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2
22. 들춰진 베일(5)
“네 녀석!!”
처음에는 벤이 사고를 친 줄 알았다.
내 ‘건강’에 관련해서 만큼은 아주 철저한 데다 광전사 같은 면모도 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으나, 이어서 들려온 말은 그런 내 생각에 의혹을 심어주었다.
“마일! 내가 그딴 더러운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말랬지!”
음? 벤이 저 녀석의 이름도 알고 있었나?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뭔가 좀 많이 다른 것 같다.
그새 변성기가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슬쩍 뒤를 돌아봤다.
‘……벤은 여기에 있잖아?’
여전히 분노에 씩씩대고 있긴 하지만 내 뒤에 얌전히 서 있는 그는 분명 벤이 맞다.
그렇다는 건 저기서 ‘마일’이란 약쟁이의 멱살을 잡은 게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건데.
쿠당탕탕!
어우, 안면도 있는 사이 같은데 정말 가차 없다.
‘세상에, 집어던지기까지?!’
신나게 잡고 흔들던 멱살을 던지듯 놓은 사내가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고개를 휙 돌려 이쪽을 본다.
마치 악귀같이 일그러진 얼굴에 구석에 처박혀버린 약쟁이를 안쓰럽게 보던 내가 내심 흠칫했으나, 그건 잠시였다.
녀석은 곧바로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내 친구가 큰 실례를 저질렀어. 사과하지.”
“아뇨, 뭐… 괜찮습니다.”
“아니야.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약이라니, 한 번 된통 당해서 두 번 다시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말이지. 미안하다. 뭔가 보상이라도 해야….”
난 정말 괜찮은데.
그냥 빨리 돌아가서 오늘 딴 금화나 세며 쉬고 싶다.
그렇기에 무엇을 권하든 얼른 거절하고 돌아가려 했지만….
“아, 술을 좋아한다고 했지? 마침 여기 2층이 주점이거든. 내가 거기서 술이라도 살게.”
“!”
“마음껏 마셔도 좋아.”
우뚝.
모든 행동이 멈췄다. 어쩔 수 없다. 이건 본능과도 같은 것이니까.
“마…음껏?”
“그래, 마음껏.”
“…….”
이건 불가항력이다.
“데몬 님…?”
불길함을 감지한 듯 벤이 조심스레 나를 부른다.
핫, 그제야 간신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니야. 에드가 그렇게까지 말하고 갔는데 참아야지.
열심히 따라다니는 벤을 생각해서라도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해. 저런 악마의 속삭임에 현혹되어서는….
“순수한 사과의 뜻이니 부담가질 것 없어. 정 부담스럽다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딸 수 있는지 노하우라도 알려주면 좋고.”
“노하우 없습니다만.”
“아, 초면에 노하우를 캐는 건 너무 심했지?”
아니. 초면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없는데.
“그렇다면 일단 친해지는 것부터 하자고.”
묘한 장난기가 담겨 있어 더욱 친근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나는 장난스레 휘어지는 그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이 자식 선수네.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 능숙한 것이 눈에 척 보인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호감이 생겼겠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내게는 안 통한다!
‘……라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와 어깨동무를 하고 2층에 와 있었다.
당했다! 어째서?!
알면서도 당하다니, 나란 새끼는 도대체 뭐 하는 새끼냐?
밀려드는 자괴감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물론 내 머리는 소중하니 실행은 주먹을 꾹 쥐었다 편 것으로 대체했다.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야. 잘 생각해 보니 납득이 된다. 술을 안 마신 지 상당히 오래됐으니까.
특히 나 같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넘어갈 만도 했다.
그러니 다시는 이런 수법에 넘어가지 않도록 술을 좀 마셔둬야 겠….
“데몬 님….”
“윽.”
술에 눈이 멀어 방해꾼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나는 간절한 표정의 벤을 보며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차라리 왁왁대며 강압적으로 대했다면 최소한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느끼지 않았을 텐데, 저렇게 유순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으니 양심이 쿡쿡 쑤신다.
오히려 더 무섭기도 하고.
때문에 나는 혹여나 그의 기분이 크게 상할까 봐 눈치를 살피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타협을 시도했다.
“딱 한 잔만 마시겠습니다.”
“…….”
“취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그래! 취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거기 형씨도 한잔하지 그래?”
“……됐습니다.”
