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in Character’s Little Sister RAW novel - Chapter (100)
그 새끼가 이한생보다 착하고 잘났으면 말을 안 한다. 그 새끼는 남들 다 쓰는 신성력 혼자 못 쓰는 무능한 망나니였다.
이보배는 이한생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묵묵히 닭고기를 씹었다.
‘질투하네.’
이한생 입장에서야 화나고 짜증 나긴 할 것이다. 아무리 전생이었다 한들 기억도 없고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가족들이 전부 가족인 것처럼 대하고 친하게 지냈으니 짜증 나고 질투 나겠지.
화르세인지를 가족처럼 여겼다고 대놓고 말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일주일이면 눈치로 알아채기 충분한 기간이다.
균열의 날 이후 이씨 남매의 우애가 깊어졌으니 이한생 딴엔 화르세인지를 본인보다 더 좋아했다고 착각할 수도 있었다. 마주칠 때마다 야리면서 중지 들던 시절과 확연히 달랐으니까.
이보배는 일부러 닭고기를 꼭꼭 씹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벌었다.
“내 말 씹냐?”
“기다려 봐.”
이보배는 야무지게 씹은 고기를 꿀떡 삼킨 후 꼬치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입가에 묻은 매콤달콤한 양념까지 핥은 후 입을 열었다.
“일단 처음엔 공자님이 오빠의 다른 인격이라고 생각하고 잘해줬어. 이건 납득?”
“납득.”
“그다음엔 빙의나 환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약에 빙의라면, 오빠 몸에 공자님이 있으니 공자님 몸에 오빠가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공자님에게 잘해주는 것처럼 그쪽 사람들도 오빠에게 잘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것도 납득?”
“납득 못 하겠는데. 잘해준다고 또 하나의 가족 취급은 개오바지.”
“그럼 이건 어때? 공자님이 먼저 잘해줬어.”
“그 새끼가?”
이보배는 이한생의 등을 보았다. 옷에 가려지긴 했으나 그의 등에 큰 흉터가 있다. 하나는 아주 오래되었고 하나는 1년 전에 생겼다.
“균열 개미가, 몬스터가 날 죽이려고 했는데 공자님이 구해줬거든. 내가 멍청하게 피하지도 못하고 눈만 감고 있었는데 날 감싸고 대신 다쳤어.”
불만을 가득 담은 이한생의 눈이 순간 멍해졌다. 그것도 잠시, 이한생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더 멍청한 새끼였네.”
“응, 어딘가의 멍청한 양반이랑 똑같더라구. 뉘 집 망나니인지 우리 집 양아치랑 똑같아서 남 같지 않더라니까. 똑같이 겁 많고 성격 나쁘고 허세 부리고 평소엔 하찮게 대하다 사람 감싸서 대신 다치고.”
“그래 봤자 다른 사람이지.”
“물론 다른 점도 많지. 그렇지만 공자님은 우리에게 최선을 다해줬어. 공자님이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갑자기 다른 세계에 떨어진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에겐 갈 곳이 없었다. 그가 이씨 집안에 몸을 의탁하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원인이야 어쨌든 화르세인지는 성신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이씨 남매 편을 들었다.
그의 위대한 가문이 있는 세계 대신 이씨 남매를 선택했다.
모두가 그를 우러러보고 망나니라 욕하면서도 차마 대들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 신이 실존하고 하늘엔 달이 세 개나 뜨는 그의 고향이다.
화르세인지는 그런 고향을 포기하고 악마 새끼에 사기꾼, 돼지가 꾸익꾸익 우는 낯선 땅을 택했다.
같이 탄산음료를 사고 돌아가던 그 날, 화르세인지는 어떤 마음으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이보배는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짐작하고 또 짐작해서 그날의 선택을 고마워하고 보답할 뿐이다.
“공자님은 우리에게 최선을 다해줬어. 그러니까 우리도 최선을 다한 거야. 공자님이 갑자기 사라져서 슬프지만 그렇다고 아쉽고 후회하진 않아. 아마 공자님도 그럴걸?”
가끔 보고 싶긴 할 것이다. 그립기도 하겠지. 그렇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이보배는 멍하니 있는 막내 오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막내 오빠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우린 막내 오빠한테도 최선을 다할 거니까.”
이한생이 전환 버튼을 누를 리 없겠지만 이보배는 혹시나 싶어 못 박았다.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양아치가 괜히 ‘시스템 신이 내가 싫대!’ 징징 울며 전환 버튼을 누르는 건 사양이다.
