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05
트리스테인 기사단 (6)
잠시 겪었을 뿐이지만, 트리스테인 기사단의 분위기는 자유롭고, 상하관계 역시 제법 느슨해 보였다.
알비온의 최북단, 수도에선 먼 변방이다 보니 기사들도 지역에서 자체 양성한 인력이 절대다수였다. 그런 조건이 단원들간의 친밀함을 높였기에, 트리스테인 기사단만의 독특한 기풍을 이뤄낸 것 같았다.
‘물론 정세를 잘 모르는 평기사들의 막연한 반감이야 부대끼다 보면 흩어버릴 수 있지만, 부단장쯤 되면 직접 중앙 귀족 놈들과 부닥칠 일이 많을 테니 반감의 정도가 다른 거야.’
140년 전 양해왕 토머스와 로드 리젠트 새빌의 집권 이후, 그들에게 반기를 들었던 두 가문은 중앙으로부터 멀어졌다.
세르게프 가문은 대리석 매매로 부를 쌓았고, 트리스테인 공작가는 이들만의 기사단을 키워냈다.
필리프 왕의 대에 이르러 군부를 크뤼엘 공작이 장악한 후, 트리스테인 공작령은 버림받다시피 했다.
중앙 귀족에게 악감정이 크고 트리스테인 공작가에는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기사단이 탄생하게 된 계기였다.
상황을 재어보느라 입을 다물고 있던 클레이오는, 엄청난 힘으로 등을 팡팡 치는 트루데에게 밀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튼 요 꼬마 마법사가 힘써주신다니 감사하지! 나도 허리 좀 어떻게 해야겠어. 아오, 작년에 다친 허릴 또 다쳐서 걸을 때마다 아파 죽겠다구.”
“야야, 그 마법사님 잡겠다. 네 맵디매운 손으로 후려치면 어떡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마법사님이 괜찮다잖아! 마수도 잡았는데 내 손이 대수야?”
“아서랬나? 너도 엄청나더라! 검 한 자루만 꼬나들고 그런 커다란 마수한테 뛰어들다니, 여간내기가 아니잖아!”
“근데 학생이면 몇 레벨이야? 요렇게 조그마한 아가들도 기사 예비생인 거야?”
“기사 예비생 아니고서야 칼을 그렇게 신묘하게 던질 수 있겠어? 고놈 발톱에 콱 끼우는 거 봤다 야.”
“리피랑 레티샤예요. 저희 두 명은 3레벨이에요!”
우락부락한 기사들이 리피와 레티샤를 둘러싸고는 삼촌이 조카 보듯, 아니, 무슨 조부모가 손자 보듯 어르기 시작했다.
“휘유, 이렇게 어린데.”
“굉장하네! 검기도 뽑을 수 있는 거야?!”
“그럼요!”
“햐아!”
쌍둥이들을 무등이라도 태우려는 기사들 사이로 라이사가 얼른 끼어들었다.
“야야야, 너희 동생들 아니거든? 작작 좀 해라. 여기 두 아가씬 안젤리움 자작가의 영애들, 저기 남색 머리 잘생긴 아가씬 탕페트 드 네쥬 가문의 외동딸, 빨간 머리 근엄한 애는 키시온 자작가의 자녀다. 거기다 이 꼬마 마법사는 그 아세르 집안의 차남이지. 셋 다 4레벨이니까 편하다고 막 대하진 말고.”
두 명의 거한과 한 명의 쪼그만 기사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하나씩 뜬 것만 같았다. 라이사가 한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들은 게 분명했다.
한 박자 늦게 트루데가 주먹을 탁 쳤다.
“…아! 아세르는 알아. 그 무역선 운항하는 데!”
“부잣집 꼬맹이였구만~. 어쩐지 입은 옷이 부티난다 했어.”
다행히 학교 서류엔 작위에 관해선 안 적혀 있는 모양이었다. 부잣집의 맹한 막내아들 취급을 받는 데에 그쳐 클레이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뭔 자작가는 다 무슨 가문들인데?”
“나 잘 모르는데. 트루데 너네 할머닌 귀족 가문 이야기들 잘 알잖아? 뭐 얻어들은 거 없냐?”
“영웅담에 빠삭한 울 할머니도 신귀족은 잘 몰라. 신귀족이 무슨 귀족, 헙.”
