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57
이름을 부른다는 것 (1)
“이런, 이런 식으로 해서는, 네 불멸은 절대로 취하되지 않아.”
“그러니까 그걸 취하할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
아서에게 답을 한 이는 떨고 있던 클레이오가 아니었다.
“글, 쎄, 그는, 그걸 원치 않을 텐데.”
클레이오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원고가 현현했는데도 세상의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
멜키오르만이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시야 끝에 걸리는 저기 지평선에선 여전히 브리스텔 스텔라 방벽이 간헐적으로 명멸했다.
본디, 원고가 펼쳐져 있는 동안에는 별들조차 반짝이지 않아야 하건만 그러한 금제가 끊어져 나간 것이다.
마법사와 국왕이 대결을 멈춘 때에 천천히 숲을 가로질러 온 멜키오르는 마치 여백에서 홀연히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펼쳐낸 광대한 에테르 소용돌이 가운데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남자는 생명력이 거의 다하여 들풀이나 자갈처럼 좀체 기척이 인식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런 그를 태서턴이 이끌고 왔다.
내내 강화를 쓰면서 균열과 마법의 폭발까지 견뎌낸 태서턴은 지나친 실혈로 생명이 끊기기 직전이었다.
그래도 그는 멜키오르를, 그가 명령한 제때에, 제 장소로 데려다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멜키오르는 등장 시간을 맞추는 능숙한 배우처럼 행동했다.
그에겐 역시 그 자신만의 각본이 존재할 테니까.
“지, 금이야, 클레이오. 나와의 약속을 이행하, 게. 나의 이름을 지워서 끝, 까지 채워져 버, 린 팔림프세스트에 다시 자리, 를 얻도록 해.”
멜키오르의 말에 호응하듯, 원고에 쓰인 그의 이름들이 마르지 않은 잉크의 광택을 발했다.
파르르르륵.
바람을 맞아 앞장으로 넘어간 페이지들, 이미 확정되어 개정할 수 없었던 부분에서조차.
클레이오에겐 다른 방도가 없어서, 방금 막 새로이 기재된 멜키오르의 이름이 포함된 문장, 남은 낱장의 몇 줄을 채우던 구절에 삭제 부호를 그려보았다.
손이 떨려서 무참히 일그러진 선이 원고 위를 내달렸다.
지이익.
클레이오는, 남은 원고에서 그를 지울 수가 있었다.
그러자 시간의 일부가 되돌려지고, 멜키오르는 다시금 숲의 가운데로부터 가장자리로 걸어 나온다.
종전과 꼭 같은 움직임으로.
“되, 었는, 가?”
멜키오르는 답을 구하듯 클레이오의 숨소리를 헤아려보다가, 기쁘게 웃었다.
“아, 정말로 마침, 내, 때가 되었군. 그래, 한 번쯤은, 우주의 별들이, 나,를 위해서, 정렬, 되는 순간도 있을, 터이다. 저 빛나던 계명성이 추락, 하였으니, 가, 능해진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아서와 클레이오 사이를 멜키오르와 태서턴이 가로막은 형국이 됐다.
사자의 검을 쥔 아서는 제 형제와 친구를 응시한다. 하지만 그의 검조차도 두 번째로는 검로를 내지 못한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힘이 약해진 태서턴은 아서의 칼에 목숨을 잃더라도 멜키오르가 하려는 일을 이루어 주려는 듯 아무런 방어의 몸짓 없이 제 신체를 내어놓고 있었다.
그 치열하면서 절박한 각오는 적어도 몇 분간 그랜드 마스터의 행동을 저지할 정도는 됐다.
태서턴은 멜키오르가 맞이할 끝을 알면서도 아서를 가로막는다. 아서는 별다른 표정 없이 사자의 검에 검기를 입힌다.
결과가 정해진 싸움, 그러나 손쉽게 끝나지 않을 대결이 시작된다.
검과 검이, 푸른 에테르와 금빛 에테르가 부닥쳐 충돌한다.
환생자가 아직 살아서 멜키오르의 곁에 머물던 것은, 이제는 다시는 그의 뜻을 어기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서와 태서턴이 대치하는 동안 신의 대리인은 필사적으로 펜을 쥐었다.
사각. 사각사각.
펜에서 여분의 잉크를 털어낸 클레이오는 시간의 틈새에서 무아지경으로 원고를 수정한다.
거의 마지막에 얻었던 색인 기능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멜키오르의 이름을 하나하나 찾아 지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펜이 오가고 멜키오르의 이름이 지워지면 행과 열이 즉각적으로 움직여, 바투 빈 공간을 만들어냈다.
멜키오르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원고를 볼 수 있는 것처럼 클레이오의 펜 끝을 응시했다.
부스러져가는 원고는 어느 장이나 할 것 없이 부드럽게 나달거렸고, 막 탈피한 나비의 날개보다 연약했다.
그 쉽게 찢기는 판면 위에서 사건들은 무작스럽게 단순화된다. 멜키오르의 이름을 지움으로써.
그렇게 그를 기록한 문자들이 사라져간다.
