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60
영원 회귀 (2)
돌아온 지 사흘째가 되는 수요일에는 내내 학교에 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수도방위대 기사단 인명록, 수도방위대 학교 졸업자 목록, 상원과 하원의원 인명록, 신문사에서 연말마다 발간하는 명사록까지 훑으니 여러 사람들의 달라진 행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약속’에 깃들었던 대부분의 기능이 동결되었지만, 알비온어를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능력은 일말의 자비처럼 남겨졌다.
그조차 없었다면 세상을 다시 사는 일은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어떤 세계에서도 ‘클리오의 약속’은 사용자에게 남겨질 것이라던 고지는, 어쨌든 거짓은 아니었던 거다.
바스코 그레이어 자작의 조카는 상업에 뛰어난 재능을 가져서 어린 나이부터 상회의 지점을 맡아 세리카에 나가 있다고 들었다.
올해로 열여덟 살인 프란의 이름 또한 벌써부터 명사록에 올라가 있었다. 계관 시인의 어린 자녀로서가 아니라 차세대의 가장 유망한 마도 과학자인 동시에 상원 폐지론자, 작위 반납 소송의 주체로서.
다시 반복된 세상의 프란은 수도방위대 학교 학생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과학아카데미는 불타지 않았다.
사환이 함께 가져다준 신문 1면에는, 루스워스-그로스베너 후작가의 후계자가 평민원의 피선거권을 얻기 위해 개시한 송사 소식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한때 장 로베르라는 이름을 쓰며 카롤링거 혁명에 참여했다 돌아온 자의 공개적 행보는 수도의 여론을 끓어오르게 했다.
해상도 낮은 사진엔 수수한 외모의 장과 그의 변호사 뒤편으로, 플랫캡 아래 단호한 표정을 한 프란의 옆모습이 찍혀 있었다.
여전히 검소한 차림새에 키는 작았지만 건강한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레이오는 그것이 보기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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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그 자그만 몸으로도 씩씩하게 영역 시찰을 갔고, 책상에 잔뜩 책이며 신문을 펼쳐놓고 있는 동안 아침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수업을 마치고 들어온 네보는 여전히 활자 틈새에 코를 박고 식사 생각도 안 하는 클레이오를 보자 괜한 타박을 주며 학생 식당으로 끌고 왔다.
1890년도 5월의 학생 식당 메뉴는 이전과 엇비슷했다. 계절 재료를 쓴 3코스, 와인은 비교적 저렴하지만 음식에 잘 어울리는 가벼운 것.
학생 식당의 총책임자인 샬럿 부인이 점심식사용 와인의 코르크를 요령 좋게 빼내고, 부식이 되지 않았는지 향을 맡아보다 살며시 미소 짓는 모습을 본 클레이오는 도무지 아무것도 더 삼키지 못하고 커트러리만 든 채 손을 조금 떨었다.
우걱우걱 제 몫의 식사를 욱여넣던 네보가 으,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러는데. 손 떨리냐? 새끼, 굶어서 그렇잖아. 안 그래도 비실비실한 놈이 아침도 건너뛰고 잘하는 짓거리다.”
“아, 정말. 굶어서 그런가 봐. 지금이라도 챙겨 내려와 줘서 고맙다. 너 땜에 살잖아.”
“이 몸의 은혜를 이제야 제대로 알겠냐고. 너 챙기는 건 나밖에 없는 거.”
“고마워.”
“아씨, 또 그렇게 정색하면 나만 바보 되고. 됐어!”
겉도는 클레이오에게 신경을 쓰라고 선생님들이 그에게 넌지시 권했다는 건 알지만, 이유야 어쨌든 성실하게 이쪽을 보살피려 드는 네보.
아직 에테르 레벨은 낮고, 검기도 쓸 줄 모르며, 사람은커녕 마수도 베어본 적 없는 카토 지구 문방구 집 아들.
이 새로운 세계에서 네보는 어쩌면 동남 전선의 추위도 생애를 건 항명도 수도에서의 분투도 겪지 않고, 지루한 평화 속에서 티 없이 반짝이는 흉갑을 차고 기사로 임관할 수 있을지 모른다.
클레이오는 자각한다.
그는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 범속한 현재에서 홀연한 감동을 내내 느끼는 것이다.
네보는 클레이오보다 두 배쯤 빠른 속도로 식사를 마치고 끙끙 앓으며 식당을 빠져나갔다. 낙제 직전인 마법 기초 과목의 보충 수업을 들으러 가는 거였다.