이한생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이보배가 내민 손을 잡았다. 막내 오빠의 온기가 전해졌지만 이보배는 잡힌 손을 빼냈다.
‘남매 우애가 깊어졌지만 이건 아니지.’
“쓰레기 버리게 달라고.”
이보배는 이한생의 다른 손에 들린 꼬치를 달라고 손을 내민 것이다.
“아.”
얼떨결에 이보배의 손을 잡은 이한생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한생은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지레 화냈다.
“누, 누가 돼지 족발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아냐?”
“아냐, 막내 오빠 마음 이해해. 돼지가 갑자기 앞발을 내밀면 잡고 싶겠지. 암, 알고말고.”
이보배는 최선을 다하겠다던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최선을 다해 이한생을 놀렸다.
“꾸익꾸익, 내 족발 잡을래?”
“저리 꺼져!”
“꾸이이익!”
이한생이 전속력으로 도망쳤지만 각성한 이보배를 뿌리칠 수 없었다. 남매는 닭꼬치가 소화될 만큼 동네를 달렸다.
* * *
“어떻게 하면 각성할 수 있어요?”
이보배와 이한생은 멍한 눈으로 초등학생을 내려다보았다.
‘얘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쫓아내야지.’
‘숙제 때문에 왔다잖아.’
장래에 되고 싶은 직업인을 찾아 인터뷰하기. 흔한 숙제다. 이씨 남매 모두 여러 차례 비슷한 과제를 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럴 땐 사전에 미리 연락하고 허락받은 뒤 방문하거나 메일로 질문지를 보내 답을 받았다. 이렇게 다짜고짜 방문하진 않았다.
“요즘 애들은 패기 넘치는구나.”
이한생이 감탄하자 감탄의 원인인 초등학생이 대꾸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약자는 살 수 없거든요. 약육강식의 세계죠.”
초등학생은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우쭐거리며 자랑했다.
“제가 우리 반에서 제일 세요.”
“응, 세 보여.”
초등학생은 태권도 도복을 입고 있었는데 검은 띠였다.
4학년이나 5학년쯤 되어 보였으니 어린 시절부터 태권도를 배운 듯했다.
시킨 적 없는 발차기를 선보이는데 꽤 절도 있고 끊어 차기가 능숙했다. 쫑쫑 땋은 양 갈래 머리가 공중에서 파닥였다.
“저 태권도 잘하죠? 헌터 되려고 열심히 배웠어요. 어떻게 하면 각성할 수 있어요?”
“장래희망이 헌터야?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먼.”
균열의 날 이후 어린아이들의 장래희망은 언제나 헌터였다.
초등학생은 이한생이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래요?”
“미안해. 기억 상실 환자라 가치관이 10년 전이야. 구식이지.”
“헐, 오빠 잘생겼는데 불땅.”
“잘생겨? 오빠아?”
이보배는 정색했다. 자라나는 아이는 나라의 미래다. 나라의 미래가 안목이 썩었으니 어른이 고쳐줘야 했다.
“네 나이 때 20대 후반이면 아저씨지. 자, 따라 해봐. 아저씨.”
“애가 어려도 보는 눈이 있네. 어떻게 하면 각성하는지 설명해 줘. 아니면 이 오빠가 설명해 줄까?”
“오빠도 헌터예요?”
“이 아저씨는 비각성자야. 자, 이리 와. 코코아 마실래?”
“아니요.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먹지 말랬어요.”
“모르는 사람 가게에 들어가는 거 아니라고는 말씀 안 하시던?”
“모르는 가게 아닌데요. 공사할 때부터 봤는데.”
“에휴.”
이보배는 초등학생을(이름은 백장미였다) 손님 응대용 의자로 불러 간식과 차를 내주었다.
백장미는 한 번 사양한 걸로 엄마와의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했는지 간식을 먹었다.
“질문이 하나는 아니지? 질문지 있으면 줄래?”
“여기요.”
백장미가 목에 건 수첩을 건넸다.
“보자, 첫 번째 질문이 아까 그거구나. 어떻게 하면 각성할 수 있냐니…….”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살겠니.’
화르세인지가 있었다면 시스템 신께 간절히 빌라고 답했을 것이다. 아니면 신의 눈에 띌 수 있도록 재능을 갈고닦으라고 했거나.
그럼 성신이 아끼시던 성자 화르세인지의 환생 이한생은 무어라 대답했느냐 하면.
