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in Character’s Little Sister RAW novel - Chapter (98)
이보배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집을 나섰다. 공방까지 고작 걸어서 5분인 짧은 거리인데 오늘따라 길게 느껴졌다.
‘공자님이 없어서 그런가.’
화르세인지와 함께 출근하던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없으니 허전했다. 워낙 시끄러웠던 양반이라 사라진 빈자리가 컸다.
‘막내 오빠가 적응하고 나면 알바 권해볼까.’
이한생이라면 가오 상한다고 거절할지도 모른다. 화르세인지는 바퀴벌레 잡아주는 걸로 꼬셨는데 이한생은 뭘로 꼬셔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던 이보배는 작게 중얼거렸다.
“바퀴벌레 또 안 들어오나.”
* * *
이보배는 공지를 붙이고 터덜터덜 걸었다. 대문을 지나 현관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그보다 먼저 현관문이 열렸다.
“막내 왔어?”
말투는 가벼우나 안에 담긴 애정은 묵직하다.
이보배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이보배보다 머리 하나 높은 곳에 있는 이귀한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 가볍지 않게 호감 가는 미소, 따뜻한 눈빛, 곧게 편 허리와 듬직한 어깨. 갑자기 짊어진 삶의 무게에 짓눌리면서도 절대 티 내지 않으려는 굳은 심지와 웃음을 잃지 않는 쾌활한 성격. 그럼에도 숨길 수 없었던 그늘까지.
“얼른 들어와.”
“큰오빠!”
이보배는 신발도 벗지 않고 뛰어들어 이귀한을 덥석 안았다. 이귀한은 웃으면서 안긴 이보배의 등을 토닥였다.
‘큰오빠다!’
이보배가 꿈에 그리던 큰오빠 이귀한이었다. 부모님 두 분을 합친 것보다 듬직하고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던 큰오빠였다.
뒤통수에 후광을 달고 다니던 때보다 지금 이 모습이 더 눈부셨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서 안 했구나!”
“모든 영광을 날 프로듀스해 준 둘째에게 돌립니다.”
방문을 열고 나온 이해기가 본인의 연기 지도를 자찬하며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이보배는 그런 작은오빠를 흘겨보고는 이귀한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에라이.”
“아야.”
하나도 아프지 않을 테지만 이귀한이 예의상 아픈 척했다. 이보배는 거실에서 사라진 이한생을 찾았다.
“막내 오빤 어디 갔어? 큰오빠가 이상해졌다고 도망갔어?”
이한생 입장에서 갑자기 인자해진 이귀한은 공포 영화처럼 무서울 것이다. 이해기가 본인 방을 가리켰다.
“형만큼은 아니지만 무서운 걸 보고 있단다.”
“어떤 거?”
“균열의 날 기록.”
“너무 자극이 세지 않을까?”
균열의 날을 기록한 영상 자료는 대부분 미성년자 관람 금지다. 정신 연령 18인 이한생이 보기엔 부적절했다.
참상을 고스란히 담은 영상은 전 국민을 넘어 지구촌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업로드가 금지되었으나 하지 말라는 건 꼭 하는 사람이 있는 법.
조금만 검색하면 모자이크 없는 당시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심한 건 아니고 당시 뉴스나 그런 거 모음집이란다. 우리 말을 믿지 않으니 증거라도 보여줘야지.”
맞는 말이긴 하다. 이보배는 조심스럽게 이해기의 방으로 다가갔다. 혼이 쏙 빠진 이한생이 중얼거리며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어, 전부 거짓말이야.”
하지만 컴퓨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한생은 지나간 시간과 그동안 벌어진 일들을 믿지 못하고 끝내 자해했다.
“이건 꿈이다, 이건 꿈이다, 이건 꿈일 거야.”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본인 머리를 때렸다. 퍽퍽 소리가 나는 것이 꽤 아플 텐데 한 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귀한이 방으로 들어가 그런 이한생의 주먹을 감싸고 달랬다.
“셋째야, 많이 힘들지만 넌 이겨낼 수 있어. 넌 강해. 형은 안다. 그 무서운 괴물한테서 막내도 지켰잖아.”
“저리 꺼져! 큰형은 안 이래!”
이한생은 믿음직스러운 큰형을 부정했다. 다음으로 이해기가 나섰다.
“한생아, 많이 놀랐지. 알아, 우리들은 다 이해해.”
“저리 꺼지라고요! 뺀질이는 죽었다 깨나도 안 이런다고!”
