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06
어둠에 맞서 (1)
오후에는 눈이 그쳤다.
부단장과 기사들은 밖으로 뛰쳐나가는 대신, 응접실에 모였다. 바쿠라는 노인이 창가에 서 있었는데, 모두가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손끝에 침을 묻히고 밖에 내민 뒤 한참을 휘젓고, 덧창에 쌓인 눈송이도 집어보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족히 일주일은 안 올 겨. 지금 눈 치워.”
“감사합니다, 어르신.”
“있는 재주 이런 데라도 써야지. 뭐가 고맙수, 부단장님.”
로탄이 눈짓을 하자 기사들과 병사들이 빠릿빠릿 오와 열을 맞춰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 낮 당번을 서는 경비병들은 성벽에 올라 주변을 경계하고, 기사 하나는 망루에 자릴 잡은 뒤 안력을 돋웠다. 비행형 마수를 방비하기 위해서였다.
어제 본 기사 중 라이사만 없었는데, 트루데게 말하길 서류 일에 붙잡혀 못 나왔다고 했다. 일을 떠맡긴 로탄의 표정이 한결 후련해 보인다면 착각일까?
아서와 아이들 역시 길의 눈 치우기에 동원되었다. 사냥을 가려 해도, 식량 마차를 올리려 해도, 성문은 열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눈을 퍼내지 않고선 모두가 성에 고립될 판이었다.
성의 거동 가능한 인원은 전부 눈삽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모두들 무섭도록 일사불란하게, 포석 위의 눈부터 건물 앞쪽으로 빙 둘러진 하수구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클레이오는 꽤 놀랐다.
‘룬데인에선 말이 끄는 제설기도 보이던데, 여긴… 그래, 말 몇 마리로 어떻게 감당할 적설량이 아니지. 게다가 사람이 말보다 낫긴 하네.’
눈은 수로에서 녹아 아래로 졸졸 흐르기 시작했다. 에테르의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래에 흐르는 온천과 연결하여 하수도 하단을 데우는 것 같았다.
아이들 역시 누구보다 앞장서서, 엄청난 양의 눈을 퍼내는 중이었다.
물론 클레이오로 말할 것 같으면, 눈이 녹아 흐르는 수로 곁, 그나마 따듯한 자리에 붙어 서서 성의 누군가가 빌려준 유행 지난 머프에 두 손을 딱 끼우고 있었다.
“에, 엣취.”
이제 날씨는 혹한이었다. 북쪽은 2월이 제일 추울 때라, 바깥에 있다가는 숨이 콧속에서 얼어붙는 수준이었다.
“레이, 보는 내가 더 불안하니까 그냥 들어가 있지 그래?”
폭넓은 눈삽을 쭉 밀고 나가며 아서가 걱정어린 얼굴을 했다. 이시엘도 마찬가지였다.
“아서 님 말이 맞다. 감기에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거기 서 있나.”
“그리고 이시엘 말대로, 올해부턴 단련 좀 해. 말라서 더 추운 거야!”
다 아는 이야기라 클레이오는 한 귀로 흘려버렸다. 얼른 마석 루비를 활용할 생각만 더 커졌을 뿐이다. 아직 마법식을 새기지 못해서 발열 기능이 없는 게 유감이었다.
“보고.”
학창시절 돈이 급할 땐 택배상하차나 공장의 생산직 일도 해봤다. 그때도 말랐긴 했지만, 깡이 있어서 버텼다. 물론 일은 죽도록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운동을 할 여유나 체력이 없었다.
‘이제 와서 운동 같은 거 하겠냐. 안 일어나도 되면 매일 누워 있지.’
움직이는 건 안 해도, 눈이 치워지는 걸 보는 동안 에테르 순환은 계속했다. 5레벨을 목전에 두고도 고비를 못 넘는 게 좀 지겹기도 했다.
그렇게 서있으니 여름 정원의 케이프 코트에 감싸인 부분은 더할 나위 없이 따듯했지만, 털을 댄 부츠를 신어도 발끝은 곱아들었고, 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더미를 부산하게 밀어내며 다가온 첼이 혀를 찼다.
“보긴 뭘 봐. 얼어 죽기 전에 냉큼 꺼지라구. 쯧쯧.”
“내가 삽질까진 못해도 있다 보면 또 할 일이 생길 수 있잖아.”
이제 턱까지 덜덜 떨며 대답하는 클레이오의 말은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첼은 노골적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마법을 써 눈을 수로까지 퍼내 준대도, 걷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필드 범위만큼씩만 밀다간 날 샐걸. 비 맞은 개처럼 달달거리지 말고, 마법으로 불이라도 피우고 있든가.”
“더 추워지면 불 피울게.”
“에휴, 저 고집. 됐다. 리피, 레티샤! 우리가 빨리 치우고 같이 들어가자!”
“그래!”
