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34
234
* * * *
9월 끝자락에 다다르면 피렌체는 천천히 서늘해진다.
아침저녁은 기온이 20도 아래로 살짝 떨어지고, 여름의 한낮보다는 춥고 가을 아침보다는 살짝 덜 추운 것 같은 오묘한 날씨가 피렌체를 감싼다.
루이스 마리노는 그 오묘한 날씨의 시작점인 9월 23일에 서있었다. 마리노는 사람이 한적한 골목길, 예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공간을 거닐다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역사지구가 아닌 곳이라 그런지 한창 사람이 많을 시간임에도 호텔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니지. 이제 폐업신고를 할 차례이니 호텔도 아니었다. 루이스 마리노는 허탈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루이스. 오늘은 빗자루를 쓸지 않는 거예요?)”
계단에 거의 눕다시피해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루이스 마리노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턱을 잔뜩 당겨 눈을 찌푸리고 정면을 보자, 시야가 잡혔다. 젊은이가 루이스 마리노를 보고 멋쩍게 미소짓고 있었다.
시모레 카사니. 요근래 루이스 마리노에게 있으면 귀찮고 없으면 얄미운 놈이 된 시모레 카사니의 등장이었다.
루이스 마리노는 다시 누워버렸다.
“(마지막 손님은 가셨고 새로운 손님은 없으니 빗자루를 쓸 필요가 없지.)”
항상 계단의 먼지 한톨 남기지 않을 기세로 쓸어내리던 것도 이제 끝이었다. 루이스 마리노는 오래전 끊었던 시가라도 피고 싶다는 눈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아쉽네요.)”
“(아쉽기는.)”
“(하지만 빗자루를 쓰는 루이스는 정말 멋있었어요.)”
“(···혀에 버터를 발랐군. 세뇨리따를 꼬시는 젤라또 가게 앞 꼬맹이도 너를 보고 놀랄 거다. 이 늙은이한테까지 추파를 던지냐면서 말이다. 너무 놀라 경악하며 젤라또를 너에게 던질지도 모르겠군.)”
신랄하게 쏘아붙인 루이스 마리노가 옆에 털썩 주저앉은 시모레 카사니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저 슬퍼하고 싶다. 오늘만큼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 마리노는 어서 사라지라는 뜻에서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었다.
“(···이제 난 백수고, 내일부터 여기에서 볼 수 없을 거다. 조금 뒤에 폐업신고를 하러 갈 참이거든. 갑자기 나타나서 플로리다 사투리가 잔뜩 들어간 이탈리아어를 구사하는 귀찮은 젊은이도 상대할 필요가 없단 소리지. 속이 시원하군.)”
두서없이 말을 내뱉는 루이스 마리노를 시모레 카사니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소하지만 세련된 정장 차림새의 늙은 노인. 루이스 마리노는 계단을 올라가 도달하는 커다란 건물의 주인장이자, 원래는 잘나가는 호텔의 주인이었다.
‘근 20년? 적어도 16년 전까지만 해도 잘나간다는 수식이 아깝지 않은 호텔이었지.’
시모레 카사니는 피렌체에 왔을 때 부모님께 찾았던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외관은 여전히 멀쩡했다. 외관만 멀정한 게 문제였지만. 시모레 카사니는 피렌체에 처음왔을 때 추억삼아 들어가봤던 호텔을 떠올렸다.
박물관마냥 오래된 옛 장식품으로 휘황찬란하게 채워져있던 로비는 휑해졌고, 사람들이 오가던 식당도 한산해보였다.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계단의 미술품들은 못질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고 샹들리에도 LED 촛불로 켜는 싸구려 가짜로 바뀌어있었다.
기둥을 장식하던 것들도 다 뜯겨나갔고, 심한 곳은 고부조와 저부조가 장식되어있던 타일도 뜯겨나간 상태였다. 귀족부인이나 가주의 침실 같았던 호텔 객실은 들어가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시모레 카사니는 어쩐지 낯이 익은 루이스 마리노에게 어릴 때와 달리 왜 이렇게 호텔이 폐허처럼 변했냐고 물어보자, 세련된 차림새의 깔끔한 웃음을 짓고 있던 루이스의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이던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너무 무신경했지.’
시모레 카사니가 풀이 죽은 루이스 마리노를 바라보며 남몰래 혀를 찼다.
역 근처에 있는 100년 된 호텔만큼은 못해도 여기도 나름 60년 이상은 된, 아주 역사가 깊은 호텔이었으나···루이스 마리노가 말아먹었다.
정확하게는 피렌체 공유용 숙소가 말아먹었지. 아니. 더 정확하게는 역사지구에만 80% 이상 몰린 공유용 숙소가 말아먹었다.
