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29
영원한 겨울의 도시 (7)
정공법으로 급소를 공격해 이기는 것은 소드마스터쯤 돼야 가능할 일.
클레이오는 적은 희생으로 공작의 완드를 얻을 수만 있다면 과정 따윈 지저분하든 말든 아무 상관없었다.
‘아슬란 놈이 여기까지 오기 전에 던전을 깨면 그게 최선이야.’
“불을 쓸 거니까 조심들 해!”
친구들에게 경고를 마친 마법사는 파빌리온 홀을 모두 감쌀 크기로 서클을 개방했다.
마법식의 여섯 슬롯 중 네 슬롯을 [발화]에, 나머지 두 슬롯을 [속성증폭]과 [추적]에 할당하고선 그대로 불러일으켰다.
왼손 위에서 마석 루비는 마법식의 휘황한 광명 아래 제 깊이를 드러내며 빛났다.
그 순간 클레이오는 목 안에서 짙은 혈향을 맡았다.
‘와… 죽겠네.’
밖에서 기후 마법을 쓴 직후 곧바로 기억된 세계로 들어왔다. 이후 에테르 순환을 한다고 했지만 고인 양은 평소보다 극히 모자랐다.
그 탓에 수위가 낮았던 에테르가 모두 빠져나가면서 그릇의 바닥을 드러냈다.
‘이거 쓰고 나면 이제 다른 마법은 못 쓰겠는데. 한 번에 끝내자.’
마법식이 온전히 결합되어 발동을 마친 순간, 클레이오는 곧장 진언을 외웠다.
“[내 손 닿는 모든 것, 빛으로 화하고,
내 뒤에 남는 모든 것, 숯이 되노니:
필경, 나는 불꽃이로다!]1)”
마법사가 있는 힘껏 던진 루비는 공중에서 산화하며 광폭한 불의 회오리로 화했다.
화르르르르륵!
네 슬롯의 [발화]가 고스란히 응축된 마법식은 무섭도록 강력했다. [추적]은 세 마리 공작에게 탐욕스레 달라붙었다.
금의 새는 달아오르기만 할 뿐 불이 옮겨붙지 않는 재질이건만, 마수와 대치하던 클레이오의 마법이 불가능을 돌파해 버렸다.
불과 금이 한참을 대치하던 끝에 마법의 불이 새를 침식하기 시작했다.
불길에 휩싸인 마수들이 괴성을 지르며 날개를 크게 퍼덕였다.
키에에에에엨!
퍼드득!
아서는 [강화]를 일으키고 이시엘은 제 건틀렛을 작동시켰다.
방비를 하는데도 살갗이 홧홧하고 숨구멍이 죄는 열기였다.
남은 샹들리에를 모두 추락시키고, 천장을 부술 듯 쿵쿵 치고, 섬세하게 조각된 난간을 수숫대처럼 긁어 부수던 세 마리의 괴조 중 두 마리가 결국 이형을 유지하지 못하고서 스러졌다.
새는 마침내 하나로 줄어들었다.
[추적]의 대상이 줄어들자 홀 안을 채웠던 무시무시한 열기도 한결 잦아들었다.마지막 한 마리 공작, 본신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금이 뚝뚝 녹아내리는 날개는 선뜻한 예리함을 잃고 저들끼리 온통 달라붙어 버렸다.
쿠우우웅!
발코니 앞까지 밀려가 추락한 새는 반쯤 눌어붙고, 반쯤은 달궈진 채 붉은 눈물을 후두둑 흘렸다.
스으으읏―
마침내 클레이오가 펼쳤던 마법식이 효력을 다하고 사그라졌다.
아서가 공작의 숨통을 끊기 위해 검을 고쳐 쥔 그때.
콰콰콰콰쾅!
구르르르르
아이들이 들어왔던 입구와 반대편, 구 에르미타주 방향에서 벽이 터져 나갔다.
건물을 날려버리며 난입한 자는 다른 사람일 수 없었다.
‘아슬란!’
클레이오는 격앙되려는 목소리를 눌러 삼켰다.
지금 저놈의 주의를 끌어서 좋을 게 뭐란 말인가.
2왕자의 처참한 행색은 그가 어떤 식으로 ‘영원한 겨울의 도시’를 지나쳐 왔는지 설명했다.
