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in Character’s Little Sister RAW novel - Chapter (6)
‘아차.’
가능한 이귀한의 비위를 맞춰주기로 말을 맞춘 게 어제의 일이다. 이보배는 고압적인 말보단 어르고 달래는 게 낫겠단 생각에 큰오빠를 보았다. 이귀한이 머리카락을 털며 주장했다.
“씻을 필요 없으니까 안 씻을래.”
“옷 사러 가는 건데 안 씻으면 옷 입어보기 미안하잖아.”
“나 깨끗해. 안 씻어도 돼.”
안 씻는 사람들의 전매특허 대사가 나왔다. 안 씻는데 어떻게 깨끗하냐 반문하려던 이보배는 이귀한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침에 식사하면서 씻고 다시 잤는지 얼굴이 깨끗했다.
기름기 없이 깨끗한 이귀한의 얼굴은 이보배보다 어려 보였다. 같이 다니면서 이보배가 동생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놀랄 것이다.
이보배는 이귀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찬가지로 기름기 없이 보송보송했다.
“알겠어, 씻지 마.”
“막내야, 머리가 기름지구나. 넌 씻어라.”
“씻을 거거든!”
* * *
이보배는 택시를 불렀다. 아직 이귀한에게 대중교통은 일렀다.
‘차도 필요하려나.’
이귀한의 상태가 지속된다면 병원 치료가 필요하다. 병원에 다니려면 자가용이 있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작은오빠도 각성했으니까 차가 있어야…….’
이보배는 중고차 시세를 검색했다가 바로 창을 닫았다. 차와 집. 정말 필요한 것들인데 액수가 만만치 않았다.
‘진짜 성과급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추가 근무 수당과 성과급으로 유지되는 가계라니. 현실이 참 서글펐다. 그래도 이보배는 큰오빠를 위해 돈을 쓸 수 있다는 점을 기쁘게 생각했다.
“핸드폰, 옷이랑 신발, 속옷. 컴퓨터는 천천히 사도 괜찮지? 또 필요한 거 없어? 쇼핑 전에 살 걸 적어 가야 충동구매를 막는 현명한 소비를 할 수 있는 거야.”
미리 쇼핑 목록을 정해야 이귀한의 충동구매를 막을 변명이 생긴다. 넉넉지 않은 살림으로 8년을 살아온 이보배가 밑밥을 깔았다.
“고기 먹을래.”
“알겠어, 점심은 고기.”
“음메에.”
“그래그래, 소고기 사 줄게.”
“무우무우 아니야. 음메음메.”
“소는 소인데 외국 소가 아니라 한우로.”
철을 이세계에 뺏기고 돌아온 큰오빠는 필요한 것보단 먹고 싶은 게 급한 듯했다. 필요한 건 없냐 물으니 컴퓨터나 게임기란 대답이 돌아왔다. 이보배는 천천히 사 주겠다고 약속하고 이해기와 상의해 필요한 물품을 적었다.
택시가 곧 도착한단 알림이 왔다. 이보배는 먼저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큰오빠, 뭐 해?”
“…….”
이귀한이 현관을 넘지 않고 머뭇거렸다. 이해기가 뒤에서 이귀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형,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돼. 우리가 같이 있잖아.”
“……응.”
이보배는 어릴 적 소풍 갈 때처럼 큰오빠의 손을 잡았다. 이해기도 남은 손을 잡자 이귀한은 그제야 현관 밖으로 발을 뗐다.
삼 남매는 택시에 탔다. 가장인 이보배가 앞 좌석에 올라 비장하게 목적지를 말했다.
“ 백화점으로 가주세요.”
균열의 날 이전에 백화점은 이보배에게 ‘쇼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간이었다. 명품관을 휩쓸진 못해도 옷을 사면서 부모님께 혼날 걱정은 해본 적 없었다.
균열의 날 이후 이보배는 백화점에 발을 끊었다. 집도 없어 대피소 신세를 지는데 백화점은 무슨. 헌 옷을 쌓아둔 노점에 맞는 옷이 있으면 감지덕지했다.
사태가 진정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마트와 지하 쇼핑센터, 인터넷 쇼핑몰이 주된 구입처가 되었다. 백화점과는 연이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끊어진 연, 큰오빠가 돌아왔으니 큰맘 먹고 이어보련다.
“보배야, 거긴.”
이해기가 백화점이 과하다고 생각했는지 만류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보배는 지갑에서 무려 백만 원짜리 기프트 카드를 꺼냈다. 목적지인 백화점 전용이었다.
“짜잔. 저번에 회사에서 받았는데 중고로 팔려다가 까먹었거든. 이걸 이렇게 써먹네.”
“으음……. 그래, 네 배포가 많이 줄었으니 키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무려 백만 원짜리 기프트 카드를 보여줬는데 작은오빠의 반응이 이상했다.
