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in Character’s Little Sister RAW novel - Chapter (4)
바닥이 떨리고 형광등이 깜빡였다. 이해기는 그제야 거실 조명이 켜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두웠다. 집 안이 무저갱처럼 캄캄했다. 거실은 동이 트지 않은 새벽보다 어두웠고 덜렁거리는 머리에 붙은 이귀한의 눈은 기괴하게 빛났다.
“이건!”
“참기 싫다고 했어. 형이 10년만. 히힛, 10년만 쉰다니까? 나쁜 동생이네?”
깜빡이던 형광등이 터지고 진정한 암흑이 도래했다. 이해기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불길하고 사악한 기운이 그에게 엄습했다.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본능적으로 꺼릴,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접한 순간 발작할 만큼 사악하고 타락한 기운이었다. 닿은 몸과 영혼을 파괴하고 짓밟는 농밀한 재앙이 이해기를 포위했다.
‘어째서 이 마력이!’
닿는 순간 영혼의 심지까지 부패해 버린다. 이해기는 이 부정한 마력을 알았다. 이 시대의 누구보다 잘 알았다.
‘죽는다!’
이해기는 반사적으로 모든 힘을 끌어내 재앙에게서 자신을 보호했다. 동시에 세상이 밝아졌다. 어둠이 걷히고 그를 둘러싼 세계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놀랐지!”
이귀한이 덜렁거리던 머리를 제자리에 세웠다. 잘린 목이 찰흙처럼 찰싹 붙었다. 목을 붙인 이귀한이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형은 관대하니까 봐줄게!”
이귀한이 씨익 웃었다.
“막내만 지키면 좋은 형이 아니지! 둘째도 지켜줘야 좋은 형!”
“이게 도대체…….”
이해기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이가 부딪칠 정도로 떨었다. 이귀한이 고개를 저었다.
“놀랐어? 무서웠어? 아니잖아? 버틸 수 있었잖아? 형은 다 아는데.”
“방금 그건…….”
“둘째야, 힘숨찐은 집에 하나면 족하다!”
웃으라고 한 말인데 이해기는 웃지 않았다. 이귀한은 너무 겁줬나 싶어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웠던 동생이 힘을 숨긴 게 반가워 조금 놀렸을 뿐인데 반응이 너무 격렬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 마력을!”
“그렇게 무서웠어? 겁먹지 마. 내가 너희를 해칠 리 없잖아. 형은 그냥 네가 저항할 수 있는 게 신기해서 그랬어.”
“아직 20년이나 남았을 텐데 어째서 지금 오염된 마력이 등장한 거지? 너는, 너는 인간이 맞긴 한 거냐?”
“걱정하지 마. 아직은 인간이야. 인간이 아니게 되어도 너희는 해치지 않을 거야. 형 믿지? 너흰 절대 안 건드려.”
아직은 인간이라는 말이 패닉 상태에 빠진 이해기를 진정시켰다.
이해기는 얼굴조차 희미하게 기억나는 형을 보았다. 믿을 수 없어 부정했으나 눈앞의 남자는 진짜 그의 형이었다.
“진짜 형이야……
“형입니다. 보고 싶었어.”
이귀한이 이해기를 포옹하려고 다가왔다. 어제는 불신했던 것 같으니 오늘 진짜 감격의 재회를 할 생각이었다.
이해기는 그런 형을 막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잠깐, 잠깐 기다려 봐. 형이 어떻게 마왕의 마력을 쓰는 거야?”
“마왕? 몰라. 나 없는 동안 마왕이라도 떴어?”
“아직은 아니야. 20년 뒤에. 세계가 망해서, 그래서 내가 돌아온 건데. 아직은 그 힘이 나와선 안 되는데 형이 사용하고, 그러니까.”
터무니없이 불길하고 광기와 파괴, 살육을 부르는 마력. 그것이 이해기가 돌아온 이유였다.
지금으로부터 20년 뒤, 현재의 균열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상처가 세계 곳곳에 생성된다.
균열이라기엔 너무 큰 상처에서 부정하고 오염된 마력을 지닌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20년간 성장을 멈추지 않은 헌터들이 대응했다.
잦아진 균열과 쏟아지는 몬스터는 어찌어찌 막았다. 문제는 오염된 세계와 하늘에서 강림한 불길하고 사악한 ‘무언가’였다.
