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in Character’s Little Sister RAW novel - Chapter (103)
“응. 연기하면 쟤네도 지켜줘야 하잖아. 아이, 귀찮아.”
리즈 시절 이귀한은 아이들도 지키려 했을 것이다. 그게 귀찮아서 연기를 그만뒀다는 이야기에 이보배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말이나 못 하면.’
이보배는 아찔해진 정신을 다잡았다. 아직 몬스터들이 균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노블레스 길드가 출구를 잘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아이들을 지켜야 했다.
‘희생? 아니야, 그렇게 쉽게 생각해선 안 돼.’
이보배는 생산계 각성자다. 어디까지나 지켜지는 사람이지 지키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보배는 강한 사람을 알았다. 아주 강해서 이 사태를 조기에 끝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둘이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들이 도울 생각이었다면 진즉 나섰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귀한은 돕기 싫어 연기를 그만뒀고 이해기는 일부러 나서지 않고 있다.
노블레스 길드원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보배는 어디까지나 보호받는 입장이다. 이보배에겐 부탁할 자격이 없다.
“시발. 뭐 하냐, 너.”
“어? 어어. 아이들 대피하는 거 도우려고!”
“그거 말고. 똥 마려운 돼지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해!”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똥 씹은 얼굴 하고.”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 이보배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오지랖 넓고 성인군자였다고. 그냥 우리 가족만 챙기면 되는 거지.’
머릿속이 시끄럽더라도 몸은 움직여야 한다. 이보배는 일단 아이들의 대피를 도왔다.
주차장으로 달려갔던 사람들이 대피소 앞까지 차를 가져왔다.
청원 경찰이 무전으로 도로 현황을 전달받고 운전자에게 대피 방향을 알려주었다.
“서둘러. 균열이 터지기 전에 대피해야 해.”
“몬스터 웨이브는 아니겠죠?”
“침식형이 더 끔찍해.”
“뭐가 됐든 멀어지는 게 우선이에요.”
균열은 세계에 난 금이자 상처다. 상처를 봉합하지 않으면 감염되고 벌어지듯 균열 또한 공략하지 않으면 악화된다. 상처가 한계까지 벌어져 고름을 쏟아내거나 상처 주위가 괴사한다.
고름이 쏟아지는 걸 몬스터 웨이브, 괴사를 침식으로 이해하면 편하다.
괴사한 살은 복구할 수 없듯 침식이 진행된 구역 또한 복구할 수 없다.
균열 침식지는 생태가 완전히 균열과 동일해진다.
뿐만 아니라 침식지 내에서 몬스터가 랜덤으로 출몰한다.
몬스터 웨이브는 튼튼한 대피소에서 버티는 게 가능하지만 균열 침식은 그마저 불가능했다.
재수 없게 대피소에서 몬스터가 생성되면 끝이니까.
침공형 균열이 생성되었을 때, 균열 밖으로 나온 몬스터를 제때 처치하지 못하면 균열이 침식형이나 방출형으로 성장한다.
아직 노블레스 길드가 몬스터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으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가능한 빨리 균열에서 멀리 대피해야 했다.
이보배는 급히 스쿨버스에 아이들을 마저 태우려 했다.
앞서 아이들을 태운 차는 이미 떠나 스쿨버스에 탈 아이들만 남은 상태였다.
“얘들아, 빨리 버스에 타!”
“으아아앙!”
고학년이라지만 그래 봐야 초등학생이다.
곧 균열이 터진단 이야기에 아이들이 하나둘 울음을 터뜨렸다.
이보배는 엉엉 울며 꼼짝도 못 하는 아이들을 안아 억지로 버스에 태웠다.
“여기도 안전하지 않아, 빨리 가야 해!”
“으아앙, 무서워.”
“엄마! 아빠!”
“바보야! 아직 몬스터도 없는데 왜 징징거려! 빨리 버스에 타!”
몇몇 아이는 무섭고 울고 싶은 걸 꾹 참고 친구에게 윽박질렀다.
백장미가 대표적이었다. 흰 도복을 입은 아이는 도복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앞에 선 친구들을 버스 쪽으로 퍽퍽 밀었다.
“침식되면요, 버스 안에 몬스터가 생기면 어떡해요?”
“주차한 차 안에 생겼단 얘긴 들었지만 운전 중인 차에 생겼단 얘긴 못 들었어. 그러니까 얼른 타자.”
“엄마 안 왔는데. 엄마 기다려야 하는데.”
“엄마는 다음 대피소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야. 얼른 타자.”