이해기가 이상하게 반응한 이유를, 이보배는 백화점에 당도한 다음 알았다.
“헉, 가격 실화냐.”
균열이 터지고 각성자가 등장했다. 균열에서 신소재와 신에너지, 균열 산업이 파생되고 전반적인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빈부격차는 이전보다 심해졌다.
한국은 사회질서를 가장 빨리 되찾은 국가 중 하나다. 국토 전체가 균열에 침식되어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도 있었다.
수출과 수입이 일부 막혔다. 그나마 이만큼 물가가 안정된 건 마석이 신에너지원이 되었기 때문이고, 식품 가격이 치솟지 않은 건 농업과 목축업 관련 스킬을 각성한 사람이 있어서다.
이보배가 신세 지는 동네 마트와 지하상가, 인터넷 쇼핑몰의 가격은 이전보다 약간 오른 선에 그쳤다.
대신 부를 축적한 상류층과 신흥 부유층인 헌터가 사는 위쪽 동네의 물가는 고공 행진한 것이다.
백화점엔 헌터 장비 판매를 허가받은 헌터 전용층이 있다. 헌터가 주 고객층인 백화점이었고, 당연히 비쌌다.
이보배가 자신 있게 꺼내 든 백만 원짜리 기프트 카드는 균열 이전의 십만 원과 가치가 비슷했다.
집에서 편히 입기 괜찮을 것 같아 가격표를 확인한 이보배의 눈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이 가격이 실환가 싶다. 싼 쪽이 아니라 비싼 쪽으로.
이귀한이 그 비싼 옷들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이귀한이 사고 치지 않도록 감시하던 이해기가 작게 말했다.
“면접 정장도 중고로 산 애가 웬일로 이 백화점에 간다 했지. 여기 가격대 몰랐구나.”
“팀원들이 옷 여기서 산다고 해서……. 물건 좋다 그래서 온 건데.”
확실히 물건은 좋았다. 가격이 이보배가 붙인 적정가의 열 배라 그렇지.
“배포는 안 키울 거니?”
“키우긴 뭘 키워.”
“그럼 됐다. 핸드폰은 나가서 사고 옷은 인터넷에서 주문할게.”
“그래도 좋은 옷이 한 벌쯤…….”
“형! 입으면 허리랑 가슴 펴야 하는 옷 필요해?”
“그런 옷 입으면 10초도 못 참을 거야.”
“고무줄 바지가 좋지?”
“응!”
“들었지?”
미리 알아보지 않고 오는 바람에 택시비만 날렸다. 이보배가 침울해하자 이해기가 어깨를 두드렸다.
“아이쇼핑하면 되지. 구경할 거 많으니 형도 좋아할 거야.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점심은 여기에서 먹자.”
“알겠어, 작은오빠. 오빠 말이 맞아. 놀러 온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요즘 헛소리를 하긴 했지만 역시 작은오빠는 듬직하다는 생각도 잠시. 이보배의 감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해기가 여운을 즐길 시간을 주지 않고 초를 쳤기 때문이다.
“조금만 참아. 오빠가 투자한 거 돌려받으면 이 백화점 통째로 사 주마. 오래 걸리진 않을 게다.”
“하하하.”
이보배는 꿈이 야무진 작은오빠를 위해 가능한 한 밝게 웃었다.
무우무우 울지 않고 음메음메 우는 소를 사주겠다는 약속에 따라 남매는 소고기집에 들어갔다. 메뉴판에 적힌 그램당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허억, 가격이.”
이보배의 눈에 2차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진도는 8을 기록했다.
“일단 6인분 주시오.”
자리에 앉자마자 이해기가 6인분을 주문했다. 이보배는 눈을 홉떴다.
‘자기가 쏘는 거 아니라고 6인분을?’
사람이 셋인데 6인분이 웬 말이냐. 이귀한이 많이 먹긴 해도 고기만 먹는 게 아니라 냉면, 멸치국수, 차돌 된장찌개 등을 맛봐도 될 텐데.
이보배가 눈을 부릅뜨자 이해기가 웃었다.
“돈은 쓰면 쓸수록 느는 거다.”
‘와, 그거 정말 사업병 걸린 사람이 할 말 같다.’
며칠 전까지 멀쩡했던 작은오빠가 왜 갑자기 저렇게 변했나 고뇌할 시간이 없었다. 고기와 함께 불이 나왔다. 불붙은 숯이 아니고 불의 정령석이었다.
‘비싼 값은 하는구나.’
불판 위에서 맛있는 냄새를 내며 익어가는 고기를 보자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그래, 옷을 인터넷에서 사기로 해 돈이 굳었다. 100만 원짜리 기프트 카드로 밥 사 먹는다 치면 된다.
이씨 집안에서 불판을 집도하는 명예는 대대로 가장에게 주어졌다. 고기를 사는 자가 불판도 지배한다.
