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96
95화. 은혜 갚은 호랑이 (4)
유리의 시선을 따라간 아린.
그녀 역시 자욱한 흙먼지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무슨 일이라…….”
솔직히 유리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른다.
유리표 짝퉁 취성이 발동되며 제대로 먹혀들었고.
이후 유리가 예상한 그레타의 다음 수는 두 가지였다.
공격을 물리고 회피하거나.
혹은 공격을 방어로 전환하거나.
그러나 조금 전에 발생한 상황은 유리가 예측한 그 어떤 수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조금 전의 그것으로 열 번의 합이 모두 끝났다는 거였다.
“하아, 끝났다…….”
유리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나온 순간.
살며시 밀려온 찬바람에 흙먼지가 휩쓸려 갔다.
그로 인해 흙먼지에 가려져 있던 광경이 드러났다.
공터의 중앙에 멀뚱히 서 있는 그레타.
그런 그녀를 중심으로 수 미터 범위의 지면이 갈라지고 뒤집혀 있었다.
‘흙먼지의 원인이 저거였군.’
아마 저렇게 지면이 폭발하며 흙먼지가 날린 거겠지.
다만 문제는 왜 지면이 폭발했냐는 거다.
그리고 갑자기 폭발한 지면도 이상했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건 그레타의 상태였다.
미동조차 없이 멀뚱히 서 있는 그녀.
눈조차 깜빡이지 않는 그레타의 눈동자는 멍하니 풀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전신이 은은한 빛을 발했다.
이를 본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저게? 왜 저래?”
사람 몸에서 빛이 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아, 하긴 무기에서 빛이 나나, 사람한테서 빛이 나나.’
어차피 거기서 거기기는 하지.
유리가 그리 납득하고 있을 때, 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거, 돈오(頓悟) 상태… 같은데?”
“배고프다.”
아린의 이야기에 동의한다는 듯 뽀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유리만이 잘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돈오? 그게 뭔데?”
“쉽게 말해서, 깨달음을 얻고 벽을 허물었다는 거야. 와, 저게 돈오구나. 나도 보는 건 처음인데.”
“……?!”
아린의 답에 유리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그러니까 지금… 나랑 싸우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거야?”
“그런 거 같은데? 그리고 상태를 보니 꽤 오랫동안 벽에 막혀 있었던 거 같아. 듣기로는 벽에 막힌 시간이 길수록 돈오 상태도 길어진다더라고.”
분명 성권을 선보인 그레타는 공인 6단이었다.
그런 그녀가 깨달음을 얻어 경지가 올라간다면 공인 7단일 가능성이 컸다.
이에 유리의 얼굴에 어이없음이 깃들었다.
‘와… 자신보다 한참 모자란 나를 두들겨 패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이건 뭔가…….
‘…내가 손해 본 느낌인데?’
아득바득 싸운 결과 저쪽은 오랫동안 막힌 벽을 허물었는데 자신이 얻는 건 고작 500만 포인트이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인 거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유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이건 다시 말해 저 아줌마가 깨달음을 얻는 데 내가 매우 크게 일조했다는 거잖아?’
이에 유리도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럼 나도… 내 지분을 주장할 수 있는 거네?’
유리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 * *
그레타 위건.
명문의 혈통인 그녀가 가문을 나와 흑검병단에 들어온 것은 조금 더 많은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가문 내에서도 쉬이 보기 힘든 실력자들이 발에 차이게 존재하는 곳.
그게 바로 흑검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문을 나온 그레타는 숱한 실전과 노력을 통해 빠르게 성장해 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의 성장에 정체기가 오고 말았으니.
타고난 재능으로 막힘없이 성장해 온 그레타는 이번에도 문제없이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는 그녀의 크나큰 오산이었다.
쉽게 넘을 거라 여겼던 벽은 여전히 그레타의 앞에 떡하니 존재했고, 여전히 단단했다.
그렇게 공인 6단의 끝자락에서 머문 지 어느덧 3년.
그간 벽을 넘어서기 위해 그레타는 안 해 본 게 없었다.
