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21
이후의 세계 (1)
혼란과 파괴 속에서 여명이 밝았던 1897년도도 이제는 3월에 접어들었다.
그 모든 비극을 뒤로한 채 자연은 나날들을 내일로 이어 놓는다. 어김없이 봄이다.
오늘은 올해 들어 가장 기온이 높은 날이었다.
파랗게 쾌청한 하늘 위로 흰색 단엽기가 날렵하게 솟아올랐다.
꼬리 끝은 남색으로 도색되어 있고 동체에는 온갖 아가씨들의 응원 메시지가 쓰여 있는, 첼레스테스 탕페트 드 네쥬의 애기(愛機)였다.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고, 구름이 항공기의 아래로 흘러갔다.
탑승객의 시야엔 룬데인의 시계탑이 장난감처럼 작게 보이다가, 이윽고 사라져버렸다.
전면부 프로펠러가 하늘을 향하고 동체 전체가 직각으로 들리는 급상승은 비행기 자체의 동력에 첼의 스킬을 얹은 작품이었다.
기체 자체의 최대상승고도는 진작 지나친 비상이었다. 이 무리한 기동은 동체뿐 아니라 비행기의 두 번째 탑승자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다.
혀를 씹지 않으려고 이를 꽉 깨물었던 탑승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뚝뚝 끊기는 발음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상승, 시에는, 좀 더 안전한 속도와 각도로 움직일 수 없나? 꼭 그렇게 급격하게, 흡.”
그의 항의는 한층 더 빨라진 상승 속도로 인해 중간에 막혀버렸다.
첼레스테스는 경쾌하게 웃으며 통신기에 대고 말했다.
“으음, 가능은 한데, 나의 사랑스런 애기 뒷자리에 사내자식을 오래 태우기 싫은 조종사의 사정으로 인해 이렇게 됐네. 기체 동력을 최대로 안 쓰면 느릿느릿 올라가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굴면서 이 비행을 보답이라고 부를 수 있나?”
“있지.”
스으으으읏―
방금까지의 급상승, 압력, 속도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항공기는 가볍게 멈추어 섰다.
아래의 도시조차 자취를 감춘, 완연한 허공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검은 원이 펼쳐져 있었다.
프란은 짧게 숨을 멈추었다.
이곳은 공기가 희박하고 지독하게 추운 고도였다.
지나치도록 빠르게 올라온 바람에 감도 안 잡히던 높이가 갑자기 실감 났다.
첼이 중력의 구를 최대한 넓게 펼쳐 주변을 안정화시키고서야 프란은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꽉 굳어졌던 어깨가 비로소 살짝 풀어졌다.
첼레스테스는 뒷좌석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 중력의 구로 공기를 모아주지 않으면 숨도 안 쉬어지고, 춥다고 말야. 따듯하게 입길 잘했지?”
“그래. 이보다 더 높은 고도라면 견디기 어려울 듯싶은데, 이 ‘흑색 반점’이 이즈음에 있어서 다행이군.”
지상에서는 이 원이 하늘 어디에 걸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둠은 망원경의 렌즈를 통과하면 사라져 버렸고, 사진으로 남기려 하면 필름이 타버렸다. 판별의 안경조차 이번만은 제대로 된 결괏값을 내놓지 못했다.
망원경이 발명되고도 세기가 지났건만 그 누구도 이 현상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데엔 원인이 있었던 거다.
비행 준비 때의 일이었다.
프란이 977기 아이들 중 어느 한 명도 이해 못 할 여러 방법을 이용해 반점의 대략적인 높이를 추산했고, 그를 본 첼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대류권보다 높은 고도로 올라가 본 그녀는 프란에게 단단히 대비를 시켰다.
첼과 프란의 계획을 병상에서 들은 클레이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면서 신이 나 연구실의 마석을 얼마든 쓰라고 두 팔을 벌렸다.
그 결과가 프란의 이 크라테르식 꼬마 인형 같은 몰골이었다.
마석 루비를 잔뜩 박은 푹신한 솜옷과 귀마개, 털모자로 무장한 프란은 추운 지방의 어린애 같았다.
그 꼴이 웃겨서 첼은 씨익 미소 지었다.
‘그래도 태도는 대범하고 표정은 의연하네.’
지상으로부터 15km, 기체의 계기판에 설치된 고도계는 표시조차 못 할 높이.
그들이 서 있는 고도는 이 시대의 인류가 이룩해낸 꿈 안에서도 꿈과 같은 높이였다.
비록 첼의 스킬에 힘입기는 했지만, 그녀도 날 때부터 창공을 다스리던 이는 아니었으니.
이 비행기를 제작한 클레어 클레비던스 시니어가 태어났던 시대에는 기구도, 비행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절까지도 대부분의 인류는 신들이 거하는 창공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날개가 없는 존재들에게 하늘이 허락될 거라는 발상은 급작스럽게 등장하여, 갑작스럽게 구체화됐다.