비싼 값을 하는지 고기도 직원이 구워줬다. 하지만 이보배는 불판 앞 가장의 상징인 집게를 놓지 않았다. 직원이 공평하게 분배한 고기를 오빠들이 먹기 편한 곳으로 옮겼다.
이귀한이 걸신들린 듯 소고기를 흡입하는 모습을 보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많이 먹어, 큰오빠.”
“쩝쩝.”
“너도 많이 먹어라.”
“작은오빠도 먹어야지.”
4인분을 첫째에게 몰아주고 2인분을 갖고 둘째와 막내가 서로 더 먹으라며 양보했다. 아름다운 우애였지만 남매가 양보하는 동안 귀한 소고기님이 불판 위에서 뜨겁게 굳어갔다.
“내가 다 먹을게.”
결국 소고기님에게 일어나는 비극을 두고 보지 못한 이귀한이 나섰다. 이보배는 집게를 딱딱거리며 돈 열심히 벌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백만 원짜리 기프트 카드는 소고기집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사망했다. 이보배는 기프트 카드의 명복을 빌었다.
식사를 마쳤으니 소화를 시킬 차례다. 남매는 어슬렁어슬렁 백화점을 구경했다. 옷이나 생필품은 마트와 인터넷에서 사기로 했으니 백화점에선 살 게 없었다. 자연스럽게 셋의 발길은 구경할 게 많은 헌터 장비 판매층으로 향했다.
헌터의 장비와 포션 등을 판매하는 최상층은 아예 각성자 등록증이 없으면 출입할 수 없었다. 이보배가 등록증을 제시하고 오빠들은 동행 자격으로 입장했다.
마네킹이 걸친 휘황찬란한 장비와 벽에 걸린 무기들을 이귀한이 생소한 듯 둘러보았다.
“큰오빠 있을 때랑 많이 바뀌었지? 큰오빠 있을 땐 제대로 된 장비 상점이 거의 없었잖아.”
“몰라.”
이귀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낯선 광경에 흥미를 보인 건 처음뿐이었다. 이귀한은 금방 흥미를 잃고 가격표만 보고 다녔다.
이해기는 아래층에서처럼 이귀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대신에 날카로운 눈으로 장비를 훑었다. 그러더니 내린 결론이 이러했다.
“훗, 이 시기 장비 수준이 이 정도였나……. 일부러 돈 주고 구매할 필요는 없겠군.”
하는 말과 장비를 훑는 눈만 보면 혼자 베테랑 S급 헌터였다. 이보배는 기가 차서 목덜미를 잡았다.
이해기가 한 말을 들은 점원과 주위 헌터의 시선이 곱지 않아 이보배는 두 오빠를 잡아 걸음을 빨리했다.
끌려가던 이귀한이 발에 힘을 주고 우뚝 섰다.
“막내야, 저기 포션!”
“응, 그러게. 포션이네.”
이보배는 포션 쪽에 별 관심 없었다. 멀리서 보아도 병부터 고급스러운 것이 개인 공방에서 수제로 제작한 포션 같았다. 평소라면 가격이 궁금해 가까이 가봤겠지만.
“앞으로 일주일은 포션 보기도 싫어. 토할 것 같아.”
9일 동안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포션만 제작한 지금은 아니었다.
큰오빠는 관심이 없고 작은오빠는 S급 헌터 놀이에 심취했다. 그래도 셋이 같이 다니니 재미는 없어도 즐거웠다.
집에 돌아가기 전 마지막 코스는 핸드폰 구입이었다.
이귀한은 핸드폰으로 뭔가 하려는 게 아니라 핸드폰 자체가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개통되자마자 동생들의 전화번호를 입력한 다음엔 껐다 켜기만 반복했다.
이해기는 이상한 주소를 입력해 알 수 없는 어플을 깔기 시작했다.
빨갛고 파란 숫자가 화면에 가득했다. 이보배는 저게 제발 가상 주식 투자 게임 어플이길 빌었다.
귀가한 남매는 인터넷에서 이귀한의 옷을 골랐다. 자기 옷을 고르는데 이귀한은 관심 없는지 소파에서 데굴거렸다.
“자꾸 군복 같은 것만 고를 거야?”
“이런 게 유용하지. 그럼 이건?”
“와! 완전 아저씨 옷 같아. 색은 왜 이래? 어디 등산 가?”
“괜찮아 보이는데…….”
자꾸 군복이나 아저씨가 입을 법한 옷을 고르는 이해기를 보다 못해 이보배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해기는 작게 신음하고 어깨를 주물렀다.
“피곤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포션만 제작한 이보배만큼 피곤하겠냐만, 이해기는 혼자 이귀한을 돌보지 않았는가. 이해기가 수긍했다.
“형과 하는 첫 외출이라 좀 긴장했다.”
“큰오빠가 좀 어리게 굴긴 했지만…… 아, 또 실종될 수도 있구나. 목걸이나 팔찌에 주소랑 이름 각인해 둘까? 미아 방지용으로 나오는 거.”
