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04)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04화
막간 – 새로운 희망 (1)
“…아.”
이사벨라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굳게 입술을 다물고 있는 오진.
그의 눈빛에는 그녀를 향한 연민의 감정은 비치지 않았다.
마치 그녀에게 ‘너 때문에 파울로를 죽인 게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진, 씨….”
하지만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그가 자신을 위해, 파울로를 직접 죽여줬다는 것을.
마음속에 고이 품어온 희망을 영영 잃게 될까 봐 겁에 질려 있는 자신을 대신해 창을 들어줬다는 것을.
“…고마워요.”
“고맙다고 할 필요 없어.”
오진은 이사벨라를 끌어안은 팔을 풀며 그녀와 살짝 거리를 벌렸다.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한 일이니까.”
“…….”
이사벨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째서일까.
자기 자신을 위해 파울로를 죽였다는 그의 허술한 거짓말에 불안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됐다.
“…흑.”
또다시 터져 나오는 눈물.
끔찍한 흡혈 충동에 시달렸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울보가 된 걸까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오진과 함께 있으면 왜 이렇게 마음이 느슨해지게 되는지.
이사벨라는 목이 잘린 채 쓰러진 파울로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이제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막연한 이미지로만 남아있던 시절의 기억이 머릴 스쳤다.
자상한 아버지와 상냥한 어머니, 그리고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언니의 모습이.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때의 기억이.
잔향(殘香)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오진 씨 저… 어떻게 하죠?”
이사벨라는 오진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계속 꿈꿔왔던 희망의 사라져버리고 말았어요.”
언니는 실종됐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죽었다.
기적처럼 언니의 행방을 찾게 된다고 해도, 이제 그녀가 바라왔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오진 씨 때문이에요.”
이사벨라는 스스로 말하고도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희망이 사라진 게 오진 때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 나 때문이야.”
오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울로를 죽여 그녀가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작디작은 희망을 완전히 짓밟아 없앤 건 자신이었다.
이사벨라는 떨리는 눈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두근, 두근.
흡혈 충동이 끓어오르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마치 심장이 고장이 난 것처럼 사납게 맥동했다.
“그럼 오진 씨 책임이니까.”
이사벨라는 달아오른 뺨을 숨기듯 고개를 숙인 채, 오진의 허리를 가볍게 양팔로 끌어안았다.
“…오진 씨가 제 새로운 희망이 되어 주세요.”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어린애 같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
오진은 가슴에 머리를 기댄 이사벨라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줬다.
곱슬기 있는 백금발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렀다.
“흐윽… 흑.”
이사벨라의 어깨가 떨렸다.
“흐아아아아앙!”
억눌러왔던 감정을 토해내듯.
그녀는 오진의 품에 안긴 채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오진은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흐르는 눈물에 섞어, 고이 간직하고 있던 희망을 떠나보낼 수 있도록.
“흑, 흐윽.”
그렇게 몇 분 정도가 흘렀을까.
이사벨라가 발갛게 부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 잊을 수 있을까요?”
잊을 수 없겠지.
이 일은 평생 그녀의 기억 속에 가시처럼 박혀 끝없이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오진은 애처롭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래. 잊을 수 있을 거야.”
달콤한 거짓말을 속삭인다.
“다… 괜찮아질 거야.”
진실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다.
때로는 천 마디 진실보다, 한마디 거짓말이 더 위로가 되는 법이니까.
* * *
칠성의 일원인 ‘정의의 검’ 데미안 살바토르가 죽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 전역으로 퍼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콜그란데 가문의 차기 가주, 아니 이제는 가주가 된 이사벨라 콜그란데의 증언에 따르면 이번 사건의 개요는 이랬다.
1. 흑성회의 파벌 중 하나인 ‘거머리 파벌’이 이탈리아의 실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콜그란데 가문에 눈독을 들였다.
2. 파울로 콜그란데가 거머리 파벌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데미안 살바토르를 가문에 초청했다.
