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reincarnated with an S-class constellation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악덕의 마신 (4)
“저는 당신을 신기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참을 침묵한 뒤, 벨리알은 불쑥 그런 얘기를 꺼냈다.
“어떤 부분이?”
“인간들의 계약자 사회에서 당신은 최하층입니다.”
벨리알이 나에게서 와인 병을 다시 받아 들며 말했다.
“제가 듣기로 D급 성좌와 계약한 시점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계약자 생활을 포기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
“당신은 계약자로서 내세울 게 없습니다. 신체 조건도 안 좋고, 마력도 내공도 없죠. 강화 각인도 잘 안 나와서 모든 능력의 강화 등급이 D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쓸 만한 스킬도 없고 성좌의 가호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알려 준 거긴 하지만, 용서 없는 팩트 폭력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 당신이, 당신보다 약자인 존재에게는 주저 없이 손을 내미는군요.”
“…….”
벨리알이 나를 빤히 쳐다본 뒤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정정하겠는데, 딱히 나보다 약해 보이면 무조건 손을 내미는 건 아니야.”
“그렇습니까?”
“이번에 나하고 같이 물건을 운송하던 계약자들 중에도 나보다 약한 놈이 있었어. 술과 약물에 찌들어 있었지.”
“그런 자는 도와주는 것보다 더 타락시키는 게 제맛이지요.”
“어쨌든.”
악덕을 사랑하는 악마다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계속 말했다.
“나는 내가 언젠가 지금 상태를 탈출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어.”
“D급 성좌와 계약한 하류 계약자 신세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그래, 그러니까…….”
나는 조금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했다.
“세상 밑바닥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을 보면, 포기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발버둥 쳐 보라고 말하고 싶어져.”
“……그건 지나친 참견 같습니다만?”
“그래, 실제로 말하지는 않아. 내가 직접 구해 줄 것도 아니면서 그런 말을 한다면 무책임한 거니까.”
실제로는 나 자신에게 필요한 말이다.
희망이 있을 거라고, 분명히 구원이 찾아올 거라고, 그런 말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 힘으로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구해 주고 싶어져.”
“……대충 이해했습니다.”
벨리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딱히 선의나 정의감 때문에 그랬던 게 아니군요.”
“…….”
“자신 같은 하류 인생에게도 언젠가 구원이 찾아올 거라 믿고 싶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구원해 주는 거군요. 자신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벨리알의 지적은 정확했다.
“당신이 모르는 척 지나치면, 세상 밑바닥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례가 더 늘어나게 되지요. 당신은 그걸 참지 못합니다.”
“……맞아.”
“이제야 겨우 당신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벨리알이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확실히 당신은 저하고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군요.”
“그런가?”
“네, 저는 지옥 밑바닥에서도 ‘여기서 더 추락할지도 모른다.’ 하고 경계하는 성격이니까 말입니다.”
『실낙원』에서 악마들이 신과 다시 한번 전쟁을 벌일지 갑론을박을 벌일 때, 벨리알은 전쟁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악마였다.
다만 평화를 사랑해서 전쟁을 반대한 건 아니었다.
그때 주전파(主戰派)인 몰렉은 이제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으니 목숨 걸고 싸우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벨리알은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다는 건 착각이며, 여기서 전쟁을 벌였다가 또다시 패배한다면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에 놓일 거라고 반박한다.
지금보다 나쁜 상황으로 추락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 벨리알에게는 그런 신중한 모습이 있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이 세상 밑바닥에 있다고 느끼고 있지만…… 더 추락하는 게 두렵지 않습니까?”
“…….”
“지금 상황에서 팔다리를 잃거나 목숨을 잃으면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실제로 당신은 이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추락할 뻔했지요…….”
벨리알이 쓴웃음을 지으며 와인 병을 내려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하는 당신을 보면…… ‘그분’을 떠올리게 됩니다.”
“…….”
“……당신이 더 높은 경지에 오르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는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벨리알은 내 얼굴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런 당신이라면, 얘기해도 좋겠지요.”
“얘기?”
“네, 제 진정한 목표 말입니다. 방금 전에 물어보지 않았습니까.”
벨리알이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이 지옥의 나라에서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그것은…….”
시끄러운 파도 소리 속에서, 나는 벨리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경애하는 존재…… 그 명예를 지키는 것입니다.”
경애하는 존재.
설마 벨리알 같은 악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게 무슨 소리지?”
“후후. 과연 무엇일까요.”