이한생의 말대로다. 이해기는 죽었다 깨나도 이러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을 잃고 이어 동생들까지 차례로 잃으니 가능해졌다.
마지막으로 이보배가 나섰다. 그녀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이한생을 붙잡고 조곤조곤 말했다.
“9년이니까 거의 10년이야.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막내 오빠를 위해서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해 줄게.”
영상은 너무 자극적이기 때문에 이보배는 책을 꺼냈다.
화르세인지의 상식 공부를 위해 구매했던 교과서와 검정고시용 수험서가 먼지 구덩이에서 벗어났다.
* * *
설명은 길었다. 길 수밖에 없었다. 이한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교과서를 펼쳐놓고 같이 공부하며 설명했으니까.
“그러니까 누나가, 진짜 보배고.”
“응.”
“이 아저씨가 진짜 작은형이고.”
“왜 나만 아저씬지 모르겠구나.”
마흔아홉 아재가 양심 없는 반응을 보였다.
“큰형은 큰형 맞는데, 다른 세계는 여기랑 시간이 다르게 흘러서 작은형보다 나이 덜 먹었다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복잡하니 일단 그렇게 이해하면 돼.”
이귀한(22세)을 연기 중인 이귀한(연령 미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에 벌어진 비극적인 현대사와 이씨 집안에 벌어진 비극적인 가정사의 일부를 접한 이한생은 차근차근 머릿속을 정리했다.
“엄마랑 아빠, 그렇게 되시고.”
이한생이 부모님을 언급했다.
이보배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이한생은 이 모든 게 사기극이라 생각하면서도 부모님의 죽음은 의심하지 않았다.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싶을 텐데 그러지 못할 만큼 눈에 박히고 머리에 박히고 가슴에 박혀 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한생에겐 그게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바로 어제, 엊그제 벌어진 일이다. 이보배는 10년, 이해기는 30년이 지났음에도 마음 아픈데 이한생에겐 엊그제였다.
“큰형이 각성해서 작은형이랑 보배 살리고 나도 살리고.”
“응. 큰오빠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각성했으니까 남들보다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나 때문에.”
“그게 왜 너 때문이야. 그런 말 하지 마라. 나는.”
이귀한이 아련하게 기억나지 않는 과거를 곱씹었다.
“너희를 짐 덩이라 생각하고 왜 나한테 이런 짐이 지워졌는지 한탄하긴 했을 거야. 그게 인간의 재밌는 점이니까. 그래도 너희가 좋았어. 너희를 지킬 힘이 있어서 행복했어. 너희가 보고 싶어서, 걱정되어서 버텼다. 너희가 있어서 돌아온 거야. 너희가 있어서, 나는 나를 잃지 않았어.”
이귀한이 부드럽게 이보배를 타이르더니 동생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었다. 이보배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해기도 목이 메는지 헛기침했다.
“큰오빠 실종된 뒤엔 이대로 끝인가 했는데, 다행히 내가 각성했어. 덕분에 막내 오빠 숨도 붙여둘 수 있었고. 그러니까 막내 오빠 몸은 내가 일정 지분 갖고 있거든? 다치면 혼날 줄 알아. 특히 이빨 간수 잘 해. 내가 얼마나 신경 썼는데.”
“내가 무능해서 보배가 정말 고생했지. 한생이 네 한 달 병원비가 얼마였는지 아니? 의료 보험이 안 되어서 기본 삼천이었단다. 사계절에서 의료비 지원해 주지 않았으면 위험했을 거야.”
“작은오빠가 무능하다니. 작은오빠 없었으면 내가 못 버텼을 거야. 작은오빠가 집안일 다 하고 돈 보태줘서 저금이라도 조금씩 하고 그랬잖아.”
“둘째랑 막내 장해. 정말 장하다. 셋째도 힘들었을 텐데 버텨줘서 얼마나 대견한지 몰라.”
이귀한의 따뜻한 손길이 재차 동생들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개인주의와 무한 이기주의로 점철되었던 남매가 서로를 위로하고 치켜세우는 모습이 낯설었다.
이한생은 거기 끼지 못하고 설명을 재촉했다.
“그래서 그다음엔?”
“그다음엔 큰오빠 돌아올 때까지 별일 없었어. 난 기계처럼 회사, 집, 병원 순회하고 작은오빠는 짐꾼으로 고생하고.”
“짐꾼은 뭔데.”
“짐꾼도 몰라?”