아이들이 모두 버스에 오르자 이해기가 중갑옷 탱커를 부축해 버스로 이끌었다.
“힘들겠지만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중갑옷 탱커는 버스에 오르지 않았다.
“죄, 죄송하지만 저는 다시 균열에 들어갈게요.”
중갑옷 탱커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E급과 F급 마석이 우르르 떨어졌다. 그 외에도 작은 금붙이와 은 덩어리 같은 환금성 좋은 물품도 나왔다.
“포션값으론 부, 부족하겠지만 이게 전부라. 정말 감사했습니다. 얼른 대피하세요.”
“죽으러 가는 겁니까.”
“귀한 포션까지 써주셨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전 가야 해요.”
중갑옷 헌터가 90도 각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고 떠났다.
죽을 걸 알면서 길드원에게 돌아가는 뒷모습에 이보배의 숨이 갑갑해졌다.
“헌터님들도 얼른 타세요!”
청원 경찰이 외쳤다. 이씨 사남매와 김율을 제외하고 모두 스쿨버스에 탑승했다.
이해기가 고개 저어 거절했다.
“저흰 아직 대피하지 못한 사람을 돕겠습니다. 가십시오.”
“괜찮겠습니까?”
“네, 얼른 가세요.”
이해기가 저렙이지만 B급 헌터고 이보배는 천상계인 B급 연금술사다.
청원 경찰은 둘이 버스에 타주길 원했지만 이해기가 계속 거절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
더는 시간 낭비할 수 없으니 결국 스쿨버스는 이씨 남매와 김율을 두고 초등학교를 빠져나갔다.
“그럼 집으로 가자. 아니다, 여기가 나을까? 형은 어떻게 생각해?”
“여기가 편해.”
“대피소로 들어가자. 만약 침식형으로 성장하면 몬스터가 어디서 생성될지 모르니 너넨 형 옆에 딱 붙어 있으렴.”
이해기가 동생들을 대피소로 몰았다. 그러더니 본인은 대피소를 나가려 했다.
“둘째 어디 가게?”
“균열 둘러보고 올게. 상황만 보고 바로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다른 사람들도 찾아서 데려오는 거야?”
“무슨 소리니?”
“아까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 돕겠다고 남은 거잖아.”
이한생이 작은형의 거짓말에 깜짝 놀랐다.
“설마 거짓말한 거야?”
이한생은 작은형의 거짓말에 실망했다가 이내 납득했다.
“하긴 뺀질이가 원래 이랬지. 혼날 때도 지만 혼자 쏙 빠져 나가고.”
이한생의 말에 이보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균열의 날 이전, 뺀질이 이해기라면 이한생 말대로 혼자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진국 이해기는 달랐다.
누가 뭐라 하기 전에 솔선수범하여 어려운 사람을 돕고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했다.
그랬던 오빠가 어쩌다가 이렇게 변했을까.
사람이 바뀌려면 계기가 필요하다.
이씨 남매가 균열의 날 부모님을 잃고 철든 것처럼 이해기 또한 무언가의 상실을 경험하고 지금의 회귀자 이해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보배는 작은오빠의 선택에 감히 말을 얹지 못했다.
이보배는 도와주지 못하고 도와주자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포션이라도 줄걸.’
길드원을 포기하지 않고 떠난 중갑옷 헌터에게 포션이라도 보급할 것을.
이보배는 자책하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돕고 싶지만 너희의 안전이 우선이다.”
“둘 다 세다며. 강하다며. 큰형 혼자서 우리 지킬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래도 하나보단 둘이 낫지. 난 이렇게 정보가 부족할 때 너희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
이해기는 세상 물정 모르는 동생에게 말했다.
“야속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정의나 의리보다 너희를 우선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시는 잃지 않겠다고 맹세했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각성했다며. 강하다며. 그럼 도와줘야지.”
무지하기에 펼칠 수 있는 정론에 이해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몰라서 그래.”
“세상이 바뀌었지. 그건 나도 알아. 머리로만 알아서 뭘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하지만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해.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 해. 왜냐하면, 그게 옳은 일이니까.”
전생에 성자였던 동생이 하는 말이라서 그런지 설득력이 남달랐다.
이해기는 자신을 응시하는 동생의 곧은 시선을 보고 감탄했다.
이한생은 겁이 많고 가끔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릴 때도 있지만 나서야 할 땐 절대 물러서지 않는 용기의 소유자였다.
그 용기로 괴물에게서 이보배를 지켰고,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한다.
“형 판타지 소설 좋아하잖아. 판타지 소설 주인공이 이럴 때 다른 사람 못 본 척하고 그러냐고. 아니잖아.”