한물간 종말론처럼 하늘에서 마왕이 강림하고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해기는 어떻게 마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기는 어떻게 반만 남은 세계를 구할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고 패배가 약속된 전투였다. 마왕이, 이성이 있는지 궁금한 그것이 봐준다고 해도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그런데 이해기는 승리했고 살아남았다.
이해하지 못할 승리에 대한 의문은 ‘세계를 구원한 용사’의 칭호에도 묻히지 않았다.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온 후부터 지금까지 마왕과 싸워 승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멈춘 적 없다.
그리고 지금, 이해기는 형제 중에서 제일 좋은 머리로 불가사의했던 승리와 생존의 이유를 알아냈다.
“형이었어?”
“형이라니까.”
“시발, 그게 형이었냐고!”
이해기가 마왕의 숨통을 끊었을 때, 마왕은 죽는 순간까지 이해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이유를 이해기는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시발, 시발, 시발 형, 시발 나는, 내가! 형 이제 괜찮은 거지? 그렇게 안 되는 거지? 괜찮아? 아프지 않아? 형! 혀엉!”
회귀자는 미래에서 너무 늦게 귀환해 버린 형의 말로를 보고 돌아왔다. 이해기는 제 손으로 죽였던 형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
* * *
이보배의 직장인 생활 5년에 휴가와 조퇴란 없었다. 어제 갑자기 나간 이유가 무엇인지 포션 1팀 모두 궁금해했다.
인사팀에 설명했는데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
“실종됐던 큰오빠가 돌아왔거든요. 그래서 관리국에서 본인 확인을 위해 절 찾은 거였어요.”
“우와, 축하드려요.”
“귀환자인 거죠? 일반 실종이 아니라.”
“네, 균열에 흡수되었거든요.”
“축하해요!”
“정말 축하합니다!”
사적인 교류는 없어도 매일 얼굴 보는 직장 동료다. 가식이든 진심이든 모두 한마디씩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래서 저, 갑자기 휴가나 조퇴를 할 수 있거든요. 미리 말씀드리려고…….”
평소 이보배가 열심히 일해서 팀의 할당량은 늘 여유로웠다. 팀장이나 팀원 모두 가능한 사정을 봐주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괜찮다고 말한 뒤에 이런 얘기 해서 미안하지만.”
축하의 의미로 커피를 사겠다며 이보배를 반강제로 끌고 나온 팀장이 이보배에게 간신히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만간 긴급 떨어질지도 몰라요. 그땐 사정 봐드리기 어려운 거 알죠?”
“긴급이요?”
“쉿.”
각성자는 오감이 일반인보다 발달한다. 각성자가 모인 길드에서 남들이 들어선 안 되는 얘기를 할 때 입가를 가리고 목소리를 낮추는 건 필수였다.
“이번에 등급 변경된 A급 균열, 우리 쪽에서 노린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렇지만 그건 신라가 공략한다고 뉴스에서 봤는데요.”
“신라에 무슨 일이 생겼대요. 우리 쪽 윗선에서 들은 게 아니라 외부 지인한테 들은 얘기. 이보배 씨한테만 미리 말해주는 거예요.”
팀장이 확실하지 않은 정보니까 틀릴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혹시 휴가 중 복귀 못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긴급 떨어질까 봐 미리 알려요. 참고만 해둬요.”
이보배는 선선히 그러마 대답했다.
팀장과 함께 팀으로 복귀했는데 내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뭔가 하고 봤더니 팀원들이 한 명을 둘러싸고 위로 중이었다.
“내 동생도 돌아오겠지?”
“돌아올 거야.”
“몸 성히 돌아오기만 하면 진짜 바랄 게 없어. 하고 싶다는 거 다 시켜줄 수 있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이보배 또한 팀원과 같은 심정이었다.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팀원이지만 이보배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었다. 눈시울을 적신 이보배는 위로하는 무리에 합류해 팀원을 도닥였다.
이보배는 입사 후 처음으로 칼퇴근했다. 하늘에 해가 걸려 있을 때 퇴근하려니 너무 낯설어 현실감이 없었다. 집에서 큰오빠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현실감은 더욱 떨어졌다.
정신이 얼떨떨한 동안 육신은 익숙하게 평소 하던 대로 행동했다. 병원으로 가려 한 것이다.
‘병원 안 들르고 바로 집에 갈까. 아냐, 막내 오빠한테도 이 기쁜 소식을 알려줘야 해. 아냐, 큰오빠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병원에 들를까, 집에 바로 갈까. 갈팡질팡하는 그녀를 붙잡은 건 작은오빠가 보낸 문자였다.
