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40
제2화 엘프 그리고 마족
엘프들의 집들은 나무 잎과 가지로 만들어진, 어찌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하늘까지 치솟은 활엽수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인위적으로 만든 집이 아닌, 활엽수에서 뻗어 나온 한 가지로 봐도 무방할 정도 였다.
엘프의 숲은 아름다웠다. 이런 엘프의 숲을 다스리는 이는 한 명의 여왕과 여섯 명의 장로였다. 장로 모두 400살이 넘은 고령으로 얼굴엔 잔주름이 가득했다. 비록 허리는 구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비단결 같은 머리사이로 보이는 새치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엘프 장로들은 모두 여왕의 집 앞에 모여 있었다. 여왕의 집이라고 다른 엘프들의 집과 다를 바 없었다. 다른 점이라곤 집 바로 옆에 자라 있는 큰 활엽수. ‘요정의 나무’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걱정이 어린 표정으로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로들은 요정의 나무에 모여 눈을 감았다. 그들의 얼굴에서 한없이 깊은 걱정이 어른 거렸다.
“장로님!”
청년 엘프가 뛰어왔다.
“무슨 일이냐. 엔플러스.”
한 장로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인간국의 왕이라는 자가 와 난동을 부리려 하고 있습니다.”
헛!
“이 기운은…….”
장로들은 눈을 번쩍 떴다.
거대한 기운이 결계 부근에서 커져가고 있었다. 그 기운은 엘프의 숲을 모두 덮칠 만큼 위력이 서려 있다. 장로 힐은 기운의 정체에 몸을 떨었다.
대하 같은 기운이 벌써 자신들을 압박 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이런 기운이 있을 수 없다. 그 마족은 이런 광대한 기운을 가질 수 없거늘…… 마왕 또한 강림할 수 없거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엔플러스. 마을에 대기 중인 형제들을 모아 봉인물을 지켜라. 기필코 봉인물을 사수 해야 한다. 침입자는 우리 장로들이 맡겠다.”
침입자의 기운은 얼마 전 침입하였던 마족 아르메이스과는 천지 차이다. 이정도의 기운은 마왕 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봉인물이 온전한 이상 마왕은 절대 강림할 수 없다.
마족 아르메이스와의 결전 때문에 장로들은 힘을 잃은 상태였다.
장로들은 죽음을 각오한 눈빛을 띄었다.
“예!”
청년 엘프 엔플러스가 억지로 힘을 냈다. 그는 앞으로 내달렸다.
엔플러스가 사라졌다.
장로들이 여왕의 집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여왕이시여. 침입자를 막고 오겠나이다.”
“광대한 기운을 가졌지만 사심은 느껴지지 않아요. 어떻게 된 일이죠?”
천상의 하모니.
아름다운 선율 같은 목소리가 여왕의 집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충분히 위압적인 존재입니다. 저희 여섯 장로가 기필코 침입자를 저지 하겠나이다.”
정로가 말했다.
“……그리고 절박한 심정이 느껴져요. 그는 아마도 나쁜 이가 아닐 거예요.”
“여왕이시여. 그것을 알아보러 가겠나이다.”
“숲에 붉은 물이 흐르는 것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알겠나이다.”
여왕의 집에서 불쑥 여성 엘프가 뛰어나왔다. 앙증맞게 솟은 봉긋한 가슴이 옷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제 막 성인식을 마쳤는지, 얼굴은 아직도 앳된 모습이었다.
숙녀의 성숙함과, 어린이의 발랄함이 조화된 여성 엘프의 얼굴은 햇빛에 환하게 비춰졌다. 화사한 꽃보다 아름다운 그녀가 장로들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조그마한 입술이 달싹거리고, 코는 살포시 찡긋해 귀염성 있게 보였다.
“여왕 폐하는 좋은 말만 한다니까. 침입자는 반드시 처단해야 해요. 그렇죠?”
여성 엘프는 레이피어를 뽑아 들었다.
은백색의 레이피어는 침입자가 있는 쪽으로 겨눠져 번쩍 거렸다.
“그……그렇습니다. 엘리나님.”
장로 힐은 더듬거렸다.
“그것 봐요. 여왕 폐하. 제가 가서 당장에 그 침입자를 무찌르고 말겠어요. 여왕 폐하는 그곳에서 지켜보세요.”
엘리나가 말했다.
“엘리나. 나의 딸아…… 어서 집으로 들어오너라.”
“싫어요.”
엘리나는 혀를 불쑥 내밀었다.
그러고선 침입자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장로 힐이 당황하여 엘리나의 뒤를 쫓고, 남은 장로들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엘리나님은 저희들이 지키겠나이다.”
