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88
고운 손의 스텔라께서 우리를 보우하시니 (1)
“헉, 컥, 크허헙. 허억—, 허억. 헙.”
클레이오는 아주 섬세하게 에테르를 다루어 조지의 폐를 외기와 차단했다가, 그가 실신한 직후에 마법을 풀었다.
그는 조지의 상태를 굳이 살피지 않고 구금실을 빠져나와 문을 거칠게 닫았다.
죽지는 않을 거다. 그를 처분하는 건 자신의 소관이 아니었다.
복도로 나서 숨을 고르던 클레이오는 난데없는 박수소리에 제 앞을 살폈다.
짝. 짝짝짝.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의, 끈을 단정하게 묶은 낮은 굽 구두 주변엔 이미 다 핀 담배꽁초가 여러 개 떨어져 있었다.
베스나는 두 손을 바짝 들고서 과장되게 박수를 치는 중이었다. 선명한 소리가 복도를 쩌렁하게 울렸다.
“잘, 하시네요. 내 후계자를 지명해야 한다면 클레이오 경의 이름을 후보 명단 가장 앞줄에 넣고 싶을 정도로.”
구금실에 방음 기능은 전혀 없었다.
안에서 무얼 하는지 종잇장 하나를 사이에 둔 것처럼 선명하게 들리도록 설계됐다. 티플라움 강판을 쓰므로 벽 자체가 두껍지 않은 탓도 있었다.
[방음], [차폐]의 식은 오히려 밖에서 안으로 역방향 작용되도록 새겨졌다. 클레이오의 심문 과정은 베스나에게 모두 전해졌다.나이든 여자는 일어나 마법사의 앞을 막아섰다.
대답 없는 상대의 냉랭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베스나는 곱게 주름진 눈가를 휘며 웃었다. 자애롭게까지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제 당신의 손도 희지가 않군요. 물론 당신은 남의 피를 손에 묻히느니 스스로 피 흘리는 편을 더 기꺼워했겠지만.”
신장이 자신의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는 베스나를 내려다보던 클레이오는 별안간 서늘한 고소를 지었다.
“지금이라도 기회를 드릴까요? 그리도 저를 험하게 다뤄보고 싶어 했잖습니까.”
“역시 알았군요?”
“들끓는 욕심을 숨기지도 않아 놓고선 무슨 말씀이신지. 국왕 대리께서 내린 명령이 아니었다면 손목이 잘리는 건 아서 님이 아니라 저였겠죠.”
“글쎄, 그땐 정말 그랬긴 했어요. 한데, 그 짓에 흥이 나기에는 시일이 너무 지나버렸네요.”
베스나는 거의 포옹을 하듯 팔을 뻗어, 자식 연배쯤 되는 마법사의 목덜미를 감싸 아래로 끌어 내렸다.
말은 입술과 귓가 사이에서 여리게 울렸다. 다감한 말씨였다.
“고통을 원하는 자에게 그걸 안길 봉사 정신은 없어요. 고통은 속죄가 아닌데, 내가 왜 그런 위안을 경에게 주어야 하나요?”
이번만은 클레이오도 답으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12월의 셋째 주였다.
늦은 밤에야 국왕 대리 집무실에서 풀려난 아서는 화려한 거리를 빠르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3왕자의 얼굴을 알아보고서 발개진 뺨으로 손을 흔들었다. 아서 역시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마주 흔들었다.
빛의 축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작년엔 전쟁으로 인해 축제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걸 만회하려는 듯, 온 룬데인 거리가 정오처럼 밝았다.
급속히 보급된 전기로 인해 아케이드의 쇼윈도도, 백화점의 샹들리에도 백광으로 휘황하게 빛났다.
이 도시는 마법과 과학이 얼싸안고 이룩한 문명의 정점에 서 있었다.
하지만 궁성에 다가갈수록 주변의 조도가 낮아졌다. 거리의 화려함과 달리 알비온의 궁성과 의회는 평소와 같은 최소한의 조명만이 켜진 상태였다.
티플라움 광산 복구와 동부의 재건에 상당한 예산이 소요되었다. 왕실의 살림은 아서의 지휘하에 긴축 재정으로 운영되었다.
뜰을 갖은 색유리로 만든 등불로 장식하는 일도 생략했다. 신화와 서사시의 장면을 재현하는 화려한 풍경은, 올해는 없을 예정이다.
신년회 역시 전쟁 동안 왕실에 공헌한 민간인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것으로 갈음하고, 연회는 벌이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왕실 자문위원회는 그러한 아서의 결정을 지지했다.
실세 중 실세인 상원의장 페텐카 세르게프와 상무장관 이슬레이는 실리주의자라서 예산을 아끼는 데 반대할 턱이 없었다.