[집에 일찍 와라.]핸드폰이 망가져서 컴퓨터로 보낸 듯했다. 근무 중엔 아무 문자도 보내지 않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딱 한 문장만 보냈다. 한 문장이라도 이보배가 마음을 굳히기엔 충분했다.
이해기는 신중한 사람이다. 이유도 없이 일찍 돌아오라고 하지는 않을 터.
이보배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탔다.
현관문 밖에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공복인 배가 꾸르륵 울렸다.
‘작은오빠가 맛있는 거 만드나.’
이보배는 침을 꿀꺽 삼키고 현관문을 열었다.
“나 왔어.”
“막내 왔다!”
“보배 왔니.”
이귀한이 현관 앞까지 나와 이보배를 반겼다. 이해기는 불 앞을 떠날 수 없는지 냄비 앞에서 인사했다.
“이게 다 뭐야?”
집을 둘러본 이보배가 혀를 내둘렀다. 갈비찜, 동그랑땡, 삼계탕, 갈치 조림 등등.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러고도 모자라다는 듯 이해기는 불 앞을 떠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불 위에서 끓고 있는 건 우족과 잡뼈였다.
“둘째가 내가 먹고 싶은 거 다 해준다!”
“그거야 그렇지만 이렇게 한 번에 잔뜩 해두면 상하잖아.”
한번 일을 나가면 장기간 귀가하지 않는 짐꾼과 회사에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하는 직장인 남매의 살림이다. 냉장고가 이 많은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다.
평소와 달리 손은 어찌나 큰지. 우족을 우리고 있는 냄비는 이보배가 포션 좌판을 열 때 쓰던 포션 제작용 들통이었다. 크고 아름답다 이 말이다.
“내 인벤에 공간 없어. 아, 큰오빠 인벤토리에 넣어두게?”
“그건 괜찮아.”
이해기가 손에 쥐고 있던 국자를 번쩍 들었다. 국자의 일부가 잘려나간 것처럼 허공에서 사라지더니, 아예 이해기의 손에서 없어졌다.
짠. 텅 빈 두 손을 흔든 이해기가 허공 어딘가에서 국자를 꺼냈다. 국자는 사라질 때와 똑같은 상태로 이해기의 손에 돌아왔다.
거실에서 벌어진 깜짝 마술쇼에 이보배는 눈을 크게 떴다.
“자, 작은오빠!”
손에 쥔 물건이 갑자기 사라지고 다시 생긴다. 이건 마술쇼가 아니다. 각성자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인벤토리 기능이다.
“각성했구나!”
“그래.”
“꺄아아아아아악!”
이보배는 괴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너무 기뻐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해기가 각성했다. 각성하겠다는 일념으로 목숨 걸고 균열에 들어가던 작은오빠가 6년 만에 각성했다.
작은오빠의 꿈이 현실이 되었다. 이보배는 흥분해 펄쩍펄쩍 뛰었다.
“히잉, 갈비찜 식잖아.”
“미안해, 형. 보배 왔으니 이제 밥 먹자. 보배야, 음식에 먼지 떨어져. 그만 뛰고 이리 와 앉아.”
‘뭐지?’
그렇게 고대하던 각성자가 되었는데 이해기의 반응이 덤덤했다. 이귀한은 동생의 각성보다 갈비찜 식는 데에 관심을 두었다.
이귀한이야 정신이 온전치 않으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고 기뻐해야 할 작은오빠의 반응이 조용하니 뭔가 이상했다.
작은오빠가 이상하든 말든 갈비찜엔 죄가 없다. 갈비찜만 죄가 없나. 그 외의 진수성찬도 결백하긴 매한가지다. 이보배는 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수저를 들었다.
음식이 남아 상한다는 걱정은 기우였다. 이귀한은 상다리를 부러뜨릴 기세였던 진수성찬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먹방 촬영하면 합성이나 편집이냐고 의심할 만한 먹성이었다.
“큰오빠, 아귀의 저주라도 걸렸어? 힘을 숨기는 게 아니라 위장에 난 구멍을 숨기는 거야?”
이보배는 이귀한의 배를 문지르며 감탄했다. 그렇게 먹어놓고도 배가 편편했다. 각성자는 많이 먹는다지만 이건 도가 지나쳤다.
“더 먹을 수 있는데.”
“사과 깎아줄게.”
“잠깐만, 작은오빠. 이러다 큰오빠 탈 나면 어떡해.”
