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16
216. 증오는 산불과도 같아서(7)
생각 없이 준 선물이었다. 그저 당시의 분위기에 떠밀려 대충 있는 것을 준 것이었는데 고작 내가 준 선물이라는 이유로 계속 끼고 있겠다니.
“그것 참….”
흐린 목소리가 천천히 말을 늘어놓는다.
지금 데온 하르트는 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알고 있다면 저런 괴상한 표정을 보이지 않았겠지. 단은 확신했다.
“고맙네.”
“…….”
“수고했어. 이만 나가봐.”
“아직 정리를….”
“카트를 두고 가면 되지. 나중에 다시 부를 테니까 나가.”
몇 차례 머뭇거리던 에드가 무언의 재촉에 못 이겨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물러간다. 힐긋 방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단이 고개를 돌려 다시 데온을 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 화분의 괴식물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
그러나 미처 가다듬지 못한 표정이 고스란히 눈에 보여 슬쩍 눈살을 찌푸린 단은 이내 짐짓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제게 정을 붙이지 말라 하시더니, 본인이 정을 붙여버리시면 어떡합니까.”
“……뭐?”
“지금 이 상황을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단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데온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
“지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뭐, 당연히 부정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뭐라 하시든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 전에 본인의 표정부터 다듬으시길.”
“……내 표정이 어떻길래.”
“정을 붙인 것까진 아니어도 조금은 흔들리는 듯한 표정?”
“…….”
“온갖 감정이 뒤섞인 죄책감에 잡아 먹힐 듯한 표정이셨죠.”
“……하.”
웃기고 있네.
굳이 대답하지 않고 품에 괴식물을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사뼈 아래까지 차오른 핏물을 걷어차듯 밀어내며 걸어가 창가에 화분을 내려놓는다.
꼴에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듯 ‘끠액’하고 우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들어 저를 보는 녀석을 뒤로하고 돌아서서 보란 듯이 웃었다.
“그럴 리가.”
“…….”
“드디어 네 눈이 삔 모양이야.”
밝은 달빛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역광이라 철저하게 가려진 붉은 눈이 그늘 속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무어라 반박하려던 단이 흠칫 입을 다물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데온이 자연스럽게 발언권을 가로챈다. 조금 전의 대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주제가 튀어나왔다.
“현재 네 상단의 영향력은 어떻지? 잘 유지 중인가?”
“……오히려 커지면 커졌지 줄지는 않았습니다. 애초에 가장 큰 걸림돌은 로우펠 상단밖에 없었으니까요. 다른 상단들은 오히려 이쪽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상황입니다.”
“스티그마 선배님께 감사해야겠네.”
“…….”
아직 이렇다 할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로우펠 가문을 멸문한 사람이 스티그마 프리미로라는 것을 확신하는 발언이었다.
단이 다시 침묵하고, 데온은 느릿하게 걸어 탁자에 다가갔다. 탁자 위에 잔뜩 놓여 있던 술병 중 하나를 집어 든 그가 손날로 병목을 날려버린다. 과격한 행동에 단의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아니, 병을 딸 도구가 여기 있는데….”
“이편이 더 편해서.”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시려고… 잠깐, 지금 그냥 입 대고 마시려는 겁니까? 그러다 입 베입니다.”
“용사라 괜찮아.”
“몸을 함부로 쓰는 건 좋지 않은 버릇입니다.”
“잔소리가 늘었네, 단.”
마치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병째로 술을 들이켠 데온이 씩 웃었다. 단의 표정이 굳었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입을 꾹 다문다. 이를 악문 듯 턱 근육에 잠시 힘이 들어가더니 이내 탁 놓였다.
조금은 힘 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터를 모시고 있으니 늘 수밖에요. 용사가 되기 전부터 매번 사람 심장을 철렁하게 만드셨잖습니까. 본인이 죽으면 제 목숨도 장담 못 한다고 말씀하셨으면서 말이죠.”
심지어 용사로 각성하기 바로 전의 상황은 어땠는가. 폭발에 휘말려 정말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보니 지금은 용사가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과보호하게 되는 모양이다.
이러한 상황을 자각했음에도 단은 물러서는 것보다는 뻔뻔하게 밀고 나가는 것을 택했다. 여기서 물러섰다간 저 희고 붉은 제 주인은 정말 본인의 몸을 막 다룰 테니까. 차라리 지금 미리 잡아두는 편이 좋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조심하라는 잔소리가 따라붙는다. 하나 신뢰하지 않는 이의 잔소리가 와닿아봤자 얼마나 와닿겠는가. 데온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는 것으로 가볍게 흘려 넘기고 화제를 돌렸다.