‘아니, 조금 더 근본적으로 따져보자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루이스 마리노가 돌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내는 한숨소리 같았다.
‘거······타이밍도 참.’
시모레 카사니는 머리를 헝클이며 돌려 물었다.
“(·········폐업신고를 굳이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운영하려면 운영할 수는 있겠지. 이 건물에 남아있었던 작품을 떼고, 장식품을 떼고, 아버지께서도, 아버지의 아버지께서도 그러셨지!)”
루이스 마리노가 참담하다는 듯 허리를 일으켜 앉았다. 주저앉은 폼이 된 루이스 마리노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항상 깔끔하게 귀족 신사처럼 다듬었던 루이스답지 않았다.
“(이런저런 아름다운 장식품도 없이 골조만이 남은 이 호텔을 봐라. 을씨년스러워서 누가 머물려고 하겠냔 말이야.)”
“(·········으음.)”
“(귀찮은 젊은이. 네 얼굴만 봐도 무슨 말을 할지 알아먹겠구나. 네 생각대로 운영하려면 운영할 수 있겠지.)”
외관만 완벽한 피렌체 호텔이라며 대서특필이 되는 것만 견뎌낸다면, 루이스 마리노는 영원히 이 호텔의 주인장이자 지배인으로서 남아있을 수 있을 것이다.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 호텔의 주인장이겠지. 근데 그러면 뭐하나.
“(무엇을 보고 자랑스러워하고, 무엇을 보고 버티나.)”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가업을 이렇게 늙은 나이가 되어서 누구한테도 물려주지 못하고 간판 문을 닫게 생겼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 입성했을 때 느꼈던 호텔의 화려함은 다 죽었다. 피렌체에 오기 위해 좋다고 예약하려는 여행객들을 물리고, 예약사이트에서 이름을 하나둘 내리고, 중개업자들에게 폐업 준비중이라고 말을 돌린 이유도 그것이었다.
지쳤다. 커다란 외관을 유지하기 위해 한평생 사랑했던 호텔의 장식품들을 하나씩 팔아넘겨 다른 호텔의 걸리는 꼴을 바라보는 것도 서글펐고, 아버지의 아버지 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 이대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게 서글펐다.
호텔에 있던 오래된 미술품들을 팔아넘긴 것은 내 아버지의 아버지대부터 점점 기울어져가는 호텔을 위해 연례행사처럼 내려온 것이었는데 이제 그냥 다 늙은 제 탓 같았다.
그렇게 서글픔을 견디고 외관만 유지한 채, 달랑 이 호텔만을 유지한다고 해도 물려줄 사람이 없다는 게 더욱더 루이스 마리노를 서럽게 했다.
그것이 루이스 마리노는 결정하게 만들었다.
“(···버틸 이유가 없지. 저번에 들어온 박물관 제의를 받아들일거야. 여기는 박물관이 될 걸세. 그렇게 된다면 내 아버지의 아버지가 지켜오고 있었던 이 호텔의 외관만이라도 지켜낼 수 있겠지.)”
완벽한 르네상스, 완벽한 피렌체가 담긴 이 호텔 건물. 색대리석이 박혀 미켈란젤로가 ‘나의 신부’라고 불리웠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만큼이나 아름다운 이 호텔만큼은 지켜낼 수 있을 터였다.
루이스 마리노는 우중충하게 중얼거렸다.
“(호텔의 외관이라도 지켜내게 되었으니 잘 된 일이지. 호텔의 외관만이라도 지켜낼 수 있게 되었으니······)”
“(루이스.)”
“(귀찮은 젊은이. 자네한테 이름을 허락한 적이 없어. 그리고 같잖은 동정심으로 앞으로 잘 될 거라느니 하는 말은 하지마. 호텔의 유지비가 얼마인줄 알아?)”
“(···루이스.)”
“(내 이름에 꿀이라도 발라놨나. 왜 이렇게 불러대는 건가. 그래. 멍청이 바보같은 불쏘시개로 쑤셔버릴 루이스 마리노가 여기있다네. 왜 부르나!)”
어서 할말 하고 나를 슬픔에 잠기게 놔두라는 듯 루이스 마리노가 성을 내었다.
시모레 카사니가 잠시 말을 멈췄다. 호텔이 왜 망했냐고 물어봐도 고개를 푹 숙일 뿐, 무어라 흰소리 하나 하지 못하던 루이스 마리노가 맞나. 평소의 젠틀하고 신사적인 루이스 마리노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상심이 크다는 것이겠지.
