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96
마지막 앞의 세계 (2)
친구들과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주로 쌍둥이들이 네 근육이 멋지니 내 근육이 단단하네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다가 종종 키나 체중을 재 보자고 달려드는 쌍둥이들 덕에 얼결에 덩달아 쌓인 자신의 신체 정보와, 레지나의 모습이라는 단서가 없었다면 결코 알아내지 못했을 상관관계였다.
잠든 채로도 클레이오가 지낸 나날들을 안다는 듯 레지나는 기쁨을 표했다.
“그렇지 않아, 클레이오. 그러니 나는 너의 앎이, 이 세계를 이해하려는 너의 노력이 기쁘게 여겨진단다. 너는 무엇을 어떻게 알게 되었니?”
레지나는 신의 신비를 제 손으로 드러낸 화신을 온유한 눈길로 바라본다.
그 따스함이 잔인해 클레이오는 먼저 눈을 내리깔게 된다. 그는 한때 신이었던 존재 앞에서 「이격」에 기대지 않았고, 말은 계속해서 떨린다.
“이 세상의 마법과 신성력 그리고 성흔은 모두 여신으로부터 기인한 힘이니, 후유증도 같을 거라고 판단했다.”
피는 생명이며, 형상과 기억의 저장소이고, 인류가 영원히 존속하는 방식이다. 필멸하는 자들이 생육하여 이어져가는 기나긴 끈.
“이 세상은 내가 본래 태어났던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돼 있잖아.
핏줄이 영웅의 자질을 천 년간 보존하고, 에테르 감응력이 세상에 남아있도록 하는 매개라면, 대마법의 후유증이 토혈인 데에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겼을 뿐이야.
그리고 이렇게 철저히 인간의 조건에 매이게 됐다는 건, 언젠가는 너도….”
“그래. 세상이 끝나버리고 나면, 여덟 번째 세계의 신이었던 기억 역시도 언젠가는 풍화되겠지. 하지만 나는 그리되도록 할 생각이 없어.
알지 않니. 우리는 의외로 강인한 존재이고, 그리 쉽사리 소멸하지 않을 거야.”
치익―
허공에서 불씨 한 점이 피어난다.
레지나의 손끝에서 일어난 열은 불꽃의 형상을 위로부터 아래로 재현한다.
흔들리는 깃으로부터 심지가 천천히 생겨나고, 심지는 이윽고 권련의 끄트머리를 만들어냈다.
흰 담뱃대는 타올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연기 속에서 거꾸로 만들어진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자연스레 필터를 끼운 레지나는 그 초연한 얼굴로 권련을 한 숨 빨아들이고, 속에서부터 스르르 연기를 흘려보냈다.
그리고는 여상스레 그것을 클레이오에게 내밀었다.
이제 막 불을 붙인 모양새가 된 담배 한 개비.
필터에는 푸른 글씨로 디스 플러스라고 쓰인, 위로 꺾인 은빛 줄 세 가닥이 들어간 그 디자인은 잊힐 수가 없는 것이다.
눈앞에 내밀어 진 담뱃대를 보며 클레이오는 앓는 울음을 삼킨다.
그 수많은 일을 겪고도 그는 한 명의 사람에 불과하고, 세상의 존망을 전능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레지나 혹은 민산 앞에서 늘 그랬듯이. 세상이 끝난 뒤에야 승인될 수 있는 마음이이었다. 그녀가 신이 아니라도 그는 그녀가 신처럼 멀었다.
사람에게 숭고함을 느끼는 정서는 병적이라 여겼지만, 어쩌면 그 병적인 감정은 온당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한 번도 네 앞에서는 피운 적이 없는데.”
“그렇다 해도.”
그녀는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 신은 자신의 세계에 속한 인간에게 그러한 법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클레이오 아세르가 된 클리오의 화신은, 자신의 옛 신이 건넨 호의를 어렵게 받아들인다.
고작 담배 한 개비를 창조하기 위해 사라진 그녀의 육신을 들여다보며.
이것은 성흔도 마법도 아닌 ‘창조’의 증좌였다.
마법의 재료조차 없이 오로지 기억 하나만을 토대로 그녀는 허공에, 이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물체를 현현시켰다.
대가를 치르고서.
뺨으로 흘러내린 레지나의 왼쪽 옆머리 한 줌은 어느새 오른쪽 머리카락보다 짧아져 있었다.
여신의 머리카락에서 난 푸르고 매캐한 담배 연기가 공간의 굴곡을 어루만지며 서서히 퍼졌다.
클레이오는 그 흐릿한 형상 가운데 자신이 알았던 세계와 알아가던 세계가 모조리 융해되는 환상을 본다.