“운빨이야.”
맞는 말이지만 아이의 꿈과 희망, 바람직한 윤리관을 지켜주기에 좋은 답은 아니었다. 이보배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이 있단다. 각성자들은 각성 직업이 그 사람에게 잠재된 재능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원하는 각성 직업을 위해 꾸준히 단련하고 노력하면 각성할 수 있지 않을까?”
백장미는 공책을 꺼내 이보배가 한 말을 받아 옮겼다.
“각성은 재능빨.”
‘너무 줄였는데.’
요즘 아이들은 세 줄 요약도 길다 한다더니 진짜였다.
이보배는 다음 질문을 읽었다.
“당신은 누구고 언제 어느 직업으로 각성했냐니. 이게 첫 번째 질문인 게 낫겠다. 나중에 고치자. 알겠지?”
“넹.”
“일단 나는 이보배고 각성 직업은 연금술사야.”
이보배가 각성한 연도를 말해주자 백장미가 헷갈려 했다.
“그럼 1세대예요, 2세대예요?”
“2세대.”
“와, 그럼 유명한 헌터도 알아요?”
“아니, 몰라. 언니는 생산계라서 그냥 포션만 만들어 팔았거든.”
어린아이에게 거짓말하자니 양심에 찔렸지만 이보배는 거짓말했다. 괜히 박 과장, 빙제, 전투 연금, 질풍방패, 광전사와 안다고 말했다가 사인받아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곤란했다.
“세대랑 유명한 헌터가 무슨 상관이야?”
“각성 시기가 빠를수록 강하다는 인식이 있거든.”
“진짜야?”
“당연히 아니지. 1세대는 유명한 사람이 많은데 요즘 각성한 헌터 중엔 유명한 사람이 적어서 그래.”
“경력이 짧아서 그런가?”
“1세대 헌터들은 다 처음부터 유명했어요.”
남매의 대화에 백장미가 참견했다.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요, 1세대 헌터들이 유명하고 그 뒤 헌터 중에 유명한 사람 없는 게 좋은 거래요. 그게 정상이래요.”
“그래? 왜 그런 걸까?”
“왜냐면요, 1세대 때는 균열이 막막 터져서 비각성자 옆에서 헌터들이 싸우니까 유명해진 거래요. 근데 이제는 헌터들이 균열에 들어가서 싸우니까 우리가 헌터들 싸우는 걸 보지 않아서 유명한 헌터가 줄었대요. 그러니까 정상이고 좋은 거래요.”
“와, 선생님이 정말 현명하시다.”
인터넷에서 1세대 이후 인물 없다느니, 강한 놈만 살아남아서 1세대 헌터들이 유명한 거라느니 싸우는 것보다 훨씬 그럴싸한 이론이었다.
이보배가 담임선생님을 칭찬하자 백장미는 기분이 좋아져 선생님 자랑을 늘어놓았다. 중간중간 숙제하는 걸 잊지 않았다.
“평균 수익은 예민한 질문이니까 노코멘트. 그래도 많이 벌긴 해. 인벤토리가 참 유용하거든. 몬스터와 싸울 자신이 없으면 아예 인벤토리를 사용하는 일을 찾아서 해도 되니까.”
“우와.”
돈 잘 번다는 소리에 아이가 눈을 빛냈다. 이보배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신 각성자에겐 나라에서 정해준 의무가 있어. 너희 균열 대피 훈련 하지?”
“네, 학교 운동장 지하에 대피소 있어요.”
“균열 발생 대피 시 각성자에겐 비각성자를 보호하고 인솔할 의무가 있어. 이걸 어기면 처벌받아.”
이보배도 백장미가 말한 초등학교 운동장 대피소에 몇 번 훈련하러 간 적 있었다. 그것 말고도 의무가 많았지만 이보배는 말을 아꼈다. 초등학교 과제인데 미주알고주알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
“이 정도면 됐지?”
“네. 헌터 언니, 고맙습니다.”
“아냐, 마침 한가했거든. 바쁠 땐 이렇게 못 해준다.”
백장미는 이보배가 내준 시간에 보답하기 위해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 버린 배꼽 인사를 올렸다.
이보배는 멀어지는 백장미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한생은 테이블을 치우면서 투덜거렸다.