클레이오는 식사를 다 마치고도 식은 차를 조금씩 마시며 창밖에서 막 피려고 하는 장미의 향과 익숙한 데도 최초여야만 하는 이 시절의 공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즈음, 수업을 늦게 마친 상급생들이 뒤늦게 들어와 왁자하게 교내 소식을 떠들어 댔다.
“길라드 이 자식은, 유니콘은 무슨 유니콘이야. 나이에서 열 살 빼고 계산해야 하는 거 아니냐?”
“강연 와서 유니콘 염병 개소리만 하며 쓸데없이 애들 부추기고 갔다고 그 세르게프 기동조사분과장이 징계 먹었다던데.”
“에즈라 선배도 좀 미친놈이긴 했는데 억울하긴 하겠다. 도대체 누가 달빛을 렌즈로 모아서 마석을 결합하면 환상생물을 만들 수 있을 거란 말을 믿냐고… 수도방위대 학교 학생이 돼갖곤.”
“다음엔 분과장 빼고 다리아 이사이 선배 강연만 듣는 게 낫겠어. 야외 실습에선 발화계 마법 활용이 크게 도움 되더라고.”
클레이오가 물에 빠지던 밤, 길라드 이클립시는 소환술 대신 유니콘을 만들 수 있을 거라며 검증이 안 된 구전의 방법을 시도해보다 실패한 듯했다.
아직 젊어서, 명사록엔 고작 몇 줄의 설명만 실린 마법사들의 여전함이 클레이오를 다시 웃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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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기를 치운 뒤 교내를 거닐던 클레이오는 어렵지 않게 목적으로 하던 사람을 발견했다.
교내에서 아서를 찾는 건 처음부터 쉬웠다. 그의 주변엔 항상 친구들이 모여 있었으니까. 검을 맞대고 어깨를 두드리고 때로는 진지한 얼굴로 미래를 논하는 친구들.
우리 황금의 977기, 그때의 그 아이들은 아니었으나, 아서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말라 죽지 않은 등나무 아치 아래 벤치에선 연병장의 소리가 잘 들렸다.
아서는 제힘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로사 선생의 지도하에 이시엘과 대련하고 있었다.
병결 기간 동안 듣고 보며 관찰해본 결과, 아서가 과거에 대해 알고 있다는 증거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게 여전히 불멸성이 깃들었는지 거두어졌는지도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으나, 분명한 건 하나였다.
이제 아서는 환시에 시달리는 왕자도, 저주받은 아이도 아니었다.
클레이오는 생각했다.
‘그거면 됐어.’
어떤 우정은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플라이 낚시도, 학생 식당의 술을 나누어 마시는 일도, 한가로운 봄날의 오수도 없다. 휘황한 서클을 선보여 제베디의 관심을 끄는 일도, 도서관의 창고 정리도 없을 것이다.
플라타 은행에 예치된 클레이오 아세르의 예금은 출금되지 않을 예정이다. 그래야만 할 이유가 없으므로.
지금의 자신에게 있는 건 애를 써서 순환시켜도 겨우 바닥에나 고이는 미세한 유량의 에테르, 깨어진 에테르 그릇, 그리고 인계의 과정을 모른 채 가지게 된 클레이오 아세르라는 이름뿐이다.
세상의 생김새에 대해 알아갈수록 의문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기만 했다.
제대로 된 힘이라곤 없는 자신이 왜 ‘클레이오 아세르’로서 다시 살도록 되었는지.
이렇게 매끄럽게 돌이켜질 수 있는 세계였다면 자신과 친구들이 고통과 슬픔을 견뎌내며 살아온 그 치열한 세월의 의미는 무엇이었을지.
자신에게는 ‘기억’이 있다.
이미 살아본 미래의 기억이. 그 모든 환대와 포용의 기억이, 참패와 승리가 교차하는 기억이.
반복으로도 지워지지 않는다면 기억은 그의 영혼에 깃든 것이다.
연보랏빛 등꽃이 드리운 성긴 그림자 아래서 클레이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새로움 가운데에서도 자신에게 기억이 남겨진 데에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살아가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볼 수밖에.
‘그래. 그렇지. 과거는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반대 방향의 지침일 수도 있겠지.’
그러리라고 생각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낼 수가 없으니 클레이오는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다.
곧 등나무 아래는 기척 없이 비고 클레이오의 결단은 누구에게도 인지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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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결 5일째가 되는 금요일, 클레이오는 학장실을 찾아가 자퇴계를 냈다.
제베디 학장은 영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던 기부 입학생을 강경하게 붙잡기가 어려웠다.
“때로는 부딪쳐봐야 스스로의 한계도 알게 되는 법 같습니다. 여길 나가서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 합니다. 그래도 제게 선생님은 언제까지고 스승님이실 겁니다.”