‘이거 오히려 좋다고 해야 할지···거 참.’
시모레 카사니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루이스. 박물관보다는 조금 더 나은 제안을 하고 싶어요.)”
“(실컷 불렀으면 만족하고 그만············뭐?)”
“(첫만남 때 어그러져서 소개를 제대로 못했는데 전, 플로리다 마이애미에 있는 마레 갤러리의 관장인 시모레 카사니라고 합니다.)”
마레 갤러리? 루이스 마리노가 건네어진 명함과 카사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햇볕에 그을러진 얼굴과 몸. 누가 봐도 공을 차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런 사람이 갤러리의 관장이라니···루이스 마리노가 명함에 쓰여진 이름과 직책을 다시 확인했다.
두꺼운 명함의 종이와 음각을 봐서는 보통 공들인 명함이 아니었다. 사업가였나. 루이스 마리노가 눈을 끔뻑거렸다. 명함을 보고 있으니 마레 갤러리 이름을 들어본 것도 같다.
시모레 카사니는 마이애미에서 왔고, 마레 갤러리의 주소는 마이애미다. 요근래 마이애미에 혜성같이 등장한 갤러리 하나가 있다던데······루이스 마리노가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물었다.
“(······귀찮은 젊은이 아니, 시모레 카사니. 아니, 관장은 그러면 박물관 대신 여기에 갤러리를 내고 싶어서 찾아온게요?)”
“(아뇨?)”
“(음?)”
“(일단 갤러리는 아니예요. 그러나 박물관보다는 이 호텔의 어울리죠.)”
“(그럼 무얼······? 무얼 하려고?)”
“(그게 말이죠···후우·········)”
“(후우?)”
후우, 후우, 시모레 카사니는 심호흡을 했다. 호텔을 목욕탕으로 그것도 4층짜리 목욕탕으로 운영하겠다고 하면 이 호텔에 대한 애착이 강한 루이스 마리노의 입에서 고운 반응이 나올 리가 없었다.
적어도 마레 갤러리의 오너가 강석이라는 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 95% 역정을 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시모레 카사니는 말해야만 한다. 폐업신고를 했다가 철회하고 다시 용도변경을 하는 것보다는 폐업신고를 하지 않고 사업을 넘겨받아 용도변경 하는 것이 더 좋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피렌체를 샅샅이 뒤져본 결과. 도서관은 몰라도 목욕탕을 할만한 건물은 여기밖에 없었다. 여기가 베스트였다. 강석이 원하던 피렌체형 건물과 4층짜리 건물. 가로로 긴 외관과 내부. 오래도록 자리한데다 목욕탕으로 용도변경을 해도 아쉬울 사람이 없는 곳. 피렌체에 반감을 사지 않게 녹아들 수 있는 상황.
그리고 예술품들도 이미 다 팔아버린 마당이라 새롭게 리모델링하기에 굉장히 편해보였다.
‘석에게 이걸 넘긴다면 살릴 부분은 살리고, 버릴 부분은 버려서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줄 거다.’
또 시모레 카사니는 루이스 마리노라는 인물 자체가 좋았다. 아무에게나 팔 수 없으나, 팔 수밖에 없어서 괴로워하면서도 건물을 위한 선택을 하고, 그러면서도 서글퍼하는 루이스 마리노가 가진 애정을 믿었다.
자신이 부모님과의 추억이 깃들어있던 하얀 건물을 팔아 마레 갤러리라는 선물을 받고, 그 추억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루이스 마리노에게도 강석이 선물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는 제안이었다.
“(······공중 목욕탕으로 호텔을 재탄생 시켜,)”
“(목, 목욕탕? 목욕타아아앙?)”
목욕탕이 피렌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거냐. 지금이 르네상스 시대인줄 알어? 호텔 유지비에 이어서 수도세까지 감당해보겠다고?
루이스 마리노가 몸을 일으켰다.
이건 차분하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문제고 말고! 루이스 마리노가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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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4층의 객실은 그대로 남기고.)”
“(네. 남기고요.)”
“(4층의 객실은 그대로 남기고 나머지 1, 2, 3층을 활용해서 목욕장을 운영해보겠다고 했단 말이지? 젊은이의 오너가?)”
“(네. 스파호텔처럼요.)”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이 핸드폰 지금 화면에 나오는 강석이고?)”
“(네.)”
거기까지 들은 루이스 마리노가 턱을 괴었다. 그러니까 조각품으로 가득 채운 목욕탕을 만들거고, 목욕탕에 객실까지 운영해서 수익을 증대화시키고···그래. 거기까지는 알아들었다. 근데 이게 무슨 애들 놀음도 아니고 여태까지 작품 관련만 운영한 사람이 목욕탕을 운영한다고 마음처럼 될까?