“헌터가 장래희망이라니. 나라 꼴이 어떻게 되려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리나라는 헌터 강국이야. 세계 최강의 헌터 검성과 최강 길드 반야가 있고, 사계절 길드도 A급 균열 공략에 연이어 성공했지. 거기에 관리국이 치안도 딱 잡아놔서 각성자 범죄도 전 세계 최하위야. 나라의 미래가 아앗! 너무 밝아서 안 보여!”
거기에 10년 뒤엔 회귀한 세최헌과 포션 마스터가 추가될 것이다.
이보배는 진하게 우려낸 국뽕 한 뚝배기를 들이켰다. 너무 자극적이고 중독성이 강해서 자주 마시진 않지만 국뽕은 최고였다.
“거 어디지? 유럽 어디에 헌터 강국 있다지 않았냐? 거기 S급 헌터가 검성보다 강하다던데 거긴 왜 빼?”
“신성 시스템 제국? 거기는 조금…….”
헌터 강국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나라 이름은 몰랐던 이한생이 경악했다.
“미친. 그게 나라 이름이라고? 장난해?”
“미친 살인마 독재자가 쿠데타 일으켜서 사람 다 죽이고 대관식까지 했잖아. 지가 황제래.”
이한생이 입을 쩍 벌렸다. 21세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각성자는 시스템에게 선택받은 신성한 인간이고 비각성자는 각성자를 수발들기 위해 산다는 헛소리가 거기 법이래. 법으로 아예 국민 등급도 정해뒀다는데. 무력은 강할지 몰라도 좋은 나라는 아니지.”
안타깝게도 요상한 사상에 찬동한 각성자들이 신성 시스템 제국으로 망명했다.
신성 시스템 제국은 그렇게 헌터 강국이 되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그걸 냅둬?”
“군인이 총만 들었을 때도 혁명하기 어려운데 고위 탱커는 총알도 튕겨. 그걸 어떻게 이겨?”
모든 각성자가 혁명에 참여한다면 끌어내릴 수 있겠지만 이미 각성자가 귀족이 된 국가다. 뜻 있는 각성자가 모여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한생이 이마를 짚었다.
“이 세상은 미쳤어.”
이상한 나라의 양아치가 한탄했다. 이보배는 그를 위로했다.
“금방 익숙해질 거야. 한국에서 태어나서 다행이지?”
이보배는 본의 아니게 국뽕 한 뚝배기를 더 마셨다. 중독성이 강하니 이걸로 끝내야 했다.
딸랑딸랑. 공방 문에 걸어둔 종이 울렸다. 이한생은 얼굴을 펴고 문에 대고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보배 공방입니다.”
“안녕하세요오.”
듣는 사람 기운이 쏙 빠지는 늘어지는 인사와 함께 붉은 치파오가 보배 공방에 들어섰다.
이보배는 붉은 치파오에서 손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래도 인사는 얼굴 보고 해야지.’
이보배는 아라크네에게 인사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얼굴이 왜 그래요?”
아라크네 미모야 남산 위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굳건했다.
문제는 안색이었다. 안색이 어둡다 못해 갱지 같았다. 병원서 본 중환자들보다 낯빛이 어두웠다.
“괘, 괜찮아요?”
“아는 사람이야? 아픈 것 같은데.”
“사랑하는 고객님들께 걱정을 끼쳐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아.”
아라크네는 비실비실 걸었다. 걷다가 발목이 접질릴까 걱정되는 수준이었다.
아라크네는 간신히 손님용 소파에 앉더니 방긋 웃었다. 시한부 환자가 죽기 전에 짓는 미소 같았다.
“소중한 이보배 고객님께서 난처한 상황에 처하셨는데 제대로 된 정보를 드리지 못한 것 같아 먼 길 날아왔답니다.”
‘이미 다 알고 왔네.’
아라크네는 이한생에게 벌어진 일을 대충 알고 있었다. 이보배가 적극적으로 숨기려 하지 않았으니 의뢰 내용만 봐도 짐작하기 쉬웠을 것이다.
“누구셔?”
이한생이 갑자기 등장한 병약 미인에 눈을 비볐다. 겁 많아 낯가리는 그에게도 눈이 번쩍 뜨이는 미인이었다.
“정보상이야.”
이씨 남매의 질답을 들은 아라크네가 얼굴을 가리고 슬퍼했다. 평소라면 가증스러웠겠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어울렸다.
“흑흑, 이한생 고객님께서 저를 잊으시다니. 정말 제가 기억나지 않으시나요? 우리의 추억 모두? 비 오는 밤 산에서의 그날도 정녕 잊으셨나요?”