첼레스테스는 그 새로운 기술의 총아였고, 처음 하늘에 올라선 이들이 이 천상의 풍경에 경이와 숭고를 느끼는 것을 이해했다.
“일단은 감사를 전한다, 탕페트 드 네쥬.”
“천만의 말씀. 프란, 너도 발전했네. 이번엔 안색만 좀 나빠졌지 토하진 않았잖아.”
몇 년 전 히드라의 독에 대한 서류를 껴안고 핀토스 산맥을 넘었을 때를 말하는 거였다.
첼레스테스 역시 가까스로 살아남은 악천후의 야간 장거리 비행이었다.
피로와 멀미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프란에게 하늘의 풍경 나부랭이가 기억날 리도 없거니와, 애초에 밤이라 보이는 것도 없었다.
“그때 이야기는 넘어가면 안 되겠나?”
“내가 왜 넘어가. 앞으로 한 세기는 놀려 먹을 예정인데. 내가 소문 안 내도 우리 발명가님의 인간미 있는 일화로 젊은 클레어 쪽이 술만 먹으면 떠들고 다니던걸.”
“클레비던스 주니어는 능력에 비해 입놀림이 얄팍하군. 영양가 없는 서설은 이만하고, 조사를 시작하겠다.”
“뜻대로 하시죠.”
조종석에서 일어난 천공의 뇌신은, 기체 밖 허공을 디디더니 뒷좌석의 프란을 쑥 뽑아냈다.
그런 막돼먹은 취급을 당하면서도 프란은 이맛살만 구겼을 뿐 별다른 불평을 하진 않았다.
‘원래 사내자식은 나라의 명령이 아니라면 안 태우지만, 너는 공이 크니까.’ 따위의 소릴 하는 첼에게 정중한 대우를 기대한 건 아니니까.
그대로 공중에 내던져진 그는 기체 주변을 몇 걸음 걸어 보더니 이내 똑바로 섰다.
프란을 놀려 주려던 첼의 시도는 시도로만 끝났다. 그는 균형 감각이 좋고 겁이 없어서 허공 위에서도 평온해 보였다.
“제법 안정적이군. 이 성흔 역시 자세한 조사를 해 보면 좋을 듯싶은데.”
“네가 또 이번만큼의 발명적 공헌을 세워 준다면 그럴 마음이 들지도 모르지? 힘내 보라고.”
첼의 진지하지 못한 태도에 혀를 찬 프란은 더 이상의 관심을 끊고서 뒤에 짊어졌던 배낭을 풀었다.
랜딩 기어가 안으로 접혀 들어가 실루엣이 더욱 매끄러워진 비행기는 프란의 낡은 배낭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반짝거렸다.
그게 바로 오늘 비행의 시발점이었다.
프란은 얼마 전 클레비던스 부녀의 속을 썩이던 부품 작동 불량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부녀가 고안한 새 랜딩 기어는 접이식으로, 착륙할 때는 밖으로 나오고 비행기 조종 중에는 동체 안으로 접혀 들어가는 구조였다.
덕분에 항행 시에는 공기 저항을 줄여 속도를 높일 수 있었으나, 착륙 때 제대로 기어가 펴지지 않는 경우가 잦아 종전의 모델보다 안전성이 떨어졌다.
그런 변수가 없어도 비행은 위험한 일인데, 위험이 더 늘어나는 건 누구도 원치 않는 상황이었다.
프란은 클레비던스 부녀가 골을 썩이던 랜딩 기어 문제를, 마도 공학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기술 지원의 대가를 금전으로 받는 대신 다른 조건을 걸었다.
이 ‘대관 일식’ 관측 비행을 성사시켜 주는 것이었다.
수도 전투 당시 필리프 왕이 사망한 후 하늘에 생긴 검은 그림자는, 지상에서 올려다볼 때는 커다란 검은 원 같았다.
필리프 왕의 사망 직후에는 해를 전부 뒤덮을 듯하더니, 시일이 지나자 축소되어 고작 이 정도 크기로 줄어든 것이다.
필름에 이물질이 들어간 채 잘못 인화된 사진처럼 주변에서 동떨어진 검은 원은 므네모시네의 문으로부터 직선으로 상단에 위치했다.
그 둥근 어둠은 광역 룬데인 안에서라면 어디에서나 선명히 잘 보였으나 거리가 멀수록 흐려졌다.
멀리 국경 경비대에서 온 연락에 따르면 알비온의 영토 바깥에서는 아예 사라져버린다고 했다.
낮에는 그 사이로 밤이 엿보이는 것 같았고, 밤에는 주변 하늘보다 훨씬 어두워서 저 먼 우주의 어딘가가 비쳐 보이는 듯 괴이한 그림자였다.
정형처럼 보이지만 비정형이고, 구체적인 형상이라기보단 시야에 왜곡을 일으키는 장에 가까운 것이라는 게 프란의 추측이었다.
