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other of the Soon-to-be Crazy 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5
곧 미치는 남주의 엄마입니다 15화 –
* * *
“오오. 이 소파 좀 보세요. 실리아 님. 시아스터 공작가의 소파라서 그런지 아주 푹신하군요! 저희 저택의 소파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허망한 얼굴로 터덜터덜 돌아온 날 반긴 건 다 마신 붕어즙을 테이블 위에 산처럼 쌓은 채, 눈에서 존경과 감격이라는 빛을 와르르 쏟고 있는 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공저에 오자마자 다자르를 만나느라 칼과는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나는 그의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중얼 물었다.
“왜. 그렇게 좋아? 할아범.”
내 모습은 복싱에서 패배한 선수가 흰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헐떡대고 있는 모양새였으나, 감격에 젖은 칼은 내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는 춤이라도 출 기세로 몸을 들썩였다.
“그야, 당연하지요. 무려 시아스터 아닙니까. 아아, 실리아 님의 능력이 이렇게 인정받는 날이 오는군요!”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칼이 살짝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저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답니다. 후후. 악시온 님이 오신 후 연이어 좋은 일이 찾아오네요. 악시온 님은 복덩이가 아닐까요?”
재활용이 안 되는 쓰레기들에 대한 충격과 공포로 얼이 빠져 있던 나였지만.
칼 할아범이 이렇게 좋아하니 조금 그 마음이 진정되는 것도 같았다.
그가 포근하게 웃었다. 눈가의 주름이 보기 좋게 접혔다.
“고민이시던 돈 문제도 해결하고, 악시온 님의 교육 문제도 해결하고 말이죠!”
“…….”
“이 할아범도 실리아 님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며 두 주먹을 꼬옥 쥐고 파이팅 하는 포즈를 취하는 칼의 뒤편, 산처럼 쌓인 붕어즙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슬쩍 눈을 내리며 물었다.
“그래서 저거 한 번에 다 먹은 거야?”
“허허. 젊은 실리아 님을 보필하려면 늙은 몸에 맞는 연료를 공급해야지요. 찔끔찔끔한 양으로는 안 됩니다.”
“…….”
나는 내 침대 위에 포옥 누워 잠들어 있는 악시온을 한 번, 다정하게 웃고 있는 칼을 한 번 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그래. 지금 난 가장이나 마찬가지지.
이 두 사람을 책임질 사람은 나야.
‘그깟 쓰레기들. 발로 잘 밟아서 재활용 가능하게 만들면 되지, 뭐.’
그런데 그쪽에서 바쁘다면서 거절을 했잖아? 망할 놈들이.
그걸 어떻게 꼬시지?
한창 고민하고 있던 그때 칼이 소녀처럼 두 손을 마주 잡고 소곤댔다.
“호, 혹시 여기서 흑매 기사단도 보셨습니까? 날뛰어라 흑매! 말입니다.”
그 쓰레기들이야 아주 잘 보았지.
본의 아니게 바닥을 구르며 날뛰는 것도 보고.
“어, 으응. 어, 어쩌다 보니?”
“아니, 세상에! 설마 기사단에 들어가셨던 겁니까?”
“응…….”
칼이 두 손을 허리 위에 올리고 질타하는 얼굴을 했다.
“빈손으로 가셨던 건 아니겠지요?”
“맞는데…….”
“선물이라도 들고 가시지 그러셨어요.”
선물? 선물은 개뿔.
“그래도 나름 이곳에서 꽤 시간을 보낼 것 아닙니까. 이사를 온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웃에게 정중히 선물과 함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칼이 잔소리를 하는 게 저 멀리서 들리는 듯 아른아른 들렸다.
이사. 선물. 이웃.
이 세 단어를 들으니 떠오른 게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사를 하면 떡을 돌리지.
‘♥3040 먹고 마시는 미식 모임♥’
태피스트리의 글귀가 동시에 머릿속을 스쳐 갔다.
‘오호?’
먹을 걸로 꼬셔 볼까?
“칼. 에반로아르 자작가 창고에서 가져온 벼 어디 있지?”
“예? 갑자기 그건 왜 찾으십니까? 저희가 출발하기 전에 미리 마차로 보냈었지요. 지금쯤 이쪽 별관 창고에 쌓여 있을 겁니다.”
갑작스레 벼를 찾자, 칼의 얼굴이 불안으로 물들었다.
그의 눈이 잠시 흐릿해졌다.
며칠 전을 회상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의 이마에 이내 식은땀이 맺혔다. 그가 조금 어설프게 웃으면서 날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아니죠? 아니라고 해 주세요. 실리아 님. 또 그 개고생 하는 거, 그런 거 아닐 거예요. 그럴 리 없어!
나는 그의 작은 희망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가자. 일하러. 붕어즙 먹은 값을 해야지.”
* * *
해가 지고 달이 뜰 때까지 우리는 일했다.
칼의 입에서 악덕 고용주라는 말이 나올 즈음, 저번에 그와 함께 했던 탈곡과 도정 작업이 끝났다.
지난번보다 훨씬 많은 쌀알을 만들었다.
이번처럼 갑자기 또 필요해질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작업이 모두 끝나자 칼은 만세를 불렀다.