이한생은 맹세코 인력거꾼, 지게꾼은 알아도 짐꾼은 처음 들었다. 이보배는 작게 혀를 찼다.
“이래서 판타지 소설 안 읽은 사람한텐 설명이 어려워.”
언제부터 판타지 소설이 현대인의 기본 소양이 되었는가.
기가 수십, 수백 번 막혀 주화입마 일보 직전인 이한생에게 이보배는 짐꾼 개념을 간략히 설명했다. 이한생은 짐꾼이 뭔지 이해하자마자 이해기를 노려봤다.
“뒈지려고 작정했어? 각성도 안 했다면서 균열인가 거기를 왜 기어들어 가?”
“각성 확률이 높아진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잘난 각성은 했고? 아, 했댔지.”
“여기부터 다시 할 얘기 많아지니까 원흉인 내가 말해주마.”
이귀한의 귀환, 이한생의 각성. 이 모든 일은 이해기의 회귀에서 비롯되었다.
이해기는 회귀를 결심했던 때를 떠올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고작 1년 전의 일일 뿐인데 그 1년이 너무 행복하고 평화로웠어서일까. 떠올리니 배는 괴로웠다.
“한생아, 이해되지 않아도 일단 들어라. 나는 21년 뒤의 미래에서 회귀했다.”
회귀자의 충격 고백을 들은 이한생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각성 하이란 거지?”
“응, 막내 오빠 학습 능력 좋네. 역시 사람이 절박해지면 지능이 올라가는구나. 작은오빠는 무시하고 계속 내 말을 들어봐.”
이보배는 회귀자를 밀쳤다.
‘짐꾼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회귀 얘길 꺼내? 얘기해 줘도 마지막에 해야지.’
그녀는 이귀한과 이해기를 가리켰다.
“일단 큰오빠랑 작은오빠는 공간 배경이랑 시간 배경이 왔다 갔다 해서 정신없어. 안 움직이고 가만히 있던 내 얘기를 기본으로 생각해.”
이보배는 그리운 큰오빠 상태인 이귀한을 가리켰다.
“그렇게 살다가 1년 전에 실종되었던 큰오빠가 돌아왔어. 그런데 다른 세계에서 고생하는 바람에 상태가 안 좋아. 각성해서 힘은 센데 조절을 못 하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말려줘야 해.”
이귀한이 어딘가 이상한 건 이한생도 지켜보면서 알았기 때문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배는 만족하고 이해기를 가리켰다.
“작은오빠도 1년 전에 각성했어. 그런데 큰오빠가 상태가 안 좋으니까 옆에서 돌봐주느라 각성자 일은 유예 중. 여기까진 알겠지?”
“그래서 네가 아직도 가장이라고?”
“응.”
“아까 갔다 온 공장이 병원비 보태줬다는 직장이고?”
“공장이 아니고 공방. 연금술사 공방. 병원비 보태준 곳에서 퇴사하고 내 가게 차렸어.”
“이 사장님이란다.”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이귀한이 다시 손을 뻗었다.
이보배와 이해기는 얌전히 쓰다듬받았지만 이한생은 슬쩍 피했다.
“지방 방송 그만하고 설명이나 계속해 봐.”
“비슷한 시기에 막내 오빠가 깨어났어. 막내 오빠 각성했다는 얘기는 어제 했지? 각성하면서 식물인간 상태가 나았는데 문제는 기억이 없다는 거야. 기억만 없으면 괜찮은데 상식도 없고 개념도 없었거든. 각성했는데 힘센 무개념이 집에 둘이나 있으니까 작은오빠가 둘을 돌봤던 거야. 나는 병원비 나갈 일 없으니까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공방을 연 거고.”
이한생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맨날 잘난 척하고 뺀질거리던 이해기 새끼라면 아예 도망쳐 혼자 잘 먹고 잘살면 잘살았지 동생 가장 시켜 얹혀살 인간은 아니었다.
왜 막내에게 가장을 시켰나 했더니 나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저 새낀 전투계라 괴물이랑 싸워야 하고 돼지는 생산계라 뭐 만들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 괜히 싸우다 다치거나 죽느니 집에서 나랑 형 돌보고 돼지가 버는 게 낫긴 하네.’
생각하면 할수록 본인이 알고 있는 가족과 달랐다.
이한생은 깊게 한숨 쉬었다.
그가 아는 이보배라면 가족들을 위해 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아는 이해기라면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갔을 것이다.