“네가 화면 앞에 서게 된다면 만인이 네 정체를 알게 될 거야.”
“…….”
대답 대신 불만스러운 표정이 돌아왔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도 개의치 않는 듯 재차 알코올로 목을 축인 데온이 말을 이었다. 그의 발언은 대화보다는 생각을 정리하는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얼굴이 나오면 이름을 아는 자들이 등장할 테고, 이름을 아는 자들이 나오면 네 상단까지 정보가 연결될 테지. ……아니, 인간계에서 정보력 좀 있는 이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으려나. 굳이 조사할 필요도 없이 네 얼굴이 화면에 등장한 순간 바로 상단에 병력을 보낼지도 모르겠다.”
“……인간계에서 철수할 때가 된 것이군요.”
“바로 그거야.”
슬슬 물러날 때가 되었다.
새 병을 따 잔에 따른 데온이 단에게 내밀었다. 눈매가 기분 좋게 휘었다.
“인간계에서 철수할 준비를 해. 완전히 빠지는 건… 네가 화면에 등장하기 20분 전이면 되겠네.”
너무 빨리 철수해서도 안 되고, 늦어서도 안 된다.
빨리 철수하면 눈치 빠른 몇몇 지도자들이 정황을 파악하고 미리 대비를 할 것이다.
데온 하르트와 관련된 모든 것을 탈탈 털었을 그들이 ‘단’과 ‘데온 하르트’가 연이 있다는 것을 모르진 않을 터. 덴 상단에서 이미 한 번 데온 하르트의 이름으로 군수물자 유통을 허가받은 적이 있었으니 모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리라.
데온 하르트의 이름을 이용한 전적이 있는 덴 상단과 그곳의 상단주인 단, 그리고 데온 하르트.
그렇지 않아도 예의주시하고 있을 텐데, 인간계에서 덩치를 키우며 수많은 수익을 벌어들이던 상단이 갑자기 철수한다? 앞으로의 이득을 내려놓고 물러갈 이유가 없으니, 필시 데온 하르트와의 연결점을 떠올릴 것이다.
데온 하르트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마계와도 연관이 있다는 것. 당연히 여러 가정을 떠올릴 테고, 개중에 ‘화면’이라는 후보 또한 존재할 테지.
‘저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
멋대로 난입해 반박하던 남자를 떠올린 데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늦으면 철수하던 상단이 붙잡혀서 탈탈 털릴 테니 당연히 안 되고, 20-30분 전에 철수하는 편이 적당하지.’
생각을 정리하던 데온이 문득 가벼워진 손을 느끼고 단을 보았다.
잔을 받아든 단이 읽기 힘든 감정을 담아 웃고 있었다.
“꽤 많은 원망을 받겠군요.”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둔 쪽 잘못이지.”
덴 상단이 데온 하르트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각국의 지도자들은 이를 그냥 뒀다.
그가 마계로 돌아서기도 전에 상단은 이미 어느 정도 덩치를 키운 상태였으니까.
전쟁이 판을 치는 상황이다. 상단은 중요한 보급의 역할도 맡고 있으니 쉬이 무너뜨릴 수 없었겠지. 특히 전쟁의 판이 완전히 뒤바뀌어 상대가 마계가 된 상황에서 무시무시한 마족들 사이를 뚫고 꿋꿋이 물자를 나를 상단이 덴 상단밖에 없었으니 더했으리라.
‘인간계에서의 전쟁은 상단을 건들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지만, 마계가 그걸 지킬 리 없으니까.’
자체적인 보급에는 한계가 있으니 부족한 부분은 자존심 상하지만 데온 하르트의 비호를 받는 덴 상단에 의존할 수밖에.
데온이 빈 술병을 내려놓았다. 붉은 눈동자가 눈앞의 사내를 직시했다.
“아니면, 이제와서 두렵기라도 해?”
만인에게 얼굴과 이름이 까발려지고 또 다른 인류의 배신자로서 욕받이가 되는 것이 두렵냐는 말이다.
단이 의중을 파악하듯 시선을 마주해온다. 데온은 눈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해는 해. 내가 멋대로 추천했으니 각오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
“…….”