벨리알은 웃으면서 와인 병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저 같은 악마에게도, 소중한 것 하나쯤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벨리알의 옆모습은, 평범한 인간하고 다를 게 없어 보였다.
* * *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서 상인들이 떠드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동안 계속 품절이었던, 어린 인간의 고기가 조만간 다시 입하될 것 같다고.
조금 조사해 보니, 내가 뒤통수를 쳤던 조직에서 다시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처음에 구출해 줬던 아이들을 다시 납치한 것 같았다. 아이들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그 도중에 그놈들이 다시 끼어든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장비를 빌려주지요.”
“뭐?”
“착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어디까지나 빌려주는 것뿐입니다.”
사정을 설명하고 지금 당장 출발하겠다고 하자, 벨리알은 나에게 지원을 해 주겠다고 했다.
“악마가 인간을 구원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건 우리들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행위니까요.”
“알고 있어.”
“저는 당신을 강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저하고 ‘악마의 계약’을 한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벨리알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제가 직접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인신매매는 판데모니움에서 허용되고 있는 정당한 경제 활동입니다. 그걸 사적으로 방해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도 알고 있어.”
판데모니움에 와서 깨달은 것이 있다.
악마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자유롭지 못한 존재였다. 뚜렷한 법과 규칙이 있으며 그걸 준수해야 하는 자들이었다.
하긴 예로부터 악마들은 계약 같은 걸 철저히 지키는 존재였다. 인간을 상대로 잘못된 계약을 맺었다가 손해를 보는 악마 얘기는 흔하디흔하니까.
“내 힘으로 해결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네, 당신이라면 잘하겠지요. 믿고 있습니다.”
믿고 있다.
설마 악마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러니…… 일을 잘 마치고, 돌아와 줬으면 합니다.”
벨리알이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돌아오면…… 당신이 인간으로서, 계약자로서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한번 고민해 보기로 합시다.”
“……벨리알.”
“말해 두지만 당신을 구원해 주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함께 고민해 보자는 거지요.”
그렇게 말하고, 벨리알은 웃었다.
“친구로서 말입니다.”
“…….”
그것이 생전에 벨리알과 나눴던 마지막 대화였다.
* * *
결론부터 말하겠다.
나는 실패했다.
작전을 세워서 그들을 분산시키고 허를 찌르려 했지만, 그들 개인의 실력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났다.
내가 들이닥쳤을 때는 수도권 기준으로 B급 계약자 한 명과 C급 계약자 두 명이 있었다.
벨리알이 빌려준 장비에 힘입어 C급 계약자 한 명을 쓰러뜨릴 수 있었지만, 몸싸움 도중 B급 계약자에게 무기를 빼앗기고 말했다.
“허접한 새끼가 어딜 덤벼!”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는 그 남자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승산이 없다고 생각해서 결국 도망쳤다.
하지만 배후에서 날아온 화살이 내 등에 박혔다.
피를 질질 흘리면서 산을 넘어 도망쳤다.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체력은 더욱 빠르게 소진되었다.
황야에 도달했을 무렵에는 추적자를 완전히 따돌린 상태였다.
하지만 더 이상 움직일 기력도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판데모니움의 순찰대를 만날 수 있는 위치였지만,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못했다.
비를 맞으면서,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결국 내 능력 부족이었다.
근력 강화가 C급만 되었어도 무기를 빼앗기지 않았을 테고, 체력 강화가 C급만 되었어도 여기서 한계에 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끝없이 떠올랐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도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곧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았다.
그동안 억눌러 왔던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이, 죽어 가는 내 정신을 지배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렇게 나는 계약자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아무것도 이루어 내지 못한 채.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한 채.
무력하게, 절망에 휩싸여 죽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 * *
“어쨌든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나를, 벨리알은 반갑게 맞이해 줬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얼굴을 바꾼 걸 보면 이제는 다른 사람으로 행세할 생각인 것 같은데, 예전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이곳에서 나누는 대화는 아무도 엿들을 수 없잖아.”
“바깥에서 실수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냥 무명이라고 불러. 김무명이라고 부르든가.”
“누가 봐도 가짜 이름 아닙니까.”
벨리알이 피식 웃었다.
“알겠습니다. ‘무명의 왕’의 대행자에 걸맞은 이름이군요.”
“…….”
벨리알은 내가 ‘무명의 왕’ 본인이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최하층 계약자가 죽었다가 성좌로 환생했다는 건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얘기니까.