이 맛도 없는 보급 담배 피우는 건 군에서 배웠다. 싸기도 하고 다른 걸 새삼 찾기도 어색해서 제대하고서도 그냥 같은 걸로 피웠다.
어머니의 말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온건한 억양으로 위장할 수 있게 된 후에도 말하기는 내내 편안하지 않았고, 단어는 언제나 혀 아래에서 단단하게 응어리가 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속을 긁고 내려가는 담배 연기는 가슴께에 굳어진 막막함을 아주 약간 풀어주었다.
클레이오의 경련이 잦아드는 것을 보고서 레지나의 색 옅은 입술이 달싹인다.
“멸망은 말이지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오랜 세월의 인과가 쌓여서 맺는 결과란다.”
“그렇군.”
레지나의 말과 숨을 듣던 클레이오는 이전 세계의 시구 한 줄을 떠올린다.
‘이것이 세상의 끝이다. 쾅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흐느끼듯 스러지는 것이다.1)’
사람들이 믿지 못하였을 뿐, 진정 시인들은 예언자였다.
뮤즈들은 시인의 귓가에 신의 말을 속삭였고, 시는 계속해서 있었으나, 시를 둘러싼 믿음의 양상은 격변했다.
이전 생애의 클레이오는 예언이 없다고 간주되던 시대를 살았다.
세상의 마침표를 디디고 서 되돌아볼 때, 그러한 이성적 판단은 참이 아니다.
그럼에도 참으로 자명한 진실처럼 느껴졌었다.
“물론 언젠가 역사의 세계는 완전히 소멸하겠지만, 아직은 그래선 안 돼.
여덟 번째 세계가 나머지 일곱 세계의 기록을 안은 채로 사라지면 그 이전의 모든 과거들이 완전히 실전되어 버릴 테니.”
‘기억된 세계’가 이전 세계의 기억이 전달되는 통로이므로, 역사의 세계로부터 신화를 모두 이어받자면 므네모시네의 문은 수없이 새로이 열려야 할 것이다.
여덟 번째 세계에 남은 지난 세상들의 기록은 결코 짧지 않을 터. 고작 아서와 친구들이 몇 번 모험을 벌인 것으로 끝날 순 없었다.
‘그래서 므네모시네의 문은 닫혀선 안 됐던 거였나.’
오로지 이 세상이 에테르를 잃어서는 안 되기 때문일 뿐만이 아니라, 기억이 전승되는 통로가 끊겨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에서는 ‘재와 강의 도시’를 끝으로 더 이상 던전이 열리지 않았다.
그건 전승의 실패이고 역사의 실패였다.
멜키오르는 정말로 대단한 일을 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탄에 빠져 있을 틈은 없었다.
클레이오는 레지나의 대화 속에서 또 다른 진실을 발굴해낸다.
“그렇다면 말이지, 이 세상을 쓴 원고의 이전 교정지에서 재와 강의 도시가 바빌론이었던 건 그때엔 아직….”
“서울이 건재했기 때문이지.”
“신화의 원형을 보존한 장소는, 그 텍스트의 구성 조건만 충족된다면 어느 곳이든 선택될 수 있었던 거군.”
한 번만 일어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거듭될 수 있는 신화의 원형으로 변전되는 과정 속에서는.
“그래, 너의 추측이 맞단다, 클레이오. 이를테면 추위와 어둠의 기억이 전달되는 장소가 반드시 레닌그라드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흥남일 수도 하바로프스크일 수도, 빌뉴스이거나 에르데네트일 수도, 혹은 네가 이름을 모를 도시였을 수도 있지.
어쨌거나 그 모든 세계는 빛과 열 속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으니까. 에라토와 멜포메네의 세계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자매들의 세상에서 일어난 일과 동일하게 말이다.”
클레이오는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 안을 스치는 강령회의 환시가 따가울 정도로 생생했다. 길라드가 보여주었던 종말의 풍경은 일어난 일 그대로였던 것이다.
“빛과 열이라면, 핵을 말하는 건가?”
“바로 그러하다.”
“정확하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거지?”
“스위스의 특허심사관이 그 유명한 수식을 세상에 알리고,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새로운 결과를 잇달아 발표하고, 독일어를 쓰는 자들이 성과를 경주하고, 바다와 대륙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열강들이 서로를 견제하다 흩어진 뒤에, 역사가 끝났다고들 모두가 자부하던 퇴색의 시대에 우연과 필연이 겹쳐 어이없이 세상은 종말을 맞이했다.
빗속에서 강물이 끓어 넘치고, 물에 사는 수많은 생물이 사멸했지.