창백한 안색의 미인이 찾아와 물기 어린 눈동자로 올려다보자 이한생이 움찔했다.
이한생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퍼래졌다가 새하얘졌다. 온갖 상상을 다 하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요 1년 사이 기억이 없어서.”
“절 부르시던 이한생 고객님만의 애칭도 잊으신 거군요!”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웃기니까 냅두자.’
막내 오빠가 실시간으로 흑역사를 쌓고 있다. 이보배는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이보배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이한생을 무시하고 아라크네에게 말 걸었다.
“어디 다친 것 같진 않고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 각성제라도 드려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너무 마셔서 토할 것 같답니다.”
아라크네가 각성제의 각 자도 듣기 싫은 듯 입을 가리고 아미를 찌푸렸다. 아라크네는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소중하신 고객님께서 제 도움이 필요하셨음에도 제때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죄의 의미로.”
달콤하고 기름진 냄새가 풍겼다. 이보배는 포장 상자 겉면에 박힌 화려한 문장(紋章)을 보고 눈썹을 들었다. 유럽 왕국이 쓸 법한 문장에 시스템창이 합쳐져 있어서 웃겼다.
“신성 시스템 제국 가면 꼭 먹어야 한다는 디저트, 에그타르트입니다. 금방 구워 맛있을 때 드셔요.”
“거기까지 다녀왔어요?”
중국을 지나 동유럽까지 다녀왔단 말에 이보배는 혀를 내둘렀다. 동북아시아 음지 최고의 정보상 아니랄까 봐 벌려놓은 게 많았다.
“포기할 수 없는 사업이 있었답니다. 조금 성급히 마무리 짓긴 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게 되어 다행이어요. 저는 할 만큼 했으니 남은 건 그분들 몫이겠지요.”
아라크네는 정의를 지키다 쓰러진 투사처럼 애잔한 미소를 지었다. 당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에 이보배는 에그타르트를 권했다.
“멀리서 사 왔으니 좀 들어요.”
“우웁, 전 괜찮아요. 많이 드세요오.”
‘이 인간이 먹을 걸 거부한다고?’
이보배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일단 물을 떠다 주자 물은 마셨다.
“그럼 이보배 고객님.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아라크네 씨 지금 일할 상황이 아니에요. 나중에 얘기해 줄 테니까 오늘은 쉬세요.”
“감히 추측하기론 이한생 고객님의 기억 상실이 호전되면서 각성한 힘에 문제가 발생한 듯하고 이 때문에 제게 의뢰하신 것 같은데.”
“어차피 아라크네 씨에겐 막내 오빠 능력 들켰고 작은오빠도 NPC 취급하랬으니까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그냥 오늘은 쉬세요.”
“잠시 화장실 좀 빌리겠습니다.”
아라크네는 이보배의 말에 고민하는 것 같더니 비틀거리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보배는 혀를 끌끌 찼다. 흑역사 적립 중인 이한생은 아라크네를 걱정했다.
“포션인가 그런 거 먹여야 하는 거 아냐?”
“포션은 피로 회복제가 아니야.”
얼마나 지났을까. 이한생이 화장실에서 쓰러진 거 아니냐며 초조해하는데 화장실 문이 열렸다. 들어갈 땐 아라크네였지만 나온 사람은 아라크네가 아니었다.
화장을 지우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김율이 비척비척 소파로 다가와 풀썩 앉았다.
빈 소파를 두고 이보배가 앉은 소파에 앉는 바람에 이보배는 엉덩이를 들어 옆으로 비켜야 했다.
“빈자리 두고 왜 여기에…….”
남다른 기럭지를 가진 김율은 이보배에게 기대더니 아예 무릎을 베고 누웠다.
이보배는 바로 치우려다가 김율의 얼굴을 보고 봐줬다.
“누나, 저 힘들어요.”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올려다보는데 도무지 이길 재간이 없었다.
‘쓸데없이 잘생기고 난리야.’
이보배는 김율의 머리를 치우려고 든 손으로 그의 눈가만 꾹꾹 지압해 줬다.
“며칠 밤 새웠는데?”
“한 달 보름이요.”
“용케 안 죽었구나.”
“죽을 것 같아요. 너무 피곤해서 못 자겠어요.”
“사람이 쉬면서 일해야지. 피곤하면 뇌세포도 일을 안 해서 멍청해진대. 이런 상태로 일하는 건 아라크네를 믿고 의뢰하는 고객에게 폐 아닐까?”