자신보다 강한 부장들을 찾아가 수없이 대련도 해 보았고.
목숨을 건 임무를 자처해서 실전을 겪어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모든 게 소용없었다.
그레타의 앞을 막아 선 벽은 그녀가 그 너머를 엿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인 7단, 영역(Zone)을 얻지 못해 좌절하고 있던 나날.
그녀가 속한 부대에 이번 동물의 숲 임무가 하달됐다.
원래 이런 잡스러운 호랑이 역은 고참급인 그레타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다만 기분 전환이 필요했던 그녀는 자처하여 호랑이 역을 맡았다.
그런데 기분 전환은 개뿔.
재미는 첫날 잠깐뿐이었고, 나날이 계속되는 지루함에 괜히 이번 호랑이 역할을 맡았나 후회가 들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들었다.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그렇게 간지러웠던 거야.’
유리와 9번째 합을 나눴을 때 이상하게 가슴속을 간질이던 그 느낌.
그리고 마지막 10번째 합에서 자신의 주먹을 튕겨 내며 다가오는 그 ‘찌르기’를 본 순간 가슴속을 간질이던 느낌이 시원함으로 바뀌었다.
마치 오랫동안 긁고 싶어 미칠 지경이던 것을 유리의 그 찌르기가 시원하게 긁어 준 느낌이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유리 홀랜드가 보여 준 그 무언가가 자신의 벽을 허물게 도와줬다는 거였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후우우…….”
긴 숨결이 흘러나오며 멍하던 그레타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서서히 돈오 상태에서 깨어난 그녀가 맨 처음 본 것은 자신의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세 사람이었다.
그레타는 그들을 훑어보았다.
‘저 아이가 그 괴상한 화살을 날린 녀석일 테고.’
어깨에 활을 걸치고 있는 푸른 머리의 소녀.
‘쟤는 누가 봐도 윰족이네.’
어마어마한 덩치를 지닌 순박한 인상의 대머리.
아마 저 녀석이 그 거인일 거다.
그리고 그런 윰족의 옆에 상당히 불량스러운 자세로 쪼그려 앉은 소년.
‘유리 홀랜드.’
유리를 본 그레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유리도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인제야 깨어나셨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선 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죽겠네.’
진짜 가진 걸 모조리 박박 긁어서 사용한 유리는 지금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뽀삐의 약손을 받고 조금 휴식을 취했기에 이 정도로 움직일 수 있는 거였다.
낑낑거리는 유리를 보며 그레타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괜찮냐?”
“괜찮겠습니까? 공인 6단이 고작 공인 1단 잡겠다고 죽어라 덤볐는데?”
“아! 크흠… 그건 그만큼 네 실력이 출중해서…….”
“예이예이, 저니까 살아남았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미 진즉 송장 됐어요. 아, 물론 저도 지금은 반송장 상탭니다. 아이고 나 죽네. 아야야”
“쿡쿡쿡.”
“…멀쩡한 사람 반송장 만들어 놓고 웃음이 나옵니까?”
“…미안하구나.”
말투가 굉장히 삐딱했지만, 솔직히 과했던 건 사실이었기에 그레타는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진심으로 칭찬을 했다.
“오늘 넌 훌륭했다.”
비록 주위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공인 1단이 공인 6단을 상대로 10합을 버틴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호랑이가 500만 포인트인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였다.
그리고 그 불가능한 걸 해낸 게 바로 저 녀석이었다.
그 실력과 재능에 대해서는 그레타도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대견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그녀를 보고 유리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말뿐인 칭찬은 별로이니, 일단 정산부터 합시다.”
“아아!”
그 말에 이제 깨달았다는 듯 그레타가 자신이 입고 있던 조끼를 벗어 유리에게 건넸다.
“…뭡니까?’
“받아, 호랑이 가죽이다.”
“…….”
유리는 자신과의 격전으로 너덜너덜해진 조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게 500만 포인트라니…….’
500만 포인트짜리치고는 상당히 볼품없는 물건이지 않은가.
그래도 안 받을 수는 없기에 날름 챙긴 그는 그레타를 보며 눈을 빛냈다.
