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in Character’s Little Sister RAW novel - Chapter (127)
‘저 인간은 저기서 뭐 하는 거야?’
예비 세최헌 이해기가 박마노의 뒤에서 무해한 청년 분위기를 풍기며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박마노와 고진아는 이해할 수 있는데 거기에 작은오빠가 낀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설마?’
이보배는 불길한 예감에 오한이 들었다. 평소 TV에서 고진아를 볼 때마다 그녀가 자신을 짝사랑하였노라 주장하는 회귀자의 발언이 뇌리에서 재생되었다.
이보배와 눈이 마주친 이해기가 엄한 오해 말라며 손가락으로 X 자를 그렸다.
그는 문자로 간략히 사정을 전달했다.
아까 화장실에 간 이씨 형제는 나간 김에 호텔을 구경했다.
그러다 우연히 박마노, 고진아와 마주쳤다.
고진아가 어색했던 박마노는 이해기를 대화에 끌어들였다.
대화가 지루했던 이귀한은 먼저 연회장으로 복귀, 이해기는 내내 붙잡혀 있다가 연회장 입장도 같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눈치껏 빠졌어야지.] [내가 무슨 힘이 있겠니.]설상가상 고진아와 대화하던 박마노가 이보배를 가리켰다. 고진아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고 이보배에게 직진했다. 옆에 있는 강햇빛을 보고 오는 거일 가능성도 있으나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고진아의 검고 단아한 눈동자가 이보배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진짜 예쁘다.’
고진아는 미인도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동양적인 분위기의 미인이었다.
극장의 큰 화면 속 고진아도 아름다웠지만 실물은 더욱 아름다웠다.
“반야문의 사호법이 아가씨를 뵙습니다.”
“편히 있어. 이분을 보러 온 거거든.”
고진아는 인사하는 강햇빛을 말 한마디로 물리고 이보배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배 씨?”
“네, 맞는데요.”
이보배는 마른침을 삼켰다.
고진아는 단전 호흡으로 단련한 특유의 발성으로 반가움을 표현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꼭 만나보고 싶었어요.”
“저를요? 왜, 왜요?”
“왜긴 왜야. 우리 보배가 이렇게 착하고 장하니까 그렇지.”
박마노가 과장된 목소리로 칭찬하면서 이보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보배는 퇴로가 막혔다.
“오빠에게 들었어요. 이보배 씨 사정도 우리 집이랑 비슷했다고.”
‘검성 입 진짜 싸다.’
처지가 비슷하다지만 고작 한 번 만났을 뿐인 인연이다.
얼마나 말하고 다녔으면 제자에 동생까지 알은척하는 것일까.
“와, 정말. 뵙게 되어 가문의 영광입니다.”
“편히 하라니까요.”
고진아는 아미를 찌푸렸다.
“하긴 이렇게 말해봐야 쉽진 않겠죠. 내가 불편할 테니까. 그럼 하고 싶은 말만 할게요.”
고진아가 이보배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 덕분에 마음을 정할 수 있었어요.”
돌아가신 부모님께 맹세코 이보배는 오늘 고진아를 처음 보았다. 감사 인사를 들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제가 무슨.”
“영화 봤죠?”
“넵.”
“어땠어요?”
살면서 자신이 본 영화 주연에게 영화 감상평을 말하게 되는 날이 올 줄 몰랐다.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보배는 당황했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아주 재밌었습니다.”
“그거 말고 내 연기요. 어땠어요?”
‘제발.’
이 질문을 예상했지만 정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이보배는 일단 생각해 둔 모범 답안을 바쳤다.
“액션 연기가 박진감 넘치던데요? 여기로 슝, 저기서 쾅!”
“액션 말고 다른 연기는요?”
이보배는 한 집안의 가장이며 사회인이다.
어엿한 어른이니 입에 발린 소리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진아는 그런 어른의 대답을 듣고 싶어 물어본 것이 아닐 것이다.
이보배는 말을 고르고 골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첫 주연에 첫 영화니까요. 아하하.”
“알아요, 엉망이었죠? 누가 봐도 엉망인데 난 그걸 몰랐어요.”
고진아가 재차 고운 얼굴을 찌푸렸다.
“오빠가 돌아오고 연기를 배우면서 내내 칭찬만 들었어요. 진짜 미친 소리처럼 들릴 텐데.”
귀환자의 동생은 쓴웃음을 지었다.
“난 내가 연기 잘하는 줄 알았어요.”
‘와우.’
배우 고진아의 충격 고백에 이보배는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연기하면서 자각이 없었다니, 어떤 의미에선 대단했다.
‘우리 집 망나니보다 못하던데.’