그가 아는 이귀한이라면 동생들이 울 때 달래주긴커녕 같이 울었을 것이다.
‘애초에 식물인간 된 새끼를 왜 살려두는데? 다들 미쳤나?’
이한생이 아는 형과 동생이라면 식물인간이 된 그를 포기해야 했다.
그게 원래 이씨 남매였다. 막내에 유일한 여자애라 예쁨받는 이보배면 모를까, 늘 찬밥 신세였던 이한생의 명줄을 붙여두다니. 그야말로 꿈같은 얘기였다.
이한생은 찡그린 얼굴을 펴지 않고 턱을 까딱였다.
“계속해.”
“그렇게 1년 살다가 얼마 전에 작은 사고가 있었어. 막내 오빠가 머리를 부딪쳐서 기절한 거야. 깨어났고, 기억이 돌아왔고, 지금 여기.”
이한생이 모르는 9년을 지나 겨우 현재 시점이 되었다.
“하아아아.”
이한생은 땅이 꺼지라 한숨 쉬었다. 영화나 소설 줄거리 같은 일들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단기간에 너무 많은 정보를 주입해서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판타지 소설 좀 읽을걸.’
이해기 새끼가 추천하는 책들을 왜 보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그땐 현명한 선택이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세상이 이 지경 이 꼴 날 것을 누가 알았을까.
이한생 본인도 모르고 형과 동생도 모르고 부모님도 몰랐으며 심지어 각성시켜 준다는 시스템도 몰랐을 것이다.
“혼자 있게 해줘.”
이한생은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생각을 정리할 겸 혼자 있고 싶었다. 손을 휘저어 형과 동생을 내쫓는데 이보배가 나가는 대신 애매한 표정을 짓고 버텼다.
‘아, 여기 뺀질이 방이랬지.’
“여긴 작은 새끼 방이랬나? 내 방은 2층 맞지?”
“설명이 길었는데 아직 남았다.”
“형 말대로 아직 설명할 게 남았어.”
“다 끝난 거 아니었어? 더 남았다고?”
“전부 설명해 주겠다고 했잖아. 피곤하면 나중에 할까?”
이한생은 평소 각종 매체의 등장인물들에게 미리 설명해 주지 않아 나중에 위기나 갈등이 찾아오는 스토리를 혐오했다.
들을 거면 한번에 듣자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말해봐.”
“여기까지가 외부인이 알고 있는 사정이고. 실은 우리 가족만 아는 비밀이 있어.”
부모님은 괴물에게 살해당해, 큰형은 실종되었다가 돌아와, 각성자 몇 없다는데 사남매 모두 각성해. 충분히 이상한 가족인데 거기에 비밀도 있단 얘기에 이한생이 기가 막혀 웃었다.
무협지였으면 기가 하도 막힌 나머지 전신 혈도가 막혀 도로 식물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비밀 뭔데. 뭐, 우리 가족이 정의의 용사라 막 변신해서 괴물이랑 싸우고 그러냐?”
이한생은 비웃었으나 이보배가 진지하게 답했다.
“세계를 구하고 있긴 하거든.”
“네가?”
이한생이 비웃든 말든 이보배는 진지했다. 이보배는 다시 한번 이해기를 가리켰다.
“모든 일은 이 인간이 22, 아니지. 21년 뒤의 미래에서 회귀한 걸로 시작해. 작은오빠가 회귀하면서 큰오빠가 이 세계의 위치를 알게 되어 귀환할 수 있었고, 그런 큰오빠를 상대하기 위해 시스템이 막내 오빠를 각성시켰어.”
이한생은 농담이길 바라고 큰놈과 작은놈을 보았다. 큰놈은 대견하다는 듯 작은놈의 어깨를 두드렸다.
“장하다, 둘째야. 네가 아니었다면 난 아직도 다른 세계를 떠돌고 있었을 거야. 모조리 부수고 죽이고 타락시켜서 얼마 남지 않은 인간성까지 잃었겠지.”
“내가 못나서 회귀한 거잖아. 보배 지키겠다던 약속도 못 지켰고. 난 칭찬받을 자격이 없어.”
“그대로 살 수 있는데도 지키지 못한 동생을 지키기 위해 돌아왔잖아. 그리고 네가 잘났으니 시스템은 네게 기회를 준 거야. 형은 네가 자랑스럽다.”
“형!”
사이좋은 형들을 보니 이한생은 비위 상했다. 헛구역질 나오는 걸 꾹 참고 가능한 이성적으로 판단해 이보배에게 물었다.
