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20
외전4. 외할머니의 세계사 (4)
마수 피톤이 침공해온 밤, 테오 공작의 침실에서 클레이오 아세르가 펼친 [경감]의 빛은 멜키오르뿐 아니라 태서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가 저의 본래 이름이 랑슬로임을 알게 된 그 밤, 그는 자신이 그 순간을 위하여 천 년을 꼬박 기다렸다는 사실을 겨우 기억해냈다.
랑슬로의 두 번째 언약 ‘영원성의 직유’는 그날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올바르게 회복되었다.
‘홀로 영원을 기억토록 한 제 부덕과 죄가 깊습니다. 나의 왕···. 하나, 이번에는 당신의 곁을 지켰습니다. 망각에 안주하지 않으며, 당신을 의지에 반하여 살게 하거나 죽도록 하지 않고, 복종할 터이니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이루도록 하시옵소서.’
‘하지만 늦었군.’
‘이 우둔한 자의 과오를 용서해주소서.’
그리하여 태서턴은 자신의 불의함을 알았으나, 책임을 지지는 못한다.
모든 것은 과거에서 결정되었다.
이솔트는 그녀가 받았던 풀려남의 기회를, 인간에 의해 잃었다.
같은 생애의 반복은 개정을 불러오고 개정은 그의 운신을 제약했다.
다시 한번 말하노니, 뒤에 온 이야기는 원형의 구조에 붙들리는 법. 그가 처음에 한 일이 그가 나중에 할 일의 발목을 붙잡고 더 깊은 나락으로 이끌고 가노라.
진실은 아주 늦게 그에게로 왔다.
그의 저주는 신의 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신의 바깥에 있던 것이었다. 세계를 지속시키기에도 급급한 신의 펜 끝은 그를 잘못 쓴 것이 아니라, 다만 포착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의 뜻을 그대로 따랐다 한들, 살아가는 일이 쉬웠을까? 그 신은 너무나도 연약하여 세계를 이어가지조차 못했는데.
저의 옛 자매들을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게 해 세계를 지키도록 했던 신의 힘은 멸실되었다.
이제 신에겐 약속을 지킬 힘조차 없지 않은가.
제 얼마 남지 않은 신성을 옛 자매에게 나누고는 깨어날 수 없게 된 신.
무용한 연민을 가진 신.
제 동기간들이 인간에 의해 겪은 고난을 보면서도, 인류가 지닌 악의와 증오와 집요함을 아직도 다 알지 못하는 신.
그 신은 이미 책에서 지우기로 했던 이름들이 다시 떠오르는 데에 속수무책이었다.
불타버린 세상을 복구하는 데에 모든 권능을 다 써버렸기에, 펜조차도 옳게 들 수 없었으니.
신이 쓰는 마지막 원고의 주인공과 미래의 방향은, 첫 생애의 아서가 요새에서 죽기 위해 나왔을 때 정해진 것이었단다.
처음 태어난 아슬란이 아서와 했던 약속을 저버리려던 찰나에.
먼 옛날 레오니드가 신성 제국의 지독한 압제 속에서 굶주리는 유민들을 구하기 위해 나설 때 그 시대의 주인공이 결정되었던 것과 같이, 신화의 원형적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
인간의 이기심이 아니라 인간의 고결함이 전면으로 드러나는, 몹시도 드문 순간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목적이 아니라 방법이었다.
누가 적자이고 누가 대적자인가. 그것은 인간의 선택과 희생이 결정하는 것이다. 세상의 운명에 관여할 위치가 아니라서, 책에 이름이 쓰이지 않을 자들이라면 다르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잔인한 처사인가?
그러나 원본이 개선되고 갱신될 일말의 가능성은, 인간의 힘에 의해 세상이 불타 멸망할 때 완전히 사라진 것을.
칼리오페는 이제 이야기를 완전히 새로이 쓸 능력이 없기에 과거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쓰일 수는 있으나 완전히 돌이킬 수는 없는 세계의 삶이란, 누덕누덕 기워낸 페이지들의 연속이지.
때로 영웅 역시 좌절한다. 그가 가진 인의가 흔들리며 방법의 순수성이 침해된다.
그러나 여신은 더 이상 주동 인물을 교체할 힘이 없기에, 세상은 그대로 본래의 관성에 의해 흘러간다.
폭주를 막아보려던 가필은 열 배 잔인한 결과를 불러오고, 선한 자는 지독한 조건 속에서 스스로의 믿음을 저버리고, 그 모든 결함은 멸절이라는 결과로 수렴하고 만다.
신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세상의 유지뿐이었는데, 그것이 그리도 이루기 어려운 일이었을 줄은 어머니 여신조차 몰랐을 거란다.
