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71
71화
다소 날카로운 분위기에서 레이드가 시작됐다.
눈치 없는 소형 친목 길드의 섀도우 헌터들이 여전히 은신한 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레기온 길드원들은 모른 척 레이드에 집중했다.
탱커의 선공이 시작됨과 동시에 고목나무 왕이 번쩍 뜬 눈으로 가지를 뻗었다. 사람의 손처럼 뻗어 나간 가지가 대지를 강타했다.
크게 진동하는 울림에 리디안이 기우뚱 흔들렸다. 제자리를 벗어난 고목나무 왕은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가지로 된 채찍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쭉 늘어난 줄기에 맞은 리디안은 반사적으로 악, 소리를 내질렀다. 언뜻 어깨를 맞은 것 같은데, 진짜 채찍에 맞은 것처럼 따끔하고 쓰라렸다.
이와 비슷한 공격이 내내 이어질 거로 생각하니 살짝 겁이 나면서, 들쭉날쭉 요동치는 HP 게이지에 서둘러 전체 회복 스펠을 외웠다.
다크 템플러들의 장판이 완료될 무렵, 몰아치는 매지션들의 광역기에 잠들어 있던 일반 몹들이 번쩍 눈 떴다.
일반 몹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보조 탱커들이 사방으로 달려 나갔다. 특이하게도 이번에는 테세우스가 보조 딜러로 빠져 활약 중이었다. 일반 몹인 버섯 정령의 합체 특성 때문이었다.
작은 영지버섯 모양에 충혈된 눈알을 달고 있는 괴이한 몹인데, 세 마리 이상 모이면 서로 합쳐 몸집을 키운다. 왕 버섯으로 바뀌면 내뿜는 독이 강력해지고 해제 불가가 되어 합체하기 전에 미리 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테세우스가 불 마법을 이용해 버섯을 지져버리는 사이, 보조 탱커들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큰 나무 정령을 붙들었다.
큰 나무 정령의 경우, 고목나무 왕에게 들러붙어 몸을 희생해 공격력을 증가시키는 특성이 있었다. 안 그래도 기본적으로 공격력이 높은 맵인데, 이보다 더 높아지면 그야말로 헬이었다.
큰 나무 정령이야말로 고목나무 왕 레이드가 어려워지는 큰 이유였기에 보조 탱커들이 큰 나무 정령의 움직임을 필사적으로 막아야만 했다.
나무 정령에 붙어 있는 타락 사념도 상당히 귀찮은 존재였다. 타락 사념은 설정상 군락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죽은 인간의 원혼이이며, 그 때문에 자신의 몸이 나무에게 먹혔다고 생각해 항상 나무에 붙어 있는 몹이다.
나무에 붙어 있다가 플레이어에게 공격당하면, 타락 사념은 플레이어에게 달라붙어 몸을 빼앗으려 한다. 상태 이상 저항이 낮을 경우, 그대로 ‘혼란’에 걸려 플레이어는 일정 시간 동안 자유를 빼앗긴다.
혼란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나무 정령과 타락 사념을 상대하는 보조 탱커가 상태 이상 저항 세팅을 한 상태여도, 물량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넋 나간 얼굴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탱커들 때문에, 괴자의 입이 바빴다. 그녀와 함께 디버프를 담당하는 무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에 비해 리디안이 있는 메인 힐러 쪽은 꽤 여유로웠다.
파티원들의 HP 게이지가 일정 수치 이상 떨어진다, 싶었을 때, 전체 회복 스펠을 한 번씩 외웠다. 타이밍이 엇갈려 HP가 떨어지는 건 이모탈이 커버했다. 어쩌다 이모탈과 힐이 겹쳐도 ‘스카디’로 회복력이 100% 치유되고 있기 때문에 MP가 아까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 정도면 힐은 여유롭게 들어가겠네요.”
놀아도 되겠다며 이모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일반 몹이 좀 까다로울 뿐이지 보스 자체는 크게 어려울 것 없는 패턴이라 리디안도 조금 긴장을 풀며 헤헤 웃었다.
이따금 고목나무 왕에게 잡혀가는 파파도 어려움 없이 쉽게 속박에서 벗어났다. 오히려 재미있는 듯 장난까지 치는 여유도 보였다. 디버프로 한창 바빠 보이던 괴자도 시간이 흐를수록 적응하며 훨씬 더 차분해진 표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이 랭커 딜러들의 화력이 든든한 덕분에 고목나무 왕의 HP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너무나 안정적인 진행이었다. 그래서 은신 섀도우 헌터들이 근처에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을 정도였다. 그냥 구경만 하는 거라 사실 크게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의 그 섀도우 헌터는 관심받고 싶어 환장한 존재였다.