“다 도와주면 고구마 답답이에 호구 소리 듣는다만.”
단순무식한 정론은 회귀하면서 잊은 속죄행의 여로를 상기시켰다.
육신은 결백해 무죄이나 죄를 기억하는 영혼은 유죄.
이해기의 속죄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게,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이해기는 애병, 용살검을 고쳐 잡았다.
“균열에 진입할게. 형, 보배랑 한생이 잘 부탁해.”
“응, 안 돼.”
이귀한은 딱 잘라 거절하고 이해기를 가리켰다.
“둘째도 내 동생. 위험하니까 가지 마. 지지야.”
“형, 나 강해. 믿는다고 했잖아.”
“그래서 안 돼. 나 운 나쁜 편이라 보조 필요해.”
이해기를 설득했나 싶더니 이귀한이 복병으로 떠올랐다.
이보배는 황당한 마음에 눈만 깜빡였다.
그러나 이한생은 이보배보다 용감했다.
“아니 시발, 큰형도 세다며! 큰형이 우리 지켜주고 작은형이 도와주러 가면 되잖아!”
“약한 동생이 둘, 그럼 지키는 사람도 둘. 그래야 균형 맞아.”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며!”
“정답!”
“그렇게 강하면 다른 사람 좀 도와줘야지!”
“내가 왜?”
무심한 말에 이한생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전신의 잔털이 삐죽 솟았다.
이귀한이 동생에게 다가갔다.
이한생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웃고 있는 큰형의 눈이 너무나도 불길했다. 부모님을 죽인 몬스터보다 더 끔찍해 보였다.
이상해진 세계, 이상해진 상식, 너무 이상해져서 다른 사람 같은 형들과 동생.
이한생은 깨어난 이후 이보배와 이해기가 누차 경고했던 이귀한의 위험성이 처음으로 와닿았다.
“셋째야, 말해봐. 내가 왜?”
인간이 아닌 무언가. 사람보단 괴물에 가까운 존재. 아니, 그 괴물보다 더 끔찍하고 불길한 무언가.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어 이한생은 계속 뒷걸음질 쳤다. 뒷걸음질 치다 막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아악!”
“나야, 나.”
이보배가 뒤에서 이한생을 붙잡았다.
“막내 오빠 그만 놀려. 그리고 나도 생각해 봤는데, 오빠들이 균열 터지기 전에 공략해야 할 것 같아.”
본래 이 세계의 인간이었건만 인간에서 한없이 멀어진 대재앙이 아끼는 막내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내가 왜?”
“왜냐하면.”
이보배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막내 오빠가 대신 해줬다. 그러니 설득은 그녀의 몫이었다.
인간의 정에 호소해선 안 된다. 상대는 인간보다 악마에 가깝다.
세상의 상식을 찾아서도 안 된다. 상대는 상식과 법칙을 파괴하는 자다.
그렇다면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이보배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철회했다. 그녀에겐 자격이 있다. 다른 사람을 구해달라고 부탁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이보배와 두 오빠는 저 악마가 돌아온 이유지 않은가.
“큰오빠, 작은오빠. 그러지 말고 힘 좀 쓰자. 힘숨찐이라도 가끔은 힘써야 해. 그래야 멋있지.”
거절당할까 봐, 미움받을까 봐 무섭다.
이보배는 이한생의 손을 꼭 잡았다. 이한생이 뿌리치면 다시 잡고, 또 뿌리쳐도 계속 잡았다.
“쉬룬뎅.”
“에이, 그러지 말고. 생각해 봐. 우리 원래 살던 집도 침식됐는데 이 균열도 터져서 침식되면? 그럼 나 억울해서 밤에 잠도 못 자. 집만 그래? 공방도 있잖아. 나 공방 연 지 만 1년도 안 됐어. 근데 공방도 뺏겨봐. 큰일이잖아.”
“집은 침식 안 되도록 오빠가 막아줄게.”
“그럼 뭐 해. 침식지 주변으로 철조망 쳐지면서 쫓겨날 텐데. 만약에 철조망 안 치더라도 집값이 얼마나 떨어지겠어. 그 집이 어떤 집이야. 작은오빠가 벌어다 준 10억에 내가 모은 돈이랑 은행 대출까지 껴서 산 집인데 이렇게 포기하라고?”
이귀한이 눈을 껌뻑였다. 효과가 있었다.