언제 찢기고 흩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원고의 낱장에 가해진 편집은, 유효하나 아슬아슬한 방편일 뿐이었다.
아홉 번째 세계의 아홉 번째 반복에 이르러, 멜키오르는 신이 준 문해의 능력으로도 읽지를 못했던 것을 바르게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세계를 오독한 만큼, 신의 대리인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지.
아, 이것이 인간 종족의 어찌할 수 없는 특질이 아닌가.
이입은 섣부르고, 판단은 성급하다. 멋대로 연민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또 동정한다.
사랑을 살해한 손으로 슬픔의 눈물을 닦고, 반역자의 탄핵을 요구하던 목소리로 사면을 탄원한다.
이 세상의 신은 그 지독한 세월을 겪고 나서도, 사라진 구제의 사랑을 다시 창설할 수 있는 존재가, 역시 인간뿐이리라 믿는 것이다.
그것은 희박하고도 절망적인 희망이다. 신의 보석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
결국에 앎이 완전해지자 한때 에라토였고 이솔트였던 존재는 분노와 증오마저 내려두게 되었다.』
근데 트루데, 니 솔직히 말하자믄, 왕세자님 첨 봤을 적에 ‘신이 계시믄 저렇겠구나’ 이런 생각 했제. 그거는 참, 니도 내 피를 타고 나서 보는 눈이 있는 기였는디, 그래 봐야 모자란 거.
니는 그치한테 엄청시리 얕보이기는 했제. 뭔 생각 하는지 머리통 안 디비바도 딱 뵈는데, 머하러 왕세자가 굳이 애써가 니 속을 까보겠나.
마, 니한테 그이는 참말로 신 같은 사람이기야 했구만. 잔인하고 또 자비를 모르는 신.
수도에 가서는 니 기사단 동무들이 숱하게 죽었는데, 갸들을 전부 다 날도 잘 안 드는 쇳덩이처럼 무작스레 쓰고는 꺾어지면 내다삐고, 녹슬면 버리삐는 그런 신 말이다.
큰 트루데 죽고나서부텀 니는 근위군이고 머고 고향 가고잡단 생각밖에 안 혔잖여.
아슬란 그노마가 턱하니 군사 끌구 쳐들어오기 전인가?
하루는 니가 칼 차기가 싫어서 머뭇머뭇하니까 왕세자가 니를 불러다 눈을 들여다보는데, 그때부텀 먼 생각이 제대로 안 됐겄지.
옛적에는 말이다, 할매가 괜히 니한테 문자 써감시롱 어려운 말 헌다고 불평했제?
근디 니가 할매 얘기를 듣다 말다 잠이 새롱새롱 들어서 뭔 소린가 싶어 놓은 게, 왕세자도 니가 들은 노래가 먼지를 다 몰랐던 거여.
어차피 니는 진짜로는 얘기 듣는 게 좋은 기 아니고 누나들 사이에서 어리광 부리다 자는 기 좋아서 만날 이야기 해달라꼬 조른 거믄서.
니 대가리가 잘 안 돌아가는기 또 목숨 부지하는 덴 도움이 됐어라. 아가 띨빡해도 또 니는 내 손주구, 내한테는 귀엽제. 니가 글케 듣고 싶어 혔던 마지막 절은 불러주고 가꾸마.
『이제 신화는 여기에서 끝난다. 더 이상 신의 노래들은 불리지 않으리라. 목소리를 전해줄 여신들이 떠나갈 테니. 마침내 문자가 전부가 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방법이므로.
여기는 마지막 분기점, 새 천 년과 새 세기가 머잖았다. 만일 세상이 이어진다면, 너는 온전히 새로운 시대를 살게 될 것이다.
그러하니 세상을 이루는 기억들이 내내 단단하기를, 네가 디딘 지표가 부식되지 않기를, 테르프시코레 여신의 말예인 이 가야트리가 바란다.』
***
트루데 탈리브는 눈을 떴다.
긴긴 잠을 자다가 깬 듯 몸이 흐늘흐늘했다.
낑낑 일어나 보니 방은 익숙한 왕세자 근위군의 숙소인데, 저를 뒤흔들어 깨우는 놈은 여기 없어야 될 인간이었다.
“일어났나, 콩알 트루데. 네가 제일 마지막이다. 안 일어나면 둘러업고라도 갈랬더니.”
“라이사? 진짜 라이사야? 본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왜 이렇게 갑자기 훅 늙은 거 같냐, 잉?”
퍽.
머리에서 생각난 말을 하나도 안 거르고 고대로 입으로 내뱉은 트루데는 라이사의 돌덩이 같은 주먹으로 그냥 처맞았다.