“괜찮아. 점심도 이만큼 먹었어.”
이해기는 사과 한 박스와 과도, 접시를 가져와 앉았다. 이해기가 사과를 깎아 이귀한에게 바쳤다. 평생 사과만 깎은 장인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껍질을 깎는데 접시엔 쌓이는 사과가 없었다. 깎아 놓는 족족 이귀한이 날름날름 집어 먹기 때문이다.
허공에서 국자가 사라지고 생기는 것보다 이쪽이 더 마술쇼 같았다. 이보배가 혀를 내둘렀다.
“큰오빠 진짜 괜찮은 거지?”
“응.”
“혹시 어디 아프면 얘기해야 해. 알겠지?”
이귀한은 사과를 씹으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큰오빠 걱정을 억누른 채 이보배는 작은오빠에게 시선을 돌렸다.
“작은오빠, 각성한 거 축하해.”
“고맙다.”
“언제 각성했어? 느낌 좋다고 하더니 그 균열에서 각성했던 거야? 왜 미리 말 안 해줬는데. 아, 큰오빠 돌아와서 놀라 까먹었나. 말할 타이밍 놓치는 바람에 기쁜 것도 지나갔어? 혼자 좋아하고 종료한 거야?”
“비슷해.”
이해기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바라던 각성을 했는데 어깨 으쓱이는 게 고작이라니. 믿기 어려운 현실에 이보배는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했지만 이해기는 묵묵히 사과 껍질만 정리했다.
“혹시 직업이랑 스킬이 별로야? 그래도 성장하면 모르니까……. 알려지지 않은 희귀 직종이면 꿀 빨 수도 있고. 저기…….”
“아냐, 전투계야. 스킬도 좋고. 희귀 직업 맞아.”
이해기가 사과 껍질의 산을 옆으로 치웠다. 사과 상자의 절반을 거덜 내고 나서야 사과 깎기&먹기 쇼가 종료되었다.
“그럼 이제 네게도 말해주어야겠구나.”
사과 껍질의 산을 옆에 두고 이해기가 엄숙하게 말했다.
“가족들에게만 밝히는 비밀이다. 네 안위와도 연관되어 있으니 꼭 지켜주었으면 한다.”
큰오빠는 비밀이랍시고 10년 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각성한 작은오빠가 밝히려는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이보배는 방만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과를 다 먹고 누웠던 이귀한도 상체를 일으켰다.
“빨리 말해. 막내 오면 같이 말해준다고 해서 참았잖아. 더는 참지 않을 거야.”
이귀한이 재촉했다. 이해기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말을 고른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5분을 뜸 들여 형과 동생의 인내를 시험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제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거기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진입했던 균열은 등급이 바뀌고, 철수하는 과정에 공략대와 마찰이 있었다. 각성해서 흥분한 차에 실종되었던 형이 귀환했다. 놀라운 일의 연속이니 이해기가 이상하게 반응할 만했다. 이보배는 작은오빠를 이해했다. 하지만 막상 이해기의 입에서 나온 사정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22년 뒤의 미래에서 회귀했다.”
이해기가 이보배를 똑바로 보고 또박또박 말했다. 작은오빠가 밝힌 사정을 듣고 이보배는 귀를 의심했다.
“작은오빠, 한 번만 더.”
“믿기 어렵겠지. 이해한다.”
이해기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제 새벽 회귀했다. 그래서 어제 형이 돌아온 걸 보고 많이 놀랐고, 또 형의 귀환을 선뜻 인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미래에서 형은 어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보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응, 유행에 뒤떨어진 것 같지만 클래식한 소재니까 잘 쓰면 재밌을 거야. 설거지 도와줄게. 설거지하면서 더 말해줘.”
작은 살림의 식기가 총출동해 부엌 겸 거실이 엉망이었다. 얼른 치워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보배의 바짓가랑이가 잡혔다. 이보배는 깜짝 놀라 아래를 보았다. 이귀한이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이해기를 가리켰다.
“내 얘긴 끝까지 들어줬잖아. 둘째 얘기도 끝까지 들어줘.”
‘아…….’
큰오빠의 너그러운 말에 이보배는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귀한의 이상한 설정은 모두 들어놓고 작은오빠의 말은 중간에 끊으려 했다. 오빠 차별이었다.
‘작은오빠가 얼마나 서운할까.’
이해기야말로 이보배와 가장 오래 산 오빠다. 실질적으로 6년 동안은 이해기가 이보배의 유일한 오빠이기도 했다.