“그러자!”
이 눈만 치우면 겨울잠도 안 자고 날뛰는 산짐승들을 잡으러 나가게 된다고, 두 쌍둥이는 신이 나 날아다녔다.
‘쟤들은 총질도 신묘하게 하는 데다 둘이 원거리 통신도 되니, 사냥 한 번 나갔다 오면 성 사람들 사이에서 주가가 수직상승 할 거고.’
그런 클레이오의 계산 따위 모르는 두 어린이는, 뺨까지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채 눈을 쭈우욱 밀고 왔다. 레티샤가 먼저 소리쳤다.
“레이, 레이. 이번엔 진짜 여우 잡아서 목도리로 둘러줄게. 그 토끼털보다 훨씬 따듯할걸!”
“그게 쉽겠냐. 무리하진 말고….”
“근데 레티샤, 레이는 지금 토끼털 두른 것도 귀엽긴 하잖아.”
“모. 안 귀여운 건 아님. 인정.”
“아하하.”
쌍둥이들이 저들끼리 흥이 올라 눈밭을 강아지들처럼 날뛰는 동안, 클레이오는 에테르 순환만 계속했다.
사실 클레이오로서도 이런 데 나와 있고 싶진 않았다. 피톤이 잡힌 마당이니 무슨 핑계를 대서든 안에서 비비고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미묘한 불안감이 그의 덜미를 잡아채 바깥으로 끌어냈다.
‘바로 그 피톤에게 미심쩍은 점이 있단 말이야. 이름 앞에 이상한 수식어가 붙어 있었잖아. ‘어린’ 피톤. 그렇다면 어딘가엔 ‘어른’ 혹은 ‘성체’ 피톤도 있을 수 있단 거 아닌가?’
물론 지난 원고에 나온 피톤은 그냥 피톤이었다. 두 마리가 나온단 소린 없었다.
이제는 클레이오도 뼈저리게 알고 있다. 지난 원고는 이세계를 헤쳐나가는 데 있어 완벽한 가이드도, 백발백중의 예언서도 아니었다.
여왕의 정원에서 나온 마수들을 보면, 에서는 어떤 위기든 한 단계 심화된 고비로 나타났다.
‘어린 피톤이란 놈, 묘하게 몸집이 작았지. 지난 원고에선 아서, 첼에 더해 이시엘까지 셋이 달라붙어도 추락하지 않았던 마수인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도저히 따듯한 방에서 죽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엣취.”
클레이오의 몸은 온갖 방한구를 감고도 추위를 이기지 못 했다. 이제는 콧속과 목 안까지 얼어붙는 것 같아, 클레이오는 부러 큼큼 소리를 냈다.
미련하단 소릴 들으면서도 [발열] 마법을 쓰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대량의 에테르를 뽑아내야 할지도 모를 일을 대비하는 거였다.
‘눈 치우고 손 좀 녹이자고 에테르를 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에테르 잔여량 부족으로 기절하면, 원고는 누가 책임져 주냔 말이지.’
기사들도 교대를 하는데, 교대 인력이 없는 편집자는 슬픔으로 눈물을 지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울면 눈가가 얼까봐 걱정된다고. 저자 선생은 이렇게 일을 시켜 먹을 거면 네보 같은 애처럼 튼튼한 몸에다 좀 넣어주지, 왜 하필 약골을 골라가지고 이렇게 운신을 힘들게 하나 몰라.’
클레이오 내면의 ‘정진’이 자신에게 주어진 취급주의품 육신에 대해 한탄하는 동안, 얇은 작업복만 입은 애들과 기사들은 입뿐 아니라 등과 어깨에서까지 허연 김을 펄펄 내며 눈을 치워갔다. 물론 제각기 검대에 자신의 무기를 휴대한 채로. 기사예비생다운 방비였다.
‘애들이 잘 처신할 텐데,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마수 이야길 꺼내서, 성 사람들까지 긴장하도록 만드는 게 옳은 일인지 판단이 안 서.’
어느덧 성내의 눈은 다 치워졌다. 도개교를 내린 뒤 진입로를 정리하는 사람들을 따라 클레이오도 성 밖으로 나갔다.
며칠 만에 보는 바깥은 천지가 새하얀 눈이라, 문명과 동떨어진 세계 같았다. 깊은 골짜기와 높은 봉우리로 겹겹이 감싸인 성채는 외로이 고립된 처지였다.
혹한과 폭설.
철에 맞지 않는 산짐승의 준동. 그리고 마수의 출몰까지. 성 사람들의 피로가 천천히 쌓여온 것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두두두두
빠드득 빠득.
산맥으로부터 성을 향해, 눈을 헤치며 기세 좋게 다가오는 존재가 있었다. 마수나 산짐승은 아니었다. 분명 사람의 모양새였다.
아이들은 일제히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가, 아서부터 의아한 얼굴로 검에서 손을 뗐다.