금이나 은으로 하면 나쁜 사람에게 갈취당할 수 있으니 플라스틱이나 다른 금속이 안전하다. 이보배가 근방 마트에서 각인 서비스를 해주는지 안 해주는지 기억을 더듬는데 이해기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단 형이 사고 칠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잘 참긴 했는데 방심해선 안 되겠지.”
거기까지 말한 이해기가 피식 웃었다.
“내가 정말 긴장했긴 했구나. 집에 오자마자 살았구나, 싶었다. 이런 말 하기 우습지만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면 첫 외출에 사건이 터지잖니.”
“그러네. 첫 외출이나 방심했을 때 터지지. 그렇지만 그건 픽션이잖아. 왜, 회귀자니까 주인공으로서 뭔가 터질 것 같아? 사건 사고 펑펑?”
이보배는 장바구니에 옷을 추가하면서 꿍얼거렸다.
“이게 소설이고 작은오빠가 진짜 회귀자면 오늘 백화점 갔을 때 균열이 터졌어야 해. 침식형이나 방출형, 흡수형이 터져서 작은오빠가 다 때려눕히는 거지.”
말하고 보니 웃겨서 이보배가 꺄르르 웃었다.
“아, 진짜 회귀자면 균열 터질 곳에 놀러 가질 않겠구나. 근데 소설에선 꼭 가는 곳마다 터지더라. 사건 사고가 없으면 소설이 재미없어서 그런가.”
“네 말이 맞다. 소중한 동생을 데리고 균열이 터질 곳에 가면 안 되지.”
“네네, 주인공 씨. 주인공의 여동생을 아껴주세요.”
“아무렴, 누구 동생인데 호강시켜 줘야지. 오빠가 이번엔 더 잘하마.”
이해기의 손이 이보배의 머리를 헤집었다.
* * *
다음 날도 이보배는 11시쯤 일어났다. 배를 긁으며 밥통을 열었는데 밥이 없었다.
‘뭐지.’
자기 전에 쌀을 씻어 취사 버튼을 눌러놓은 기억이 생생했다. 이보배는 싱크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싱크대에 설거짓거리가 가득했다. 어제랑 똑같았다.
‘작은오빠가 회귀 타령하더니 사실은 내가 회귀했나?’
이보배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고서 피식 웃었다. 미소는 오빠 둘이서만 해 먹은 야식의 잔해를 보자마자 사라졌다.
‘또, 또, 또 치사하게 둘이서만.’
이보배가 싱크대 물을 틀자 이해기가 어제처럼 손을 휘젓고 웅얼거렸다.
“그냥 둬. 내가 치울게.”
“치우는 건 괜찮은데 자꾸 둘이서만 먹기야? 치사해.”
“미안, 형이 밤에 배고프다고 해서.”
이보배는 없던 과자 봉지와 쓰레기를 치우고 설거지를 해치웠다. 식재료가 진짜 동났으니 오늘은 마트에 가 식재료를 채우고 실종 방지 인식표도 살 계획이다.
이보배는 소파에 엎드려 있는 이귀한은 내버려 두고 이해기를 흔들었다.
“작은오빠, 일어나. 마트 가서 점심 먹고 식량 좀 사놓자.”
“어? 아냐, 식재는 어제 주문해 뒀으니 오늘 올 거야.”
“그래? 그럼…….”
중요한 식재가 보충될 거란 얘기에 마트에 가기가 귀찮아졌다. 이보배는 인식표 구매를 뒤로 미루고 아점이나 먹기로 했다.
이보배는 인벤토리에서 짜장라면을 꺼냈다. 일요일은 아니지만 휴일이니 기분은 비슷했다. 이보배가 짜장라면을 꺼내는 걸 본 이해기가 냉동실에서 만두를 꺼내 봉지를 뜯었다.
“그건 또 언제 샀어?”
“어제 새벽에 편의점 갔다 왔지.”
“왜 안 들렸지. 내가 그렇게 잠귀가 어두웠나…….”
“이 오빠들이 동생 잠을 깨울 만큼 미숙한 자들은 아니란다.”
이해기가 만두를 굽고 이보배가 라면을 끓였다. 싱크대에 라면 물을 덜어내면서 이보배가 말했다.
“나 오늘은 밖에 안 나갈 테니까 작은오빠 병원 다녀올래? 계속 못 갔잖아.”
“……한생이한테 말이냐?”
“응.”
“그래……. 한생이한테도 가봐야겠지…….”
가기 싫은 사람처럼 보였다.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작은오빠.”
“아니다, 가야지. 돌아와서 한 번도 못 봤으니 봐야겠지. 한생인 어떠니?”
“비슷하지 뭐.”
“그래……. 비슷하구나.”
이해기가 자조하듯 웃고 만두를 뒤집었다. 이보배도 면을 휘저어 풀면서 스프를 뜯어 뿌렸다. 맛있는 냄새가 좁은 집에 퍼지고.
