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75
꾸준한 정원사 (2)
멜키오르의 손에는 흙이 묻은 정원 손질용 장갑이 끼여 있었다.
‘와, 진짜 이 위화감 어쩔 거냐.’
전정가위를 도구함에 되돌려놓은 멜키오르는 연못가에 놓인 소박한 나무의자를 가리켰다.
“앉도록. 지금이 딱 좋을 시간이지.”
의자에 앉자 잎이 거의 져 가는 장미가 잘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잎도 벌레 먹고, 덩굴도 누렇게 말랐고 꽃도 비실비실 했다.
야외용 간이 탁자 위에는 식지 않게 감싼 양철 주전자와 대충 구겨진 양철 컵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왕세자는 정원 손질용 장갑을 벗었다. 그 안도 맨손이 아니라 얇은 면장갑이었다.
멜키오르의 손등을 흘낏 살폈던 클레이오는 어이가 없어졌다.
‘어차피 에테르 안 집어넣으면 보이지도 않는 게 성흔인데, 유난도 유난이다.’
도대체 누가 감히 왕세자의 손모가질 붙들고 에테르를 불어넣어 볼 거라고 저 야단을 부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하긴, 뭐. 내가 저 인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긴 있나. 없어.’
클레이오의 기분이 어떻든 간에 늘 우아하고, 오늘따라 느긋하기까지 한 멜키오르가 잔에 차를 따랐다.
쪼르륵―
그리고는 귀신에 홀린 듯 어안이 벙벙한 클레이오 앞에 잔을 밀어주었다.
뒤늦게 정신줄을 붙잡은 클레이오가 반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진사나 삽화가가 없나 찾는 거였다. 선전용 그림을 만들려고 이 짓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정원을 돌보는 소박한 취향의 왕세자.
그림은 좋지 않은가. 악명 높은 마가렛 대처도 찍은 정원일 컨셉 사진, 왕세자라고 못 찍을까.
움찔대는 클레이오의 기색을 왕세자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무얼 찾고 있나?”
“혹시 또 언론인을 대동한 자리인가 해서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하하, 일전에 훈장수여식 때 꽤 놀랐나보군, 클레이오 경.”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보니 말입니다.”
“오늘은 아무런 일정도 없는 휴일이지. 여긴 내 사적인 공간이고. 펜을 든 무뢰배들을 들여놓는 곳이 아니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 무뢰배들과 꽤나 친해 보이던데….’
클레이오에겐 모든 것이 불편한 자리이지만, 왕세자의 입에서 나오는 ‘경’이란 호칭이 그 중에서도 제일 불편했다.
[언약]없이 충성서약만 맺은, 그저 형식상의 직위임에도 어쩐지 저 자가 그 호칭을 쓰면 부하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묘하게 거슬리는 클레이오였다.“그렇다면 여기서는 부디 저를 저하의 기사로 부르는 대신 제 나이와 처지에 걸맞은 호칭을 써주실 수 있겠습니까.”
“흐음, 남들은 칭호를 얻으면 기차표 예약 할 때까지 쓰려고 안달인데 어째서 그리도 마음에 안 들어 하는지.”
“제게 맞지 않는 옷을 껴입은 듯한 기분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지, 클레이오. 이렇게 날이 좋으니 못 들어줄 청도 아니야. 헌데, 내 취미가 꽤나 놀라운가 보군.”
“그렇지 않다면 허언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궁성 한복판에 코티지 정원이라니, 이 또한 정취가 있군요.”
“장미덩굴은 삼분지 일이 썩었고, 아네모네도 구근을 파내기엔 늦었지만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올해는 이르게 서리가 내렸는데 어찌 아직 꽃이 피는지 모를 노릇이야.”
흙이 묻은 소박한 옷을 걸치고 양철 잔에 담긴 차를 찬찬히 마시던 멜키오르는, 사람 손이 미치다 만 듯한 쇠락한 정원을 바라본다.