라이사는 트루데라 불린 기사의 뒤통수를 무자비하게 내려쳐 입을 다물게 했다.
“야, 야. 혀가 길다. 잡담 그만. 마지막으로 저기 금발 왕자님은 5레벨이다. 너네 모두보다 레벨 높아. 싸우는 거 봤지? 엄청나지 않던?”
“왕자님?”
“누가 왕자야?”
“눈깔이 삐었나. 저런 순금을 녹인 듯한 금발이 흔해? 아서 리오그난 3왕자 전하 되신다고 한다.”
세 기사가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하려는 차, 아서는 생글생글 웃으며 자연스레 손사래를 쳤다.
“이제 와서 새삼 따질 게 있나요. 그냥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저는 어머님과 함께 변경의 산속에서 자라 왕족이니 하는 소리엔 영 익숙하지가 않네요.”
“그래도… 그래도 되나?”
“안 될 거 뭐 있습니까. 앞으로도 쭉 아서라고 불러주세요.”
아서의 천성적인 친화력으로 어색해진 분위기는 금방 풀렸다.
때맞춰, 부엌을 총괄하는 턱수염 노인이 커다란 도기 주전자를 천에 감싸 안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기사님들, 늦어서 미안합디다. 이거 한 잔씩 하고 얘기들 하셔.”
노인이 주전자를 감싸고 있던 천을 휙 젖히자, 응접실 전체로 향긋하고 새콤한 향기가 확 퍼졌다. 순간 입 안에 신 침이 고이는 향기였다.
“어이구, 이거! 아저씨 고맙습니다.”
“아저씨가 만드는 핫 토디는 최고예요!”
응접실 한편의 테이블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못생긴 토기 컵을 가져와 기사들이 음료를 나누었다.
“학생들도 한잔씩 해.”
“와, 감사합니다!”
상황이 나쁘게 흘러갈까 신경을 곤두세웠던 클레이오도 슬쩍 마음을 놓고는 음료의 맛을 음미했다.
기사들의 칭찬은 과언이 아니었는지,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몸의 마지막 한기까지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물에 위스키를 옅게 타고 시나몬에 레몬, 생강이랑 꿀을 더한 건가. 감기가 뚝 떨어질 것 같은 맛이네.’
클레이오보다 빨리 잔을 쭉 비운 아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빈 잔을 바쿠 노인에게 내밀었다.
“저, 한 잔 더 주실 수 있나요?”
“요게요게, 어린 게 맛을 좀 아네. 입에 맞아?”
“맞다마다요.”
“그래, 많이 마셔라!”
노인은 싹싹한 아서가 마음에 드는지 잔이 넘칠 정도로 다시 채워주었다.
“야아, 바쿠 아저씨 영광이야. 그 핫 토디가 왕자님 입에도 맞고.”
“뭐여, 누가 왕자여?”
“여기, 얘가 왕자래.”
“히야, 거 잘생긴 청년이긴 하네. 이게 맛있어라?”
“제가 생전 마셔 본 핫 토디 중에 감히 최고라고 할 만합니다.”
와르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벽난로는 한껏 달아올라 뜨겁게 열을 냈고, 따듯한 술이 들어가자 사람들의 표정은 더더욱 누그러졌다.
그들 한가운데에 아서가 있었다. 천성적으로 시선을 끌어모으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귀를 기울이고 싶게 만드는 우리의 주인공이.
‘소탈한 소년 왕자는 항상 인기가 좋은 법이지.’
더 이상 클레이오가 개입할 일은 없어 보였다. 그제야 긴장이 풀려서 팔다리가 축 늘어지고, 어깨에 매달린 듯한 피로가 느껴졌다.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응접실에서 겉도는 사람은 클레이오뿐만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마석 흑요석을 챙겨 넣은 앞주머니를 두 손으로 소심하게 감싼 로탄이 뒤늦게 라이사에게 물었다.
“근데 라이사 너, 저 애들에 대해선 언제 그렇게 다 파악한 거냐? 오늘 처음 얼굴 봤잖아.”
“서류요, 서류. 부단장님. 제가 발목 뽀각 해서 성으로 돌아왔는데도 걱정하기는커녕, 사무업무 밀린 거나 하라고 한 아름 맡겨 놨잖아요. 거기 같이 있던걸요.”