이한생은 어떨지 몰라도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 공자님은 가출하면서 옷을 바꿔 입을 정도로 디테일에 신경 쓰는 연기파다. 각성 시스템교에 잠입할 때 보여줬던 연기력도 상당했다.
‘그때도 고진아 씨보다 막내오빠가 연기 더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보배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례한 생각들을 티 내지 않도록 표정 관리에 집중했다.
“편집이 끝난 후, 스크린 속 나를 보고 착각에서 빠져나왔죠. 자다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는데 동시에 부끄럽고 화가 났어요. 너무 부끄러워서 잠도 못 자고.”
본인 연기의 실체를 알아챈 고진아는 가장 먼저 연기 선생을 찾아가 따졌다.
연기 선생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검성이 보고 있잖아요.”
감히 검성의 동생 앞에서 연기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만큼 간이 부은 사람은 없었다.
설혹 있더라도 고진아 주위엔 없었다.
검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모님도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자신들 때문에 고생한 딸이 재능 때문에 꿈을 포기할까 봐 일부러 진실을 감췄다.
“연기 못하는 사람도 나고,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 사람도 나인데 오빠가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결국 고진아의 원망은 검성에게 쏟아졌다.
검성이라도 말렸어야 했다. 옛날처럼 연기는 아무나 하냐고, 너는 재능이 없다고 진실로 폭행하며 말려줬어야 했다.
“막 따졌어요. 왜 연기가 엉망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냐, 발연기하는데 때려서라도 말렸어야지. 그러니까 오빠가, 잘난 검성님이 그러더라고요. 고생한 저에게 보상해 주고 싶었대요. 배우가 되고 싶어 해서 배우가 되게 해줬는데 뭐가 문제냐고.”
고진아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렸다.
“저 욕하는 사람들은 없을 거라고, 업계 사람들도 대형 투자금 들어와서 좋아하니까 일석이조 아니냐고 하는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라죠. 그걸로 심하게 싸웠어요.”
검성은 검성대로 동생을 위해 시간과 돈을 들였는데 원망받자 역정 냈다. 심지어 개봉 전에 전 세계 수출 계약을 맺는 바람에 고진아의 망신살은 국제적으로 뻗어 나갈 예정이었다.
무협 세계에서 지존으로 군림했으며 팔순 잔칫상까지 받아먹고 온 검성은 먼저 사과할 줄 몰랐다. 검성 입장에선 잘못한 게 없으니 더욱 그랬다.
고진아는 고진아대로 사과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떨어져 짓밟힌 참담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평생 남매가 화해하지 않겠구나 싶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검성이 먼저 다가온 것이다.
“사과하러 온 건 아니었어요. 그냥 저를 닮은 아이를 봤는데, 대견해서 제 생각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까 오빠가 돌아오기 전이 생각나는 거예요.”
고진아는 자신이 철부지처럼 투정 부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회사가 도산하고 어머니는 쓰러졌으며 오빠는 실종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암에 걸려 투병하게 되었다. 고진아는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 사회에 떨어졌다. 배우를 꿈꿀 만큼 빼어난 외모가 오히려 독이 되어 위험한 일도 많았다.
‘솔직히 나보다 힘들었겠지. 난 그때 큰오빠가 있었는데.’
이보배는 균열의 날 직후, 이귀한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고 몸을 떨었다. 일단 이한생은 확실히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모든 게 꿈같았죠. 하루하루가 위험한 외줄 타기였는데 오빠가 돌아오면서 모든 게 바뀐 거예요. 아빠가 낫고, 엄마는 건강해지고, 사람들은 오빠를 검성이라고 부르고. 제가 한 고생을 보상하겠다는데 전 그냥 오빠가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좋았어요. 좋았는데, 초심을 잊었던 거예요.”
고진아의 말에 감동받은 호위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박마노는 심기가 복잡한지 웃는 얼굴이 흐렸다.
검성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지만 부모에겐 자랑스러운 자식이요, 고진아에겐 좋은 오빠다.
인간의 다면성이 검성을 싫어하는 박마노에게 남다른 감정을 심어준 것 같았다.
“그 생각 하니까 오빠한테 미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먼저 사과했죠. 모두 이보배 씨 덕분이에요.”
‘이건 그러니까, 내가 화해의 계기가 된 건가.’
자칫 오래갈 수 있었던 남매의 냉전이 이보배 덕분에 끝났다. 고진아가 보이는 호감은 거기에서 기인한 듯했다.
기실 이보배가 한 일은 없지만 사람은 가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었다.
이씨 남매가 실시간으로 세상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오빠는 정말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돌아와서 기뻐요. 이보배 씨도 그렇죠?”
“네!”