멜키오르의 이름이 세상을 쓴 기록으로부터 삭제될 때, 수록된 역사가 한 번도 진실이었던 적 없었던 사내는 큰 기쁨을 느낀다.
사내의 육신이 손끝부터 천천히 물리적 실체를 잃어가기 시작한다. 심해의 생물처럼 투명하게 배경을 비추면서.
그는 살다 죽는 것이 아니라, 신의 안배에 따라 수명이 다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책에서 이름을 지우는 결말을 쟁취해냈다.
심지어는 신의 뜻에 따라 세상이 지속되도록 하면서.
그러나 멜키오르는 자신이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지속은 종말보다 비루할 것이기에.
마침내 클레이오는 색인의 항목에서조차 멜키오르가 사라지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했고, 그가 저질렀고, 그가 이룩했던 모든 일의 맥락이 뭉개지고 이야기는 뒤엉켜버렸지만 그 때문에 팔림프세스트엔 문장을 쓸 공간이 생겨났다.
클레이오는 열악하게 개정된 원고를 한숨 속에서 마무리한다.
이 무리한 개변에 의해 신들의 정원은 황폐해졌고 청금빛 개울은 곧 잦아들었다. 잉크가 흐르던 펜은 거의 말라 거친 선만 자아냈다.
클레이오는 수정이 확정되길 바라는 간절한 기원 속에서 7장을 끝냈다.
힘겹게 바스락거리던 원고는 그렇게 끝난 7장이 정전임을 확정했다. 이야기의 7장이 끝을 맞이하고, 클레이오의 성흔이 재장전된다.
원고의 끄트머리엔 너덜너덜한 빈 낱장이 단 한 페이지 남았다. 이제는 여덟 번째 장이다.
클레이오는 이어서 한 번 더 성흔을 발동시킨다.
그는 간신히 얻어낸 백면의 첫 줄에 ‘8장. 그리하여 신의 뜻을 벗어난 아서 리오그난에게서 불멸성이 거두어진다.’라고 쓴다.
.
.
.
털썩.
아서는 곧 태서턴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온몸이 망가진 기사는 흰 모래무지에 반쯤 처박힌 채 막대한 피를 토해내며, 눈으로는 언약의 대상만을 쫓았다.
그에게는 일별조차 않고 희미해져 가는 제 손끝을 내려다보고 있는 인물의 모습에, 태서턴 트리스테인은 식별하기 어려운 미소를 짓는다.
천 년과 반복을 거치면서도 그치지 않았던 언약, 영원성의 직유가 조건을 충족하여 종결되었다.
당신을 의지에 반하여 살게 하거나 죽도록 하지 않고, 복종하여.
공기 속으로 섞여서 가벼이 소실되는 자는 가만하게 말한다. 들린 것은 아니나 들리게 된다. 이름이 지워지고 분노로부터도 해방된 자의 말이다.
‘신살자여, 너는 나를 역사에 붙들던 네 아집을 더 이어갈 수 없다. 이게 다고, 여기까지이다.’
태서턴이 그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짧다.
파아아아아앗―
광막한 빛이 시각을 일시에 앗아 간다.
므네모시네의 문은 세상으로 펼쳐놓았던 에테르를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문을 지키듯 붙박여 있던 레지나는 바르르 눈꺼풀을 떤다. 마침내 뜨인 자수정빛 눈은 책망의 기색 없이 세상의 왕을 본다. 지면에 내려앉았던 아서의 황금빛 에테르가 걷혀 문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서는 지금 벌어지는 이변의 목적을 알게 된다.
아서의 에테르 전체를 환수하여 성흔 역시 무력화시키려는 것이다.
역방향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므네모시네의 문 앞에선 어떤 스킬도 쓸 수 없고, 성흔 역시 제대로 발동하지 않았다.
사아아아아앗―!
클레이오 역시 그 여파에 휩쓸려, 그가 손에 쥔 팔림프세스트가 꺼져 사라질 듯했다. 마법사는 아직 잉크가 마르지 않은 원고를 그러쥐고서 더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필사적인 [방어] 마법을 펼쳤다.
그의 에테르는 문을 통하여 온 것이 아니기에, 일시적인 에테르 진공 상태가 된 문 앞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이대로 8장의 첫 줄이 온전히 새겨지고 나면 클레이오는 곧장 문으로 갈 터였다.
므네모시네의 문으로부터 부는 역풍에 휘말린 아서는 홀로 맞선다. 그는 힘겹게 검을 들어 올린다. 뜯겨나가는 에테르를 조금이라도 보존하기 위해서.
그 부닥침은 이제껏 매끄러웠던 아서의 온몸에 가느다란 날로 저민 듯한 상처를 만들어 낸다.
그 상처는 이전처럼 곧장 치유되지 않고 내내 남는다. 아서의 핏방울이 금빛 폭풍에 뒤섞이기 시작한다.
금과 적. 고귀하면서도 잔인한 색채가 아서의 주변에서 뒤섞인다. 그는 버티고 저항하고 검로를 낸다. 신이, 신의, 신으로부터 이러한 형용구가 붙은 모든 일들을 끝내기 위해.