3. 하지만 이미 가문 내에 깊숙이 침투해버린 거머리 파벌이 파울로와 이사벨라를 인질로 삼아 데미안을 공격했고, 데미안은 치열하게 맞서 싸웠지만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상이 이사벨라의 증언을 통해 밝혀진 사건의 진상이었다.
쉽게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이탈리아 내에 절대적인 인지도를 지닌 이사벨라의 말이라는 것과 당시 가문에 초청되어 있던 뇌랑의 증언 덕분에 사건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전 세계는 흑성회에게 칠성을 죽일 정도의 힘이 있다는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한시라도 빨리 흑성회를 추적해 잡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공론화됐다.
세계 곳곳에서는 ‘정의의 검’에 대한 추모가 계속되며 다른 칠성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흐아아아! 이게 얼마만의 집이냐아아!”
하은은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지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 달, 아니, 거의 두 달 만에 돌아오는 집이었다.
이사벨라와 오진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 또한 이번 사건의 주요 참고인으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정신없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으헤헤. 역시 우리 집이 짱이라니까.”
콜 그란데 가문의 저택이 박살이 난 이후 로마 시내에 있는 콜 그란데 가문 소유의 5성급 호텔에서 머물렀지만.
역시 자기 집만큼 마음이 놓이는 곳은 없는 법.
“으헤헤. 이게 얼마 만에 집 침대냐.”
하은은 침대 위에 풀썩 엎드린 채 벌레처럼 몸을 꼬물거렸다.
오진은 하은이 벗어 던진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좋아?”
“뭐야? 오지니 넌 이사벨라 고년 호텔이 더 좋았다는 거야?”
“그럴 리가.”
5성급 호텔답게 시설과 룸 컨디션 모두 호화롭기 거지가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집이 짱이지.”
“그치?”
오진은 침대에 엎드린 하은의 옆자리에 앉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헤헤. 우리 둘만 있으니까 좋다.”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오진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는 하은.
그녀는 녹아내릴 듯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오진을 침대로 끌어당겼다.
오진이 못이기는 척 그녀에게 끌려가려고 할 때.
파직!
두 사람 사이에 푸른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둘만’이라니. 본녀가 있다는 걸 잊어버린 게냐?]오진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베가가 팔짱을 끼며 눈을 찌푸렸다.
하은이 베가를 올려다보며 콧방귀를 끼었다.
“헹, 너무 작아서 안 보였는데?”
[뭐라?]베가는 뽀르르 날아오르더니 작은 손바닥으로 하은의 이마를 찰싹 때렸다.
동전만 한 크기의 작은 손바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꽤나 묵직했다.
“아악! 왜 때려?!”
[흥. 성좌에 대한 예우를 그대의 머리에 직접 주입한 것이니라.]“쪼그마한 게 힘만 좋아서는.”
[쪼, 쪼고만…!]베가가 파르르 몸을 떨며 하은의 이마를 찰싹찰싹 때렸다.
[이 무엄한 것!]“악! 그만! 그만!”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
오진은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난 그럼 청소 좀 하고 있을 테니까 나중에 일 끝나면 불러줘.”
“씨이!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깐!”
[호오. 본녀의 예절 교육에 반기를 들려는 게냐?]아무래도 둘에겐 들리지 않은 모양.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방을 나왔다.
“후우.”
간단하게 거실 청소를 마친 후, 창고 방으로 쓰고 있는 빈방에 들어갔다.
‘어디 그럼.’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우우우웅!
손바닥에 맺히는 찬란한 빛무리.
데미안에게 흡수한 천칭자리의 성흔이 만들어낸 빛이었다.
“이걸 어떻게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나려나.”
오진은 밝게 타오르는 빛무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천칭자리의 성흔이 만들어내는 빛에는 성흔의 마력을 딱딱하게 결정화시켜 버리는 힘이 있었다.
‘문제는 너무 눈에 띈다는 거지.’
마력을 결정화시켜 버리는 능력이 천칭자리의 성흔 말고는 없으니 남들 앞에서 자유롭게 사용하기 어려웠다.
‘마력을 결정화 시키는 능력은 일단 베가가 보지 않을 때나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단순하게 ‘빛을 다루는 능력’이라면 충분히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방법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사기적인 방법으로 말이지.’