“아오, 그게 하필….”
“부단장님 고집 그만 부리시는 게 어떤가요. 우리 견습 애가 문헌에서 찾아냈는데, 그 날개달린 뱀 마수 놈 이름이 피톤이었대요. 엄청난 거물이던데요? 이 애들이 잡아준 덕에 피해를 줄인 거죠.”
잔을 홀짝대는 척하며 클레이오는 라이사와 로탄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안 그래도 토벌대와 공자님껜 각각 파발과 전신을 보냈다. 비행형 마수는 저지선을 뛰어넘어 출몰한다고. 비행형 마수가 다시 나타날 가능성을 염두에 둬, 성의 경계를 강화하기로 했다. 오늘은 내가 번을 서지. 내일부터는 너희가 삼교대로 망루를 지켜야 할 거야. 이런 데서 시간 버리지 말고, 가서 잠이나 더 자.”
아서는 부단장과 부단장 대리의 대화에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저어, 교대할 인력이 부족하다면, 저희가 불침번을 서도 되는데요.”
“너희의 실력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 추운 밤 망루를 지키는 건 손님이 할 일도, 너희 같은 아이들이 할 일도 아니다. 밤엔 잠이나 자도록 해.”
아서를 나무라는 로탄의 말투는 여전했지만, 말 내용은 어조와 완전히 달랐다. 클레이오는 남몰래 웃음을 감추었다.
‘순 꼰대에 허당인 줄만 알았더니, 이 양반도 꽤 생각이 깊네. 하긴 운이 좋아서 트리스테인 기사단의 부단장이 된 건 아니겠지.’
부단장보다는 사회성이 있어 보이는 라이사가 상황을 수습했다.
“외성벽에 오르게 하거나, 마수 잡는 데 데려갈 순 없지만, 내 다리가 나으면 사냥 안 나갈래? 마수가 나오니 맹수들도 자극을 받아서, 겨울잠을 안 자고 오만데서 다 날뛰지 뭐야. 혹시 사냥해 본 적 있어?”
리피와 레티샤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즉답했다.
“네! 엄청나게요! 저 사냥 좋아해요!”
“할게요! 꼭 데려가 주세요!”
두 쌍둥이의 눈이 겨울밤의 시리우스 성처럼 환하게 빛났다.
“라이사! 애들 데리고 뭐하는 짓이야!”
“아니, 할 줄 아니까 따라온다고 하는 거겠죠. 너희 총은 잡아 봤어?”
“그럼요.”
“시험해보셔도 돼요.”
“총은 무슨 총이야. 나머지 애들은 열여덟 살이나 됐지, 요 쌍둥이들은 더 어려.”
“하하, 제가 부단장이랑 처음 사냥 나갔을 때가 딱 저 나이였잖아요.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너랑 얘들이 같냐…?”
“물론 열한 살 때 아버지가 산짐승에게 뜯겨 죽고, 열두 살 때 어머니가 실족해 내장이 꿰여 죽는 꼴을 당한 저랑 다르기야 하겠지만. 그렇죠?”
“라이사, 좀!”
클레이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라이사란 기사는, 말을 살갑게 하는 것 치고는 눈이 너무 차갑다 싶긴 했는데….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느라 저렇게 된 걸까.’
그녀가 아서 일행을 환대한 건, 말 그대로 가용 인력이 늘어난 이점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특별한 편견이나, 악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진 않고. 단지 자기 사람과 아닌 사람에 대한 선이 분명한 타입 같군. 반대로 로탄 부단장은 보기보다 정이 많고 말야.’
클레이오가 머릿속에서 인물 데이터를 갱신하는 동안 아이들은 기사들과 어울려 흥겨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밖에는 눈발이 굽이굽이 몰아쳤지만, 성의 두꺼운 벽 안은 따스한 밤이었다.
***
다음날.
간밤의 눈보라가 아침까지 멈추지 않았다. 성의 덧창은 닫힌 채이고, 덧창의 빗장도 걸어둔 그대로인데 덜컹임만 거세졌다.
몰래 창문을 열어본 아이들은 철없는 비명을 질렀다. 눈이 건물의 2층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와, 엄청나!”