몸이 말짱해도 쨉이 안 되는데, 사지가 다 끊겼다 붙은 듯 아프고 지끈거려서는 도통 라이사의 주먹질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얼마 안 되긴, 무슨. 넌 더 맞아야 돼. 네 지금 꼴을 니네 외할머니가 아시면 혀를 차실 거다.”
“안 그래도 꿈자리서 외할머니를 본 것도 같은데, 어구구구, 허리야. 아니 삭신이야. 왜 이렇게 온몸이 다 아퍼.”
“돌아가신 지 한참 되신 가야트리 할머니도 네놈이 걱정되어서 나오셨나 보지.”
“내가 뭘.”
“차기 국왕과 측근에게 칼을 들이대고도 반역자가 안 된 데 감사하고 짐 싸라. 고향으로 돌아간다.”
“뭐? 반역자? 내가 언제 왕세자님과 공작님에게?”
“귓구멍이 썩었냐. 반역자 아니게 됐다고. 그 왕세자도 이제 왕세자 아니고 공작님도…. 아무튼, 아서 왕자가 차기 국왕이 될 거다. 일단은 짐부터 챙겨.”
트루데는 어안이 벙벙했다.
자다 깨 보니 왕세자가 세자위을 내려놓고, 태서턴도 공작위를 반납하며, 트리스테인은 왕실 직할령이 된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아서 왕자가 유일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니?
그는 라이사의 불친절한 설명을 들어도 뭐가 뭔 소린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왕세자의 매혹에서 풀려난, 생존한 최후의 왕세자 근위대원들은 근래의 기억이 불완전해 한동안 혼란이 있었다.
그중에도 가장 늦게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자가, 이시엘과 마지막까지 대치했던 작은 트루데였다.
“아니, 뭐가 어케 돌아가는겨.”
“자세한 이야기는 고향 가면서 해 줄 테니 일어나. 이러다 기차 놓치면 트리스테인 직행 못 타고 환승편으로 가야 한다고. 안 그래도 마수 땜에 선로가 엉망인데, 더는 못 기다린다. 너네 어머니가 오지도 않는 니 편지 기다리다가 눈이 빠지셨는데 여기서도 늦을라고?”
“편지, 허, 그러네… 언제 마지막으로 보냈더라?”
“2년 전, 벌써 2년 전이다!”
“어, 어어어. 어어어?”
아무튼, 어릴 때부터 라이사에게 말로도 검술로도 이겨본 적 없던 트루데는, 거센 구박을 받으며 별로 있지도 않던 짐을 대충 챙겼다.
왕세자 근위군의 본진인 헤브론 성 밖으로 나오자 수도는 온갖 곳이 다 공사 중이었다.
대로에 접한 건물은 대부분 비계를 두르고 있고, 깨져 나간 보도를 새로 포장하는 인부들이 분주했다.
주요 지역 복원이라면 마법사가 하겠지만 그들이 전부 맡기엔 보수할 건물이 너무 많았던 터였다.
깡깡 시끄럽고 활기찬 거리를 마차를 타고 쏜살같이 가로지르니 윗니 아랫니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안이 흔들렸지만, 봄 날씨가 쾌청하니 머리가 맑고 기분도 좋았다.
트루데는 어쩐지 기억이 뒤죽박죽인 최근의 일을 되짚다가, 역시 꿈에 할머니가 나왔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오래 살았던 외할머니는 파도도 잔잔하던 어느 겨울날 언제나처럼 바닷가에서 산책을 나갔다가 훌쩍 사라지셨다.
다들 할머니는 보통 분이 아니셔 갖고 죽을 날을 알고 귀천하신 거라고들 했다. 묘가 없어서 성묘대신 매년 겨울마다 제카브르 내해에 꽃을 뿌렸다.
‘돌아가면 할매 보라고 바다에다 꽃이라도 몇 송이 뿌려야겄다.’
트리스테인행 특별 편성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와 있는 룬데인 중앙역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동남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은, 몇 없는 친구들이 모두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모양이었다.
다들 부상에서 막 나은 듯 초췌한 모습이지만 대충 운신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얼른 돌아가서들 소뼈 스프랑 블러드 소시지 스튜에 세 개의 호수를 거덜 내자는 소릴 들으니 뱃속이 요동쳤다.
트루데도 기차에 올라타며 소리쳤다.
“가자! 그래, 얼른 돌아가자! 으아아~!”
속이 탁 트이고 숨이 잘 쉬어졌다. 어째선지 아주 오랜만에, 속의 말을 그대로 말한 감이었다.
기차는 고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작은 트루데는 마침내 맞이한 해방의 자유를 환호로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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