늦은 시각까지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늘 단신으로 나다니는 ‘리오그난 연대장 대리’에게 익숙해져, 별다른 소란을 더하는 법이 없었다.
그들에게 가볍게 묵례한 아서는 걸음을 더더욱 빨리했다.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품속의 봉투가 완전히 식기 전에 서둘러 도착해야 했다.
파마 궁은 안 그래도 외진 자리라, 밤이 되니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아슬란이 궁성을 침공했을 당시 파괴된 건축물은 어떻게든 복구했지만, 한 번 히드라의 독이 스몄던 자리는 어둡게 변색되고 조경을 하기도 어려웠다.
궁성 내부의 경관을 완벽하게 [정화]하는 건 누구의 우선순위도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굳건한 외성벽의 모습과는 달리 룬데인의 궁 내부는 뒤숭숭한 모양새였다.
‘아무리 긴축 재정이래도 뜰에 유리 등불 정돈 달 걸 그랬나.’
시종들 수 또한 줄였기에 화재 방지 요원을 두기 어려워 등불을 안 켠 거기도 했는데, 밤이 늦으니 약간 아쉽기는 했다.
‘2층 사무실 창에서는 진짜 삭막한 풍경밖에 안 보이겠는데.’
마침내 아서는 목적지인 파마 궁에 다다랐다.
2층을 올려다보니 예상대로 클레이오의 사무실에서만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왼손 안쪽으로 돌려 찬 손목시계의 자판을 확인했다. 밤 11시 40분이었다.
오늘도 수도방위대 마법 고문은 야근을 하는 모양이었다.
‘쉬라고 해도 사람 말 되게 안 들어. 휴.’
지난여름, 몇 달간의 요양을 끝낸 클레이오는 본래 가지고 있던 수도방위대 마법 고문 직위에 몇 가지 권한을 더 얹어주길 요청했다.
기실 수도방위대 마법 고문 이래봤자 원래는 에즈라와 사무실을 같이 쓰던 명목상의 지위일 뿐이었다.
클레이오가 원하는 수준으로 스텔라 방벽 가동 시험을 하고 또 이것저것 기능을 더 더하려면, 별도의 인력과 장소가 필요했다.
스텔라 방벽의 에테르 전지 충전에는 자원봉사자가 많이 필요했다.
왕실 마법감이자 수도방위대 학교 학장으로 다망한 제베디가 자원봉사자까지 감독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그쪽 분야는 클레이오가 총괄하게 됐다.
자리가 만들어졌으니 장소도 필요했다. 그러나 사무실 자리를 고르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왕실 근위군의 소관이자, 수도에 체제 중인 니네베 연대원들이 쓰는 구 수도방위대 건물에 자리를 주기는 애매했다.
의회는 이미 하원의원들에게 의원사무실조차 제대로 배정하지 못할 만큼 포화 상태여서, 별수 없이 궁성 한편에 사무실을 꾸리게 됐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그랬고, 실제로는 클레이오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
자신의 사무실은 반드시 알비온의 궁성 안에 있었으면 한다는 거다.
아서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클레이오의 뜻을 들어주었다.
다만 궁 안에서 어느 궁을 골라 사무실을 만들어 줄 것인지가 약간 문제였는데, 아서는 고심 끝에 파마 궁을 클레이오의 사무실로 정했다.
다소 볼품없고 춥기는 하지만 아서 자신이 틈틈이 훑어둔 덕에 위험한 장치나 알려지지 않은 비밀 통로 같은 것이 없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증개축을 거듭해서 거주자나 시종조차도 완전히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는 미로 같은 궁성은, 멜키오르의 안마당이었다.
가끔은 힐레이다조차 모르는 통로로 수족을 움직이는 작자이니 클레이오를 궁의 아무 곳에나 거하게 둘 수 없었다.
클레이오는 아무런 불만 없이 파마 궁에 안착했다.
사실 사무실을 내어준다고 거창하게 말하기엔 좀 면구스러웠다.
사용하지 않은 지 이미 수십 년인 2층의 접견실을 치우고, 별 가치 없는 조각상 몇 개는 지하 창고로 옮긴 뒤, 책상 세 개와 캐비닛만 들여놓은 게 다였다.
좀먹은 카펫은 클레이오가 먼지 날림을 질색해서 걷어버렸고 이미 빛바랜 커튼만 새것으로 갈았다.
궁성 전체의 꼴이 엉망이니, 파마 궁엔 아직도 라디에이터 설치가 되지 않았다.
