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67
67. 선전포고(2)
상처를 어루만지듯 느릿한 손길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금방이라도 내 목을 잡아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그저 가만히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낙인은…….
‘저주 같은 게 아니란 말이지.’
물론 마왕이 한 것은 맞긴 하다. 다만 제국 쪽 인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몸이 약해지고 뭐 그런 저주스러운 용도는 아니었다.
누누이 말했다시피 내 몸은 외부의 영향을 받아 약해진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약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 낙인은, ‘위치 추적’ 마법이다.
생각해보라. 마왕이 뭘 믿고 날 순순히 인간계로 보내겠는가.
아무리 마계에서 잘해준다 해도 결국 나는 고향이 ‘인간계’인 인간이다. 별다른 불평불만 없이 순순히 마계에 머문다지만 인간계를 보게 되면 흔들릴 만도 하지 않나.
그렇기에 마왕은 내가 인간계로 갈 때면 언제나 위치 추적 마법을 걸곤 했다.
‘처음 마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제국으로 갈 때도 그랬지.’
용사의 시신을 힘겹게 고쳐 안고 제국에 다녀오겠다 했을 때, 마왕은 내게 위치 추적 마법을 걸었다.
말로는 내 안전을 위해서,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 라지만…… 결국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찾아가겠다는 뜻이 된다.
완벽하게 코가 꿰여버린 나는 차마 뭐라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비척비척 용사의 시신을 끌고 제국으로 돌아갔고, 용사의 시신을 둘러메느라 엉망으로 흐트러진 옷차림을 자각하지 못한 채 황제를 비롯한 제국의 주요 인사들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무리하게 체력을 소모한 탓에 용사를 내려놓자마자 울컥 피를 토하고 말았다.
당시 나는 내 몸을 추스르는데 집중한 터라, 저들의 시선이 내 얼굴을 비껴가 좀 더 아래에 멈춰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전에 없던 검은 낙인, 그리고 각혈. 싸늘하게 식은 용사의 시신과, 이를 수습한 그의 동료.
그들의 생각이 ‘마왕의 저주’에 미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듣지 않고, 그렇다고 마왕군 군단장이 되었다고 대놓고 말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는데…….’
이제는 들키지만 않길 바랄 뿐이다.
황제까지 속인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계에 돌아갈 핑곗거리가 필요했으니까.
사지 멀쩡한 내가 마계에 다시 가야겠다고 하면 도대체 뭐라 생각하겠는가. 당연히 ‘이 새끼가 대놓고 배신하겠다 이거지?’ 하는 생각부터 들지 않겠나.
그렇기에 나는 저주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풀기 위해 마왕 곁에 있어야 한다는 설정을 살짝 집어넣었다.
고로 해명하기엔 너무 늦었다.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농락당한 것이 되어버린 황제가 친히 내 목을 댕강 썰어버리겠지. 장담한다.
그렇기에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노력하겠습니다.”
다음번엔 저주가 풀린 상태로 만났으면 좋겠다는 상대를 향해, 애초에 저주에 걸린 적도 없는 사람이 답했다.
***
“하르트 영지라…… 의외로군요.”
이건 내게도 별 쓸모없는 땅인데. 물론 손익을 따져보면 손해보다는 이득에 가깝긴 하지만…….
공작 스타베 일루스터가 늘 그렇듯 별 대답 없는 크루엘을 힐긋 눈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황궁 복도에서 하르트 명예 백작을 만났을 때, 그가 영지를 반납하고 싶어 왔다고 했던가요.”
그때 그 자리에 크루엘 하르트도 있었다.
아니지. 그가 먼저 그 자리에 있었고, 자신이 뒤늦게 도착했다. 그리고 데온 하르트와 대화를 나눴었지.
[백작도 폐하를 뵈러 왔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 최근에 받은 영지에 관해 청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부족해서 그렇습니까? 크기가 작다거나, 땅이 척박하다거나.] [아뇨, 그저 영지를 반납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거 흥미롭군요.]말로만 흥미롭다 했을 뿐 굳이 그 영지가 무엇인지 조사는 하지 않았지만, 크루엘이 개인적으로 조사하려 했다면 알아내지 못할 것도 없다.