“셋째 보고 싶다!”
죽은 듯 자고 있던 이귀한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형이 저러는데 나만 보러 가기도 좀 그렇네. 다 같이 보러 갈 수 있을 때 볼게.”
“……알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작은오빠가 막내 오빠를 피하는 걸로 보인다. 각성 하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이보배는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큰오빠의 귀환에 각성이 겹치면서 마음이 복잡한 걸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작은오빠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본래는 식물인간 되는 순간 생명 유지 장치 떼어버리겠다고 농담하던 남매였다. 이한생을 살려두는 건 이보배 자신의 고집이다. 두 오빠는 막내의 고집에 끌려간 희생양일 뿐이다.
‘아냐. 욕심내도 된댔잖아.’
부정하면서도 이보배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작은오빠가 막내 오빠의 현상 유지를 그만두자고 언제 말을 꺼내도 화내지 않기로.
이해기가 편히 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듯 이보배도 이해기가 편히 살길 바랐다. 이한생은 이보배의 책임이었다. 그러니까 이보배만은 끝까지 이한생을 붙잡아야 한다.
짜장라면에 군만두. 완벽한 휴일 밥상이 완성되었다. 여기에 계란 프라이를 올리면 더 완벽했을 거란 아쉬움이 남았다.
이보배는 라면을 후후 불어 먹으며 두 오빠에게 경고했다.
“야식 먹을 땐 나도 불러. 치사하게 둘이서만 놀면 좋아? 하나도 안 남겨놓고 설거짓거리만 쌓아놓는 건 무슨 경우야? 그러니까 막내 오빠가 맨날 자기만 따 시킨다고 투덜거린 거야.”
“아아, 셋째 보고 싶다.”
“형, 조금만 참아.”
‘밥 먹고 병원에나 가야겠네. 어제 못 갔으니.’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이보배의 생각을 끊었다. 이보배는 뚱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었다. 회사에서 온 전화였다.
“설마 또 긴급은 아니겠지.”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게 줬다 뺏기다. 설마 휴가를 줘놓고 부르는 건 아닐 거란 생각에 이보배가 조심스럽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이보배입니다. 네, 네네. 네, 저희 오빠 이름이 이해기 맞는데 무슨 용무이신지요?”
인사팀이나 포션 팀이 아니라 무려 전략팀에서 온 전화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귀를 기울이는데 상대방이 이해기를 찾았다.
-이해기 씨 전화가 안 되어서 죄송하게도 대신 연락드렸습니다.
“저희 오빠가 핸드폰이 고장 났었거든요. 어제 사서 개통했는데 번호가 바뀌었나 봐요.”
전략팀에선 균열과 관련해 이해기에게 질문이 있다고 했다.
-질문 몇 가지에 응해주시면 사례하겠습니다. 이해기 씨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잠시만요, 이해기 씨 바꾸겠습니다.”
이보배는 들어도 모르니 당사자를 바꿔주는 게 최선이다. 각성 하이에 걸려 못 미더웠으나 평소 보이던 진중하고 선량한 작은오빠를 믿기로 했다.
통화를 넘겨받은 이해기는 대답 몇 번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가 자신 몫의 라면을 한 젓가락에 씹어 삼켰다.
“보배야, 나 너희 회사에 갔다 올게. 균열 공략 전에 간단히 분위기나 목격한 몬스터 종류를 물으려나 봐.”
“그 정도는 전화로 해도 되잖아. 그리고 짐꾼은 작은오빠 말고 더 있을 텐데 왜…….”
“균열 속 던전을 발견한 게 나란다. 최초 입장자도 나고. 사계절은 믿을 만하고 현우에겐 빚진 것도 있으니 호의를 베풀어 나쁠 건 없겠지.”
이해기가 친근하게 말한 현우가 부길드장인 전투 연금 한현우는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한현우를 동생 친구처럼 편하게 말하는 말투 때문에 이보배는 던전 발견과 첫 입장에 대해 태클 거는 걸 까먹었다.
‘진짜 괜찮을까.’
이보배가 말리기도 전에 이해기는 외출 채비를 마쳤다. 아마 말렸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동생이 신경 쓰일까 봐 업계에서 가장 대우가 좋은 사계절과는 일하지 않았던 작은오빠다. 이보배는 작은오빠를 믿기로 했다.
“혹 늦으면 저녁은 둘이서 먹어.”
“알겠어.”
“둘째야, 잘 다녀와.”
이해기를 배웅한 이보배는 날짜를 헤아리고 깜짝 놀랐다.
“마감까지 며칠 안 남았네? 괜찮은가?”
처음 얘기 들었을 때 마감까지 2주 남았다고 했다. 거기에서 9일에 이틀이 더 지났는데 아직도 공략 전이라니?