초반에만 해도 조금 떨어져 레이드를 구경했지만, 예상보다 쉽게 풀려가는 진행에 심술이 났는지 은근슬쩍 다가가 기웃거리던 그의 움직임은 점점 대범해졌다.
보스의 HP 게이지를 보며 전체 공격이 떨어진 틈을 타 해당 영역에 다가가 깔짝거리는가 싶더니, 재미가 들렸는지 그 짓을 수차례 반복했다. 심할 땐 메인 힐러가 있는 근처까지 와 알짱거리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리디안 주위로 물결이 일렁거리자 결국, 주시하고 있던 크라이그가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고목나무 왕의 HP가 74% 정도 남았을 때였다.
이번에도 용감하게 안까지 들어와 아슬아슬하게 휩쓸고 있는 섀도우 헌터를 주시하고 있던 크라이그가 조용히 마제스티를 불렀다. 그러잖아도 크라이그처럼 계속 신경 쓰고 있던 마제스티도 그 의도를 금방 파악하곤 씨익 웃었다.
그래도 두 명으로는 조금 모자랄 거 같아, 마제스티는 이노센트에게도 똑같이 눈짓했다. 열심히 주먹을 내지르던 이노센트도 그 눈빛을 찰떡같이 알아듣곤 히죽 웃었다. 그리고 크라이그의 손가락 신호에 맞춰, 세 사람이 동시에 스킬을 사용했다.
“일섬신월.”
“카운터 스트라이크.”
나이트와 바바리안이 가진 최고 공격 스킬이었다.
갑작스레 나간 고성능 공격 스킬에 고목나무 왕의 HP가 순식간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노센트 가까이 있던, 눈치 빠른 페이지도 그 의도를 알아채곤 은근슬쩍 합세했다.
“아홉 가닥의 꼬리.”
페이지가 쥔 검은 채찍이 아홉 갈래로 갈라져 고목나무 왕을 후려쳤다. 섀도우 헌터의 고레벨 공격기술이었다.
도적 계열답게 당연히 크리티컬이 터졌고, 다른 곳에서 함께 들어오는 딜러들의 잇따른 공격기에 보스의 HP는 단박에 70%가 되었다.
오로지 눈빛과 눈치로 시작된 합동 공격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고목나무 왕이 가지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보스 구역 내에 무조건 들어가는 전체 공격이었다.
“억!”
중앙에서 엉뚱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몇 초 정도는 더 여유 있을 줄 알았는데, 난데없는 가지 채찍 공격에 두들겨 맞은 상대의 은신이 풀렸고, 레기온 길드원들은 낯선 인물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플레이어 정보
이름 : 쿠렉 / 길드 : 신세계
레벨 : 76 / 직업 : 섀도우 헌터 / 보조 직업 : 연금술사
HP : 1315 / MP : 870
쿠렉. 신세계 길드원으로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쓰렉’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20대 중반인 그는 주로 길드 마스터인 베누스를 따라다니며 관종 짓을 일삼던 플레이어다.
베누스와 마찬가지로 노르드 월드를 초창기부터 해온 올드 플레이어인데, 같은 친목 길드 출신 플레이어들의 증언에 따르면 원래는 조용히 게임만 즐기던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평범한 플레이어였던 그는 70레벨이 되자 신세계에 가입했다. 그 후로 베누스한테 옮은 건지, 숨겨 두었던 본성이 나온 건지, 그때부터 섀도우 헌터가 할 수 있는 모든 비매너 짓을 일삼으며 쿠렉은 단번에 노르드 월드의 스타로 떠올랐다.
하나, 사람들과 싸우는 걸 좋아하는 파이터 기질이 다분하지만 PVP 실력은 그저 그런 중급 정도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컨트롤 자체는 별 볼 일 없었다.
다만 은신을 활용한 도망 기술 하나는 최고였기에 게임 시절, 길드전이 있는 날이면 일부러 다혈질인 하이 랭커들을 살살 긁어 열받게 만드는 게 쿠렉의 임무였다.
매번 따라오는 랭커를 피해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야 하니, 도망 기술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열받은 하이 랭커들이 쿠렉을 쫓아다녀 전력이 분산되면 베누스와 햄스터가 일점사로 한 명씩 처리하곤 했다. 그래서 길드전 때 신세계와 매치되면 쿠렉을 봐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야 한다는 전략이 나올 정도였다.