“너도 각성 하이냐?”
바로 믿으리라 바라지 않았으나 설마 각성 하이 소릴 들을 줄 몰랐던 이보배는 발끈하여 외쳤다.
“아니거든!”
이보배는 시끄럽게 떽떽거렸다.
이건 이한생이 기억하는 동생과 일치했다. 이한생은 귀를 막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꿈도 존나 이상한 거 꿔서 기분 더러운데 현실은 더 이상하냐.’
제발 꿈이었으면.
이한생은 간절히 하느님과 부처님을 찾았다. 그런 이한생에게 어째서 나는 찾지 않느냐는 듯 시스템이 새 창을 띄웠다.
‘지랄.’
이한생이 바란 답이 아니었다. 이한생은 알림을 무시하고 재차 하느님과 부처님께 기도했다.
* * *
이해기는 어제 말했던 대로 낙지볶음을 만들었다. 낙지볶음에서 그치지 않고 낙지 탕탕이, 해물 낙지전, 낙지 연포탕, 낙지 김치 죽 등등 낙지로 식탁을 채웠다.
이한생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낙지 왕국을 노려봤다. 본래 이씨 집안 밥상은 이보배 위주로 돌아갔다. 게으른 돼지는 육지 동물인 돼지답게 육고기를 좋아하지 바다 고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한생을 위한 메뉴에 심지어 주방장은 이해기란다. 이한생은 아직도 이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귀한이 밥상머리에서 똥 씹은 표정인 동생을 위해 앞접시에 낙지볶음을 덜어서 건넸다.
“입맛 없어도 조금 먹어봐.”
이귀한이 이보배가 아닌 이한생에게 음식을 덜어주는 것도 비현실적이었다. 이한생의 전신에 닭살이 올라왔다.
“시발, 꿈도 개떡 같은 거 꾸더니 현실이 더 악몽이야.”
“악몽 꿨어?”
이한생에게 수면 가루 뿌린 죄가 있는 이보배가 멋쩍어하며 물었다.
이한생은 낙지를 노려보다가 입에 넣고 씹었다. 양념 맛이 기가 막혔다. 세상이 뒤집혀도 낙지는 멸종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운데 이해기 새끼가 요리를 배웠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요리사 하다가 회귀한 거 아니야?’
웃기지도 않는 회귀 썰을 믿어줄 거면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수면 가루 써서 미안해. 이게 또 몰랐으면 안 썼는데 배우니까 쓰고 싶어져서.”
“되었다. 돼지가 보신하게 족발 놀리는 재주를 배웠으니 못 쓰다 당하는 것보단 낫느니.”
눈치 보며 사과하던 이보배의 눈이 커졌다.
“공자님?”
“문자도 모르는 게 밥상에서 공자님은 왜 찾아.”
이한생은 본인이 말한 말투가 이상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는지 태연했다. 화르세인지도 양아치 말투나 기억을 떠올릴 때 저랬다.
‘역시 양아치 안에 망나니 있어.’
이보배는 제대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망나니의 단편을 본 게 기뻐 웃었다. 양아치가 본능적으로 지적했다.
“웃지 마라. 콧구멍 평수 넓어져서 돼지 같다.”
“우리 막내 예쁜데 왜 그래. 예쁜 꽃돼지잖아.”
이에 이귀한이 이보배를 감싸고.
“우리 보배가 나를 닮아 인물이 좋지.”
이해기가 동생을 감싸는 척 본인을 치켜세웠다.
거의 10년이 지났어도 변함없는 이씨 집안의 식탁에 이한생이 기가 막혀 투덜거렸다.
“형들은 진짜. 아직도 보배만 예뻐하기냐?”
투덜거리는 이한생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진심으로 분하고 억울해서가 아니다. 하나라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것이 있어 기쁘고 반가워서 나온 눈물이었다.
* * *
늦은 점심을 먹은 이한생은 잠시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고 방에 들어왔다.
이한생은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방은 작고 가구도 몇 없었다. 책상, 옷장, 그리고 방 크기와 맞지 않는 침대가 전부였다.
그의 방이라고 하지만 눈에 익은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옷장을 열어보니 낯선 옷이 가득했다. 이한생 눈에 차긴 했으나 완벽하진 않았다.
“이 새끼는 누가 공자님 아니랄까 봐 정장만 처입었나.”
이한생은 스포츠 메이커를 좋아하는데 화르세인지는 정장과 세미 정장만 입었다.
