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93
93. 속고 속이고, 이용하고 이겨내고(1)
그녀라면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 눈치챘겠지.
아니나 다를까, 망설임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명확한 답이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이 어찌나 유능한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눈에 담았다. 맹목적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저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공작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책상을 돌아 나와 사에린의 앞에 선 그가 살짝 허리를 숙여 부드러운 몸짓으로 그녀의 손을 받쳐 든다. 시선이 마주치고, 보라색 눈이 아름답게 휘어졌다.
이어서 그의 고개가 낮아지며 느슨하게 묶어 둔 보라색 머리칼이 그녀의 손등을 스치고 주위에 커튼을 만든다. 그 사이에서, 공작의 입술이 나붓이 손등에 내려앉았다.
귀족 영애를 향한 예법.
평민인 사에린의 눈이 커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차마 손을 빼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채 눈만 굴리고 있자니 공작이 담백하게 고개를 든다.
그린 듯한 미소가 오롯이 그녀를 향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아뇨, 당연한 일인 것을요.”
사에린이 서둘러 맡은 임무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뜨고, 뒷모습을 지켜보던 공작이 조용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사에린은 성공할 것이다. 혁명군 사이를 이간질해 그들 중 일부를 황제에게 보내겠지. 다니엘이라는 머리도, 압도적인 수도 없는 이상 그들은 황제의 먹잇감일 뿐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으니 마냥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겠지.
사에린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의심하는 쪽은 다름 아닌 황제.
‘자칫 그들의 손에 죽기라도 하면 곤란해.’
황제는 언제나 죽지 못해 살고 있었으니.
관건은 황제의 생존 욕구다. 조금이라도 그가 살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마침 얼마 전에 황제가 황궁에 돌아왔댔나.’
황제가 주야장천 황궁을 비우고 있을 수는 없다.
아무리 황태자가 일 처리를 잘하고 있다 해도 현 제국의 황제는 에도아르도 데세르트이기에 그는 간혹 조용히 황궁에 돌아와 일들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그러니 지금 황궁에 가면 황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체할 것 없이 바로 마차를 준비하라 이른 공작이 집무실을 성큼 나섰다.
***
사에린은 굳이 따지자면 혁명군을 응원하는 쪽이었다.
공작을 향한 마음에 평민이라는 신분의 벽. 그런 상황에서 신분제 자체를 없애겠노라 주장하는 혁명군의 사상은 실로 매혹적이었으니.
그러나 그 사실이 외부로 표출되는 일은 없었다.
지금, 공작을 사랑하기에 혁명군을 지지한 그녀는.
공작을 사랑하기에 혁명군을 부수러 가는 중이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그가 그것을 바라고 있으니까.
“안녕하세요, 아이덴 씨.”
“아, 사에린 님.”
“수장이 돌아왔다면서요? 그는 어디에 있죠?”
“뻔하죠. 어머니를 만나러 갔을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말꼬리에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상황이 상황인데 정신도 못 차리고 자리만 비우고 있으니.”
“그러게요.”
이건 이용해 먹을 수 있겠다. 사에린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럼 생각해 보자. 아이덴의 성격은 어땠지? 그는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나? 욕심이 많다면 재물과 권력 어느 쪽? 그는 어떤 목적으로 혁명군에 들어온 거지?
이용하기 쉬운 성격이고, 이용 가치가 충분한가?
“그는 도대체 언제 거사를 치를 생각일까요?”
“모릅니다. 언제까지 미룰 생각인지.”
“이런. 공작님께서도 슬슬 혁명군이 움직이길 바라는 눈치시던데. 이건 아이덴 씨의 의견과는 상관없는 수장의 독단적인 선택인 거죠?”
“물론입니다. 저희도 답답해 미치겠다고요.”
“거사를 미루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고 계신가요?”
“이유야 늘상 같죠. 준비가 덜 되었다든지, 타이밍이 아니라든지.”
“이건… 핑계에 가까운 것 같네요.”
한쪽 뺨을 감싸 고개를 기울이며 의뭉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리듯 질문을 던진다.