“침식이 아니라 몬스터 웨이브였다 쳐. 그것도 문제야. 몬스터들 떼로 돌아다니잖아. 걔네가 돌아다니면서 공방 설비랑 우리 집 가구 부수면 어떡해? 우리 집 소파 큰오빠가 주워 온 건데. 낡고 쿠션 다 죽었어도 내가 얼마나 아끼던 건데. 그거랑 슬라임 침대 망가지면 어떡해?”
이귀한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오빠가 몬스터 집 근처로 얼씬도 못 하게 해줄게.”
“그러지 말구. 아예 균열 공략하면 침식이랑 몬스터 웨이브 걱정할 필요도 없고 좋잖아.”
“귀찮은데.”
아직이다. 아직 모자랐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른다.
이보배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딱 좋은 걸 떠올렸다. 진작 생각하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좋은 변명거리였다.
“그리고 허누리! 균열 진입한 각성자 중에 허누리 있다고 했어! 작은오빠도 허누리 알지? 강철 깡통 허심 딸이잖아! 그분이 나 사계절에 소개시켜 주셔서 내가 먹고산 거야. 막내 오빠도 그분 덕에 산 거나 마찬가지야! 은혜 갚아야지! 나랑 막내 오빠의 은인인데!”
이 정도면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귀한의 반응이 시들했다.
“은혜는 갚는 게 아니야. 원수를 갚는 거야.”
이보배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모두 말했다. 더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보배가 울상 짓자 이해기가 나섰다.
“보배야. 형은 성격이 나빠서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면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해.”
“그럼?”
“네가 하고 싶은 말 한마디면 충분하단다.”
이보배는 이해기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
“난 오빠들이 노블레스 길드원을 구해줬으면 좋겠어.”
이귀한은 무심한 얼굴로 이번에도 이유를 물었다.
“왜?”
이보배는 바싹 만 입술을 핥았다.
인간의 정, 세간의 상식, 이성적인 이유 모두 실패하고 남은 딱 하나의 이유.
“내가 그랬으면 좋겠으니까.”
이보배의 욕심.
그때까지 이보배와 손잡고 있던 이한생이 외쳤다.
“나도! 나도 구해줬으면 좋겠어.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형들이 안 다치고 구할 수 있으면, 그러면 구해줘.”
항상 귀여운 막내에 가끔 귀여운 셋째까지 원한단다.
대마왕은 언제 심술부렸냐는 듯 상큼하게 외쳤다.
“구랭!”
* * *
이보배의 계획은 단순했다.
균열로 진입해 이귀한은 마기로 어그로를 끌어 출구로 향하는 몬스터를 모으고 이해기는 균열을 공략한다.
전투 능력이 없는 이보배와 이한생은 어떻게 하느냐.
남매끼리 의견이 분분했으나 이귀한은 아예 균열에 데리고 가는 게 안심된다고 주장했다.
“형을 믿긴 하지만 저번처럼 차도 없는데 괜히 눈먼 화살에라도 맞으면…….”
“그건 제가 해결할게요.”
조용히 이씨 남매의 공방을 지켜보던 김율이 나섰다. 김율이 제시한 해법은 간단했다.
돈이다.
김율은 이보배와 이한생에게 스크롤 수십 장을 건넸다.
스크롤을 제작하려면 연금술사, 마법사, 부여술사가 필요하다. 스크롤에 담으려는 스킬 종류에 따라 다른 직업군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과 류의 스킬은 보유한 사람이 많고 쓰임새가 다양하기 때문에 스크롤 가격이 낮은 편이지만 그 외 스킬을 담은 스크롤은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특히 보호 마법이 담긴 스크롤은 비각성자에게도 인기가 높기 때문에 가격이 더 나갔다.
그런 스크롤을 뭉텅이로 건넸다. 균열 진입하면 적당한 곳에 서서 찢으면 된단다.
이보배는 입만 뻐끔거렸다.
“이 정도면 안전할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보배 누나는.”
김율이 밋밋한 묵색의 금속 반지를 꺼냈다. 평범한 검은색 금속처럼 보였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반짝였다. 꼭 별 가루를 뿌린 것 같았다.
“제 스킬을 부여한 아이템이에요. 누나가 인식하지 못한 공격이라도 한 번은 막아줄 거예요.”
상인 전용 스킬 .
공격을 방어하는 대신 예상 피해량만큼 소지금이 줄어든다.
아이템이란 각성자가 제작한 물품의 총칭이지만 아무 능력이 없는 건 아이템이라고 하지 않고 보통 능력치 상승이나 스킬이 부여된 제작품을 아이템이라고 불렀다.
“이런 스킬도 있었어? 나 지금 20만 원밖에 없는데.”