“그건 괜찮아요. 저 스킬 있거든요.”
이보배는 그런 스킬도 있냐 물으려다 그만뒀다.
나 같은 스킬이 있는데 피로를 무시하거나 특수한 상황에서 집중력을 유지하는 스킬은 당연히 있을 것 같았다.
‘발동 중에 통증 무시하는 스킬도 있댔으니까.’
이한생은 아름다운 미녀가 미남이 된 현실이 믿기지 않는지 얼어붙어 있었다.
“뭐야?”
해동된 후 뱉은 한마디가 저거였다. 이보배는 김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라크네는 강아지처럼 이보배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뭐긴 뭐야. 보는 대로지.”
“아라크네 씨가…….”
“여장 취미 정보 팔이. 공자님이 아라크네를 부르던 애칭이야.”
이한생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잠깐 본 아라크네와 결혼까지 생각했는지 제 화를 이기지 못했다.
“시발!”
분노한 이한생이 김율에게 삿대질했다.
“옷을 왜 그딴 식으로 처입어! 사람 헷갈리게!”
“역시 한생이 형님은 똑똑하세요. 사람 헷갈리라고 입어요.”
눈을 감고 이보배의 손길을 즐기던 김율이 고개를 들고 이한생을 칭찬했다.
이한생은 칭찬에 기뻐하지 않고 뒷목을 붙잡았다. 혈압이 치솟은 듯했다.
“아오, 머리야. 아이고, 뒷골아. 너희 둘이 나 속이려고 짰냐?”
“나 얘랑 그렇게 안 친해.”
“네가?”
이한생이 김율에게 무릎베개해 주고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이보배에게 눈을 부라렸다. 이보배는 당당하게 변명했다.
“그치만. 예쁜 고양이가 와서 애교 떨면 안 친해도 쓰다듬고 싶잖아.”
이보배는 김율의 수작에 넘어갈 마음이 없다.
수작에 넘어가지 않는다면 무릎베개쯤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절대 얼굴에 혹해서가 아니다.
‘조용하네?’
이보배가 아는 김율이라면 친하지 않다는 말에 천연덕스럽게 ‘누나, 서운해요. 저는 누나에게 몸과 마음을 바칠 준비 완료했는데’라 능청 떨 법하다.
그런데 어째 김율이 조용했다. 이보배가 내려다보자 김율의 눈빛이 몽롱했다. 이보배는 김율의 가슴을 살짝 두드렸다.
“잘 거면 편하게 자. 소파 붙여줄까?”
사실 이보배의 무릎을 베고 있는 지금도 길쭉한 김율에겐 불편한 자세였다. 길쭉한 사람이 몸을 한껏 구겨 소파에 걸쳐 누운 게 불쌍하고 불편해 보였다.
김율이 고개를 저었다.
“으으, 아니에요. 아직은 버틸 수 있어요. 누나랑 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확인하기 전까진 안 자요.”
“일하지 말고 쉬라니까.”
“에이, 누나도 참. 우리가 남인가요.”
이보배의 무릎에서 일어난 김율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이씨 남매가 동시에 말했다.
“남이다, 새끼야.”
“남이야.”
“아앗, 너무해요. 저는 보배 누나 남편 후보에 한생이 형 픽 매제 후보잖아요. 한생 형님, 형님이 직접 고른 매제 후보를 버리실 거예요?”
“매제 후보?”
금시초문인 이야기에 이한생이 어리둥절해하자 김율이 호소했다.
“절 보배 누나 남편감으로 찍었잖아요!”
“너는 거울도 안 보냐? 매일 그 얼굴 보고 살면서 저 꼴통이랑 결혼하, 잠깐만.”
김율의 시력을 걱정하던 이한생의 머릿속 전구가 켜졌다. 양아치의 머리가 신음하며 돌아갔다.
‘잠깐만 있어봐라. 지금 돼지가 가장인데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랑 형들은 자동으로 빠지는 거 아닌가?’
그러면 이한생의 독립도 쉬워질 것이다. 이한생은 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좋아. 오늘부터 응원한다. 잘해봐라.”
“역시 한생 형님은 멋있어요! 기억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저를 응원해 주시는 그 마음에 보답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할게요!”
이한생의 매제 지지 선언에 김율이 피로를 잊고 기뻐했다. 이한생이 기억이 있든 없든 김율을 지지하겠다는 말에 특히 감명받은 눈치였다.
“잘들 놀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