“그러면 김무명 씨…… 무명의 왕의 뜻은 어떤지요?”
“승낙하기로 했어.”
“잘됐군요.”
벨리알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강유진이 걸어온 행적을 생각할 때, 분명히 받아들여 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위험했던 것 같은데. 만약 무명의 왕이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페넥스 쪽에 정보를 흘리거나 하면 큰 곤경에 처했을 거야.”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는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강유진 일행이 페넥스를 쓰러뜨린 뒤, 다른 악마들에게 네가 의심당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잘 진행할 생각입니다만…… 어차피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
“네.”
벨리알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무명 씨, 저는 이미 페넥스에게 인간들이 침략을 개시할 거라고 귀띔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했다.
“어느 쪽으로 침략할 거라고 알려 줬지?”
“…….”
내 질문을 듣고, 벨리알이 흡족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동부 산간 지대…… 옛 강원도 지역을 지배하는 계약자 그룹이 철원 쪽 루트로 진입할 거라는 정보를 넘겼습니다.”
“페넥스는 그쪽에 신경을 집중시키겠군.”
그렇다.
벨리알은 페넥스에게 잘못된 정보를 넘겼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페넥스 암살 같은 게 아닙니다. 철원 북부 곳곳에 촌락을 형성하고 있는 타락귀들을 사냥하는 것이죠.”
타락귀는 판데모니움의 피지배층으로, 어두운 피부를 지닌 인간 형태의 마족이다.
쉽게 말해서…… 판타지물에 나오는 다크엘프다.
“타락귀 노예는 일본 등의 블랙마켓에서 매우 비싼 값에 거래된다고 하죠.”
“판데모니움의 재침공이 시작되기 전에, 타락귀들을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넘어갈 생각일 건가.”
크게 한탕 해먹을 생각이었나 본데…… 운이 없었다.
“그럼 페넥스가 철원 쪽을 신경 쓰고 있는 사이에 인천 쪽을 통해 넘어가면 되겠군…….”
인천 일대는 벨리알의 지배력이 강하다.
서해안의 섬들을 통해 북한 쪽으로 넘어가면 페넥스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결국 철원을 통해 넘어갈 강원도 쪽 계약자들은 미끼가 되어 주는 셈이다.
‘만약 나중에 다른 악마들에게 의심받아도…… 벨리알은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정보를 입수해서 페넥스에게 전달해 줬다고 결백을 주장할 수 있겠지.’
벨리알은 악마들 중에서도 모략과 선동에 능하다.
이 정도 준비를 해 놨으면 다른 악마들에게 배신을 의심당해도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마태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아무도 모르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마태수의 성좌조차 모르는 일이죠.”
벨리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고 마태수가 예전부터 결탁해 있었다는 건, 이번 일의 당사자들밖에 모르는 일입니다.”
마태수는 판데모니움의 벨리알하고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보는 철저히 은폐되어 있었다. 마태수가 49호 앞에서 밝히기 전까지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사실 나도 마태수를 조금 의심하고 있었어.”
“그렇습니까?”
“그래, 사마윤 같은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류를 악마들에게 팔아넘기려는 배신자’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하하. 그건 엄청난 음해입니다. 마태수도 억울해하겠군요.”
벨리알이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태수도 저도 인류에게 피해를 입힐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
“제 목표는 ‘그분’이 만든 판데모니움을 진정으로 영광스러운 나라로 만드는 것뿐입니다.”
“…….”
그분.
벨리알이 그렇게 부르는 존재는 한 명밖에 없다.
판데모니움을 만든…… 신에게 반역한 마왕.
벨리알이 그분에게 품고 있는 마음을, 나는 과거에 들어서 알고 있다.
“알겠어. 그럼 너를 전적으로 신뢰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무명의 왕에게 잘 전해 주시죠.”
그렇게 말하며 벨리알이 손을 내밀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벨리알과 악수를 했다.
“일이 잘 해결되면, 그때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나와 손을 맞잡은 채, 벨리알이 아름다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 * *
판데모니움을 지배하는 마신 중 한 명이면서, 다른 마신을 숙청하고 판데모니움을 변혁시키려 하는 존재, 벨리알.
성좌가 된 이후, 나는 언젠가 벨리알과 협업하여 일을 진행하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연락을 취하는 것보다 먼저, 벨리알 쪽에서 마태수를 통해 접촉해 왔다.
그렇다면 이 협력 관계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날 밤, 성좌 튜브의 내 채널에 영상이 하나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