“…스승님이네?”
“저 넝마 덩어리가 너네 선생님이야?”
“응. 아마도. 틀림없이.”
모두들 에테르로 안력을 돋워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작자를 살폈다.
레티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네 스승님 우리랑 헤어진 뒤로 옷을 한 번도 안 갈아입었나 봐.”
“음, 저 인간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야.”
“아서, 넌 선생한테서 안 배워도 될 걸 배워버렸구나.”
“엑, 그건 아니거든?! 난 잘 씻고 옷도 잘 갈아입는데?!”
“방 꼴 말야, 네 방 꼴.”
“으….”
아이들이 투닥대는 사이, 산에서 성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언덕을 고작 세 번의 도약으로 훅 뛰어넘은 작자는 어느새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뭐야. 니들은 수다 떨 틈도 있고, 여긴 여유만만이다 이거지? 엉?”
“스승님!”
“오냐.”
가까이서 보니 미에츠의 꼴은 더욱 가관이었다.
넝마가 된 로브는 온통 눈이 얼어붙은 데다 수염 역시 떡지고 딱딱했다. 미에츠는 제 모습에 아랑곳 않고 아서의 목을 콱 조였다.
스승의 팔꿈치를 꺾으며 날래게 빠져나온 아서는 어린애처럼 활짝 웃었다. 반가움이 온 얼굴에 어렸다.
“스승님이야말로 신나게 마수 잡으러 산맥을 헤집고 다녔으니 재미가 넘쳤겠습니다? 뭐한다고 혼자 돌아오셨대요?”
“혼자는 무슨. 마수 토벌은 종료다. 지금 다들 뒤에서 산 넘어오고 있어. 막내 기사 놈이 쪼그만 마수새끼에게 발가락을 물려서, 이 몸이 먼저 성으로 연락 전하러 온 거다.”
망루의 기사는 마수 토벌대에 함께 있었던 미에츠를 알아보았는지 ‘환영’ 이라는 수신호를 보내왔다.
같은 방식으로 수신호에 답신한 미에츠를 향해, 성안에서부터 경비병 두엇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반가움 가득한 얼굴이었다.
무슨 재주를 부린 건지 미에츠는 성에 도착하자마자 마수 토벌대에 바로 들어갔었다. 어느 기사 하나와 용병 시절에 안면이 있었다나 뭐라나.
그리고 거기서 어떻게 지냈을지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반응을 보니 훤했다.
미에츠에게서 지독한 냄새가 나 몇 걸음 물러선 클레이오는 마수의 피로 자줏빛이 된 로브 끝자락과, 그 아래 드러난 칼집을 보았다.
‘토벌대에서도 엄청 잘 싸웠나 보지.’
미에츠의 레벨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아서와 이시엘을 가르친 이이니 보통 실력은 아닐 것이다.
선생은 넝마를 두르고도 왕자처럼 당당한 태도로, 진짜 왕자를 툭툭 건드려가며 해자를 넘었다.
그러라고 치워놓은 눈이 아닌데, 마치 미에츠를 맞기 위해 대로를 뚫어놓은 꼴이 됐다.
두 사제는 성큼성큼 걸어 기사단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일행에 끼어든 경비병들은 ‘미에츠!’ ‘왔나!’ 등등을 소리치며 그의 등을 두드려댔다. 고작 닷새 정도 같이 있었던 사이일 텐데, 평생 함께한 전우 대함에 못지않았다.
지린내가 난다느니, 목욕물을 준비해야겠다느니, 물 말고 세 개의 호수 술병을 먼저 달라느니,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로지 미에츠 한 명이 도착했을 뿐인데, 성의 분위기가 일거에 살아났다.
마수를 모조리 처치한 데다, 중상자나 사망자도 없다는 낭보가 함께 덧붙어 왔던 덕이기도 했다.
“스승님 근데, 거기 콧물로 고드름이 맺혔으니 에테르로 한 번 털어라도 내세요. 그대로 물에 들어가면 목욕물을 두 번은 갈아야 할 거 같아요.”
“쳇! 수도에 가더니 까다로운 물이 들어 왔어, 이 자식.”
“공중 보건의 문제거든요?”
미에츠는 걸음 속도조차 늦추지 않고, 그대로 에테르를 거칠게 피워 올렸다. 순식간에 미에츠를 감싸고 있던 찬 기운이 증기가 되어 날아갔다.
클레이오는 순간 움찔할 만큼 강한 기세였는데, 기이하게도 에테르의 형태나 색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지…?’
그는 습관처럼 ‘약속’을 문질렀다. 양가죽 장갑 아래 뭉근한 감촉으로 반지가 존재감을 알렸다.
그 후 평소보다 느리게 떠오른 메시지의 내용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8레벨 검사칭호: 결벽의 은둔자]
‘8레벨? 소드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