윤기 나던 머리채는 광폭한 추위에 얼었다 풀려 끝이 끊겨나가 있었고, 고급스런 가죽으로 지은 부츠도 발등이 터져나간 채였다.
갑옷의 다른 부분은 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심장 주변이 움푹 우그러든 흠집투성이 흉갑과 소매가 시커멓게 말라붙은 튜닉만 남아, 단이 찢어진 채 나달거렸다.
입성은 모두 엉망이고, 마도구인 박편의 이창만이 말끔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함께 왔던 두 기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슬란은 아주 끔찍한 과정을 거쳐 이곳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새카만 분노가 서린 눈으로 홀 안을 훑었다.
아서, 클레이오, 이시엘 그리고 황금의 공작.
이시엘은 클레이오를 끌어당겨 중정 쪽 창가로 물러섰다.
에테르가 다 닳아 방어 마법조차 펼치지 못하는 클레이오는 심기가 뒤틀린 아슬란의 검을 빗맞기만 해도 중상일 터였다.
아서 역시 아슬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새를 죽인답시고 고개를 돌렸다간, 7레벨 검사에게 그대로 몸과 목이 분리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
겨우 1, 2초간의 대치였을 것이다.
아슬란은 제지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튀어나와 공작을 향해 짓쳐 들었다.
저 빈사의 황금 새가 마스터 클락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는 자의 움직임이었다.
클레이오는 소리가 되지 않는 노성을 질렀다.
‘겨우 다 잡아놨더니 어디서 막타를 지가 치려고!’
던전에 들어올 때는 클레이오와 친구들을 권력으로 찍어 누르고, 중간엔 제 동료를 찌르더니, 막판까지 더럽게 치사한 새끼 아닌가.
그런 주제에 아슬란은 뛰어난 검사이기까지 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아서가 공작과 아슬란 사이를 가로막았다.
두 검사의 무시무시한 대치에 이시엘이나 클레이오는 개입할 수조차 없었다.
2왕자의 묵직한 검이 3왕자의 정수리를 가를 듯 날아들었다.
앉았다 일어서는 불리한 자세에서도 엄청난 힘을 낸 아서가 양손으로 베그의 검을 쥐고서 아슬란의 검을 막아냈다.
콰아아아앙!
잔기술로 흘려낼 수 없는 검은 순수한 힘으로만 가로막을 수 있었다.
막중한 내력이 실린 검을 받아낸 아서의 발이 뒤로 지지직 끌렸다. 그의 주변에 나무 바닥이 뚜둑 비틀리며 파였다.
두 사람의 검기가 정면으로 부닥치며 홀 안의 공기를 찢어발겼다.
한 레벨 차이에도 불구하고 싸움의 초입에선 명백한 우위와 열위가 드러나지 않았다.
제 능력을 완전히 펼친 아서의 검격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지독한 수련과 실전을 모두 거쳐 얻어낸 실력이었다.
철괴를 제련하는 제철소에서나 볼 불티가 두 사람의 검 사이에서 일어나, 강 방향으로 난 모든 창을 가로로 깨부쉈다.
휘이이이이
강에서 인 ‘혹한’의 바람이 홀 안으로 사납게 불어 닥쳐왔다.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려 아서의 이마와 눈을 드러냈다.
튼튼하고 유연한 몸을 쭉 편 아서는 아슬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형님, 끝난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이건 형님의 몫이 아닙니다.”
아슬란이 새를 가로채려 하는데 아서가 넙죽 그러십시오 할 리가 없었다.
평소처럼 건들거리지도 농담을 하지도 않는 아서의 청록빛 눈동자엔 단단한 각오가 어렸다.
예외를 모르고 부는 차가운 강바람은 카스틸리엔 황가의 검은 머리 역시 마구 헝클어, 아슬란의 얼굴에도 어둠을 드리웠다.
저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키가 작은 동생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아슬란은, 입술을 비틀어 옅게 웃었다.
“몫이라 했나.”
그리고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이후의 대화는 검으로 이루어졌다.
카아아앙!
급작스레 기압이 바뀐 것처럼 클레이오의 귓속이 먹먹해졌다.
이것은 예를 지킨 결투가 아니었다. 살의를 발출하는 진짜 전투였다.
배다른 두 형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서너 차례의 검격을 교환했다.