“아이덴 씨는 생각해 보셨어요? 왜 수장이 거사를 미루는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군요.”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의문을 친절히 짚어 주고.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아무래도 수장은 지금의 자리를 잃기 아쉬워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
“그렇잖아요? 수많은 왕국 출신들이 모인 거대한 하나의 연맹. 그 연맹의 수장. 황제를 처리하면 새로운 바람이 불어 흩어질지도 모르는 권력이니 아쉬울 만도 하죠.”
독을 속살거린다.
아이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만이라는 땔감에 불이 붙어 또 하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탄생시킨다.
사에린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불이 꺼질세라 부채질을 서둘렀다.
아이덴에 대해서는 대화를 나누며 파악했고, 서류상에 기록된 내용 역시 기억해 냈다.
그는 재물, 권력 따지지 않고 통틀어 욕심이 많은 인물이다. 그가 혁명군이 된 이유는 황제를 죽이고 싶다는 이유와, 혁명군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서.
혁명이 성공하면 참여했다는 것을 강조해 명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명성이 높아지면 뒤따라오는 것들도 많을 테니까.
휘두르기도 쉬운 인물이며, 혁명군에서 제법 큰 세력을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이용 가치 역시 충분하다.
그럼 이제 움직여야 할 때다.
뭐를? 혀를.
“그래서 말인데요, 아이덴 씨가 황제를 처리하고 새 나라의 중심이 되는 것은 어떨까요?”
“혁명군은 모두가 평등한….”
“말은 좋죠. 하지만 그런 꿈같은 세상이 어디에 있겠어요. 애초에 황좌 자체를 없앤다는 건 터무니 없는 주장이었어요. 아니,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결국 나라를 이끌 핵심 인력은 필요하죠.”
‘머리가 좋은’ 사에린은 ‘평민’이다.
좋은 머리와 평민이라는 출신은 주어진 사상을 비틀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악’은 고려하지 않은 ‘이상’에서 좀 더 인간의 욕망이 포함된 ‘현실’로 끌어내렸다.
이상은 어디까지나 이상이다.
이 사상을 누가 떠올렸는지 몰라도 아마 크게 고생 않고 자란 어딘가의 귀족 학자이거나 머릿속이 꽃밭인 긍정적인 사람이겠지.
평민이기에 길에서, 시장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서 인간의 크고 작은 악의를 느끼게 되는 사에린으로서는 그것이 의도대로 진행될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것은 혁명을 일으키고 그에 동참한 이들조차 그러할 테니까.
“아이덴 씨의 세력을 이끌고 황제를 죽이세요. 그리고 그 공으로 혁명군의 중심이 되어 신분제를 없애는 대신 나라를 이끄는 수뇌부에 포함되는 거죠.”
“…….”
“조금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 볼까요? 수뇌부만 빼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거예요. 여기서 아이덴 씨가 ‘황제를 죽였다는 상황’을 잘 이용하면 그 수뇌부조차 아이덴 씨의 손으로 뽑을 수도 있겠죠.”
이를테면 ‘제가 이 일을 성공하는데 큰 도움을 준 이들은…’ 하고 언급한다든가. 황제를 주도하여 죽인 이의 말이니 아마 대체로 존중되리라.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즉석에서 떠올린 것들이었다.
“공작님께서도 하루빨리 거사가 이루어지길 바라고 계셔요. 그러니 적극적으로 돕지는 못해도 황제의 일정 정도는 구해 주실 겁니다.”
물론 아이덴이 황제를 죽일 가능성은─
“……확답이 필요합니다.”
0%.
사에린은 생긋 웃었다.
“황제의 일정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이거면 된 거다. 사에린은 조용히 제 손등을 매만졌다. 공작의 입술이 닿았던 그곳은 아직도 감촉이 선연해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공작은 지금도 충분히 그녀를 존중하고 있었다.
……공작은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만약 한번 쓰고 버릴 존재로 여겼으면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즉시 침실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편이 훨씬 이용하기 편하니까.
실제로 그는 제게 마음이 있는 이들 중 쓰고 버릴 패로 여기는 이들은 남녀 구분 없이 침실로 끌어들이곤 했다.
때로는 그들이 괜히 부럽기도 했지만, 공작이 누구를 더 중히 여기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기에.
사에린은 망설임 없이 짧게나마 꾸었던 꿈을 버렸다.