오로지 정원만을 대면할 때, 그의 얼굴에서 순연한 미소가 떠오른다.
결코 그러한 표현에 걸맞은 인간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런 순간엔 의지와 무관하게 시선을 강탈당하고 만다.
세계가 다시 쓰이고 있는 것을 아는 이 자는 어떤 마음으로 매년 새로이 피는 꽃을 키우는 것일까?
클레이오로선 짐작도 해볼 수 없는 심경이었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에겐, 저 꽃들의 피고 짐이나 인간의 목숨이 사그라듦이나 다르지 않게 느껴질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는 전자에 더 마음아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솜씨 좋은 정원사들은 저 풀과 나무들이 보내는 제각기의 신호를 알아듣는다 하는데, 나는 정원에서 자라는 식물의 뜻을 이해할 수 없지. 정원사로는 영 실격이네.”
멜키오르의 말에선, 아쉬움보다 기꺼움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았다.
말이 없는 식물이야말로 저 왕세자가 평온히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일 테니까.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그곳이 지옥이겠지.
그의 불안전한 출신, 지나친 아름다움, 과도한 권능―그 모든 것이 한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요소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물론, 나랑은 역시 상관없는 문제지만. 앞뒤좌우야 어찌되든 지금은 당장은 알비온의 왕세자 저하이시잖아.’
“국사에 바쁘신데 취미에 쏟으실 시간이 부족한들 어찌하겠습니까. 오히려 어디에서 조경을 배우셨는지 여쭙고 싶을 정도입니다.”
“어릴 적에, 이곳을 돌보던 조용한 정원사가 있었네. 소박한 코티지 정원을 가꿀 줄 아는 정원사가 없어서, 어머니의 고향서부터 일꾼을 하나 불러 올렸지. 그를 따라다니며 어깨 너머로 배운 걸세.”
“아 그렇다면 이곳은 혹시….”
“그래. 돌아가신 내 모친의 거처였지. 그분께선 본디 평민 출신이라 저 차가운 궁성에 정을 못 붙이시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터, 폐하께서 모친의 고향집을 본떠 만들어 주신 곳이네.”
“여전히 아름답고 소박한 풍취가 있습니다.”
“그대도 부탁이 있을 땐 듣기 좋은 말을 할 줄 아는군.”
미지근해진 잔을 든 채로 클레이오는 굳어버렸다.
“…과연 세자저하께는 내심을 숨길 수가 없군요.”
경련하는 입가를 숨기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사실 차에서 무슨 향이 나는지도 안 느껴졌다.
“하하, 그대가 내게 먼저 연통을 넣은 건 처음이 아닌가. 허나, 여기 아세르 영식은 내게 아주 중요한 계약 상대이기도 하니, 편의를 봐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주도록 하지. 말해 보도록 해.”
이야기가 빨라서 좋다고 해야 할지, 무섭다고 해야 할지.
물론 클레이오는 앞뒤를 재느라 기회를 버리진 않았다.
“저를 국왕 서고에 출입시켜주실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네?”
“얼마든지 출입시켜 주겠다고 했네. 지금 가겠나?”
“…이유도 묻지 않으시고 말입니까?”
“묻는다고 내가 마법에 대해 뭘 알겠나? 왕실 서고의 서적 대부분은 해독 불가능한 고문서, 기적과 기이, 금지된 마법에 관한 것인데, 본다 한들 실현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니.”
“그렇다고 듣기는 했습니다.”
“탐구심을 가지는 건 좋은 자세지. 게다가 이런 일은 정말로 처음 있는 것이라, 나로서는 재미가 있어.”
순순히 납득해주니 다행이었지만 어쩐지 뒤통수가 당기는 듯 찝찝한 기분이 남아있었다.
‘처음… 지난 원고에선 없던 사건이라 봐준다는 거지? 이 작자는 원고 내용을 개변하는 거라면 뭐든 허용하는 걸까? 그렇게 순순히 넘어갈 리 없을 것 같은데.’