클레이오는 눈으로 따라가기조차 벅찬 싸움이었다. 「이격」을 켜고도 상황을 파악하는 게 한 박자씩 느렸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건 아서에게 너무 불리해!’
아슬란의 공격은 크든 작든 아서에게 반드시 상처를 남기는데, 아서의 공격은 세 번 중 한 번만 아슬란에게 닿았다.
아서는 그 정확한 눈으로도 헛손질을 하며 몇 번이고 은빛 잔상만을 베어냈다.
박편의 이창이 작동하는 탓이었다!
수십 차례 검격이 오가자, 차근차근 쌓인 타격은 기어이 확연한 격차로 나타났다.
마침내 아슬란이 승기를 잡았다.
박편의 이창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분노가 일으킨 힘일까?
혹은 저의 기사를 참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덕일까?
필요 이상으로 넘쳐난 에테르가 아슬란이 움직이는 자리마다 궤적을 남겼다. 에테르가 닳아져 가는 아서와는 기세가 달랐다.
아슬란은 홀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강도로 검기를 일으켜 다시금 아서를 내리 베었다.
피할 수 없는 묵직한 정면 공격 앞에서 아서는 양 팔목을 교차해 내밀며 건틀렛에 에테르를 밀어 넣었다.
콰아아아앙!
마치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홀 전체가 아르르 울렸다.
공예품처럼 화려하게 조각된 대리석 기둥도, 아라비아식 장식으로 금박을 입은 벽도 갈라져 떨어졌다.
클레이오와 이시엘 역시 방어 마도구를 써 우수수 쏟아지는 파편을 막았다.
먼지가 가시자 참상이 파악되었다.
반파된 천장 위로 백야의 하늘이 창백한 민낯을 드러냈다.
마도구의 반동으로 물러섰던 아슬란은 검을 고쳐 쥐고서 아무런 방비가 없어진 아서의 빈 옆구리를 크게 베어냈다.
푸슛!
아서는 몸을 비틀어 깊은 부상을 입는 건 막았지만, 그 탓에 자세의 균형이 무너졌다.
바로 그것을 노린 듯 아슬란의 검이 되돌아와 아서의 발등을 수직으로 찍었다.
콰악!
에테르 유량의 차이로 [강화]는 무력해졌다. 아슬란의 검이 아서의 발등을 뚫고 바닥까지 박혀 들었다.
당장 이시엘이 끼어들려 했지만 아서는 준엄한 눈빛으로 그녀의 개입을 막았다.
이시엘은 아슬란에게 상처를 입혀서도 안 되고, 그에 의해 상처를 입어서도 안 됐다.
아슬란은 왕국의 2왕자였다.
한낱 자작가의 자식이 왕가의 적자를 해한다면 기억된 세계를 기껏 빠져나간다 해도 중형을 받게 된다.
하지만 2왕자가 저를 공격한 자작의 자녀를 비상 상황에서 참수한다면 그에겐 아무도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할 수 없는 한 이시엘이 아슬란과 싸워선 안 돼.’
아서와 아슬란은 격하게 싸워댄 터라 처음과 위치가 바뀌었다.
이제 공작은 아서의 뒤가 아니라, 반파된 발코니를 등지고 선 아슬란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키익키익 얕은 비명을 지르던 황금 공작은 바닥에 들러붙었던 날개를 힘겹게 떼어내기 시작했다.
아슬란은 여전히 아서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서로서는 감사한 노릇이었다. 놈은 던전에 들어온 목적조차 잊은 채 아서 자신에게 천착했다.
지금 아슬란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클레이오와 이시엘의 존재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고, 눈썹 주변도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서는 공포에도 아픔에도 압도되지 않았다. 그저 좀 더 나은 기회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려면 시간을 끌어야 했다.
아서의 넓은 시야 끄트머리에 주저앉아서 에테르 순환을 하는 클레이오가 잡혔다.
‘레이가 에테르를 좀 더 모으고, 새가 바닥에서 완전히 뜯겨져 나가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버텨보자.’
아서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슬란은 음산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때, 마인라트 영지에 침입한 도적은 너였군. 그래, 이 움직임, 이 보법. 네가 아니라면 누구일 수 있었을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형님. 거의 다 잡은 마수를 가로채려 했던 분께서 떳떳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발등이 꿰뚫린 고통을 참으며 아서는 씨익 웃어 보였다.