편한 옷이 있긴 있는데 모두 인벤토리에 수납되어 있어 이한생은 꺼낼 수 없었다. 먼지 쌓인 책상엔 공책이 몇 권 있었다. 건드린 흔적이 있어 펼쳐보니 성신의 교리가 적혀 있었다.
“이게 성신의 교리인 걸 내가 어떻게 알지?”
이한생은 그 사실이 섬뜩해서 공책을 책상에 던지려다가.
“아무리 그래도 교리 적힌 공책인데 던지는 건 좀 그래.”
지레 겁먹고 얌전히 책상에 올려두었다.
이한생은 좁은 방을 빙빙 돌다 발을 몇 번 구르고는 침대에 누웠다. 침대 쿠션이 예술이라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손에 잡히는 햄스터 인형을 들자 그 옆에 있는 곰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겉감이 보들보들하고 솜도 푹신한 햄스터 인형과 다르게 곰 인형은 참 구질구질했다. 원래도 싸구려 인형이었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더 구려졌다.
털은 뻣뻣하면서 거칠고 솜은 뭉쳐 단단했다. 코와 눈은 빛이 바랬고 입을 그린 부분은 닳아 없었다.
이한생은 떨리는 손으로 곰 인형을 잡아 품에 안았다. 겉모습은 구질구질하지만 좋은 냄새가 났다.
“시발. 짐 챙길 시간 없었다면서 이딴 거나 챙기고 지랄인데. 꼴통 새끼가.”
말은 거칠었으나 이한생은 곰 인형을 던지지 않고 품에 안았다.
그제야 약간 안심이 되어 내내 무시하고 있던 알림을 다시 볼 용기가 생겼다.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으로 전환하시오]-확인 버튼을 누르거나 강하게 원하면 바로 전환됩니다.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으로 전환하시오, 라.”
제발 눌러달라는 듯, 실수로라도 누르길 바라는 것처럼 크고 반짝이고 눈부시고 무시할 수 없는 확인 버튼이 퀘스트창 아래에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내가 미쳤냐, 누르게.”
이한생의 말에 항의하듯 버튼이 번쩍였다.
이한생은 이보배에게 배운 대로 퀘스트창을 없앴다. 버튼은 끈질기게 버티다가 이한생이 없앤다는 생각을 열 번 넘게 하고 나서야 사라졌다.
이한생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꿈속의 기억과 이상한 현실을 비교했다.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은 성신의 사랑을 받았다. 그에 반해 이 세계의 신은 이한생을 원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 저리 요란스럽게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이 되라며 퀘스트를 내리는 거겠지.
“시발. 내 몸을 왜 그 새끼가 써. 지랄.”
화르세인지가 생판 남은 아니다.
뺀질이 이해기 왈,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은 이한생의 전생일 가능성이 높단다. 이보배도 동의했다.
이귀한은 한술 더 떠 둘의 영혼이 같단다. 큰형이 언제부터 귀신을 볼 수 있는지 차치하고, 이한생의 생각은 ‘뭐 어쩌라고?’였다.
화르세인지가 그의 전생이든 영혼이 같든 간에 둘은 다른 사람이다. 이름부터 다르다. 이한생은 멋있는 이한생이고 화르세인지는 이름부터 개구렸다.
“그 새끼가 내 전생이 맞긴 한 거 같아도 이건 아니지.”
이상한 꿈과 묘하게 친숙한 화르세인지의 존재가 전생이라는 개똥 같은 말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이한생도 무의식중에 전생이 맞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전생이라면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은 죽었다는 이야기다. 환생해서 이한생이 되었으니 화르세인지는 그렇게 끝이다. 복잡한 게 싫은 이한생은 단순하게 정리했다.
“열여덟 살 때 창고에서 얼어 뒤졌나 보지.”
꿈은 깨고 나면 금방 잊혀지지만 이름을 부르던 중후한 목소리는 뇌리에 남았다.
이한생이 사고 치고 반항할 때마다 엄하게 꾸짖으며 이름을 부르던 부모님이 떠올랐다.
“이한생, 이 녀석!”
다시는 부모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볼 수도 없다. 이한생은 곰 인형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울었다.
* * *
믿음직스럽고 멋진 이귀한을 연기 중인 이귀한이 눈을 떴다. 평소엔 심연 같은 눈동자가 연기 중이라 그런지 언뜻 총명하게 빛났다.
“한생이 운다.”
“난 안 들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