“또한 나 역시 그대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니, 이번 일을 신세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클레이오는 얼음 칼이 목이 스친 듯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내역이 상세하지 않은 멜키오르의 부탁이라니. 서명해서 건네는 백지수표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는 항목이었다.
“저하께서 제게 부탁할 일이 뭐가 있을는지요.”
“단기간의 길안내이지.”
“여행이라도 계획하고 계십니까? 하지만 저는 콜포스에서 나고 자라 룬데인 시내조차 잘 모르는 처지인데, 어딜 안내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안내해줄 수 있는 곳이 왜 없나. 그대에겐 ‘예측’의 성흔이 있는데.”
“성흔까지 써야 할 여행지가 어디일지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나 역시 한 번은 기억된 세계에 들어갈 것이다. 그 때에는 안내자가 필요할 터.”
멜키오르와 아슬란은 처지가 달랐다. 왕실 재산 처분권이 현재는 왕세자에게 있으니 마석이나 마도구가 아쉬울 리 없었다. 레벨 4의 검사이긴 하지만 무력을 추구한단 소리 역시 못 들어봤다.
‘지난 원고에서도 왕세자가 던전에 관심을 보였나?’
「기억」을 통해 원고를 샅샅이 뒤져 보니 왕세자와 던전에 동행했던 이시엘의 회고를 찾을 수 있긴 했다.
‘진주의 도시’라고, 던전 중에선 가장 안전했던 곳이었다. 강강강강 전개이던 원고에서 그나마 숨 돌리는 구간이었다고 할까.
‘진주의 도시’로 문이 열렸을 때 왕세자는 기막힌 타이밍으로 아서의 파티에 끼어들어갔다.
아서와 이시엘이 막아보려 했지만 ‘기억된 세계의 일 역시 내 영토의 일이니, 내 영토와 신민을 지키는 일 앞에서 물러설 수 없네.’라는 정론을 무기로 그들의 만류를 격파했다.
그리하여 왕세자가 던전에 들어갔던 진짜 목적은 끝까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대중적 인기를 얻기 위한 모션에 불과했을 수도 있고.
‘그런데, 지난 원고 내용 기억한다는 낌새는 잔뜩 풍겨 놓고 웬 안내가 필요하다는 거지. 그쯤 알면 제 앞가림은 스스로 하지 않고.’
“저하께서 어찌 그런 위험한 곳에 거하시려 하십니까?”
“친애하는 클레이오, 나에겐 이유를 설명해야 할 의무가 없다.”
책하는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멜키오르의 시선엔 미묘한 쓸쓸함이 감돌았다.
지금까지 등장한 인물 중 가장 무서운 놈이 평소와 다르게 구니, 쓰나미가 밀려오기 전 해안에서 파도가 밀려나가는 고요의 순간처럼 긴장이 더해졌다.
클레이오는 간신히 예에 맞춰 대답을 했다.
“송구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
.
.
그 뒤로는 왕세자를 쫓아가느라 바빴다.
왕이 잠든 침실 복도를 지나쳐, 아홉 개 쯤 되는 모퉁이를 돌고, 다섯 군데의 계단을 오르내린 것 같았다.
마침내 멜키오르는 그림 하나 걸려 있지 않은 긴 복도 앞에 섰다.
벽을 찬찬히 살피던 왕세자는 왼손의 장갑을 벗었다. 슬쩍 살펴보니, 꽁꽁 싸맬 이유도 없이 희고 깨끗하기만 한 손이었다.
‘하긴 어차피 성흔은 오른손에만 있는 건데.’
그리고는 왼손을 벽의 한 구석에 대자, 거기서부터 복잡한 마법식이 역으로 구축되는 것이 보였다.
‘봉인을 해제하는 건가!’
「지각」을 통해 보니 확실했다.
벽 안쪽에는 [방어][은폐]등 몇 가지의 마법식이 동시에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특정 조건을 가진 이의 접촉으로만 봉인이 해제되는 모양이었다.
몇 초 뒤.