친구라면 더없이 든든하고 적이라면 그 혀를 뽑아버리고 싶게 만드는 그런 표정이었다.
당연히 아슬란은 후자의 충동을 느꼈다.
콱.
지이이잉.
더더욱 짙어진 검기를 두른 칼이 더 깊이 아서의 발등을 파고들었다.
근육이 찢기고 신경이 끊기는 고통 가운데 아서의 셔츠가 땀으로 푹 젖어들었다.
“너와는 더 나눌 말이 없다. 네 비열한 도둑질에 대해선 손목으로 대가를 치르도록 해라. 그것이 마인라트의 방식이다.”
“알비온에서는 이미 두 세기 전에 사라진 악습을 부활시키고 싶으십니까?”
숨통이 꽉 조이는 긴장감 속에서 필사적으로 에테르 순환을 거듭하던 클레이오 역시 분통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왜 저 형제들은 하나같이 동생 손목을 자르질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카각!
아슬란이 바닥에서 검을 뽑아내자 아서의 발등에서 울컥 피가 솟았다. 회색 천으로 된 덧신이 금세 새빨갛게 물들었다.
부상으로 움직임이 느려진 아서의 목덜미를 노리고 아슬란의 검이 다시금 파고드는 순간.
키에에에에에!
깃이 듬성듬성해지고 꼬리가 한 덩이로 녹아내린 공작이 아서의 등 뒤에서 치솟았다.
아서는 재빨리 바닥에 납죽 엎드려 새의 공격을 피해냈다.
사아아앗!
불에 뭉그러졌어도 남아 있던 몇 개의 속깃털은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아슬란의 양 눈을 노렸다.
박편의 이창이 작동하고 아슬란 역시 민활히 회피하였으나, 마수의 연속 공격이 잇따라 그의 어깨와 상완을 발라냈다.
날갯짓에 따라 후두둑 피가 튀어 마도구의 은빛 파편 위를 물들였다.
8레벨의 마수 앞에선 7레벨 검사의 [강화]도 소용이 없었다.
피를 본 새는 만족한 듯 날갯짓해 저 높은 천장의 궁륭 위로 올라앉았다.
주객은 전도된 지 오래였다.
새가 활개를 치든 말든 아슬란과 아서는 싸움을 끝내야만 했다.
2왕자가 새와 대치하는 동안 바닥을 한 바퀴 빙그르르 구른 아서는 제 검을 역수로 쥐고서 아슬란의 왼쪽 발목을 콱 베어냈다.
박편의 이창이 가리지 않은, 아주 낮은 구석이었다.
“윽!”
아슬란의 하지가 비틀리면서 단단한 지지를 잃었다.
아서는 그 틈을 노려 하단에서 상단으로 짧게 검을 내질렀다.
샤샤샤샷!
다시금 마도구가 아서의 공격을 흘려냈다.
대검을 휘두를 만한 간격을 벌려낸 아슬란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서의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골반 아래까지 쭉 내리그었다.
얇은 흉갑이 종잇장처럼 베이며 아서의 너덜너덜한 셔츠를 검게 물들였다.
“큭!”
왼발에서 흐른 피가 아서의 걸음마다 찍히고, 오른팔에서 흐른 피는 손에 쥔 검의 그립까지 더럽히고 있었다.
진신을 드러낸 아서는 마인라트에서처럼 순순히 아슬란에게 제압당하지 않았다.
아슬란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
끝낸다.
죽여야만 이것을 멈출 수 있다.
그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되뇌며 다시금 아서를 상단에서 베었다.
찬란하게 응축된 검기가 아슬란의 검은 보검을 불에 달군 것처럼 물들였다.
고도로 훈련된 자세, 막강한 에테르, 발목을 베이고도 버텨내는 단단한 하지로 아슬란은 심판의 일격을 내리꽂았다.
아서의 신체가 온전했던 앞의 두 번과는 상황이 달랐다.
아니, 레벨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두 번이나 필살의 공격을 막아낸 쪽이 기적이었다.
세 번씩이나 맞서는 것은 불가능한, 육중한 기세가 담긴 검이었다.
1) Friedrich Nietzsche, 「Ecce Ho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