지상에서 육안으로 할 수 있는 관찰은 다 마친 프란이 이제는 하늘에서 대관 일식의 그림자를 관찰해보고 싶어 안달을 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멜키오르에게 협력한 에클립시 가문이 왕실 천문관의 지위를 잃고 일가가 도주하듯 땅과 집을 처분해버린 이때, 왕실에선 당장 새 인선을 감행할 여유가 없었던 터라 프란은 이 좋은 기회가 사라져버릴까 조급증이 다 났다.
완고하게 규명을 거부하는 이 이상 현상은 이제껏 근거리 관측의 기회 자체가 없었다. 기술의 문제이기도 했고, 사정의 문제이기도 했다.
하늘에서 두드러지는 저 어둠은, ‘신의 힘’이라 불리는 기적의 작동 방식이 실상은 그리 정교한 구조나 안배에 의한 것이 아닐 거라는 과학자들의 추측을 뒷받침할 가장 중요한 증거였다.
바로 그 가설에서 이 시대의 무신론이 탄생했으므로, 프란도 잘 알고 있는 논쟁이었다.
34년 전, 필리프가 즉위 전에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는 기록은 찾았지만 엄밀한 조사 자료가 없었다.
그야 이웃 나라의 혁명, 왕자의 형제 살해와 집권 세력의 교체로 혼란스럽던 땅에서 리오그난 왕가가 지닌 권위의 원천을 샅샅이 조사해 보겠다고 나서는 담대한 과학자는 없었던 모양이다.
있더라도 요구가 묵살되었거나.
자신들의 가계가 신으로부터 축복받았다고 주장하는 왕실 가문이, 그 축복의 실체를 규명하려는 시도를 어떻게 보아 넘기겠느냔 말이다.
‘그러나 저것의 실상은 그저 지상으로부터 15km 고도에 걸린 검은 그림자에 불과한데.’
프란은 눈앞의 검은 공동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검은 막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투명해져 반대편의 하늘이 비쳐 보였다.
‘근거리에서 관찰할수록 실체가 희미해지고, 깊이도 밀도도 없으며, 점점 물러나는 듯 여겨진다.’
이 허공의 장막이 해를 가리며 확장되면, 룬데인에서 관측할 땐 마치 일식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리라.
알 수 있는 건 극히 적었으나 한 가지 추측만은 맞았다.
대관 일식은 결코 일식이 아니었다.
이건 천체와 천체의 궤도가 겹쳐지는 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프란이 메모지에 끄적이는 내용을 흘끗대던 첼이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건 그냥 하늘에 드리운 장례식 베일 같은 거였단 건가?”
“그렇게 말하면 그리 못 볼 것도 없군.”
“흠, 뭐, 실제로 저 아래선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긴 하니까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구나.”
첼이 가볍게 언급한 건 무려 필리프 왕의 장례식이었다.
물론 궁성과 교회에 조기를 걸기만 했지, 특별 공휴일을 선포하지도, 시민의 조문을 받지도 않는 장례이기는 했다.
“안 그래도 왜 비행 일자를 바꾸지 않는가 싶었다. 너라면 분명 장례식에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굳이 왜? 난 요즘 이시엘의 승작 파티 준비로 바쁘거든?”
얼마 전 키시온 가문은 백작가로 승작되었다.
전통적으로 변경백이라면 최소 백작 가문은 되어야 격이 맞았으니, 드디어 가문 수대의 애국적 헌신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승작의 가장 큰 공헌자는 물론 이시엘과 그의 부친 슐리만이었다.
그리고 이 경사를 본인보다 더 기뻐하는 인물이 첼이었고.
“엘은 이제 백작이라고, 백작!”
그 들뜬 자랑을 듣던 프란의 빼족한 눈꼬리가 더더욱 높게 치솟았다.
일단은 하이드-와이트 백작가의 상속 1순위인 인물이 차갑게 반문했다.
“이시엘 키시온의 승작을 나에게 강조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나?”
물론 첼은 프란의 반응 따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너한테 의미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그냥 내가 자랑을 하고 싶은 건데. 그래, 다음엔 하늘에서 전단지를 뿌려 볼까. ‘(축) 소드마스터 이시엘 키시온 백작 승작 (하)’, 어때? ‘(최)불과 대적의 기사 이시엘 키시온(고)’ 쪽이 나을까?”
“문구를 뭐라 쓰든 그런 행동이 키시온에게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만.”
“그래. 그래서 안 하는 거야. 하, 마음 같아선 이 비행기 꼬리로도 같은 글귀를 공중에 적고 싶은데.”
첼은 손끝만 들어 비행기의 후익을 슬쩍 흔들었다.
그 유난스러움에 질린 프란은 뭐라 불평하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현재 까마득한 상공에서 오로지 첼레스테스의 항공기와 성흔의 보호만을 받고 있단 사실을 의식한 듯, 일단은 입을 다물고 각종 관측 도구만 차례로 꺼냈다.
그 짙푸른 하늘, 새하얀 구름, 꽃가루가 날아다니는 대기 아래에서 왕의 것답지 않게 소박한 장례식이 끝나가고 있었다.
#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