호랑이 가죽도 호랑이 가죽이지만, 지금부터가 유리가 말한 정산의 진짜 시작이었다.
그가 슬쩍 운을 떼었다.
“음…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대체 얼마나 벽에 막혀 있었으면 한 시간씩이나 그러고 있습니까?”
그레타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랫동안 막혀 있던 벽을 뚫었기 때문일까.
그레타는 유리의 축하 인사를 너무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하하, 고맙다. 무려 3년이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는데… 겨우 뚫었다. 다 네 덕분이다!”
“그쵸? 제 덕분이죠?”
“당연하지!”
“맨입으로?”
“…어?”
그레타가 눈을 끔벅였다.
그리고 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뽀삐와 아린도 덩달아 눈을 끔뻑였다.
오로지 유리만 평온한 안색을 유지하고 있을 뿐.
할 말을 찾지 못해 어버버거리고 있는 그레타를 향해 유리가 조곤조곤하게 따졌다.
“자자, 생각해 봐요. 무려 3년이나 막혀 있던 벽을 저 때문에 뚫은 거잖아요?”
“그… 그렇지?”
“만약 오늘 저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바로 그겁니다!”
“응?”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는 거죠! 그 벽을 뚫는 데 앞으로 3년이 더 걸렸을지, 5년이 걸렸을지, 혹은 10년이 걸렸을지!”
“…그렇게는 오래 안 걸렸을 거 같은데?”
“장담해요? 그렇게 확신이 있으신데 3년이나 제자리걸음 하셨습니까?”
“…….”
유리가 사실만 가지고 조곤조곤 말로 두드려 패니 그레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는 제 할 말만 이어 나갔다.
“아무튼!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높은 경지에 들어야 탱탱한 피부가 오래오래 가는 법입니다!”
“…진짜?”
“에엥? 뭐야, 그 못 믿겠다는 눈빛은? 아니, 지금 당장 본인 피부 만져 보면 알 거 아니에요? 아까 전보다 훨씬 매끈매끈 탱탱해진 거 안 느껴지십니까?”
유리의 말에 그레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실제로 경지의 깊이가 노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그러니 유리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린이 뽀삐에게 작게 속삭였다.
“…쟤, 어디서 약 좀 팔아 본 거 같지?”
끄덕끄덕-.
속닥거리는 둘을 한 번 째려본 유리는 그레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마무리에 들어갔다.
“그래서!”
“……?”
“저한테 그렇게 큰 도움을 받았는데… 단순히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퉁치려고요? 그렇게 양심 없는 분이셨습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그레타는 유리의 이야기가 단순히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벽에 막혀 수년은 기본이요 십수 년, 혹은 수십 년씩 좌절하는 이가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가문에서도, 그리고 흑검병단에서도 그런 이들은 넘쳐 났다.
그러니 자신이 이번 공인 7단이 된 거에 대해 유리에게 합당한 보상은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원하는 게 뭐야? 재물?”
“재물! 골드! 좋죠! 그런데 그거 말고… 그 왜, 있잖습니까?”
유리의 눈이 게슴츠레 변하자 이에 무언가를 떠올린 그레타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포인트는 안 돼. 그건 요람의 규율에 어긋나.”
“아뇨, 아뇨. 포인트 말고요! 저도 그런 건 안 바랍니다. 대신 그 있잖습니까.”
“뭐?”
“그, 있잖아요. 험험… 이걸 제 입으로 설명하자니 좀 그런데…….”
“……?”
“아 왜, 막 비싸고 몸에 좋고, 마나도 짱짱하게 늘려 주는… 그런 거?”
연신 몸을 배배 꼬는 유리를 보고 그레타가 고개를 갸우뚱해졌다.
대체 저 녀석이 왜 저러나 싶던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으니.
그레타가 이를 작게 중얼거렸다.
“…비약?”
그레타의 중얼거림을 듣자마자 유리의 눈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목이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바로 그겁니다, 누님!”
…누님이란다.
언제는 아줌마라더니.
상처받았던 27살은 곱게 눈을 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