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66
선택 (3)
가엘이 보이는 뛰어난 성과의 원인은 몰라도 그 결과가 기쁜 클레이오 역시 제 요리사를 흐뭇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좋은 요리사였다. 모험심이 있으면서 맛의 균형을 맞추는 능력도 뛰어났다. 트리스테인 음식을 응용해 클레이오가 먹고 싶어 하는 메뉴를 잘도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 재료만 안정적으로 수급할 수 있다면 마라유는 늘 갖춰둘 가능성이 보였다.
‘마라가 의외로 달콤한 맛 도는 리슬링이나, 좀 바디감 있는 로제랑 잘 어울린단 말이지.’
아슬란이 밉지 와인엔 죄가 없기에 이젠스 와인을 몇 병 사 두길 잘했다. 마라와도 조합이 좋았다.
껍질을 까 가지런히 썬 피단은 건두부 불린 것과 섞어 흑식초와 간장에 버무렸다. 매운 국물을 들이켜다 한 점씩 집어먹기 좋은 냉채였다.
‘이다음엔 버섯, 양배추, 순무 잎, 감자와 양고기 어깻살을 두반장과 마라유에 볶아 볼까? 마라샹궈의 열화 카피 정돈될 것 같은데. 숙주는 녹두로 키우면 될 것 같고.’
커다란 유리병 두 병에 꽁꽁 밀봉된 마라유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꼴꼴 와인을 비우고 있는 기분은 아주 끝내줬다.
오늘의 클레이오는 올해 들어 최고로 인생이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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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착착 붙는 맛이 좋아선 과식을 해 버렸네.’
위장에 피가 몰리니 초저녁부터 쓰러지듯 자곤 애매한 시간에 깬 거다.
영 잠을 설치게 될 모양인지 눈이 말똥말똥했다.
그런 클레이오의 「지각」에 미묘한 이질감이 감지됐다.
반쯤 쳐 둔 커튼 밖, 눈으로 보아선 달빛만이 고여 있는 테라스 한구석이 신경 쓰였다.
클레이오는 고양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침대를 벗어나 잠옷 위에 가운을 덧입었다.
한밤중의 2층 침실 테라스로 슬그머니 나타날 인간은 한 명뿐이었다. 어느 새벽의 태서턴조차도 유령 같은 모습이지만, 들어오긴 방문으로 들어왔었다.
“상급 검사는 감기에 잘 안 걸린다는 걸 재차 실험해 볼 필요가 있냐?”
문밖의 인영은, 말없이 달그림자를 이고 있어 표정이 그믐처럼 가려진 아서였다.
사뭇 어두운 분위기의 아서를 클레이오는 여상하게 대했다.
어차피 아서가 이 테라스를 기어 올라올 때 행복하고 즐거운 상태인 적은 드물었다.
“바람 들치니까 얼른 들어와. 가택 연금 명령을 위반하면 중징계로 넘어간단 건 몰라서 저지른 거냐?”
저택 정문을 감시하는 수도방위대 기사단의 하급 기사들이 7레벨 검사의 기척을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놓아두었다간 아서가 그대로 밤을 새울 것 같아 굳이 타박하는 체하며 안으로 불러들였다.
아서를 끌어다 벽난로에서 가장 가까운 카우치에 앉히니 커다란 게 순순하게 이끌려왔다.
이제는 위화감 없이 제 옷처럼 잘 어울리는 왕자의 예복에 달린 금붙이가 어둠 속에서도 희박한 광채를 반사시켰다.
얼마나 오래 바깥을 헤맸는지 견장은 이슬이 굳어 버걱거렸고, 검대에 매인 예도의 검집은 파르라니 살얼음이 낀 것만 같았다.
시월 말 치고도 유독 추운 밤이었다.
클레이오는 카우치의 맞은편, 평소엔 아서가 즐겨 앉는 침실 의자에 앉아 눈이 암순응을 하길 기다렸다.
사그라든 벽난로 불의 부드러운 빛이 야음의 장막을 슬며시 걷어내고 서서히 체온이 오르는 아서의 옆얼굴을 비춰주었다.
거의 두 달 만에 보는 아서는 더더욱 성숙해져, 표정의 윤곽에 경질의 고뇌가 달라붙은 듯 보였다.
클레이오는 조금 놀랐다. 미묘하게 아쉽고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쟤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나.’
앳된 청년이 완전한 성인이 되는 마지막 꺼풀을 벗기에, 며칠 모자란 두 달은 충분한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저렇게 말이 없는 아서는, 이제는 모든 구절을 외울 수도 있을 것 같은 8교의 아서 왕을 떠올리게 했다.