무거운 한숨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심 움찔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벤의 반응을 보아하니 오히려 기분이 상한 것 같다.
얻은 건 없고 호감은 깎였다니. 최악이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필이면 또 그걸 들은 건지, 벤이 움찔 몸을 떨며 이쪽을 빤히 쳐다본다.
“…….”
“…….”
한숨을 쉬어야 할 쪽은 이쪽인데 왜 당신이 한숨을 쉬냐고 묻는 듯한 눈빛.
어쩐지 숨이 막혀 나도 모르게 다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그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딱… 한 잔만입니다.”
“네?”
“아쉬우시겠지만, 그 이상은 다음을 기약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 같던 녀석이 허락의 말을 하다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내 귀가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은 아닐까?
머릿속에서 몇 번의 절차를 걸쳐 그 말이 진실임을 확인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간신히 흥분한 기색을 감추고 답했다.
“네.”
드디어!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판을 확인하려 하자, 마냥 흥미롭다는 듯 나와 벤을 번갈아 보던 녀석이 손을 들어 사람을 불렀다.
“메뉴판에 있는 거 전부 하나씩.”
시발, 사랑한다.
이건 너무 낭비가 아니냐 물으니 남으면 친구 놈들 줄 생각이란다.
세상에 이런 천사가 또 어디 있을까.
술은 금방 나왔다.
나는 벤의 우려 섞인 시선을 무시하고 신나게 병들을 훑었다. 그리고 급격히 우울해졌다.
‘이 많은 것들 중에 딱 하나만 맛볼 수 있다니.’
그것도 한 병이 아니라 한 잔이다.
섞어 먹는다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그 술만의 맛을 느끼기가 어렵다.
모처럼의 한 잔을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끝낼 수는 없기에, 나는 울 것 같은 심정으로 이걸 잡았다가 저걸 잡기를 반복했다.
그게 답답했던 모양이다.
“음… 고르기 힘들면 내가 추천해 줄까?”
“예?”
“쌉싸름한 맛을 좋아한다면 이거. 뒷맛이 깔끔한 걸 좋아한다면 이거. 달달한 걸 좋아한다면 이거. 목 넘김이 부드러운 걸 좋아한다면 이거. 그리고….”
설명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야… 너 이 자식….’
굉장한데?!
이 녀석도 어지간히 술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어쩐지 반가운 마음에,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길어지는 그의 말을 끊지 않고 묵묵히 끝까지 들었다.
옆에서 벤이 질린 표정을 하는 것 같았지만, 아무렴 어때.
지금 내게 있어 이 선택은 일생일대의 선택과도 같다. 그의 눈치 때문에 대충 선택하기에는 모처럼 주어진 기회가 너무 아까웠다.
그렇게 고심 끝에 간신히 하나를 택하고, 드디어 잔이 내 손에 쥐어졌다. 안에서 찰랑거리는 액체가 어쩜 이렇게 영롱하던지.
또 언제 마실 수 있을지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에 눈물을 머금고 홀짝이는데, 앞에서 같이 잔을 기울이던 녀석이 문득 입을 뗐다.
“좀 시끄럽지?”
“음?”
“거친 녀석들이 많아서, 술만 먹으면 싸움이 붙거든.”
“……아.”
한쪽에서 서로 주먹질을 해대는 사람들.
하지만 원래 술집에서는 싸움이 일상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가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그곳에는 살벌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드잡이를 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둘 중 누가 이길지 내기할래? 아, 물론 옆에 형씨도 같이.”
“전 됐습니다.”
“에이, 빼지 말고오.”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벤에게 슬그머니 어깨동무를 한다.
나는 그제야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건지 알 수 있었다.
반쯤 비워진 잔에 다시 채워지는 술.
어깨동무로 시야를 좁히고, 내게 다시 술을 따라준 것이다.
마족에게는 욕설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천사 같은 마족이 다 있을 수가.’
서둘러 잔을 비우자, 다시 술이 채워진다.
또 마시고, 다시 채우고, 마시고, 채우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기억이 끊겼다.
***
웃음은 실없지만, 붉은 눈동자는 또렷하다.
표정은 풀어졌지만, 움직임은 여느 때보다도 빈틈이 없었다.
위험하다.
본능이 마구 경종을 울린다. 온몸을 엄습해오는 두려움에 잠시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랬던 벤이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은, 그가 무려 술 세 병을 비우고도 반이나 더 마셨을 때였다.