레기온에 가입했을 당시, 첫 길드전 상대가 신세계였던 크라이그 역시 멋모르고 쿠렉에게 휩쓸려 쫓아다닌 전적이 있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휩쓸린 이후로는 상대하지 않았지만, 대놓고 깔짝거리는 베누스보다 은신으로 깔짝거리는 쿠렉이 더 짜증 나는 건 당연했다.
화산 던전 때도 거의 99% 확신이었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더 짜증 날 수밖에 없었다. 쿠렉을 바라보는 크라이그의 눈매가 더욱더 찌푸려졌다.
현재 쿠렉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새하얗게 질려 고목나무 왕의 패턴에 두들겨 맞고 있었다.
고목나무 왕은 HP가 10% 까일 때마다 강력한 전체 공격을 한다. 하지만 그 외 패턴 역시 전체 공격인 건 변함 없다. 그 때문에 쿠렉은 휘몰아치는 전체 공격에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버릇대로 은신을 썼지만, 이어지는 전체 공격에 계속 풀리고 HP도 쭉쭉 떨어졌다.
“꼴값도 저런 꼴값이 없지.”
슬쩍 쿠렉을 바라본 이노센트가 한심하다는 듯 비하했다. 사방에 널린 게 힐러지만, 레기온 힐러들은 그 누구 하나 돕지 않았다. 쿠렉도 거기까진 기대하지 않아, 쏟아지는 경멸 섞인 눈빛에 더욱더 민망해했다.
자기 딴에는 빨리 벗어나겠다고 달음박질하는데, 오히려 고목나무 왕의 패턴 중 하나인 칼바람 나뭇잎 공격에 맞아, 추가로 상태 이상인 암흑까지 걸리고 말았다. 방향성을 잃고 더듬거리는 모습에 곳곳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보스를 공격하던 크라이그가 몸을 돌려 쿠렉을 향해 일반 검기를 날렸다. 저레벨 공격기술이지만 크라이그쯤 되는 하이 랭커가 쓰면 하나의 훌륭한 살인기였다.
푸른빛의 부메랑을 닮은 작은 검기가 쿠렉의 몸을 강타했다. 그러잖아도 500 아래로 떨어진 쿠렉의 피는 순식간에 300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갑작스러운 피케이 모드와 대폭 떨어진 HP에 놀랐는지 쿠렉이 소리를 지르며 허둥댔다.
평소 같았으면 침착하게 반격하거나, 홧김에 주변 사람이라도 공격했을 텐데. 고목나무 왕이 또 다른 패턴을 보인 탓에 당황한 쿠렉은 무얼 판단할 새도 없었다.
땅 밑에서 솟아오른 가시덩굴이 플레이어들의 몸을 감쌌다. 이 또한 전체 공격이었고 꽤 강력한 대미지를 자랑했기에 리디안이 서둘러 쓰린 몸을 부여잡으며 전체 회복 스펠을 외웠다.
리디안의 스펠에 레기온 모두의 HP가 쭉 오른 반면, 쿠렉의 HP는 그대로 쭉쭉 떨어졌다. 이윽고 50 아래의 HP를 목격한 순간, X됐다, 라고 중얼거리며 쿠렉은 망연자실 정지했다.
저 평소대로 염탐이나 즐기려던 건데, 재수 없게 딱 걸릴 줄이야. 다 무모하게 선을 넘은 제 탓이지만 감정적으로 치솟는 화는 어쩔 수 없었다.
“아오, X발!”
마지막 발악과 함께 쿠렉은 장렬하게 쓰러졌다.
추하게 널브러진 시체에 지켜보던 모두가 폭소를 터트렸다. 쪽팔리기 짝이 없는 몹사였다. 아직 낯을 가리느라 무표정하게 굳어 있던 시우도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었다.
리디안도 작게 웃었다. 뭐, 죽은 사람을 보며 웃는 게 좀 그렇긴 한데, 하는 짓이 하도 얄미웠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저거 살려서 몹사로 계속 오뚝이 시킬까요?”
낄낄거리던 괴자가 제안했다. 역시 전투 세인트다웠다. 물론, 그녀의 말대로 쿠렉이 일어나는 즉시 아까처럼 딜러들이 한꺼번에 살살 쳐, 전체 공격으로 몹사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일부가 그에 동의해 목소리를 높이자, 마제스티가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자자, 무시합시다. 어차피 이번 일로 베누스 멱살 잡을 일 생겼으니까요. 레이드 끝나는 대로 그 새끼 조지러 갈 거니까 다들 진정하세요.”
베누스를 조진다는 발언에 겨우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쿠렉의 시체를 두고, 레기온은 한동안 레이드에 집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