“눈에서 수영해도 되겠어!”
일기 때문에 모든 일정이 중지되고, 아침밥도 느지막하게 먹을 수 있었다.
마수를 잡은 다음 날은 아침밥부터 전날과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이라고 먹는 것으로 일행을 박대하진 않았으나, 오늘은 그야말로 풍성한 특식이 나왔다.
신선 식품이 부족한 지방이다 보니 푸성귀는 적었지만, 절여 둔 각종 과일과 채소, 저장해둔 염장 육류와 훈제 생선이 든 갖가지 메뉴로 식탁이 화려했다.
‘심지어는 졸인 복숭아를 얹은 페이스트리까지 있네. 엄청나군.’
식당 한쪽의 큰 식탁에서 각자 덜어 먹도록 배치되어 있는 음식을 손 크게 퍼온 아이들은, 각자 행복한 아침식사를 했다.
클레이오는 아침부터 절인 앤초비 튀김이나 염장 대구 필라프 같은 걸 먹고 싶지는 않아, 훈제 연어를 넣은 스크램블 에그만 조금 떠왔다.
허기가 좀 채워진 뒤에야, 아이들로부터 질문이 나왔다. 항상 클레이오의 마법에 관심이 많은 쌍둥이들이었다.
“근데 레이, 어제 쓴 그 마법은 뭐야?”
“화살 나오는 건 첨 봤어!”
“아, 그게….”
“한 발뿐이지만 휙 휘돌아서! 그 뚫기 힘들던 마수 비늘 사이로 푹! 들어가고!”
“[추적] 마법식을 넣으면 그런 식으로 공격이 유도가 되더라고. 응용을 해봤지.”
처음 [아킬레우스의 창]을 설계할 때는 자금 사정이 넉넉지 않았다. 어떻게든 마광석 청동을 적게 써 보고자 [속성증폭][투척][가속]에 [복제]를 넣었지만, 이제 마광석 청동 정도는 아쉽지 않게 소모할 수 있었기에 마법식을 개량했다.
[속성증폭][추적][투척][가속].마법식의 조합을 바꾸면 마법의 발현 형식도, 설계도 바뀐다. 그 결과가 어제의 마법이었다.
‘사실 마석 은을 쓰면 구절과 호응이 더 잘 맞을 것 같지만, 그런 돈지랄은, 당장은 하고 싶지가 않네.’
“그럼 그건 이름이 뭐야?”
“또 근사하고, 이상하게 잘 지었나?”
접시에 남은 스크램블을 씹던 클레이오는, 사용했던 진언에 걸맞은 이름을 즉흥적으로 붙였다.
바이런이 ‘은빛 활의 신’에 관해 노래한 구절을 썼으니, 이름이라면 하나뿐이다.
“[아폴론의 화살]이라고 부르면 적당할까? 이름은 지금 붙였어.”
“와, 또 언제 그런 건 만들었대.”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이름인데, 세긴 무지 세고.”
리피의 말을 들은 클레이오는 슬며시 웃고 말았다.
‘아폴론 같은 네임드 신도 므네모시네가 주신인 이세계 오면 듣보잡 되는구나. 굴욕은 굴욕이네. 본래라면 피톤의 심판을 예언 받은 신인데….’
“작문은 꽝이고, 책이라곤 한 줄도 안 읽는 레이가 마법 쓸 때만 그렇게 멋진 진언을 쓸 수 있는 게 믿기지가 않아.”
클레이오는 떠오르는 옛 추억에 애매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읍면단위에서만 살아 봤던 ‘정진’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 가장 감동받은 것은, 25만권의 장서가 소장된 도서관이었다.
근로 장학 아르바이트는 내내 도서관에서 했다. 드물게 일이 적은 때는 원 없이 책을 읽었다. 이전 생애에서 즐거운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 나날들은 꽤 좋았던 것 같다.
‘덕분에 마법씩이나 쓰게 되고, 인생 진짜 알 수 없다니까.’
“음, 그냥 생각이 나는데. 타고난 게 아닐까?”
“얄미운 소리 하네!”
쌍둥이들은 믿지 않았지만 그는 진실만을 말했다. 리피가 흘겨보든 말든, 클레이오는 연어 스크램블 에그만 꼭꼭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