지난 6년간 남매 사이는 돈독했다. 이해기가 이보배의 고집을 들어주며 지탱해 주고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늘 곁에 있으면 귀한 줄 모른단 말처럼 찬밥 취급해 버릴 뻔했다.
이귀한이 붙잡지 않았다면 큰 실수를 했을 것이다. 이보배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미안, 작은오빠. 정말 미안해. 계속 말해줘.”
“이해한다. 형의 말보다 더 믿기 어렵겠지.”
“나는 타락이다. 나는 어둠이다. 나는 파괴다. 나는 마왕이다아아.”
“아니야, 형. 형은 인간이야. 돌아와 줘서 고마워.”
언제 경계했냐는 듯, 이해기가 이귀한의 농담을 받았다. 훈훈한 미소를 지은 것도 잠시. 이해기가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균열에서 각성했지만 바로 집에 오진 못했다. 몇 달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지. 그 바람에 네가 많이 걱정했다만 어쨌든 돌아온 난 헌터가 되었고 눈부신 속도로 성장했다. 검성처럼 한국을 넘어 인류를 대표하는 헌터가 되었고 많은 업적을 쌓았다. 참 많은 일이 있었다.”
22년이니 에피소드가 많을 수밖에 없다. 이해기는 22년간의 일은 건너뛰고 클라이맥스로 돌입했다.
“시스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미션이 있었다. 난 그 미션을 달성했고 업적을 세워 보상을 받았다. 그 보상으로 어제 날짜에 회귀한 것이다.”
“와…….”
설거지하면서 들어도 괜찮을 뻔했다. 이보배는 이해기가 상처받지 않도록 표정 관리에 각별히 신경 썼다.
“음, 그렇구나. 그랬어.”
이보배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가렸다.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얼굴 근육이 멋대로 움직였다.
‘어떻게 반응하지?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아? 농담인가? 웃으면 되나?’
“저어, 작은오빠.”
“그래,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물어라. 네가 알아도 괜찮은 정보에 한해서 대답해 주마.”
‘일단 말투부터 어떻게든 해봐!’
이보배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방금 말한 그 클래식한 설정으로 소설을 쓸 건가? 아니면, 설마 그러진 않겠지만 회귀했단 설정으로 헌터 활동을 할 건가?
“투자를 하려 한다.”
‘여기서 갑자기 투자!’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내면의 이보배가 주먹으로 벽을 후려쳤다. 이보배는 작은오빠를 흰 눈으로 보지 않을 자신이 없어 아예 눈을 감았다.
“내겐 누구보다 확실한 정보가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고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미래에 대한 정보지.”
자기만 알고 있는 확실한 정보. 작업 들어갈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필수 용어였다.
“확실한 투자처와 아무도 모르는 미래를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안심해선 안 된다. 내가 돌아온 것으로 나비효과는 시작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시기와 다르게 돌아온 형이 그 증거지. 나비효과의 여파는 점점 커질 거다. 그러니!”
이해기가 목소리를 높였다.
“가능한 한 빨리 투자해 단타로 치고 빠져야 한다!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좋지.”
이해기가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만, 사랑하는 보배야. 돈 얼마나 모았니?”
이보배는 목덜미를 주물렀다. 회귀 얘기가 나올 때부터 조짐을 보이더니 투자가 튀어나오자 뻣뻣하게 굳었다.
각성, 회귀, 투자. 전혀 연관되지 않는 세 단어를 조합해 내는 작은오빠에게 존경심이 들었다. 진심이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투자해서 대박 나면 뭐 해?”
“이사 가야지. 지금 형 방이 없잖아.”
“와아! 새집!”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할 법한 대화가 그녀가 처한 현실의 가혹함을 일깨웠다. 이보배는 열심히 심호흡했다. 작은오빠가 같이 일하는 짐꾼 중에 다단계에 빠진 사람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작은오빠. 정말, 정말 진심으로 이 대화에 끼고 싶지 않지만 하나 더 물어볼게.”
“그래, 물어보거라.”
“회귀해서 투자하는 소설 없는 건 아냐. 근데 장르가 다르잖아. 똑같이 현대 판타지 카테고리에 묶여 있지만 우리가 사는 건 소위 말하는 헌터물이나 게이트물이고 투자는 그냥 현대물, 특직물, 경영물 이쪽이지.”
소싯적에 판타지 소설 좀 읽어본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이게 다 이해기가 열심히 영업하고 다닌 성과였다.
