 뒤로도 제리는 포인트에 관해 이런저런 잡스러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포인트의 단위는 10부터 시작해서 최대 50,000짜리까지 있으며.
포인트 가운데 있는 구멍에 줄을 넣어 묶음으로 들고 다닌 다거나.
월말 평가 상위권 10명에게는 성적에 따라 추가 포인트가 차등 지급된다는 것.
또한, 요람 본토에는 포인트를 저축해 둘 수 있는 은행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한번 물꼬를 튼 수다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고, 제리는 더 이상 유리가 캐묻지 않아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그걸 가만히 듣던 유리는 확신했다.
‘이 자식… 원래부터 말 많은 놈이었구나?’
아마 화젯거리만 던져 주면 알아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떠들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중간중간 이야기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서 종종 옆길로 새는 것이 문제였지만…….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의식의 흐름을 따라 떠들다 보면 감추려던 정보마저 실수로 발설할 수 있었다.
때문에 유리는 제리의 수다에 열심히 맞장구를 쳐 줬다.
그가 신이 나 더 열심히 떠들게 하도록 말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이어진 이야기 중 유리가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바로 포인트 상점의 존재였다.
“요람 측이 운영하는 상점이 있다고?”
“어, 비록 연차가 낮으면 구매할 수 있는 물품이 몇 개 되진 않지만… 그래도 1, 2년 차 기수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지.”
제리의 설명에 의하자면 1년 차가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은 건조 식량, 생필품, 훈련복, 숫돌과 기름 등이었다.
생각보다 제법 이것저것 챙겨 주기는 하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건량 하루 치에 1,000포인트? 그거 비싼 거야?”
“상점에서 파는 물건 중 가장 싼 게 건량이긴 한데… 깨는 데 하루 정도 걸리는 하급 퀘스트 하나에 1,000포인트 정도를 벌 수 있거든? 대략 감이 오지?”
“횡포 수준이네.”
저 말이 사실이라면, 건량만으로 끼니를 해결한다고 했을 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상점에서 파는 물건 중 건량이 가장 싸다고 했다.
다른 물건 구매에도 어마어마한 포인트가 들어갈 것이고, 하위권에 머물지 않기 위해 성적 점수에도 포인트를 써야 할 거다.
기수들이 포인트에 허덕거린다던 제리의 말이 이제는 이해가 됐다.
고개를 끄덕이던 유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용패는? 용패도 판다고 했잖아?”
“아, 그거? 그건 특판이야.”
“특판?”
“특별 판매라고 해서 일반적으로 구할 수 없는 귀한 물건… 예를 들어 골족의 상급 포션이나, 고대 동방의 마체술 원본, 상급 영약 등을 팔아.”
“오?”
“매달 새로운 물건으로 갱신되는데 거기에 종종 금룡패나 백룡패 같은 것도 올라오거든. 물론, 가격을 보면 사고 싶다는 생각은 쏙 들어가겠지만…….”
특판 되는 용패가 너무 비싸다드니.
막말로 그 가격이면 영약을 사지 누가 용패를 사겠냐는 둥.
중얼중얼 욕하던 제리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 특이한 소문이 하나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