“제 통장 잔고에서 빠지니까 괜찮아요. 저도 요즘 사업 축소 때문에 잔고가 평소보다 부족하긴 한데 소지금이 부족해도 피해를 줄여주니까 없는 것보단 나을 거예요.”
눈먼 화살이나 불똥이 튀는 건 처음 한 번만 막으면 김율이나 이귀한이 대처할 수 있다. 반지는 그런 용도였다.
김율이 은근슬쩍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우려 했다. 이보배는 반지를 뺏어 오른손 검지에 꼈다. 아이템이라더니 손가락 굵기에 맞춰 알아서 크기가 변했다.
김율은 왼손 약지가 아님에도 이보배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이걸로 누나가 제 목숨줄을 쥐셨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특수 상인은 파산하고 일정 기간 내에 만회하지 못하면 죽어요.”
이보배가 놀라서 반지를 빼려 하자 김율이 농담이었다고 개구지게 웃었다.
“농담이에요. 지금 균열 등급이 C급인데 여기 정도는 보스 몬스터가 때려도 괜찮아요.”
‘이렇게 많이 알아도 괜찮은가.’
이보배는 김율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아서 못마땅했다.
‘ 스킬도 그렇고 파산하면 죽는다는 것도 그렇고. 고급 정보일 텐데.’
본래 아라크네가 이씨 남매에게 후하게 퍼주긴 하지만 본인과 관련된 개인 정보는 그렇게 후하지 않았다. 가족 얘기 때처럼 노림수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자기가 알아서 계산하고 푸는 거겠지? 공짜로 퍼주면 페널티 있다고 했으니까.’
남들보다 레벨 업이 열여섯 배는 어렵다고 했으니 레벨 업한 기념으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정보를 푸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율의 꿍꿍이가 어떻든 준비가 끝났다. 이씨 남매와 김율이 나란히 균열에 진입했다.
[이상한 설산]-난이도: E~C
-마감: 카운트다운 중단 상태
-일반 필드형 → 침공형으로 상태 변경.
-균열 상태가 이상하다.
-그 외 정보는 감정이 필요하다.
‘상태가 이상하다’는 문구에 놀란 것도 잠시였다. 균열의 기이함을 잊을 만큼 맹렬한 추위가 이보배를 덮쳤다.
“으아아아.”
균열 내부는 상태 이상 이나 에 걸릴 만큼 기온이 낮았다.
설산이라고 하는데 눈보라가 휘몰아쳐 산은커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누나, 한생 형. 빨간 스크롤 찢으세요!”
균열에 진입하기 앞서 스킬로 균열 정보를 감정했던 김율이 외쳤다.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서 가까이 있는데도 외쳐야 소리가 들렸다.
이보배와 이한생은 김율이 말한 스크롤을 찢었다. 그러자 추위가 가셨다.
“형, 애들 잘 부탁해.”
“응.”
이해기가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귀한과 남은 사람들도 움직였다. 이보배와 이한생을 지킬 수 있도록 적당히 뒤가 막힌 곳에서 몬스터 어그로를 끌 예정이었다.
눈보라 치는 설산은 걷는 게 무어냐, 제 한 몸 세워서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다.
이한생이 쌍욕을 내뱉자 이귀한이 이한생을 들었다.
“으악! 놔!”
“진짜? 놓는다?”
“아, 아냐! 그냥 가!”
“막내도 들어줄까? 업힐래?”
“난 괜찮아.”
괜찮다고 말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몸이 기우뚱하는 이보배를 김율이 부축했다.
김율은 눈 쌓인 설산에서도 아라크네일 때처럼 축지법 쓰듯 잘 걸었다.
“고마워. 근데 너.”
“네, 누나. 업어줄까요?”
“오늘 돈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니야? 스크롤도 그렇고 반지도 재수 없으면 돈 나가는데.”
“그러게요. 혹시 모르니까 이제 아끼려고요.”
“어떻게?”
김율이 잘나긴 했지만 그래 봐야 보조계다. 생산계나 보조계나 그게 그거였다.
한 대도 맞지 않도록 이귀한 뒤에 잘 숨어 있겠다는 뜻인가 싶었는데 김율이 엉뚱한 말을 했다.
“누나 저 투잡 뛰어요.”
“알아. 정보상이랑 중개상이잖아.”
투잡 뛰는 김율의 뒤에서 무언가 날아왔다. 설원 박쥐였다. 눈보라 때문에 지척에 다가온 뒤에야 눈에 들어왔다.
이귀한은 접근을 알아챘겠지만 이보배가 아닌 김율을 노렸기 때문인지 경고하지 않았다.
“위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