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95
95. 속고 속이고, 이용하고 이겨내고(3)
재상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번이고 말을 꺼내려 입을 열었으나 다시 닫았고, 받은 충격을 삭히기 위해 제 얼굴을 연신 쓸어내렸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죽음을 가정한 말을 지적해야 하는 걸까, 무려 황제의 육신을 ‘고깃덩어리’로 치부한 것을 지적해야 하는 것일까.
황제는 제 죽음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을 것임을 상정하고 있었다. 아마 전쟁터에서 목이 떨어졌을 때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목구멍까지 치민 말은 많았다.
말이 너무 과격하십니다. 어찌하여 죽음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겁니까. 본인이 곧 제국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등등.
그러나 침묵 끝에 간신히 입 밖에 나온 말은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최소한 망토는… 벗어 두고 가십시오. 전투용 망토가 아니지 않습니까. 시선을 끄는 데다 활동에 방해가 될 겁니다.”
황제는 피식 웃었다.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붉은 망토의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이내 말 위에 훌쩍 올라타며 흘리듯 말했다.
“황제로서의 몇 안 되는 증거를 그리 쉽게 벗어 던져서야 쓰나.”
…….
홀로 말을 타고 검 한 자루 찬 채 황궁을 빠져나와 능숙하게 숲을 달리던 황제가 힐긋 눈동자만 굴려 어느 한 곳을 쳐다봤다.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쥐고 있던 말 고삐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황제의 뜻을 읽은 말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자리에 멈춰 선다. 황제는 훌쩍 아래로 뛰어내려 말 등을 한차례 토닥이고는 쉬려는 듯 나무에 다가가 기대앉았다.
다리를 꼬고 몇 초간 하늘만 바라보길 잠시, 나무에 뒷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은 그의 입이 열렸다.
“망각을 경계하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
“과거를 망각한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마련이지. 짐 역시 그리 긴 삶을 살진 않았기에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다만, 최근 들어 이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되더군.”
바닥에 핀 들꽃들을 손으로 살짝 쓸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텅 빈 목소리가 나무 사이로 허무히 흩어졌다.
“참으로 놀랍더군. 8년 전쟁을 직접 겪은 이들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을진대, 벌써 망각의 괴물에 먹힌 자들이 나타날 줄이야.”
아직 세대교체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말이지.
건방졌던 이레온 왕국을 예시로 들며 눈가를 꾹꾹 누르던 황제가 꼬았던 다리를 풀며 들고 있던 검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흰 붕대가 감긴 왼손이 풀이 자리 잡은 바닥에 놓이고, 오른손이 품에 들어갔다 비수를 쥐고 나온다.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에 ‘그들’이 반응하지 못한 찰나의 순간, 일이 터졌다.
푸욱!
“……!”
침묵 속에 동요라는 감정이 섞여들었다.
자신들 중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닌 다름 아닌 황제 본인의 손등을 꿰뚫은 비수를 보는 이들의 눈에 혼란이 스민다.
적들의 감정 상태가 어떻건 황제는 그저 무표정으로 비수를 뽑아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좀 낫군.”
기껏 깔끔하게 갈아 놓은 흰 붕대가 다시 붉게 물든다.
고통은 뒷전이었다.
내내 시야에서 걸리적거리던 검은 망령들이 사라졌음에 그의 얼굴에 표시 없는 만족감이 깃들었다.
비수를 다시 품에 집어넣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왼손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채 오른손엔 검집을 쥐고 주위를 산책하듯 거닌다.
그의 걸음이 지나가는 곳마다 흔적을 남기듯 붉은 자국이 바닥에 피어났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그래, 망각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 그러니 이참에 묻지. ─그대들은 에도아르도 데세르트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 아는가.”
걸음을 멈췄다. 피가 흐르는 손을 들어 나무에 핀 꽃을 매만졌다.
어여쁜 꽃잎에 피가 묻어나고,
질문이 이어졌다.
“8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장의 주역 중 하나가 누구인지 아는가.”
용사의 파편을 지닌 또 하나의 이름 없는 영웅이 누구이며,
“짐이 어째서 비밀 호위를 두지 않는지─ 알고 있는가?”
보아라, 망각이란 이리도 두려운 것이다.
반역이 있었을 당시의 황제를 알고 있다면, 8년 전쟁 당시의 황제를 기억하고 있다면, 최소한 현재 전쟁터에서의 황제가 어떤지 조사라도 했다면.
그랬다면 저들은 감히 어설프게 황제를 노려 오지도 않았을 텐데.