얼어붙은 시간이 깨어지듯,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내렸다.
떨고 있었던 모양이다. 테이블 밑의 두 손이 아직까지도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말리지 못했다.’
처음 취한 것 같았을 때, 말릴 수 있었음에도 술 세 병 반을 해치울 때까지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때 가장 본능이 강렬하게 위험을 고하고 있었으니까.
분명 겉보기에는 가장 만만해 보이는 순간인데, 어째서.
그러나 마왕과 함께하며 오랜 시간 전투를 겪어온 벤은 눈보다는 감을 믿는 것이 수명 연장에 더욱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 담당 환자가 새 술을 따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 아하핫….”
안주도 없이 연거푸 술만 마셔댄 탓에 처음 또렷하던 붉은 눈동자가 조금 흐릿해졌다.
그가 테이블에 얼굴을 비비며 헤실헤실 웃는다. 그 탓에 옆에 늘어서 있던 병 중 하나가 툭 쓰러졌다.
‘……그새 빈 병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역시나, 병 네 개가 주르륵 늘어서 있다.
쓰러져서 테이블 위를 구르고 있는 것까지 합하면 총 다섯 개.
그새 병을 더 비우다니.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른 것 아닌가.
빳빳이 서 있던 촉이 조금 누그러졌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지났다는 의미.
그럼에도 벤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조금 누그러졌을 뿐이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여전히 눈앞의 상대를 향해 있는 그의 촉은, 이제 다른 의미로 긴장해야 함을 알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적이야아?”
“아닙니다.”
“그럼 네가 적이야아아?”
“그자도 아닙니다.”
“누가 적이야아?”
“지금 여기엔 없습니다.”
“너어, 적이야아아아?”
“아닙니다.”
술주정이 시작됐다.
취하지 않을거라면서요….
벤이 조용히 얼굴을 감쌌다. 그 와중에도 데몬의 질문은 계속 반복되고 있어 더욱 참담했다.
괜히 허락했다. 막심한 후회가 밀려왔다.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자칫했다간 뭔가 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아 눈 딱 감고 한 잔만 허락했는데.
‘허락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마왕의 조커. 마지막 용사를 죽인 마왕군의 자랑스러운 0군단장 데몬 아루트는.
벌써 20분째 같은 질문과 답을 무한 반복하는 중이었다.
잔뜩 취해 헤실거리는 저 인간에게 왜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느냐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에 대해 전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 만만해 보이겠지. 실없어 보이겠지. 그럼 어디 한 번 저 질문에 긍정을 해보시든가.
저 ‘적이야?’라는 질문.
그에 대답을 못 하거나 긍정을 하면, 0군단장은 언제 웃었냐는 듯 돌변해 단검을 들고 마구 달려들기 시작한다.
그런 경우 최소 중상, 심한 경우에는 시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난자당해 죽곤 했다.
그러니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 이곳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수습도 힘들다.
‘다행히 아직 1단계 수준이긴 한데….’
그의 술주정은 세 개의 단계로 나뉜다.
1단계 질문, 2단계 의심, 3단계는 추궁.
1단계에서 ‘적이야?’라는 질문에 부정을 하면 그냥 넘어간다.
2단계에서는 그 뒤에 ‘왜?’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그때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공격이 시작된다.
3단계는 그냥 학살의 시작이라고 보면 된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면, ‘왜?’라는 질문에 ‘데몬 님은 마왕군이십니다. 저 역시 그렇고요. 그러니 적이 아닙니다’라는 의견을 내세웠다 치자.
2단계에서는 그냥 넘어가지만, 3단계에서는 ‘그게 왜? 배신할 수도 있고, 스파이일 수도 있잖아?’ 하고 다시금 추궁하는 것이다.
그에 그저 부정하는 것 빼고는 뭐라 답하겠는가. 황당함에 말문이 막혀버리거나 단순한 부정만을 반복하면 ‘역시 적이구나’ 하고 공격을 가해 오니 당사자로서는 미칠 지경이다.
‘3단계만큼은 절대 안 돼.’
그런 생각으로 단단히 각오를 하고 새 병에 손을 뻗는 데몬의 손을 제지했다.
탁한 붉은 눈이 도르륵 굴러가 저를 담는다.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은 명백한 불만.
살기도 분노도 아닌 그저 불만이다. 그럼에도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것처럼 잠시 굳어버린 벤은, 마른침을 삼키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