저번에는 일이 끝나자마자 바닥에 쓰러졌던 것 같은데, 역시 붕어즙을 산더미처럼 먹어서인지 끝나고서도 팔팔했다.
“다녀올게.”
“우우, 제가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 그럼. 내가 애도 아니고. 방앗간 잠깐 다녀오는 건데 뭘.”
칼은 그래도 무리를 하긴 했던 건지, 다음 날 근육통에 시달렸다.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대는 그를 더 부려 먹었다가는 내 양심이 칼을 들고 할복을 할 기세라서, 방앗간에는 직접 다녀오기로 했다.
“그래도 이런 일은 시종이…….”
“에이. 됐어.”
시아스터 공저의 시종에게 부탁하자는 뜻인 것 같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 미친 사돈 녀석에게 빚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본능적인 경고였다.
“쉬고 있어, 칼!”
난 시아스터 공저를 휙 나섰다.
내가 방앗간에 가는 것은 떡을 만들 쌀가루를 공수하기 위해서였다.
어제 반나절 넘게 물에 불린 쌀을 한가득 마차에 실었다.
아무래도 가루를 만들기 위한 기계가 이곳에 있을 리는 없으니, 방앗간으로 가야 했다.
산길을 쭉 내려와 시아스터 공작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도시로 들어섰다.
당연하게도, 공작령에 속한 곳일 것이다.
마부에게 부탁한 덕에 마차는 멈춤 없이 방앗간으로 향했다.
방앗간은 도시 외곽에 있었다.
“이걸 가루로 만들려고 하는데.”
방앗간에서 한창 작업 중이던 고용인들이 내가 건넨 쌀을 보고 눈을 끔벅였다.
“이게 뭐시여?”
“그러게 말이여?”
“미아르는 아닌 것 같은디.”
그들은 차마 귀족으로 보이는 내게 물을 수는 없었는지, 저들끼리 수군대다 이내 답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기계를 돌렸다.
본래 미아르의 가루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기계가 오늘은 쌀을 품었다.
수월하게 쌀가루를 받고 값을 치른 뒤, 방앗간을 나서던 때였다.
“어?”
막 마차에 오르려고 하는데, 뒤에서 이상한 물음표가 날아왔다.
난 심드렁하게 마차에 발을 올렸다.
실리아의 인맥은 좁디좁았기에, 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날 보고 아는 척하는 일은 벌어질 리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개미 몸에 날개가 생겨 까르륵 날아다닐 정도의 낮은 가능성이었다.
“어어?”
“…….”
“어어어어?”
하지만 거의 귀에 대고 제 존재감을 피력하고 있는 저 반응은 개미도 어느 날 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아니, 생각해 보니 개미는 원래 날 수 있었다. 날 수 있는 개미가 있었지. 맞아.
나는 깊은 깨달음을 얻고 휙 몸을 돌렸다.
“실리아?”
“?”
어어어 공격을 일삼던 사람은 서글서글하게 생긴 웬 남정네였다.
옷차림이 딱 봐도 귀족으로 보이는 그는 입을 쩍 벌리고 검지로 날 가리키고 있었다.
이 무슨 귀족적이지 못한 무례람.
나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한껏 도도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차 계단에 올라간 상태라 키가 엇비슷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왜 여기에 있어? 자작령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이렇게 멀리 나오다니. 놀라운 일인걸?”
날 제법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를 천천히 살폈다.
지난날 흑매를 만나고 나서 앞으로 더 나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는 기대를 반쯤 버리고 있었기에, 그를 살피는 내 얼굴은 갓 뽑은 감자처럼 못생기게 변했다.
흐음. 누구더라.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왜, 왜 그렇게 봐?”
“억.”
“실리아?”
나는 이 몸의 기억을 샅샅이 뒤지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남자는!
실리아의 소꿉친구이자,
아카데미 동창이자,
첫사랑이자,
그녀가 짝사랑했던 남자였다.
허어억!
“실리아! 잠깐! 어디 가!”
“사, 사람 잘못 보셨어요.”
나는 큰 충격을 받은 기계처럼 몸을 바르르 떨며 급하게 마차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밖에서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걸 혼이 빠진 얼굴로 무시하고 문을 꼭꼭 잠갔다.
“출바알!”
“실리아아아아!”
히힝! 말이 울고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나도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런 미친.”
이윽고 내 입에서 터져 나온 건 이 몸이 짝사랑하던 상대를 만났다는 슬픔이나 기쁨 따위의 비명이 아닌,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한껏 담긴 욕지거리였다.
저 남자가 누군지 떠올리자마자, 기억 속에서 저 남자에게 과거 실리아가 한 미친 짓들이 떠오르고 만 것이다.
‘야. 오면서 주웠다. 처먹어.’
‘읍읍! ㅅ, 실리아! 나 당근 알레르기……! 사, 살려 줫! 우웨엑.’
‘닥치고 먹어.’
‘훌쩍. 실리아,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야? 흑흑.’
‘그래, 그렇게 울어. 더 울어 봐. 응? 크크.’
우는 얼굴을 보려고 일부러 못 먹는 걸 먹이고,
만년 2등인 그를 능멸하고,
매일 빵셔틀을 시켰다.
나는 이 파렴치한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며 수치심에 한껏 휩싸였다.
도대체 이 몸은 왜 정상적인 게 하나도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