“내가 네게 가르친 것이 없는데 스승으로 여기다니 그것도 못 할 짓이다. 참으로, 다른 길을 찾았다면 마음으로나마 응원을 해 주마. 그래.”
“부친께는 연락을 해 두었으니 곧 자퇴 동의 서류를 보내주실 겁니다.”
보호자의 동의가 없으면 자퇴 처리가 완료되지 않는데도, 클레이오는 일단 밀어붙이는 형태로 기숙사를 퇴소했다. 류바 사감은 평소 조용하고 영혼이 없는 것처럼 굴던 소년의 변모에 놀란 눈치였다.
클레이오는 다 채우지도 않은 짐가방 하나에다, 조그마한 고양이 한 마리만 데리고서 곧장 수도의 아세르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차남이 무단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단 연락을 받은 기디온 아세르는 극히 대로해, 다음날 곧바로 룬데인으로 왔다.
이번에는 그가 후려치는 손을 피할 수 있었다. 어렵지 않았다.
기디온 아세르의 인생에서 몹시 드문, 감정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순간이었으므로 자세는 엉성했고, 무예를 익힌 적 없는 그였기에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그 긴 세월을 지나치고 다시 돌아와서 본 그는 그저 사랑을 잃은 서툰 남자였다.
클레이오는 이번에는 그간 별고가 없었냐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텔마 아세르가 죽은 후 기디온 아세르의 내면은 영원한 내전 상태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차가운 강물이 정신을 일깨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이라도 괜찮습니다. 제게도 사업을 해볼 기회를 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냐.”
클레이오는 차분하면서도 담담하게, 준비한 설득의 말을 풀어놓았다.
기디온 아세르는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긴 했지만, 특허품 제조에 대한 클레이오 아세르의 전망을 인정해주게 되었다. ‘세상의 필요’라는 측면에서 클레이오의 발상은 도움이 될 터였다.
아세르 저택 안 일곱 개의 침실, 24인용 식탁이 놓인 식당, 응접실 모두 사업상 전초 기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클레이오도, 기디온이 차남에게 정치를 시키기 위해 아세르 저택을 단장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클레이오는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전쟁과 마수 출몰이라는 서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삭제되었을지, 유지될지는 알 수 없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클레이오 아세르는 그저 작은 치부나 하던 인물로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다시 므네모시네의 문이 열린다면. 룬데인이 폭격당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마법도 무엇도 없는 그가 미래에 벌어질 일들에서 아서를 도우려면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처음 이 세계로 왔을 때처럼 그는 확연하지는 않으나 개연성 있는 미래를 알고 있다.
원고를 읽은 걸 그저 손쉬운 치부의 실마리로 알고서 가벼이 살아냈던 시절을, 그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다시 살아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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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지하의 와인 셀러 안 재고를 확인해보던 클레이오, 셀러에 따라 들어와선 흥분해 팔락거리는 베헤못을 일단 안아 들었다.
어린 고양이는 눈을 과하게 반짝거리면서 뭐라뭐라 미얔미얔 소릴 쳐댔다. 흰 구석 없이 새까만 온몸의 털을 부풀리면서.
인간의 말 따위는 못 하는 고양이지만, 어떻게든 바라는 건 들어주고 싶어서 클레이오는 품속에서 버둥대는 고양이의 뜻을 짐작하기 위해 성심을 다했다.
진정하라며 베헤못을 토닥거리는 와중, 지하의 어둠 속에서 왼손의 약속이 희미하게 반짝, 빛을 낸 것도 같았다.
그 불명확한 미광에 미간을 찌푸리던 클레이오는 곧 숨을 멈출 것 같은 기분이 됐다.
“키잇.(술.)”
“뭐?”
“미야아아앜.(술 줘.)”
며칠간 잘 먹어서 겨우 솜뭉치 상태를 벗어난 베헤못은 클레이오의 품 안에서 파닥파닥 날뛰었다.
너무 놀란 탓에, 클레이오는 얼빠진 소릴 하고 말았다.
“이렇게 작은데 술을 마셔도… 되나?”
다시 시작된 세상에서 클레이오 역시 아직 술 한 모금 마셔본 적이 없었다.
그런 여유를 가질 틈도 없었거니와, 잔을 기울이면 생각날 얼굴이 너무나 많았기에.
지금은 여기에 없거나, 있더라도 더 이상 오래된 친밀함 속에서 잔을 부딪쳐 주지 않게 된 이들이.
“내놔!”