그때 그 대화에서의 ‘영지’가 바로 이 ‘하르트 영지’는 아닐까?
눈을 가늘게 뜨고 크루엘의 표정을 샅샅이 뜯어보던 공작이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조금 뒤에 있을 회의 탓에 예민해진 모양이다.
단지 하르트 영지가 제 가문을 무너뜨린 이의 손에 있는 것이 불쾌했을 뿐이겠지.
‘설마 데온 하르트를 위해서겠어?’
거기까지 생각한 공작이 크루엘을 향해 싱긋 웃었다.
늘 그렇듯 상냥하게 눈을 휘어 보인 그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질책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번 일은 단순히 경에게 포상을 주기 위한 가벼운 이벤트였을 뿐이니.”
“…….”
“그 밖의 특이 사항은 없습니까?”
[개새끼가아아아아아!!]당시의 외침과 데온의 태도를 떠올린 크루엘이 굳은 듯 딱 붙어 있던 입술을 천천히 뗐다. 녹색 눈동자가 바닥을 향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딱히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
“알겠습니다. 선물은 고맙게 받지요. 원한다면 하르트 영지의 모든 관리 권한을 경에게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크루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들끓는 분노가 압축된 ‘개새끼가’라는 거대한 외침이 고막을 뒤흔드는 듯해서, 그는 무심코 데온이 배후를 눈치챘던 그때의 그 상황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주 그냥 날 갖고 노느라 즐거우셨겠어? 안 그래? 이 개새끼야!!]온갖 욕설이 쏟아진다. 크루엘은 ‘공작’이란 말이 나온 그 순간부터 얼어붙은 지 오래였다.
눈치챘다.
이러라고 창문을 열어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적당히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고 떠나길 바랐는데, 설마하니 배후의 정체까지 유추해낼 줄이야.
‘그러고 보니 어릴 때 제법 영특했었지.’
전혀 기쁘지 않다.
한쪽 팔로는 여전히 아이를 들쳐멘 채 다른 손으로 허리춤을 더듬어 검 손잡이를 잡았다.
‘공작이라면…….’
배후를 눈치챈 이 아이를 죽이길 바랄 테니까.
카앙! 불꽃이 튀었다.
불편한 자세에서 용케 데온의 공격을 막아낸 크루엘이 힐긋 붉은 열기가 가득한 내부와 제 동생을 번갈아 보고는 서둘러 걸음을 뗐다.
1초라도 빨리 이 뜨거운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속도를 높이며, 크루엘은 조용히 데온에게 속삭였다.
데온은 여전히 욕을 내뱉으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살고 싶다면 이곳에서 알게 된 것들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너는 영특하니 말해선 안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겠지.
그리고 데온의 단검이 재차 옆구리에 내리꽂히려는 순간, 문을 열고 나간 크루엘은 눈앞에 보이는 리엔이라는 동생의 기사를 발견하고 곧장 데온을 던졌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는 크루엘을 조용히 살피던 공작 스타베가 자연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그리고 사에린.”
“네, 공작님.”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구석에서 둘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구원교의 총괄이라는 귀찮은 일을 기꺼이 해낸 여자. 공작은 그녀를 향해 달큰하게 눈을 휘어 보였다.
“수고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한 박자 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공작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아주 은밀하게 물 밑에서 움직이세요. 황제에게 걸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교에서 걸러내고 걸러내어 남은 진실된 신도들을 앉혀놓고 세뇌하듯 가르치는 말이 있다.
황제는 죄악이요, 공작은 구원이다.
공작은 구원이다.
‘스타베 일루스터는 구원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교의 목적이다.
공작, 스타베 일루스터에게 맹목적인 사람들을 만드는 것.
겸사겸사 황제를 향한 민심을 악화시키기도 하고.
“맡겨주세요.”
“든든하군요.”
한 번 웃어준 뒤 몸을 돌렸다.
여자의 존재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크루엘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이만 가죠. 회의에 늦겠습니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에서 일정 간격을 두고 따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앞서 걷는 공작의 눈은, 조금 전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공작이 회의장에 들어섰을 땐, 이미 황제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모여있는 상태였다.