이보배는 힘차게 동의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 마음만은 변치 않으리라.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전부예요. 그리고.”
고진아는 용건을 끝냈지만 바로 떠나지 않고 망설였다.
이보배는 인벤토리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포션 공방을 운영하고 있어요. 상태 이상 치료제 주문 제작 의뢰를 받고 있고요. 그게 아니더라도.”
이보배는 자신과 같은 귀환자의 동생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오빠 흉보고 싶을 땐 언제든 연락 주세요.”
“고마워요.”
고진아가 선녀처럼 웃으면서 이보배와 명함을 교환했다.
* * *
고진아가 연회장을 떠나자 그녀에게 말 한마디 붙이고 싶어 한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고진아와 대화를 한 이보배에게 관심이 쏟아졌으나 곁에 박마노가 있어 먼저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부님과 진아 아가씨의 우애를 지켜주셨군요.”
선망과 동경의 시선을 즐기던 강햇빛이 역으로 이보배에게 동경의 시선을 던졌다.
“인연이 좋게 닿았던 거죠.”
“끄응, 이제 살겠네. 진아 언니한테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불편하단 말이지.”
박마노는 고진아가 사라지자 안도하고 목을 스트레칭했다.
이해기도 옆에서 고진아가 떠난 사실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마노 선배는 이해할 수 있지만 작은오빠는 왜?’
막냇동생의 의구심 가득 찬 시선을 받은 이해기가 뻔뻔한 낯짝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또 반하면 곤란하다는 의미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재수 없었다.
“강햇살 씨? 아까 바빠 보여서 인사를 못 했습니다. 검성 제자로 들어가니 어떻습니까? 살 만합니까?”
“강햇빛입니다. 사부님을 적대하지 말아주십시오.”
“아, 미안. 내가 이름 잘 외우는데 헷갈렸습니다. 그리고 적대 행위는 영감님이 먼저 했습니다?”
“박 과장님은 사부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부님은 정의롭고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강햇빛의 말에 충격받은 박마노가 입을 가리고 뒷걸음질 쳤다.
“내가, 내가 그 영감에게 속아서 돈도 빌려줬어!”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일이 없다는 듯 박마노가 가슴을 쳤다.
“이자까지 후하게 돌려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담보 무이자 대출해 준 사람에게 사기 친 게 이자냐! 뒤통수 후려친 위자료지!”
분개한 박마노가 검성이 저지른 만행을 제자인 강햇빛에게 폭로하려 했다.
이해기가 급히 끼어들어 박마노를 말렸다.
“마노 누나, 진정하세요. 숨 들이쉬고 내쉬고. 찬찬히.”
사부가 저지른 죄목을 어린 제자에게 알려줄 수도 없다.
답답해진 박마노가 뒷목을 잡았다.
이해기가 박마노의 혈압을 낮추느라 간지러운 말을 속살거렸다.
춤을 배우고 있던 유마리도 다가와 말리려는데 뜻밖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워워, 과장님. 진정하세요.”
최요한이 이해기의 반대편에서 박마노를 진정시켰다.
목표를 달성해 옷을 갈아입고 안경도 벗은 평소의 최요한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과장님이 좋은 자리라 과음하셨네요. 과장님은 기분 좋을 때 목소리가 커지거든요.”
최요한은 진솔하게 사과하고 강햇빛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햇빛은 즉시 몸을 뒤로 물려 최요한의 손을 피했다.
사부인 검성에게 언질받은 게 있는 듯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을.’
강햇빛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이미 최요한은 임무를 완수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건 훼이크였다.
“과음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사부님께서 박 과장님의 무재를 높이 평가하시니 나태와 방종을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강햇빛은 포권을 한 뒤 자리를 옮겼다.
박마노는 누가 보아도 워커 홀릭이기에 강햇빛의 말을 듣고 화낼 줄 알았으나 그러지 않았다.
“쯧, 제자 앞에선 잘하나 보지.”
박마노가 이를 가는 검성도 누군가에겐 좋은 아들이요, 좋은 오빠요, 좋은 스승이란 사실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진실을 아는 회귀자 홀로 쓴웃음을 지었다.
“근데 요한이 너는 웬일이냐? 내가 가자고 꼬실 땐 싫다고 하더니.”
“실은요. 과장님이 보배 씨 옷 고르는 거 도와달라고 사진 보내셨잖아요.”
옷을 살 때 최요한에게도 보여주겠다고 사진을 찍더니 진짜로 보낸 모양이었다.
“응, 근데 그때 너 씹었잖아.”
“취미에 집중하고 있어서 나중에 확인해 보니 너무 늦었더라고요. 그래도 혼자 두 번째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최요한의 온화한 눈빛이 이보배에게 닿았다.