잘 웃고 실없고 어린애처럼 굴며 장난을 치는 아서가 아서인 만큼이나, 고독과 위엄을 거느린 아서 역시 아서이다.
클레이오가 미처 읽지 못한 더 먼 과거의 반복 가운데서도 아서는 아서였을 테지.
아서는 의식도 못 하면서 말끔한 턱 아래를 엄지로 문질렀다. 깊은 생각에 빠질 때의 버릇이었다.
이래서는 날이 샐 때까지 다시 못 누울 것 같아 클레이오가 먼저 운을 뗐다.
“뭔데. 말을 해야 알지.”
“…너랑 애들을, 계속 기다렸어.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앞뒤를 다 잘라먹은 우물우물한 소리였지만 클레이오는 아서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그리 말재주가 없는 놈도 아니면서 저 말 한마디를 어찌나 어렵게 꺼내는지.
“기다리면서 고생 많았다. 신문 봤어. 애썼더만.”
“그냥 책 안 잡히려고 아등바등한 거야. 고생은 너랑 다른 애들이 했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밤에 잠을 못 잘 지경이었다고.”
“얼씨구, 그러셔? 울겠다 울겠어.”
“아니 우는 게 아니라고, 하아암. 그냥, 하암, 하품이 나서….”
“이 자식, 졸리구만?”
“어, 어… 그럴지도. 오늘 국새 반납하기 전에 멜키오르랑 드잡이질했더니 피곤해.”
“그 작자는 다 죽어가는 줄 알았는데 기력도 좋네. 얼른 자라. 여기 나가서 옆방도 침실이야.”
클레이오는 손으로 옆방을 가리켰다.
아세르 저택엔 남는 게 침실이었다.
첼레스테스가 거의 반영구 임대해버린 3층 모퉁이 방 하나를 빼고도, 아서에게 할애해 줄 쓰기 편한 침실은 충분했다.
어느새 눈꺼풀이 가물가물해진 아서는 거의 잠투정을 했다.
“그냥 여기서 잘래. 따듯하다.”
“야, 내일 등 쑤셔. 예복도 구겨진다.”
클레이오의 역정을 무시한 아서는, 제 몸을 구겨 넣기엔 작은 카우치 위에서 움틀움틀 자세를 잡아갔다.
방 주인은 반쯤은 어이가 없고 반쯤은 웃겼다.
어느 아서이든 아서이지만, 바로 이 아서가 클레이오에겐 가장 친숙한 우정의 대상이었다.
내려다보고 있자 몇 분 지나지도 않아 놈은 도롱도롱 코를 골았다.
7레벨 검사라 해도 몸이 금강석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갑작스레 맡은 국왕 대리의 직무를 처리하며,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들과 부대낀 몇 주는 아서에게 제법 큰 무리를 준 모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겠지만….’
아서는 해야 할 말이 있지만 아주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공표를 미룬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왕세자를 형님 따위로 부르지 않았다.
클레이오를 만난 열일곱 살의 봄 이후, 아서는 차츰 모난 태도를 누그러트리고 여유를 가지게 됐다.
그런 그가 놀리듯, 자조하듯, 예언의 날이 유예되었음을 알리듯 종종 입에 담던 호칭을 버린 건 클레이오에게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주었다.
‘어떤 형태로든 멜키오르가 선전 포고를 한 거야.’
아직 애티가 남은 잠든 얼굴과 달리 단련된 검사의 체격은 육중했다. 클레이오에게 딱 맞는 카우치가 아서의 뒤척임에 따라 애처롭게 삐걱댔다.
한숨을 내쉰 클레이오는 완드를 꺼내 아서에게 가벼운 [경감]을 걸어주고는 제 침대에 도로 파고들었다.
오리털 이불 밑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베헤못이 툴툴댔다.
“웨에엙. 에오우우우우웅.[놈은 또 언제 기어들어 온 거냐. 저 가구는 아무래도 새로 수선해야 하겠구나.]”
요리조리 돌아눕던 베헤못은 아서의 코 고는 소리가 거슬린다며 방을 나가버리고, 클레이오만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이상하게도 다시 눈이 뜨였다.
좀처럼 쭉 이어 자기 어려운 밤이었다.
일출이 머잖은 시간.
희부연 어둠 속에서 여전히 카우치에 누운 아서 역시 깨 있었다.
클레이오가 일어난 걸 안 아서는 잠기운이 가신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
“어.”