귀족파와 황제파. 척 보기에도 두 부류로 완벽히 갈려 앉아있는 모습.
그 모습이 제법 우스웠으나, 공작은 자연스럽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짐짓 부드러운 인사말을 꺼냈다.
“제가 늦은 모양이군요.”
귀족파의 수장이자 황제 다음가는 권력자가 꺼낸 말이다. 귀족파의 이들이 앞다투어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들어오시지 않았으니 아직 회의는 시작한 것이 아니지요.”
“딱 좋을 때 오셨습니다.”
“아직 의제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기 앉으시지요.”
공작이 안내에 따라 귀족파 자리 중에서도 황제와 가장 가까운 자리인 상석에 앉는다.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태도에 황제파 이들의 얼굴이 찌푸려졌으나 딱히 뭐라 하지는 않았다.
원칙대로도 그가 저 자리에 앉는 것이 맞으니까. 단지 저 인간 자체가 원체 재수 없다 보니 무슨 짓을 해도 못마땅해 보일 뿐이다.
“……갑작스러운 회의라니. 무슨 일인지 걱정이 되는군.”
“무엇인지는 몰라도 중요한 일이겠지요. 폐하께서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큰 회의를 여셨을 리가 없잖습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야, 전쟁이지.
여태껏 황제를 봐온 주제에 아직까지도 감을 못 잡고 있다니. 공작은 입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앙큼하게 예산안을 따로 작성해둘 때부터 이런 상황이 올 것은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
아마 예산안 작성을 모르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리 회의를 소집한 이상 ‘전쟁’과 관련된 내용일 것은 충분히 예측했을 것이다.
‘그’ 황제이지 않은가.
제 핏줄을 모조리 베어 넘기고 올라온 자가 군주로서의 자격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쥐고 있던 검 끝을 외부로 돌리는 것이다.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그것이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고, 또─’
─패륜황제보다는 정복황제로 기억되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까.
‘정복황제는 그래도 영토를 넓혔다는 칭찬 거리가 있으니…….’
“공작 각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 말입니까?”
문득 던져진 질문에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귀족파는 물론, 황제파조차 자신의 대답이 궁금하다는 듯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예,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글쎄요. 폐하의 깊은 속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아…….”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다.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의뭉스러운 몸짓과는 달리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이들이 아니다. 저들의 눈에는 미묘한 확신과 의심이 서려 있었다.
이쯤에서 적당히 응해줘야겠지.
여전히 의뭉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공작이 흘리듯 툭 덧붙였다.
“다만 최근 들어 이레온 왕국이 계속 시비를 걸고 있다던데,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지.”
회의장에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이 기꺼워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것도 잠시, 조심스러운 부름에 공작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 말은…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저 추측일 뿐이지요.”
대놓고 긍정하진 않았지만 부정은 결코 아니다.
긍정의 의미가 가득한 대답에 회의장의 사람들이 입을 다문 순간, 문밖에서 황제의 등장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서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네메세우스를 대동한 황제가 들어선다.
걸릴 것 하나 없다는 듯 정면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는 걸음과 그의 사나운 기세에 움찔한 것도 잠시, 모두의 입에서 일괄된 인사가 흘러나왔다.
“제국에 광명을.”
“모두 앉지.”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척 듣기에도 심기 불편한 목소리에 자리에 앉은 이들이 반사적으로 황제의 표정부터 살폈다.
무표정.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느낌의 무표정이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수틀리면 목부터 날아가는 황궁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눈치껏 황제의 기분을 파악하고 내심 마음을 다잡았다.
입 잘못 놀리면 죽는다. 최대한 다물고 있자.
“일단, 바쁜 와중에도 갑작스러운 회의에 참여해 준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야, 몇 년 전에 한 명이 바쁘다는 이유로 불참했다가 작위를 잃은 적이 있으니…….
“모두 각자의 일을 하다가 급히 왔겠지. 그 점을 감안해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
“지금부터 삼일 뒤, 짐은 전쟁을 선포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