흰 벽 위에 선을 긋듯, 문고리도 없는 네모난 문이 생성되었다.
“자, 들어가게.”
그렇게 거창한 봉인이 되어 있었는데, 정작 서고는 큰 저택의 개인 서재 규모쯤 되는 방에 불과했다.
양쪽 벽엔 2층 높이의 책장이, 문 맞은편에는 압살롬 2세 시대 양식의 아주 좁은 창이, 문이 자리한 벽 끝엔 마석 난방기와 책걸상이 갖춰져 있었다.
멜키오르는 대뜸 난방기 앞의 1인용 안락의자에 가 앉았다. 밀짚모자도 벗어 탁자 위에 올렸다. 금세 일어날 태도가 아니었다.
어쩐지 순순히 서고를 열어 주더라니, 밀착감시를 받아야 한단 소릴 왕세자는 뒤늦게야 해주었다.
“제가 열람하는 내내 저하께서 거기 계셔야 한단 말입니까?”
“규정상 그러하네.”
“열람이 길어질 듯한데 그런 폐를 끼쳐도 될는지….”
“마법사들이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를 기피한다 익히 듣기는 했네만, 어쩌겠나. 흐음, 여왕의 시대였다면 방법이 있었을 텐데 지금은 가망이 없으니 안 됐군.”
“무엇입니까?”
“국왕의 배우자는, 상호간의 [언약]을 맺을 경우 왕과 동등한 권리를 갖지. 내 조모는 여왕이셨지 않나. 부군인 국서께서도 책과 마법에 흥미가 많으셨다더군.”
클레이오는 ‘이 자식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라고 생각하면서도, 접하기 어려운 정보는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했다.
‘결혼을 한다고 다 [언약]을 맺진 않잖아. 그럼 쥴레이카 왕비는 여기 들어올 수 있던 거야 아닌 거야….’
“그 이후론 좀처럼 방문자가 없었던 것 같군.”
멜키오르는 방금 클레이오가 이름을 적어 넣은, 백지에 가까운 방명록을 팔락여 보였다.
왕세자의 말대로 클레이오와 이전 방문자 사이엔 30년 이상의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설마 저 멜키오르가 쥴레이카처럼 눈에 띄는 변수를 눈치 못 챘을 리 없는데. 게다가 친어머니가 여길 들어올 수 있다면 아슬란이 굳이 출입 인가를 멜키오르에게 받으려 했을 리도 없고. 아- 젠장, 모르겠다.’
“그런 것 치고는 서고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군요.”
“바닥의 저 자디 잔 문양을 알아보겠나?”
“네?”
“전부 마석 백금이야. [보존] 마법식을 그리고 있지. 여긴 사람 손이 안 닿아도 더럽혀지지 않네.”
‘리오그난 왕가가 데르니에 대륙에서도 부유한 편인 건 알았지만, 돈지랄도 어쩜 이런 돈지랄이….’
클레이오는 한동안 책장보다 바닥에 눈이 가, 집중력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생각해보니 동행인 제한 없이 출입 가능한 이가 하나 더 있군. 룬데인 대주교 역시 귀족원 의장과 같은 권한을 가지지.”
“그분께서는 병석에 오래 계셨다 들었습니다.”
“수십 년 만에 대주교의 건강이 나아져, 이제는 곧 접견을 받을 거라고 하더군.”
두 사람의 대화 사이로 대성당의 종소리가 끼어들었다.
뎅― 뎅―
클레이오는 왕성에 정오가 갓 지나 도착했는데, 벌써 오후 2시가 지나고 있었다.
“서설은 이쯤 할 테니, 오늘 하루 동안은 맘껏 마법의 비급을 탐구해 보도록 하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참, 당부하는데. 필사나 메모는 안 돼. 반출이 불가한 금서란 건 그런 뜻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럼.”
혹시라도 멜키오르가 자신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 낼까봐 클레이오는 서둘러 뒤돌아섰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필사 뭐, 그런 게 왜 필요해. 「기억」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