비꼬듯이 물었지만 그 대답이 긍정이라 해도 질책하지 않을 생각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적의를 한 몸에 받는 것은 각오했던 것보다 더 숨 막히는 일이니까.
인간계에서, 저택과 형의 무덤을 오가는 길에서 들었던 제 욕이 얼마나 많았던가. 단순한 욕에서 그쳤다면 모를까, 노골적이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진득한 적의와 살의가 담겨있어 쉽사리 무시할 수 없었더랬다.
전쟁에, 마족의 손에 소중한 이를 잃은 자들이 내뱉는 피눈물이 뚝뚝 배어나는 서슬 퍼런 저주.
그래, 그건 저주였다.
제게 이루어야 할 목표가 없었거나 어중간한 각오로 일을 치렀다면 목을 졸라오는 저주에 패배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데온은 새 병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걸 수락한 건 너야. 이제와서 무를 수는 없으니 지금이라도 제대로 각오를 해 두는 게 좋을걸.”
새 술병의 병목이 손날에 의해 깔끔히 날아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단이 히죽 웃었다.
“두렵다고요?”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스터도 하신 일인 것을요.”
설령 두렵다 해도 그것을 입 밖에 낼 리 없다.
입 밖에 낸다 하여 무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주인도 아무 말 없이 한 일을 부하가 두렵다고 징징거릴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심지어 일이 여기까지 흘러온 원인에는 제가 부추긴 것 또한 한몫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무어라 투정을 부리거나 뒤로 빠지려 들 만큼 단은 양심 없지 않았다.
“실수 없이 확실하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데온은 다시 식도에 알코올을 들이부었다.
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중얼거림이 들린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에 잔을 기울이던 단이 데온을 보았다.
“내 증오는 산불과도 같다고 말했던가….”
“……?”
“그때 주술사가 했던 말이야.”
[귀인에게 증오는 산불과도 같습니다. 처음엔 별 것 아닐지 몰라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급격히 덩치를 키워 종국엔 모든 것을 집어삼키겠지요.]“그 자리에 아마 너도 있었을걸.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발언 이후 근처에 숨어서 따라오던 단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으니까.
[그리고 저 아이는 언젠간 터질 폭발물에 가깝지요.] [폭발물이 터지면 불이 나고, 반대로 불이 나면 폭발물이 터집니다. 그 탓에 되도록이면 저 아이와 마주치지 않길 바랐지만…….]그제야 기억난 듯 단이 ‘아’하고 탄성을 뱉는다. 데온은 테이블 앞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 앉아 술병을 빙글빙글 돌렸다.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그 사람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줬다면 좋았을 것을.”
“…….”
그랬다면 크루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무의식 중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답은 금방 나왔다. 아니.
형을 원망하지 마라 말했다면 네가 뭘 아냐며 분노하여 단검을 들이밀었을 것이고, 무언가 오해가 있을 거라 말했다면 역시 믿지 않고 분노를 표했을 것이다. 후회할 거라 말했다면 끝내 감정을 터뜨렸겠지. 주술사의 발언은 최선이었다.
뭉뚱그려 말하지 않았다면 본인이 다쳤을 터.
스스로의 정신을 지킬 생각이 없는 듯 두뇌는 ‘만약’이라는 가정에서조차 좋은 답을 내리지 않는다. 데온은 끝내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알아. 그때의 난 크루엘을 옹호하는 말이라면 무슨 말을 듣든 분노했을 거야. 미신 따위를 숭상하는 자의 헛소리로 치부한 채 계속해서 형을 원망했겠지.”
그렇게 단순히 가족을 향했던 증오는 지금 산불처럼 커져가는 몸뚱이를 제어하지 못한 채 마냥 덩치를 키워 세상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어디까지 치달을지 본인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크루엘이 살아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겠지. 설령 진실을 알아 미치려 했다 해도 그라면 저를 달래든 억누르든 끝내 폭주하지 않게 막았을 것이다.
막지 못했을 가능성은 계산에 두지 않았다. 강압적인 방법을 쓰든, 온건한 방법을 쓰든 나는 그의 말을 들었을 테니까. 진실을 알게 된 이상 나는 크루엘의 철저한 가해자고, 죄인이기에.
“……마스터는.”
가만히 듣고 있던 단이 입을 열었다.
“너무 착하신 것 같습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