겨우 스무살이?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이 호텔을···?
루이스 마리노가 의심을 가득 담아 호텔의 외관을 훑었다.
될 지도 모른다. 이 호텔을 강석의 작품으로 가득 채운다면, 강석의 작품이 두개 걸린 마레 갤러리도 연신 흥행가도를 달려가는 중이니 호텔도 그렇게 될 확률이 높긴 높았다.
그런데 그게 목욕탕과 호텔이 같이 들어있는 유지비용을 감당할 정도일까? 예약이 잘 들어찼던 루이스 마리노도 유지비용을 내는데 급급하다못해 걸려있던 작품까지 팔아야만 했는데···? 작품들을 파는 경매장 같은 게 되어버리진 않겠지?
온갖 걱정으로 루이스 마리노가 호텔 외관만 반복해서 훑었다. 마른세수가 나왔다. 안정적인 박물관이라는 방법이 있는데 목욕탕을 해야만 할까? 아니. 이렇게 고민이 되면서도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 ‘(그래도 호텔이 한층이라도 살아서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오너께서는 실질적인 운영에는 관심이 없어서 아마 지배인 자리도 그대로 유지해주실 겁니다. 저부터가 마레 갤러리의 관장인걸요.)’
방금 들었던 시모레 카사니의 말이 귓가를 계속 자극하기 때문이었다. 호텔 지배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이 호텔과 계속 함께할 수 있었다.
박물관이 되어버리면, 호텔 지배인의 자리는 사라진다. 영원히 외부인으로서 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박으로 느껴져도 호텔을 강석에게 넘긴다면 호텔 지배인 자리는 유지할 수 있다.
– ‘(그리고 제값에 사주실 겁니다. 강석은 공간에 쌓여있던 추억을 무시하는 오너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 이상의 수익도 내시고요. 뭐, 제 상사는 믿어볼만한 사람입니다.)’
시모레 카사니가 가진 저 오너를 향한 무한한 신뢰감. 루이스 마리노도 느껴보고 싶었다. 보호해야 하는 자가 아니라 보호받는 자가 되고 깊기도 했다.
마레 갤러리도 시모레 카사니가 소유한 건물이었다는 걸 들은 다음부터 마음 저 깊은 곳에 새순이 움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루이스 마리노가 입술을 깨물었다.
“(······호텔을 되살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거야. 목욕탕이라면 더더욱.)”
“(오너라면, 강석이라면 다를 겁니다.)”
“·········.”
“(강석이라면 여길 멋지게 되살려줄 겁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루이스 마리노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시모레 카사니가 내민 손이 보였다. 그 너머로 강석이라는 만나본 적 없는 자의 손이 보이는 것 같았다.
루이스 마리노는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마리노는 스스로가 마지막 잎새인 줄 알았다. 서늘해지고 있는 가을의 끝에서 뚝, 떨어져 빗자루에 쓸리듯 상처입고 헤집어져 흙으로 돌아가 모두에게 잊혀지는 삶. 그것이 자신에게 남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과 자신이 망쳐놓은 이 호텔을 되살려준다고?
미술품이 사라지고, 오래된 문헌들이 꽂혀있던 책장은 비워진···문화와 예술이 사라져버린 이 공간을 다시 여름으로 되살리겠다고.
루이스 마리노는 바람빠진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바로 일 마니피코(Il Magnifico, 위대한 자)의 재림이겠군.”
“그가 메디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일 디비노(Il Divino, 신성한 자)의 재림 같은 사람이긴 합니다.”
로렌초 메디치의 재림은 내가 속단할 수 없지만 그가 미켈란젤로의 재림이라고는 믿는다. 그 기적같은 재능과 성실성, 그리고 그 고집불통의 끝을 보이는 우직한 실행력과 일중독적인 기질.
그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시모레 카사니가 강석의 등을 떠올렸다. 언제나 우직하게 망치를 두들기는 그 믿음직한 등은,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언제나 이뤄내었다.
“믿어보시죠.”
시모레 카사니의 말에 결국 루이스 마리노가 쓰러지듯 손을 붙잡았다.
* * * *
9시 40분.
강석은 물을 마시러 내려왔다가 지잉, 울려오는 진동에 몸을 멈춰섰다. 묘한 예감이 일었다. 강석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이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호텔 협상타결.]짧은 문장이 주는 호쾌함이 나쁘지 않았다.
이제 목욕탕을 채울 대리석을 구하러 가면 되겠군.
강석이 기분 좋게 물을 따랐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235. 1507년 4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