사실, 끝의 시작은 한 세기 전의 한 지점이지. 알고 있니? 아인슈타인은 학살자였단다!”
핵무기의 상호파괴적 발사, 발전소의 붕괴, 잇따르는 자연재해….
레지나가 말하는 내용은 숙연하기 그지없건만, 그녀의 표정에는 천진하기까지 한 해방의 즐거움이 어려 있었다. 드디어 제약에서 풀려난 말의 기쁨이.
이것이, 언젠가 알게 될 거라던 진실이란 말인가?
클레이오는 아연해진다.
인류가 이룬 핵에너지 활용에 대한 발명이 오로지 한 과학자의 공이나 과일 리가 없지 않은가. 혹은 그로 인한 세상의 멸절이.
“그게 무슨 비약이야. 너는 상대성 이론의 발표가 역사 멸망의 분기점이었다고 말하는 거야? 정말이지 삼류 펄프 픽션 같은 이야기군.”
“실제로 세상은, 조야하게 쓰인 픽션의 방식으로 혼란스럽고 엉망이라는 사실을 나는 부정할 생각이 없단다. 그냥 그 일은 정말로 그렇게 되어버린다.”
“너의 말을 나는 믿어야 할 수밖에 없겠지. 믿지 않는다는 방도는 없으니.”
“클레이오, 잘 생각해 보렴. 나는 근거 없이 네게 믿음을 강요하는 게 아니란다.
역사의 세계 물리학자들이 인간에게 자멸의 불을 전한 해에, 신으로서의 죽음이 예정된 나는 칼리오페의 세계에 화신체를 얻었지. 그런 식으로 신들은 다음 세계의 인물이 되는 거야.”
“!!!”
의심하던 클레이오의 머릿속에서 조각난 정보들이 하나의 상을 이루기 시작한다.
레지나 이스토리아는 한 세기도 전에 이 아홉 번째 세계에 태어났다.
‘상대성 이론의 발표는 1915년… 설마.’
클레이오의 눈에 이해의 빛이 떠오르자, 레지나는 눈가를 물결처럼 휘면서 웃는다. 그 긴 세월들은 오로지 간결한 말로 축약된다.
“뮤즈들이 창생한 세계의 인간들은 대개, 언젠가 반드시 자멸의 방법을 찾아낸다.
나의 자매들은 멸망을 저지하기 위하여 정말로 애를 썼어. 정말로… 그 이야기를 하자면 이 밤이 모자라지. 그 수천 년간의 복무.
여기 칼리오페의 세계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안배가 도사리고 있는지 너는 이제 알잖니.”
“그래. 너무 규모가 큰 세계는 통제가 되지 않고 너무 작은 세계는 지속성이 떨어지지.
그 사이 어딘가의 값을 찾기 위해 얼마나 무참하고 무시무시한 안배가 있었을지, 내가 상상할 수 없다는 걸 차라리 행운으로 여길 정도로….”
레지나는 클레이오가 맺지 않은 말을 모두 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실패했지.
“네가 옳다. 신들은 세계와 피조물들을 구해보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 내 세계조차도 새 천년기의 사반세기 이상 존속될 수 없었지.
물론 네가 아는 종류의 살상 무기는 그저 역사의 세계에 국한된 것일 뿐 인간이 자신의 손으로 멸망에 다가간 방법의 세부는 모두 달랐어.
그러나 인간의 기술로서 멸망을 확정 지은 걸출한 인물은, 혹은 시대의 요구에 응답한 인물은 항상 있었고, 이전의 자매들에게 일어난 일이 나의 세계에도 일어난 것뿐이다. 일곱 세계 전체가 그랬지.”
일곱에서 둘을 제하는 간단한 계산이었다. 뮤즈는 아홉이었고, 자멸하지 않은 세상은 에라토와 멜포메네의 것뿐이라면.
“일곱 개의 세상이 사람의 힘으로 자멸해 사라졌다는 건 결국 칼리오페의 세계도 한 번은 멸망했다는 거군…. 내가 미처 읽지 못했던, 이솔트의 죽음 이후의 일인가?”
“그래. 그 원고는 존재하지 않기에 읽을 수도 없단다. 듣기로, 이솔트가 죽고 나서도 서사시는 계속 이어졌지. 칼리오페는 아주 먼 곳까지 써냈고, 그 결과 세계를 쓴 책은 한 번 불타버렸다.
칼리오페는 세계가 불타버린 학예의 신이기에 이토록 혼곤한 피로 속에서 잠든 것이고, 네게 주어진 팔림프세스트가 재처럼 흩어지는 것은 잿더미로부터 복원된 원고이기 때문이란다.”
1)「The Hollow Men」, T. S. Eli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