클레이오는 급하게 부디갈라 와인 한 병을 열어서 손끝에 한 방울만 묻혀 고양이에게 내밀었다.
베헤못은 감질나게 그게 뭐냐고, 조그만 손톱도 안 들어간 앞발을 휘둘러댔다. 그래도 거절하지는 않고 까끌까끌한 혀로 클레이오의 손끝을 싹싹 핥았다.
몇 방울 술이 들어가도 아프거나 문제가 생기는 기색은 없었다.
“정말 마실 수 있구나.”
“마신다, 된다! 줘라! 먀아아앜!”
지하 셀러 바닥에서 한 손에는 먼지 쌓인 와인병을 쥐고 무릎에는 고양이를 올린 채로 클레이오는 볼썽사납게 엉엉 울었다.
베헤못의 말은 가느다란 울음소리와 뒤섞였고 이전처럼 유창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들렸다. 제 성질머리를 못 견뎌 성마르고 빠른 말투가 사무치게 그리웠었다.
“베헤못.”
“그래.”
“베헤못….”
“키에엣!”
“널 계속 이렇게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잡소리 말고 와인이나 더 따르라는 듯 클레이오의 손목을 갉작이던 고양이는 제 미간과 등으로 떨어져 내리는 뜨거운 눈물 속에서 옴찔거리다가 온몸으로 클레이오에게 붙어왔다.
“그거 나, 이름 맞다. 불러라.”
***
반복되어도 변치 않는 것들이 있다.
케트너스 레스토랑엔 졸인 무화과 소스를 얹은 푸아그라 구이를 꼭 같이 팔고, 베헤못이 입맛을 다시도록 맛있었다.
역시 같은 자리에서 성업 중인 와인 도매상에 연락을 하고 1875년산 주교의 탑을 대량 매입했다. 샬롱 북부의 흑포도로만 빚은 ‘금잔의 석양’ 1888년산 역시 케이스로 사들였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자 베헤못은 한결 털결이 자르르해지고, 금세 청소년 묘로 자랐다. 뮤즈의 신수에게는 제주를 바쳐야 했던 모양이다.
클레이오는 외부 활동에 필요한 옷을 맞추면서 자그마한 베헤못의 목둘레에도 맞는 실크 리본 타이를 함께 제작했다. 빨간색과 초록색이었다.
일을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로열 서커스에서 시위 행렬과 마주쳐 마차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클레이오는 베헤못을 바구니에 넣어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오래 입어 풀기가 가시고, 소맷단이 좀 모자란 재킷을 걸친 그는 군중 속에 쉽게 뒤섞였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경찰들이 둘러서 있지만 진압할 태세는 아니었고, 시위대에는 막내 사환이나 견습 하녀 정도의 나이인 청소년도 많았다.
열일곱 살 시절의 체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중병을 앓는 건 아니었기에 다음 전차 정류장까지는 걸을 만했다.
인파에 섞여 나아가던 클레이오는 목소리 하나만으로 군중을 탄식하고, 분노하게 하는 존재를 인식했다.
사과 박스 위에 올라선 연설자는, 반짝거리는 눈에 적갈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여성이었다. 목소리가 주는 인상보다 신장은 훨씬 큰데 얼굴은 앳되어 약간은 소녀처럼 보였다.
연설은 막바지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바로 자선이 아니라 복지입니다. 그리고 필요 없는 것은요?”
그녀의 연설에는 참여를 유도하는 구조가 있는 모양인지, 답변은 그녀 자신이 아니라 군중의 함성이 대신했다.
탁월한 연설자에게 동조하는 대인원이 이뤄낸 하모니였다.
“귀족원이겠지요!”
곧이어 노랫소리가 들렸다.
‘나가자, 나가자, 우리의 발로, 걸어서, 걸어서, 내일로 간다, 제 발로 걷지 않는 자들은 뒤에 두고서.’
클레이오는 순간 어지러워져서 고양이가 든 바구니만 꽉 껴안았다. 연설자의 얼굴과 목소리는 완전히 낯설면서도 익숙한 데가 있었다.
그는 플래카드를 든 나이 지긋한 여성에게 머뭇머뭇 물었다.
“저기 박스 위에 선 사람은 누굽니까?”
“깃발의 스콜라 지부 지부장이잖니. 얘 보렴, 너 오늘 룬데인에 처음 왔나?”
“…그런 셈입니다.”
친절한 부인은 어리버리 두리번거리는 클레이오에게 여러 가지를 설명해 주었다.
조지나 하웰은 핀토스의 외떨어진 산촌 출신이면서, 제비꽃 클럽 후원회의 연대로 수도방위대 학교를 졸업한 수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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