“헌터물에서 회귀면 그게 아니지. 이런 설정이면 인류에 큰 위기가 닥쳤는데 피해가 너무 커서 좀 더 대비하려고 과거로 가는, 그런 스토리가 이어지잖아. 그런데 여기서 투자?”
이보배는 내내 외면하던 이해기를 직시했다. 어제부터 갑자기 이상해진 작은오빠가 너무 걱정스러웠다.
“헌터로 승승장구했다며. 똑같이 승승장구하고 활약하면 돈은 자연스럽게 모이잖아.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투자해서 돈을 빨리 불리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한다 쳐.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 22년 뒤의 작은오빤 고작 투자해서 돈이나 벌려고 회귀한 거야?”
이보배가 아는 이해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가 곤 우족과 잡뼈에서 우러난 뽀얀 국물처럼 진국인 사람이었다.
이해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20대 청년이 지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오묘한 감정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네 말대로다. 바꾸고 싶은 게 있고 더 잘하고 싶은 게 있어서 회귀를 결정했다. 그걸 달성하기 위해 전력 질주할 예정이었는데.”
“는데?”
“안 그래도 된다.”
이해기는 이귀한을 흘깃 보더니 아련한 눈빛을 보냈다. 쓴웃음을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여러 감정이 담겨 복잡하고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해기의 아련 모드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니 투자나 하련다. 보배야, 얼마나 모았니. 많이 모았니?”
이보배는 돈을 열심히 모았다. 스트레스를 풀려다 보니 외식이 잦아 식비가 좀 나가긴 했지만 그 외엔 졸라맬 수 있는 만큼 졸라맸다. 이해기는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동생을 걱정하면 걱정했지 통장 액수를 궁금해하진 않았다.
그랬는데.
“내가 각성하면 장비 맞춰줄 수 있다고 말했었지. 억은 모았니? 소스는 확실한데 단타로 치고 빠져 수익을 얻으려면 초기 투자금이 중요해서 말이다.”
“막내가 돈을 그렇게 잘 벌어?”
“얘가 다니는 회사가 사계절이야, 형. 형 때도 컸지만 지금은 더 커져서 빌딩 하나 다 써.”
“우리 막내가 그렇게 큰 회사에 취직했단 말이야?”
“그래! 보배가 우리 집 가장이라니까!”
“우와!”
투자가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이보배의 부족한 사회 경험도 이건 아니라고 외쳤다. 이건 투자가 아닌 돈 뿌리기다.
투자를 하느니 사치하는 게 낫다. 사치하면 기분이 좋고 물질과 추억이 남는다.
투자는? 스트레스와 후회는 기본이요, 가끔은 건강도 망친다.
기다려도 이보배가 대답하지 않자 이해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 22년이나 지난 내 기억을 믿기 어려울 거다. 이해한다. 실제로 나도 이 시기의 정보는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대박은 대박 아니겠니.”
세상엔 ‘각성 하이’란 게 있다. 균열의 날 이후 새로 생긴 신조어다.
각성자가 자신이 특별하고 선택받은 존재라고 착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게 각성 하이다. 각성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한 사람일수록 걸릴 확률이 높다는 통계가 있었다.
‘작은오빠가 많이 힘들었구나.’
이보배는 절절히 후회했다. 삶이 고달프단 핑계로 곁에 남아 있는 오빠가 힘든 걸 알아차리지 못해 병을 키웠다.
다행히 각성 하이는 낫는 병이다. 거하게 데여 현실을 깨달으면 금방 낫는다고 한다.
동생이자 가장으로서 일침을 놔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보배는 그러지 않았다. 착각 때문이긴 해도 이해기는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행복하다면 잠시라도 즐기게 놔두고 싶었다.
“대출이랑 보증은 안 돼.”
“당연하지.”
이보배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원래 오빠를 위해 모은 돈이니까.’
어떻게 쓰든 작은오빠의 마음일 것이다.
‘그래도 큰오빠가 저러니…….’
큰오빠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은 듯하니 모은 돈을 다 내줄 순 없었다. 마력이 안정되면 가장 먼저 병원을 찾아가 정밀 검사도 받고 상담도 받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막내 오빠의 사례와 다르게 의료보험이 적용되겠지만 가용 자금은 많을수록 좋았다. 작은오빠 말마따나 집도 새로 구해야 할 것이다.
“여기.”
이보배는 남는 월급과 성과급을 쪼개 꼬박꼬박 저금해 둔 예금 통장을 이해기에게 내밀었다. 통장에 찍힌 액수는 1억이었다.