“직접 뵙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잘 어울려요, 보배 씨. 마음이 통했네요.”
“하하, 감사해요.”
이보배는 공연히 민망해서 볼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최요한과 한현우, 이한생의 마음이 통했으니 참 좋은 일이었다.
몰래 취미 활동에 매진한 최요한은 식전이었다.
이보배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놀라 밥부터 먹으라고 뷔페를 가리켰다.
이보배는 디저트를 몇 개 골라 최요한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하,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괜찮은데요.”
“저도 혼밥 잘하지만 아는 사람 있는데 앞자리가 비면 섭섭하잖아요.”
자신이 지지하는 한현우가 탈락하면 탈락했지 최요한만은 용납할 수 없는 이해기가 끼어들려다가 박마노에게 붙잡혔다.
“요한이 밥 먹게 두고, 우린 저기서 술이나 마시자.”
이해기의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그는 결국 자신의 팔을 붙잡은 박마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이해기는 순순히 끌려가 점점 멀어졌다.
멀어지면서 눈이 마주친 이귀한에게 이보배에게 가보라 눈짓했으나 거절당했다.
‘형! 저기서 밥 먹어!’
‘응, 싫어.’
애초에 이귀한은 최요한을 매제 후보로 지지하고 있으니 도와줄 리 없다.
이해기는 이한생을 찾았으나 이놈의 동생은 춤바람이 심하게 들어 아직도 춤추고 있었다. 심지어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의 사교 댄스 교실은 마쳤는지 단체로 요즘 유행한다는 춤을 췄다.
“아이고.”
“거 기회 좀 줘보라니까. 그렇게 나쁜 놈 아니야.”
“알아요. 아는데요, 누나.”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면 살리지도 않았다. 때로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게 독이 된다.
이해기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 끙끙거리다 포기했다.
아니, 이건 포기가 아니다. 동생에게 보내는 신뢰다.
‘믿는다, 보배야! 오빠 마음 알지?’
마음이 닿기라도 한 듯 이보배와 눈이 마주쳤다.
이해기는 엄지손가락을 들고 몸을 돌렸다.
“이해기 씨가 뭔가 하시네요?”
“무시하세요.”
이해기의 의도는 전해졌으나 이보배는 냉정하게 무시했다.
떡 줄 사람은 아무 생각 없는데 김칫국을 항아리째 들고 와 마시고 있으니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이보배는 신경질적으로 자허 토르테를 포크로 떠서 입에 넣었다. 작은오빠에게 쌓였던 분노와 짜증이 입에서 살살 녹는 초콜릿과 함께 사라졌다.
‘행복하네.’
역시 케이크는 초코 케이크가 최고다.
최요한은 눈을 감고 자허 토르테를 음미하는 이보배를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요, 요한 씨가 도와주신 거에 비하면 변변치 않은걸요.”
식사를 마친 최요한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최요한은 이보배가 돕든 돕지 않든 목표를 달성했을 것이다.
공연히 신경 쓰게 만든 것 같아 도리어 미안했다.
“그런데요.”
이보배는 운을 뗐다가 민감한 대화 같아 문자로 할까 고민했다. 그러자 최요한은 품에서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이제 편히 말씀하세요.”
“설마?”
귀 밝고 눈 좋은 각성자들에게서 사생활을 지키기 위한 스크롤은 아라크네의 거미줄의 대표 상품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느냐고 이보배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최요한이 허허 웃었다.
“편하고 좋은데 안 쓰면 아깝잖아요.”
이보배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박마노와 콤비를 짠 최요한이 스크롤 쓰는 모습을 보니 박마노를 배신하는 것 같아 이상했다.
“그냥 마노 선배를 정점으로 올리겠다던 야망 포기하신 것 같은데 취미 활동은 포기하지 않았구나, 해서 여쭤보려고 한 건데.”
하필 이보배가 하려던 말도 박마노의 경고와 관련되어 있어 기분이 더욱 오묘해졌다.
“그렇죠. 과장님이 이런 거 그만두라고 했는데.”
최요한은 사뭇 슬프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찌나 애석해 보이는지 과장임을 알면서도 안쓰러웠다.
“근데 정말 취미가 되어서 말이에요. 취미보다는 약간의 강박일까요. 제가 조금, 의도치 않게 사회의 어두운 면을 많이 목격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보험을 들어두지 않으면 밤에 잠이 안 와서…….”
어둡고 쓸쓸한 최요한의 눈빛이 연회장 중앙에 있는 강햇빛에게 닿았다. 나이에 비해 동안인 소년이 근심 걱정 없이 웃는 얼굴을 보고 안심한 듯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무척 서글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