그 순간 클레이오는 자신이 쓴 8장의 구절이 확정되었다는 고지를 본다.
[—저자가 해당 전개를 정전으로 인정합니….]그러나 그 금빛 글자는, 금적색 폭풍 가운데서 뻗어 나온 상처투성이 손에 의해 이내 흩어진다. 문장의 끝이 검사의 손끝을 스쳐 이지러진다.
사자의 검으로 공간을 찢어낸 아서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폭풍을 완전히 벗어난다. 천둥과 번개가 밤하늘을 할퀴고 지면이 흘러내리는 도중, 기울어진 므네모시네의 문에서 빛이 꺼져버린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여신은 다시 눈을 감는다.
종내에, 에테르의 흐름은 통상대로 문 안에서 문 바깥으로 나오는 방향성을 되찾는다.
아서는.
아서는 제 몸을 뒤덮은 핏물을 쓸어낸다. 갑주가 깨져나간 자리, 뜯긴 튜닉 아래 새살이 돋아서, 그가 불멸의 거둠을 거부할 수 있었음을 증거 한다.
클레이오는 현현 시간의 제한이 없는 원고를 꽉 붙잡는다. 그의 손에 다시 깃펜이 쥐인다.
아서의 개입에 의해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문장을 또다시 꼭 같이 쓰려 한다. 하지만 잉크는 계속해서 말라 흩어져버리고 문자가 되지를 않는다. 이제 낱장들은 모서리가 둥글다. 여백이 모두 먼지가 되어서.
도무지 어떤 말도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그라져가는 존재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머잖아 세상으로부터 실전될 속삭임이, 음성 없이 클레이오와 아서의 귓가에 메아리친다.
두 번 있지 않을 자, 다시는 없을 자로서 이름을 잃은 이의 목소리이다.
‘신의 사자여, 헛된 시도를 말게. 결국에 우리의 주인공은 불멸성을 감당하도록 예정된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의 저항이 또한 이러한 결말로 운명을 이끄네. 글쎄, 절대로 세상을 멸망케 할 수도 없고 신의 사자를 되돌려 보낼 수도 없다면 스스로 세계를 짊어질 아틀라스가 되는 방도 외에 무엇이 있었을까.
이제는 알지. 내 모든 반복된 생애보다도 긴 삶을 그에게 예비해 놓았기에 저 애가 주인공인 것을.
그것은 신의 적자였던 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적들과 대적자가 모두 사라진 세계에서 그 모든 고통을 누가 대속하겠는가. 그에게 주어졌던 주인공으로서의 권익은 모두, 이때를 위한 것이었겠지. 아, 이제는 알아. 나는 주인공 같은 건 되고 싶지 않네. 그 일을 어찌 생명 있는 존재가 견딜 수 있겠는가?
역사가 끝날 때에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 구원이며, 그건 지난 여덟 번째 세계를 지배했던 종교가 포착했던 신에 대한 유일한 진실이지.
그리고 우리 구원의 지연자는, 일어날 구원을 지연시킨다는 명성 속에서 멸망을 지연시키는 의무를 짊어지게 될 것이다.
신의 모든 계획은 들어맞는 동시에 틀어졌다. 내가 그녀의 뜻을 이루게 하고, 그가 그녀의 뜻을 가로막았으니.
이 결말은 신이 원한 바는 아니겠지.
아마도 주인공은 내가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완전한 멸망을 일으키거나, 더 오랜 절망을 맛보게 될 테니까.
종내에는, 마지막 여신 역시 나와 같은 패배를 겪게 될 것이다.
차라리 여기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어긋난 채 달려가는 세계를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하는 것보다 낫다는 걸 칼리오페 역시 알게 될 걸세.
더 이상 무사 여신은 시인에게 계시를 내리지 못하고, 송덕될 영웅시 역시 전해주지 못할 것이다.
나는 필연과 함께 죽는다. 뒤에 올 것은 목적도 목표도 없는 우연의 세계이다. 보게, 역사는 다시는 수정될 수 없는 채로 발가벗겨져 인간의 손에 내맡김 당했네. 칼리오페의 역사는 그렇게 유기되었지.
남은 것은 우연이고, 나머지는 침묵이네.’
그리고는 웃음소리.
소실된 육신의 끝에, 영혼이 남기는 미소. 권능 없는 아름다움이 남기는, 한시적인 인상. 그렇게 존재는 완전히 사라진다.
태서턴은 의식을 잃고서 웅크렸다. 황야에는 클레이오와 아서만이 선 채이다. 두 사람 모두 기진하였으나 쓰러지지 않고, 그들의 등 뒤에는 여전히 므네모시네의 문이 남겨져 있다.
클레이오는 차가운 땀이 밴 손에서 펜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써야만 했다. 쓰고 나서, 저 문으로 가서….
“그만하자, 클레이오. 소멸한 자의 말이 맞아. 여기까지, 여기까지만 하는 거야.”
#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