피를 듬뿍 먹어 본연의 색을 잃은 꽃을 매만지며 황제가 낮게 웃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꽃잎을 만지던 손이 나무와 연결된 줄기로 내려간다.
이 꽃이 본래 무슨 색이었더라. 보라색이었다.
……그래, 보라색.
마치 누군가의 목을 따듯 거침없이 줄기를 뚝- 꺾어 들었다. 향기를 맡듯이 꽃에 코를 가져다 댔으나 느껴지는 것은 짙은 혈향뿐.
꽃향기를 맡듯 눈을 내리깔고 있던 황제가 그 자세 그대로 천천히 시선을 움직인다. 눈 밑 짙은 그늘과 달리 생생하게 번뜩이는 금안이 정면을 향하고, 정확히 어딘가에서 멈춘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짐이 우습더냐.”
툭. 꽃이 떨어지는 것을 신호로 전투가 시작됐다.
번개처럼 검을 뽑아 든 황제가 떨어진 꽃을 짓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빈 검집이 바닥을 나뒹굴고, 숲 어딘가에서 피가 솟구쳤다.
적들 중 한 명의 머리가 떨어졌다.
당황한 이들이 급히 쥐고 있던 무기를 들어 대응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죽음을 미루는 것에 불과했다.
피처럼 붉은 망토가 펄럭인다. 아니, 어쩌면 정말 피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시야에 붉은색이 일렁인 참이면 반드시 누군가의 머리가 떨어졌으니. 그러면 또다시 붉은색이 시야에 점철되고, 공포 어린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자, 잠깐….”
“그 옷차림, 그 문양. 확실히 알고 있다. 혁명군이었지. 짐이 기억하기로 그곳의 수장은 이리 멍청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독단인가? 앞으로 혁명군은 걱정할 필요 없겠어.”
서걱.
“아, 으아, 아아아….”
그제야 이들은 떠올리고 만다.
‘황제’와 ‘폭군’이라는 칭호에 가려졌던 그의 재능을. 용사의 파편을 지닌 이들 중에서도 재능이 유독 뛰어났던 자의 이름을.
“아아….”
“사, 살려….”
그의 검술은 거침없고 맹렬했으며 한편으로는 호쾌했다.
한 손으로 장검을 쥐고 휘두르는 자유로움. 눈앞에 산이 있다 하더라도 그대로 베어 버릴 듯한 강렬한 기세.
검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누군가의 신체 어딘가가 깔끔하게 잘려나가며 허공에 피가 비산한다. 바람을 타듯 가볍게 움직이다가도 상대를 베어내기 위한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에 강한 힘을 담아 단번에 휘둘러지는 검은 많은 이들을 베었음에도 피 한 방울 묻지 않고 깨끗한 은빛 검신을 자랑했다.
구경하는 입장이었다면 그 시원스러움에 되레 카타르시스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황제를 보고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의 적이었다.
“어째서 공작이 오늘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군. 혁명군과도 연관이 있었던 것인가.”
수장이 의도한 것이 아닌 듯한 계획. 그럼에도 저들의 손에 들어간 황제의 일정.
공작이다. 공작이 아니고서야 이 어설픈 이들이 황제의 일정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리 목숨 걸고 저를 도발한 이유라면….
‘저들의 손에 짐이 죽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겠지.’
모순적인 행동임에도 황제는 어쩐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공작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황제가 혁명군의 손에 죽어서는 안 될 테니까. 공작은 더 높은 자리와 권력을 노리는 것이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바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혁명’은 절대 성공해서는 안 될 테고. 동시에 점점 커 가는 혁명군의 세력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감히 짐을 이용해?”
하지만 이것 역시 물증은 없겠지.
사납게 웃은 그가 재차 검을 휘두른다. 거추장스러운 옷차림을 한 채 황제는 잘도 움직였다.
누군가 용기를 내 손을 뻗어 그의 망토를 잡아당겼으나 황제는 휘청거리거나 끌려가는 대신 도리어 역으로 상대를 끌고 온 뒤 검을 찔러 넣었다.
깊숙이 찔렀던 검을 뽑자 피가 튀며 그의 움직임에 맞춰 망토가 펄럭이며 떴다가 가라앉는다.
“배후는 필요 없다. 굳이 심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으니.”
살려 두어야 할 이유가 없고, 살려 줄 생각도 없다. 도망친다 하여 놓쳐 줄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그를 죽이는 것, 하나뿐이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날, 혁명군의 전력 중 1/9이 증발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달받은 수장 다니엘은 기껏 보충한 전력이 다시 원점이 되었음에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녀석이 혼자 황제의 일정을 구했을 리가 없어. 그 정도의 능력이 없거든.] [조사해 봐. 이 일을 벌이기 전에 녀석이 누구를 만났는지.] [……사에린?]심증은 있으나 결정적인 물증이 없다.