“우리 전부 다 같이 세리카로 밀항할 일은 없겠다.”
조금 얕은 숨을 내쉰 클레이오는 여상하게 답했다.
“쌍둥이들이 아쉬워하겠네. 레티샤가 특히 그 아이디어를 마음에 들어 했는데.”
초조한 불안은 있었지만 안온했던 나날이 끝나려는 모양이었다.
평화의 옅은 잔영을 붙든 두 사람은 이날이 아무것도 아닌 날처럼, 그저 아서가 좋은 술을 얻어온 어느 밤의 다음 날인 것처럼 툭툭 말을 던졌다.
“대신 걔가 바란다면 세리카 대사로 발령 내 주겠어.”
“그것도 환시의 이끎이냐?”
아서가, 제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잦게 환시에 시달린다는 것 정도는 클레이오도 눈치챘다.
굳이 말할 만하지 않은 끔찍한 기억이 돌이켜질 때 아서는 술을 들고 찾아왔었다.
클레이오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저 잔만 내주곤 했고, 아서는 클레이오가 알면서도 묻지 않아주는 무심한 배려에 숨을 돌리곤 했다.
“아니. 그렇지만 그렇게 해 봐도 좋을 일 같아서.”
“생전 처음 있는 일인 거군.”
“리피와 레티샤는 너무 일찍 인생의 방향을 택했어. 다른 길도 있을 수 있단 걸 충분히 알게 한 뒤 작위를 잇든 공신이 되든 택할 수 있을 거야. 레티샤는 모험을 해보고 싶어 해.”
다가올 전쟁에서 그 애들은 그만한 헌신과 충성을 보여줄 것이다.
그건 아서에게 익숙하며 당연한 일이었다.
국새를 다루는 일이 당혹스러우리만치 익숙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 애들에게 항상 정해진 일을 하도록 하고 싶진 않았다.
왕관이 제게 주어진 것이라면 기묘한 반복의 예감에 몸부림치는 대신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싶었다.
“내가 왕이 되면, 누구에게든 선택이라는 사치를 사치가 아니도록 만들겠어. 그러한 조건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온유한 세계를 이루고 싶어.”
아서의 말은 불안을 발랄함 아래 숨긴 채 제 편이 되어 달라고, 왕이 된다면 네게 보답을 하겠다던 삼 년 전과 다른 확신을 품고 있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 자원의 분배에 순위를 두고 철혈의 통치를 널리 펼쳤던 자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기를 아서는 소망한 것이다.
이제는 결말이 정해졌다는 예감이 들었다.
시대를 역행하여 왕권을 강화하거나, 혹은 제 권력을 내려놓는 박애의 군주가 되는 행위는 일종의 과정일 뿐 목표가 되지는 못한다.
아서에게 주어진 의무는 단순히 한 왕국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천 년 전 레오니드가 그러하였듯 아서는 세계의 표준을 제정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아서가 신의 뜻에 부합하는 바람을 스스로의 의지로 가지게 될 때, 세계는 그의 뜻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
트리스테인 영지에서 ‘작내 서술’이 안겨준 불의 칼은 저 애가 가질 수 있는 기적 중 가장 하찮은 것에 불과하리라.
오로지 신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기 위하여 아홉 번째 계승 전쟁에 끌려 들어와서도 아서는 지치거나 마모되지 않았다.
그는 진정 레오니드의 자손이었다.
그럼에도 레오니드보다 더 나아간 자.
왜 아서여야만 했는가.
그가 선하고 그가 옳아서?
그보다는, 그가 견뎌낼 수 있어서라는 확신이 들었다.
제 의지대로 이뤄지지 않는 삶을, 신의 뜻을 이룰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의 반복을.
그러면서도 클레이오 자신처럼 신의 의지에 전적으로 복종하지 않고, 제 길을 찾기 위해 거듭 새 방향을 찾으려는 자.
클레이오의 흐린 눈앞, 박명에 물든 침실 천장 아래로 금빛 글자가 떠올랐다.
이해의 대가였다.
[—사용자의 서사개입도가 상승합니다.—누적 비율: 74.7%]
이제 저 고지는 족쇄나 훼방꾼이 아니라 신의 흡족함을 드러내는 치하로 여겨진다.
‘아.’
클레이오는 덧없이 흩어지는 글자를 쓸어보았다.
허공에서 닿는 곳은 아무것도 없건만 신의 뜻이 희미하게 손에 잡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역사의 이름을 가진 이가 말했다.
“아서. 네 뜻은 이루어질 거야.”
네가 신 안에서 길을 찾는 한 언제까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