클레이오가 사비를 써서 파마 궁 보수를 한다 해도, 국왕과 국왕 대리가 모두 병중인 침체된 궁중에 외부 인력을 들여 시끄럽게 공사를 벌이는 건 보기가 좋질 않았다.
그래서 대신 낭비적인 편법이 횡행했다. 막혀 있던 벽난로 연통은 가을 초입에 클레이오가 마법으로 뚫고 복원해 불을 피울 수 있도록 고쳤다.
거기다 마석 난로를 큰 걸로 두 대나 들여놔서, 겨우 온기가 감돌게 됐다.
난방이 그렇게나 중요했던 이유는, 클레이오가 제 집보다 이 사무실에서 훨씬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미 평화에 젖어든 분위기에서 오로지 클레이오만이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절박하게 스스로를 마모시키며 갖은 방비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 정도로 엄청난 방어가 필요한 공격이 예상된다면 차라리 문제가 생겼을 때 일시적 후퇴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봤지만, 클레이오는 ‘절대로 안 된다.’며 정색했다.
므네모시네의 문이 여기에 있는 한, 절대로 수도를 내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 점은 모두가 이해했다. 이 세상을 닫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모든 에테르의 원천.
문은 아슬란의 침략뿐 아니라 멜키오르의 자폭으로부터도 지켜져야 하는 에테르 흐름의 통로였다.
이 시대의 기술은 에테르와 과학을 함께 이용하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갑작스레 에테르가 사라진다면 사람들의 삶은 극도로 열악해질 거다.
그런 생각을 하자, 원래부터 그곳에 있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오래된 유적이 요즘엔 좀 다르게 느껴졌다.
기록되지 않은 기적 속 이솔트 왕비가 므네모시네의 문으로 첸트룸 대륙에서 대함대를 몰살했다는 이야기를 클레이오에게서 듣고 난 이후부터 그랬다.
그토록 강대하고도 무서운 힘이 오로지 하나의 문을 통하여 이 세상으로 흘러드는 것은 너무나도 위태롭지 않은가?
또한 그것을 고작 한 명의 마법사와 소드마스터가 휘저어 닫았고, 같은 일을 멜키오르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은 더더욱 놀라웠다.
본래 그리하였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세상의 구조는, 실은 이토록 취약하고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러한 힘에 기대어 이룩된 문명이란 손쉽게 작살날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단단하고 변동가능성 적은 토대를 택해야 했던 게 아닌가?
그건 어쩌면, 아서가 에테르 감응자로서 최고의 경지라 할 수 있는 소드마스터에 이르렀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확실히 자신이 소유한 힘은 경천동지할 만한 것이었다. 땅을 가르고 산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전란의 시대에나 필요한 힘이지 않은가.
티플라움 도구를 활용하고, 삶의 편의를 도모하는 데에는 낮은 레벨도 괜찮았다. 이를테면 그 대단한 능력을 가진 프란 화이트도 마법사로서의 등급은 고작 2레벨이었다.
‘마리아 선생님의 마법 이야기의 히트 이후로, 뒤늦게 발현한 1레벨 감응자가 엄청나게 많아졌다지.’
건강한 젊은이들이라면 전선으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지만, 요즘 스텔라 방벽의 전지를 충전하는 데 주축이 되는 장노년층이나, 체력이 그리 뛰어나지 못한 축의 여성들에게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그들은 자신들도 이 세상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은 클레이오가 고안하고 그레이어 상회가 생산한, 은색 원기둥에 남색과 금색 리본이 둘러싼 형태의 에나멜 버튼을 자랑스레 매달고 다녔다. 스텔라 방벽 충전 자원봉사회의 표식이었다.
이러한 일은 저절로 벌어진 게 아니었다.
모두 클레이오의 계획하에 조직된 거였다.
휴직 후 가을에 복귀한 제레미 툴민, 제레미 툴민을 따라온 아레사 리드가 클레이오의 양손이 되어 자원봉사자를 조직하고 홍보를 했다.
그들은 혼자서도 열 사람 몫을 하는 아주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멜키오르의 최측근이었던 이들이 잠자코 클레이오 아래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게 된 일은, 아서에겐 잔잔하게 충격이었다.
더위가 잦아들던 무렵, 아서가 쓰는 국왕 대리 집무실로 찾아온 클레이오는 방어적인 무표정을 지으며 보고서를 건넸더랬다.
‘내가 직접 심문한 결과야. 베스나 드리스콜이 내용의 진실성을 교차로 보장하는 보고서고.’
브룬넨의 포로를 직접 심문하여 아슬란의 공중폭격 계획을 알아낸 건, 클레이오에겐 꼭 필요한 일이었다.
바로 그의 직무에 설득력을 부여해주는 근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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