균열이 터지는 것보다 회사가 망한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이보배는 길드와 균열을 검색한 뒤에 안도했다. 카운트다운을 막기 위해 선발대를 보내 내부 정보를 수집 중이란 기사가 있었다.
연관 기사엔 이번 공략에 길드 마스터인 빙제와 부길드 마스터인 전투 연금술사가 참전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보배는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길마랑 부길마가 같이 들어가네. 성공 못 하면 실직인가…….”
부길드 마스터는 두 명 더 있지만 길드 마스터이자 S급 헌터인 빙제가 없으면 회사가 휘청일 게 분명하다.
이제까지 이보배는 길드의 공략 성공 여부를 궁금해한 적이 없다. 긴급이 떨어지면 기계처럼 포션을 만들고, 할당량을 채운 후엔 신경 쓰지 않았다.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들었거니와 바닥난 정신력으로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또한 사계절 길드가 잘 버티리란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A급이다. 본래 공략을 맡기로 했던 신라에서 사계절로 넘어온 것도 이상하다 싶어 이보배는 관련 기사를 계속 눌렀다. 그러다 한 기사의 댓글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다.
* * *
사계절도 낙오자로 마감 늘리는 거 아니냐?
* * *
└응, 사계절은 안 그러거든. 너 삼국 통일 국가 알바지?
└사계절은 전 직원이 정직원이얔ㅋㅋ 짐꾼도 정직원 쓰는데 균열에 사람 버리고 튀겠냐. 너네 쉰라나 그러겠지. 판사님, 이 댓글은 저희 집 거북이가 읍읍.
└└특별한 헌터들을 위한 특별한 공간이 있다는데? 거미줄에 달린 정보가 궁금하신 분은 여기를 클릭!
* * *
“이건 또 뭔 일이래.”
신라가 공략을 포기한 데엔 좋지 않은 이유가 있는 듯했다. 핸드폰이 아닌 컴퓨터로 기사를 찾아보는데 이귀한이 아는 척했다.
“아, 그거.”
“큰오빠 뭔가 알아?”
이귀한은 외출 한 번 하지 않고 이해기와 집에만 열흘 넘게 있었다. 뭔가 얘기 들은 게 있을 법했다.
“둘째가 그랬는데, 신라가 균열에 사람 던져놓고 시간 늘렸대.”
“탐색조나 선발대로 마감 시간 늘리는 건 마감 임박한 균열 공략할 때 종종 쓰이는 전략이야.”
“헌터가 아니라 짐꾼이나 채집꾼.”
“그건…… 살인이잖아.”
경찰과 군인이 민간인을 보호하듯 각성자는 비각성자를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않는 국가가 많다. 천만다행히도 대한민국은 그게 상식인 나라였다.
길드는 이익집단이지만 동시에 공익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이 헌터의 갑질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건 그들이 몬스터와 싸워 자신들을 지킨다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헌터의 모임인 길드가 비각성자를 미끼로 써먹는다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래서 둘째가 죽을 뻔했는데 살았다 그랬어.”
“그런 걸 나한테 숨겼단 말이야?”
“아, 지금이 아니라 회귀 전에.”
이게 소설 속 주인공 설정인지 현실에서 작은오빠가 당한 갑질인지 아리송했다. 이보배는 큰오빠에게 묻는 걸 그만두고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마치니 타이밍 좋게 마트에서 식량이 배달됐다.
“한번 뜯으면 멈출 수 없어.”
이귀한이 감자 과자를 하나 뜯어 먹었다.
‘작은오빠 나간 김에 그냥 마트 가서 인식표 사야겠다.’
이보배는 냉장고와 식량 창고를 잘 채운 다음 이귀한에게 마트 마실을 제안했다.
“마트?”
“응, 또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사고…….”
이귀한이 속옷과 기타 물품이 든 박스를 가리켰다. 이해기가 식자재를 사면서 같이 주문한 것이다. 이보배는 결국 진짜 의도를 밝혔다.
“요즘 인식표가 유행이거든. 다들 이름이랑 생년월일, 연락처 적은 인식표 하나씩 달고 살아. 근데 우리 가족만 없는 거 같아서.”
“막내야.”
“응?”
“구라 티 난다.”
“미안.”
“막내가 원하면 인식표는 찰래. 하지만 마트는 안 갈 거야.”
“왜에, 가자. 혹시 이틀 연달아 나가면 피곤해서 그래?”
“아니.”
“그럼?”
“……알겠어, 가자.”
이귀한이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일어났다. 이보배가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고 말하려는데 이귀한이 손을 내밀었다.
“대신 손 놓치면 안 돼. 알겠지?”
“당연하지.”
“놓치면 뿌셔뿌셔야.”
이귀한은 그렇게 말하더니 감자 과자를 입에 넣고 씹었다. 와그작, 얇은 감자 과자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이보배는 큰오빠의 손을 놓는 일 없이 무사히 쇼핑을 마쳤다. 이귀한은 인식표가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얼굴로 쓰다듬었다. 이보배도 흡족했다.