***
갑작스러운 알현 신청은 당연한 것처럼 빠르게 받아들여졌다.
황궁의 사용인들이 놀라는 반면, 공작은 황제가 필히 그러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이를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시종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야, 정적의 말을 듣지 않는 것보다는 어떤 헛소리일지라도 일단 들어 두는 것이 나을 테니까.
더 나아가 심리전에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상대의 속을 떠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광오한 황제가 이를 피할 리 없었다.
“제국에 영광을. 신 스타베 일루스터가 현재의 제국을 뵙습니다.”
“그래, 공작. 무슨 일이지?”
공작은 대답 대신 황제를 쳐다보았다. 정확하게는 얼굴 바로 아래까지만.
피곤한 듯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비스듬히 앉은 황제가 딱 최소한의 예의만 지킨 건방진 공작을 불쾌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황제의 매서운 눈빛보다 더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손은 어쩌다 그리되셨습니까.”
“공이 신경 쓸 것 없다.”
팔걸이에 걸쳐져 있던 흰 붕대가 감긴 왼손이 지그시 주먹을 쥔다.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살폈다.
‘전쟁터에서 다친 건가. 도대체 얼마나 활개 치고 다녔길래.’
상처의 규모를 확인하기 위해 꼼꼼히 살폈으나, 그가 온다고 붕대를 새로 갈았는지 피 한 방울 내비치지 않은 깨끗한 흰 붕대는 부상의 정도를 철저히 감추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쉽게 약점을 보일 리가 없지.’
공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릴 때, 서늘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순순히 상처를 살피는 것을 두고 보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붙드는 목소리.
“지금 짐의 상처를 보겠다고 온 것인가, 공작?”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폐하.”
그래, 이제 입을 놀릴 차례다.
황제가 혁명군의 손에 죽지 못하도록, 이 말을 하는 자신을 죽이지 못하도록─
지그시 감겼던 눈이 뜨였다. 바닥을 보던 자안이 천천히 올라가 황제의 가슴께에서 멈추는가 싶더니, 더 올라가 금안을 똑바로 마주한다.
맹수를 닮은 금안은 여전히 맹렬했으나 눈 밑의 그림자는 숨길 수 없는 피로를 담고 있었다.
황제는 그에게 제 얼굴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멋대로 고개를 들고 자신의 얼굴을 본 공작을 무어라 질책하지도 않았다.
다만 알현실 전체에 낮게 살기가 깔렸을 뿐.
검과는 거리가 먼 공작으로서는 버티기 힘들 법한 살기였으나, 그는 끝끝내 버티고 서서 깊숙이 묻어두었던 진실을 끄집어냈다.
“현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의 아버지이자 폐하의 형님이었던 전 1왕자의 죽음을 기억하십니까.”
그 많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를 챙겨 주었던, 온화한 성격의 한 남자.
다행히 황제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도, 그렇다고 검을 빼 들지도 않았다.
그저 붕대를 감은 왼 손등을 툭툭 두드리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나직이 주위에 물러가란 명을 내렸다.
“경들도 물러가도록.”
“하오나 폐하. 장군님이….”
“네메세우스에겐 짐이 직접 말해 두지.”
“…….”
“일루스터 공이 짐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물러가겠습니다.”
기어이 호위까지 물린 황제가 공작을 쳐다봤다. 더욱 낮아진 목소리가 침착하게 흘러나왔다.
“그라디스 공작이 죽였다고 알려졌으나 실은 공이 죽인, 그 사건을 말하는 것인가.”
“잘 알고 계시는군요.”
“미쳤군.”
진실을 알았을 때, 황제는 이를 덮어야 했다.
이미 그라디스 공작가는 멸문했으니까. 그것도 1왕자 시해를 이유로 가문의 이름이 완전히 지워졌는데, 이제 와서 사실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황제만이 타격을 입는 것이 아니라 공작 역시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서 인정하다니.
“이제 와서 언급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무슨 속셈이지?”
“제가 왜 그분을 죽였는지 연유가 궁금하지는 않으신지요.”
“…….”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해 그랬습니다.”
공작의 자리로 만족할 줄 알았던가.
공작위에 올랐으면 황제의 자리를.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면 발밑에 일통한 대륙을.
스타베 일루스터는 그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