물가가 많이 올라 옛날 같지 않은 1억이지만 그래도 1억이었다. 억 단위가 주는 감상이 남달랐다.
그 1억을 작은오빠가 현실을 깨닫게 하는 데 뿌려야 한다니 아깝다. 너무 아까웠다. 통장을 내미는 손이 떨렸다.
‘아냐.’
이해기가 자신의 생명을 경시해 가며 짐꾼과 채집꾼 일을 병행하지 않았다면 이만큼 모으는 건 불가능했다. 작은오빠가 보탬이 되어줬기에 이렇게 적금도 들 수 있었던 거다.
이보배는 줬다 뺏고 싶은 자신을 달랬다.
“고맙다, 보배야.”
각성해도 막내 돈엔 손 못 댄다더니 선뜻 통장을 받는 이해기의 모습에 괴리감이 들었다. 낯선 괴리감은 머리를 쓰다듬는 작은오빠의 손에 날아갔다.
이해기는 만지면 꺼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조심스럽게 이보배의 머리를 토닥였다.
“정말 고맙다. 오빠가 더 잘하마. 반드시 네 신뢰에 부응하마.”
‘말투나 고쳐줘.’
이보배는 작은오빠를 따라 애잔한 표정을 지었다. 거울이 없어 보진 못해도 작은오빠가 지었던 애잔함의 열 배는 더 애잔한 표정이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 * *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은 호흡과 심박이 변한다. 벽과 문이 가로막고 있지만 거실에 남은 두 청년은 동생이 깊이 잠든 것을 바로 알아챘다.
“시스템이 불가능하다고 알린 업적이 나야?”
“그래. 내가 형을 죽였어.”
이해기는 순순히 죄를 고백했다. 형은 동생을 알아보았으나 동생은 형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때의 형이 인간이 아니었다는 말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 변명을 허락한다 해도 이해기는 자격이 없다.
끝 모를 오만으로 남은 가족마저 모두 잃고 죽지 못해 살아온 마흔아홉의 이해기는 그럴 수 없었다.
죄를 고한 이해기는 처분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따뜻한 손이 거칠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짜식, 네 덕분에 내가 일찍 돌아온 거구나. 어쩐지 갑자기 돌아갈 수 있겠단 느낌이 팍! 들더라니.”
이해기의 회귀가 이귀한의 귀환에도 영향을 주었다. 원래대로라면 22년이 지난 뒤에야 마왕이 되어 돌아올 미래가 바뀌었다.
“네 말대로면 세계가 난리 났던 거 아냐? 내가 했을 짓이야 뻔하지. 보이는 대로 다 부수고 죽이고 오염시켰겠지. 혼돈! 파괴! 망각! 이러면서 다녔을 게 뻔한데 왜 질질 짜고 그래. 네가 잘했어.”
“그렇지만 형, 형은 날 알아봤는데.”
“힘은 숨겨도 동생 사랑은 숨기지 못하는 나란 인간 멋진 인간. 멋진 인간 나란 인간. 자책하지 마. 내가 돌아오기 전에 제일 무서웠던 게 뭔지 알아?”
이귀한이 히죽 웃었다. 관리국에 잡혀 있을 때, 그리고 이해기를 놀릴 때 지었던 음산하고 기괴한 미소였다.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딱 그 생각만 하고 버텼는데 정작 만나니 아무 감흥이 없는 거야. 날 지탱하던 게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거야. 착각이었던 거야. 자기세뇌였던 거야. 그래서 너희 만나고서 내게 아직 인간성이 남아 있단 걸 실감하고 얼마나 기뻤는데.”
마왕이라 불려도 할 말 없던 기괴한 미소가 점점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런데 네 말대로면, 난 인간성을 잃었을 때도 너흴 잊지 않았단 거잖아. 그게 얼마나 안심되는 얘긴데. 좀 패긴 한 것 같지만.”
“좀이 아니었어.”
“죽이진 않았잖아. 그 지랄을 떨어도 너희는 알아본다니까 좀 안심되고, 더 참을 수 있을 거 같고, 불안한 마음이 안정되고 그렇다.”
“형…….”
이해기가 눈물을 흘렸다. 이귀한은 눈물을 육수처럼 뽑는 둘째의 머리를 한 대 갈겼다.