마트를 나온 이귀한이 말했다.
“마트는 사람이 많구나. 백화점보다 더 많았어. 사람이 저렇게 모여 있는 걸 보면 말이야.”
이귀한이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
“이렇게 쳐서 납작하게 만들고 싶다.”
“그럼 안 돼. 맞은 사람이 얼마나 아프고 놀라겠어.”
이보배는 깜짝 놀라 큰오빠를 타일렀다. 이귀한은 정신이 온전치 않지만 육체는 각성자다. 맞은 사람이 다치는 건 물론이거니와 각성자의 비각성자 폭행은 법으로 엄히 다스렸다.
“아프기 전에 죽으니까 괜찮아.”
“안 괜찮아. 낯선 사람이 갑자기 나를 때린다고 상상해 봐.”
“살아 있는 게 후회되도록 만든 다음 죽여야지.”
이귀한이 주먹을 쥐었다 펴더니 히죽 웃었다.
“죽어서도 영원히 후회하게 해줄게.”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었는데.’
원래의 이귀한은 기어오르는 동생들은 철저하게 응징했지만 과한 폭력과는 거리가 먼 성정이었다. 이보배는 개미를 짓밟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해 보이는 모습에 이귀한의 말을 부정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음, 그렇구나. 즐거운 얘기 해볼까. 저녁은 뭘 먹을지 생각해 보자. 내가 만들까? 뭐가 좋아, 김치찌개?”
“막내야, 그건 즐거운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이귀한이 정색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해기는 음식 솜씨가 좋지만 이보배는 음식 솜씨가 영 좋지 않다. 자신의 실력을 아는 이보배가 욱해서 말했다.
“6년 동안 내 솜씨가 나아졌을 수도 있잖아.”
“아니야, 막내야. 그건 아니야.”
둘이 실랑이하는데 이해기에게서 문자가 왔다. 늦을 것 같으니 저녁은 먼저 먹으라는 내용이었다. 가족 대화방을 확인한 이귀한이 마트를 가리켰다. 아까까지만 해도 얼른 나가자고 졸랐던 그 마트다.
“여기서 사 먹고 가자.”
“큰오빠 외식 너무 좋아하면.”
“사 먹자.”
외식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할 일이 없었다. 이보배가 배경음악 삼아 TV를 켜자 이귀한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소파에 누웠다.
“그동안 둘이서 뭐 했어?”
“그냥 얘기.”
“어떤 얘기?”
“사는 얘기. 하고 싶은 얘기. 듣고 싶은 얘기.”
“큰오빠가 하고 싶은 얘기가 어떤 건데?”
“보고 싶었어!”
이보배는 나도 보고 싶었노라 화답했다.
“듣고 싶은 건 어떤 거야?”
“6년 동안 어떻게 살았어?”
“작은오빠가 말 안 해줬어?”
“둘째는 너무 옛날이라 기억 안 난대.”
‘아, 그러십니까.’
이해기의 투자는 언제 실패해 그에게 현실의 쓴맛을 보여줄 것인가.
이보배는 이귀한이 실종된 후 둘이서 살아온 이야기를 술술 풀었다. 이귀한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경청했다.
“회사 다니고 병원 가고, 재미없지? 작은오빠가 짐꾼이랑 채집꾼 일해서 에피소드가 많을 거야. 다음엔 얼버무리지 말고 생각나는 거 풀라고 해봐.”
“알겠어. 기억 안 나도 쥐어짜라고 할게.”
“큰오빠는.”
다른 세계에 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이 혀끝에 걸렸다. 식탐 부리는 걸 보면 실종된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은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이보배가 눈물을 감추려고 눈에 뭐 들어간 척하는데 이귀한이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보배도 누군가가 계단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나 왔어.”
“둘째야, 어서 와.”
“작은오빠 왔어? 저녁은 먹었고?”
이보배가 혹시나 싶어 만들어둔 김치찌개를 가리키자 이해기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기는 옷도 벗지 않고 김치찌개를 부활시키기 위해 양념을 추가했다.
“가서 뭐 했어? 얘기만 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질문이 꽤 자세해서 답변에 시간이 걸렸다.”
“우리 회사 망하는 건 아니지?”
이보배가 걱정스레 묻자 이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략은 성공할 거다. 원래도 날 구출한 게 사계절이었으니까.”
“구출?”
“신라가 나쁜 짓 했었다는 사실만 알아두어라. 그래, 기왕 말한 것이니 이것만 알아둬라. 신라는 나쁘고 반야는 못 믿는다. 사계절은 믿어도 괜찮아.”
이해기가 믿어도 되는 길드와 상종을 해선 안 되는 대형 길드의 이름을 읊었다. 이보배가 아는 길드도 있고 모르는 길드도 있었다. 기준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각성 하이는 정말 무서운 병이었다.