이 사건은 공작과의 연결고리에 대한 물증 하나 없이 다니엘 개인의 심증만 남긴 채 한 어리석은 간부의 독단적 행위로 막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이는 공작의 바람대로 혁명군의 발을 묶어 둔 사건이 되었다.
***
“데몬 님, 이것 좀 보세요. 제가 여행 중에 얻은 건데, 인간계의 낚시 도구래요. 정말이에요?”
“네….”
“실이 이렇게 약해서 툭툭 끊어지는데 이걸로 물고기를 낚는다니, 이해가 안 되네요. 왜 굳이 이렇게 약한 실을 사용했대요?”
“마계에선 약한 실일지 몰라도, 인간계에선 나름 튼튼하고 질긴 편에 속합니다.”
“왜요?”
“마계와 인간계는 다르니까요.”
“어떻게 다른데요?”
“하….”
이래서 내가 5군단장과 마주치기 싫었단 말이지.
5군단장 오엘, 그녀는 물리적으로는 딱히 위협적이진 않지만 다른 방면으로 굉장히 위협적인 군단장이다.
지금 당장만 봐도 내 정신과 스트레스에 굉장한 타격을 가하고 있는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오죽하면 마왕도 그녀를 ‘마계 전역 순찰’이라는 명목하에 마왕성 밖으로 내돌렸겠는가. 이게 다 그녀의 호기심을 감당하기 힘들어서다.
엄한 추측이 아니다. 내게 5군단장을 마중 보내겠다 했을 때, 마왕은 통신을 끊기 전 분명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나는?!
“아, 그리고 데몬 님, 이것도 보세요. 인간계의 통신석인데 ‘통신기’라고 불리고 있대요.”
“아….”
“아시고 계셨나 보네요. 신기하지 않아요? 이건 분명 마력석인데 인간계에서 사용된다니, 왜일까요?”
통신기, 통신기라… 그걸 또 어떻게 구했데?
마력석이 마계에서만 사용된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황제가 괜히 별 소득도 없이 영웅 후보들을 마계로 보내는 줄 알았던가.
마력석은 인간계에서 주술의 제물이자 도구로서 최상급 취급을 받는다. 통신기는 바로 그 마력석을 이용한 인간계의 도구 중 하나고.
‘마계의 통신석과 같다고 보면 되지. 물론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마계의 통신석은 아무 마력석이나 주워 마법을 걸면 끝이지만, 인간계의 통신기는 마력석 하나를 여러 개로 쪼개어 주술을 걸어야 사용이 가능하다.
마력석 하나를 두 조각으로 나눈 뒤 주술을 걸면 둘이서만 통신이 가능하고, 세 조각으로 나누면 셋이서만… 이런 식으로.
심지어 일정 크기 이하로 작아지면 주술 자체가 걸리지 않아 마구잡이로 쪼갰다간 기껏 들인 비용이 증발해 버릴 수도 있다.
마력석 자체가 구하기 힘든 데다 주술사도 찾기 힘든 상황에서 통신기는 비효율적이기까지 하니 인간계에서 통신기를 지닌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저걸 손에 넣은 게 참 용하다….’
어느 고위 귀족 하나 죽이고 빼앗은 건 아니겠지? 의심을 담아 오엘을 쳐다봤다.
사실 나도 하나 갖고 있긴 하지만.
‘난 출처가 확실하다고. 황제가 줬으니까.’
내 저택에 고이 모셔져 있을 통신기를 떠올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내 표정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줄곧 오엘의 뒤에 잠자코 서 있던 늑대 귀의 마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엘 님, 그쯤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
“데몬 님께서 귀찮아하십니다.”
“그래? 왜?”
“끊임없는 질문에 끊임없이 대답해야 하는 것도 누군가에겐 곤욕일 수 있습니다.”
“어째서?”
부관이라는 자리 때문인지, 성격이 원래 그런 건지….
늑대 귀의 마족, 데르니반은 지긋지긋할 법도 한 오엘의 물음에 어떠한 내색도 없이 꼬박꼬박 답했다.
그러고 보니 둘이 사귄댔나?
처음 들었을 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보니 묘하게 어울린다.
물론 그도 계속해서 답을 내놓기는 곤란했는지, 고개를 정면에 고정하고는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다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