오진은 정신을 집중해 손바닥 위에 맺힌 빛을 움직였다.
우우우웅!
손바닥 위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점차 형상을 갖추더니 오진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환영(幻影).’
빛을 다루는 능력이니만큼 세밀하게 빛을 컨트롤할 수만 있다면 홀로그램처럼 빛으로 이뤄진 환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건 써먹을 수 있겠어.”
활용 방법이 무궁무진한 능력이다.
특히 남을 속여 먹는 데 타고난 재능을 지닌 오진에게는 더더욱.
“뭐… 아직 익숙해지려면 연습이 좀 필요할 것 같지만.”
거울에 비친 듯한 자신의 모습을 향해 손을 뻗자 몸을 통과해 손이 쑥 뚫고 지나갔다.
수면 위에 돌을 던진 것처럼 빛에 파문이 생기더니 이내 오진의 환영이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빛을 다뤄서 환영을 만드는 데 워낙 세밀한 컨트롤이 필요하다 보니 아직 형체를 유지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연습만 하면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거야.’
오진은 새롭게 얻은 성흔이 마음에 든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근데 데미안 그 자식은 왜 이 좋은 능력을 놔두고 안 썼던 거지?”
시각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감각 기관이다.
환영을 제대로 활용해 눈을 속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전투의 양상이 180도 바뀌었을 텐데.
“아, 설마.”
오진은 손바닥 위에 빛나는 빛을 여러 색으로 바꿨다.
게임 커스터마이징 창에 염색 파트를 건드리듯 오만가지 색으로 변하는 빛들.
그제야 오진은 왜 데미안이 ‘환영’이라는 사기적인 능력을 두고 사용하지 않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사용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데미안에게는 오진이 지닌 ‘변형’처럼 빛의 파장을 조절해 색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어 환영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데미안 그 자식은 하얀색 원툴이었지.’
그렇다면.
“이 환영은 나만 쓸 수 있는 능력이라는 건가?”
오진은 눈을 빛내며 다시 한번 자신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칠흑의 창을 쥔 채 위협적으로 눈을 뜨고 있는 자신의 모습.
“아따 새끼 잘생겼네.”
하은이 들었으면 배를 잡고 뒤집어질 만한 말을 중얼거리며 오진은 환영을 없앴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환영을 만드는 걸 연습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만큼 하은이 가만 놔둘 것 같지 않았다.
“오지나! 집에 돌아온 기념으로 배달이나 시켜 먹자!”
역시 양반은 못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하은이 벌컥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언제 싸웠냐는 듯 베가가 찰싹 올라타 있었다.
[배달? 음식을 직접 만드는 게 아니라 시켜 먹는 게냐?]“엉! 족발이랑, 피자랑, 치킨이랑 다 시키자구!”
[오오! 그대답지 않은 좋은 생각이로구나!]“앙?”
하은이 눈을 찌푸리며 머리 위에 앉은 베가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을 때.
띵동.
맑은 초인종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벌써 시켰어?”
“엥? 아니 아직 안 시켰는데….”
오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달칵.
“안녕하세요 오진 씨.”
이사벨라가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뒤에는 대형 트렁크를 손에 쥔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낀 우락부락한 체형의 경호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뭐야 이건?”
하은이 대형 트렁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삿짐이에요.”
“…이삿짐?”
“예. 분명 오진 씨 집에 방 하나가 남았었죠?”
이사벨라는 눈을 반짝이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야, 야야 잠깐! 누구 멋대로 이사야 이사는?!”
“어머, 오진 씨에게 듣지 못하신 건가요?”
그녀는 입고 있는 원피스 자락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며 오진이 있는 쪽으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오늘부로 오진 씨의 전속 메이드로 임명받은 이사벨라 콜그란데라고 합니다.”
“…뭐?”
전속 메이드로 임명받았다고요?
누구한테요?
“누, 누가 그런 걸 임명했는데?!”
“후훗. 누구겠어요? 오진 씨가 직접 임명해주셨어요.”
예?
제가요?
…언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