* * *
휴가 셋째 날. 이보배의 몸이 드디어 휴일을 인식했다. 이보배는 12시가 넘어 눈을 번쩍 떴다.
‘다들 아직도 자나.’
12시가 넘었는데 거실이 조용했다. 이보배는 거실로 나갔다. 이번에도 자기들끼리 야식을 해 먹었는지 싱크대가 꽉 차 있었다.
그래도 이번엔 그녀 몫을 남겨두었는지 냉장고에 랩 씌운 대접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보배는 대접을 꺼내 랩을 벗겼다. 떡볶이였다.
‘왜 떡만 있냐.’
쓰레기봉투엔 어묵 포장지와 계란 껍질이 가득한데 왜 떡만 차게 식어 이보배를 기다리는가. 이보배도 어묵과 삶은 계란 먹을 줄 아는데.
이보배는 떡볶이를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를 들은 이해기가 눈을 감고 말했다.
“보배야, 설거지 두면 내가 치운다.”
두 번은 치웠지만 세 번은 없다. 이보배는 설거지를 하지 않고 떡볶이를 먹었다. 조금 불긴 했지만 맛있었다. 어묵과 삶은 계란이 있었으면 더 맛있었을 게 분명하다.
“둘이 더 자든가 밥 먹어. 난 병원 다녀올게.”
어제 이해기가 외출하는 바람에 병원에 가지 못했다. 아흐레나 병원에 들르지 않았다가 다시 이틀을 가지 않았다니. 막내 오빠에게 의식이 있었으면 분명 서운해했을 것이다.
“막내야, 셋째한테 내 안부 전해줘어.”
“알겠어.”
오늘은 거실 배치가 좀 이상하다 했더니, 이해기가 소파를 점령하고 이귀한이 거실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잘 다녀와.”
“…….”
이보배는 소파에 누운 이해기를 보다가 집을 나서 은행부터 들렀다. 그리고 통장 비밀번호를 바꿨다.
그녀는 작은오빠를 믿는다. 정말 믿는다. 원래 비밀번호는 주기적으로 변경하는 거잖아?
투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지만 투자하지 않으면 잃는 것도 없다. 이보배가 각성 하이에 투자할 수 있는 돈은 1억이 끝이었다. 그 이상은 절대 안 된다.
착잡한 마음은 막내 오빠가 입원한 병실과 가까워지자 심화되었다. 이해기가 계속 병원에 가지 않으려는 게 정을 떼려는 의도인가 싶었다.
‘작은오빠가 이제 그만두라고 해도,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보배는 이를 악물고 콧물을 훌쩍였다.
‘욕심내도 된다고 했단 말이야.’
이름도 모르는 운전기사가 해준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보배는 병실로 들어갔다. 막내 오빠 이한생이 눈을 감고 그녀를 기다렸다.
“막내 오빠, 나야. 이틀 만이지? 이번엔 진짜 서운했겠다, 미안.”
이보배는 근육이 소실되어 뼈와 가죽만 남은 몸을 주물렀다.
“내가 휴가 받았다고 얘기했나? 이렇게 제대로 휴가를 받은 건 처음인 거 같아. 누워 있으니까 일어나기 싫더라. 이불이랑 합체해서 계속 누워 있고 싶었어. 이래서 큰오빠가 소파에서 안 일어나나? 막내 오빠는 누워 있는 게 지겨울 테니까 이해하기 어렵겠다.”
이보배는 슬라임 침대를 탕탕 쳤다.
“아니네. 침대 쿠션이 이렇게 좋으니까 안 지겨울 수도 있겠다. 어휴, 비싼 값을 해요.”
헤헷. 이보배는 가볍게 웃고 일부러 즐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막내 오빠가 단순히 의식을 잃은 게 아니라 깊은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꿈속에 이 목소리가 닿아 자신과 가족들을 떠올려 주길 간절히 바랐다.
“비싼 데로 고기 먹으러 갔는데 세상에, 정령석으로 고기를 구워주는 거야. 비싼 고기라 그런지 엄청 맛있어서 또 가고 싶더라. 다 같이 가면 몇 인분을 먹어도 돈 생각 안 들 텐데.”
이보배는 넷이 불판 앞에 앉아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는 풍경을 상상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막내 오빠랑도 가고 싶어.”
병원은 계절을 잊게 한다. 환자에게 최적으로 맞춰진 온도와 습도, 닫힌 유리창을 투과해 들어오는 햇빛이 외부와 병원을 격리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병실이란 계절을 만든다.
오직 하나의 계절만 존재하는 병원이란 세상에서 이한생은 언제쯤 눈을 뜰까? 언제쯤 다른 계절을 맞이하러 병원을 나올까?
가능하긴 할까?
“나 포기하지 않을래.”
10년이든 20년이든, 평생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겠다. 이보배는 결의를 다지고 병실을 나왔다.
* * *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