“그러니까 닭살 돋는 머슴 짓은 그만해, 새끼야. 하루 종일 옆에서 시중들어서 깜짝 놀랐네. 소름 돋아서 어둠이 깨어나려고 그런다.”
“해줘도 지랄이야.”
이해기가 인상 팍 쓰고 이귀한을 노려봤다.
이귀한은 하찮은 쓰레기 보는 듯한 동생의 눈빛에 만족했다. 장남인 그가 가장이 되면서 형에게 고분고분해졌지만 원래는 저렇게 건방진 새끼였다. 둘이 친했던 건 사실이지만 형제의 친분과 존경은 다른 영역이니까.
이귀한에게 많은 일이 있었듯 이해기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한 명은 이세계, 한 명은 미래에서 돌아왔지만 아무렴 어떤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지.
“1억으로 뭐 할 거야?”
“확실한 곳에 투자해야지.”
“투자하고 난 다음엔? 원래 미래에서 돌아오면 히, 히, 히, 뭐더라. 히드라?”
“히든 피스?”
“그래! 그런 거 독식하는 게 회귀자 덕목 아냐?”
이해기는 아픈 뒤통수를 문질렀다.
“보배에게도 말했지만 난 이 시기에 일어났던 일들은 잘 몰라. 균열에 갇혀 있었거든. 그래서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독점하려면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그때까지 레벨 설렁설렁 올리면서 보배 짐이나 덜어주려고 한 건데…….”
이해기는 곤히 잠든 집안의 가장이 통장을 내줄 때의 반응을 떠올렸다. 통장을 주는 눈빛이 굉장히 딱하고 측은한 것을 보는 듯했다.
“보배가 안 믿는 거 같지?”
“내 얘기도 안 믿던데.”
내면의 어둠을 억제하는 오빠와 미래에서 돌아와 투자를 시작한 오빠. 둘의 말을 믿지 않았으면 머리 아픈 오빠 둘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가뜩이나 사는 게 힘든 동생이 인생에 머리 아픈 오빠 둘이 추가되었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이해기는 한숨을 팍팍 쉬었다.
“이번엔 보배가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행복하지 않았단 얘기로 들린다?”
“…….”
이해기는 말을 아꼈다. 귀환자는 회귀자의 고충을 이해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
“헌터 일은 안 할 거야?”
“하긴 하겠지. 이전처럼 두각을 드러내진 않을 거야. 관심과 견제를 심하게 받았어.”
견제에 휘말려 가족을 잃었다. 견제하는 세력을 얕본 이해기의 오만이 불러온 참사였다. 복수는 했으나 잃은 가족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그런 건 지긋지긋해.”
마흔아홉. 쉰을 목전에 둔 나이에 회귀했다. 신체는 젊어졌지만 정신은 여전히 피로하고 지친 중년 그대로다.
“사는 것도 지긋지긋했는데 회귀하면서 마음 다잡았거든. 이번엔 더 잘하자. 살릴 놈은 살리고 세계도 구하자.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이게 뭐야.”
무너진 세계처럼 무너졌던 마음. 그걸 간신히 다잡아 독려해 가며 초특급울트라로열스페셜나이스한 성장 독식 코스를 작성했다.
회귀자가 직접 만든 초특급울트라로열스페셜나이스 성장 독식 코스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 휴지조각이 되었다. 다잡은 마음이 도로 부서진 건 기본이다.
“일주일 쉬고, 머리 비웠다가 계획 짜봐야지.”
지금 바로 무언가를 계획하기엔 정신이 버텨주질 못했다. 미래에 대비해야 할 최종 보스도 사라진 판국 아닌가. 이해기는 조금 쉬고 싶었다.
“일주일?”
“그래.”
“고작 일주일만 쉬게?”
본인이 곧 악이며, 타락이며, 죽음이며 어둠이라 자처한 마왕이 말했다.
“기왕 노는 거 제대로 놀아야지.”
“고작이라니. 22년에 비하면 일주일이 짧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놀자는 게 아니잖아. 푹 쉬고 그다음에 꽃길 깔아주는 건데.”
회귀자의 회귀 계획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장본인이 달콤한 타락을 주장했다.
“기왕 쉬는 거 제대로 쉬어야지.”
행복한 백수 인생엔 옆에서 같이 놀아줄 친구가 필요하다. 이해기는 뻔히 보이는 형의 속셈을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했다. 저항하기엔 너무 달콤한 유혹이었다.
형이 10년 쉬니 나도 10년 쉬겠다. 귀환자에 이은 회귀자 존버 메타가 시작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