“엘리나는 아직 철이 없는 아이에요. 비록 침입자에게서 사심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위험하답니다. 철없는 아이를 잘 부탁해요. 그리고 붉은 물이 흐리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주시리라 믿겠어요.”
“예.”
장로들은 그제야 장로 힐과 엘리나는 사라진 쪽으로 달려갔다. 전력을 다했다.
“햐…….”
엘리나는 멈춰 섰다.
많은 엘프 청년들이 단 한 사람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화살은 시위를 떠나 그 사람에게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조금씩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은 엘프 청년들이었다. 엘리나는 온몸을 죄어 오는 기운을 억지로 부정하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헉.
순간 엘리나는 숨이 멈추는 듯했다. 엘프 청년들에게 포위된 침입자 인간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 손에 든 장검을 늘어트린 채 걸어오는 그는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용미. 뚜렷한 이목구비. 강인한 눈. 분명 외형은 강했다.
그러나 엘리나에게 느껴지는 것은 강함이 아니다,
절박함과 부끄러움이다.
침입자는 걸어가고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었고, 억지로 기운을 일으켜 주변을 위협하고 있었다. 마치 하기 싫은 일을 하듯.
“엘리나님. 돌아가십시오. 이곳은 위험합니다.”
“싫어욧!”
엘프 청년 리프는 뒤이어 속속 도착하는 장로들을 보고선 고개를 숙였다.
“큼…….”
장로들은 신음을 삼켰다.
마족 아르메이스와의 결전으로 힘이 소비 되지 않았어도, 저 침입자를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형제들이 힘을 합친다 하더라도 결과는 뻔하다.
저 침입자를 막을 수 없다! 정녕 저자는 인간이 맞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말하겠소. 나는 이렇게 무력을 쓰기 싫소…… 부디 그대들의 왕을 만나게 해 주시오.”
주첨기가 말했다.
엘리나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절박했다. 엘리나가 쥐고 있던 레이피어를 검집에 힘없이 꽂아 넣었다. 엘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주첨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를 안아주고, 평안함을 주고 싶었다.
장로 힐이 엘리나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정체를 밝히시오! 당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니오. 어째서 여왕 폐하를 만나려 하는 것이오!”
“나는 신명국의 황제 주첨기라 하오. 그대들의 왕에게 간절히 부탁할게 있어 찾아온 것이외다…….”
“거짓말!”
청년 엘프 리프가 외쳤다.
“당신은 인간이 아닙니다.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접근은 불허합니다.”
리프는 시위를 끝까지 당겼다.
화살촉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불신을 어떻게 신뢰로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거짓을 해본 적이 없소.”
“거짓말입니다.”
“믿고 안믿고는 그대의 마음이오. 하지만 이리 부탁하리다. 내 검을 쓰지 않게 해 주시오.”
청년 엘프들은 겁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어쩌면 드래곤과 마족보다 더 사악하고 강한 존재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경계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돌아가시오! 안으로 들어올 수 없소.”
장로 힐이 외쳤다.
“그대들에게 내가 죄를 범하게 되니…….”
주첨기가 앞으로 걸었다.
청년 엘프들은 시위를 당긴 손의 힘을 풀지 않은 채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부끄럽소.”
주첨기의 눈이 날카롭게 떠졌다. 주첨기의 신형이 흔들거리면서 사라지려 할 때였다.
엘리나가 엘프들의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와 양팔을 크게 펼쳤다.
“잠깐만요!”
거친 바람이 엘리나의 안면을 스쳤다. 엘리나의 녹색 머리칼이 심하게 나부꼈다. 사라졌던 주첨기의 모습이 장로 힐의 눈앞에서 나타났다.
장로 힐은 자신을 노려보는 사나운 눈빛이 보였다. 그것은 온몸을 굳게 만들었다. 다른 장로들이 서둘러 장로 힐을 뒤로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오?”
주첨기가 엘리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리나는 갑자기 주첨기에게 뛰어왔다. 주첨기는 그런 엘리나을 저지 하지 않았다.
“엘리나님!”
엘프들이 놀라 외쳤다.
엘리나는 주첨기의 가슴을 향해 뛰어들었다. 주첨기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안은 여자 엘프를 보았다. 엘리나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주첨기를 더욱 강하게 안았다.
“절박할수록…… 자신이 부끄러운 만큼…… 저를…… 안아주세요.”
여성 엘프는 슬픈 눈으로 말했다.
엘리나의 머릿결에서 상큼한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첨기는 멍하니 엘리나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
주첨기가 엘리나를 뒤로 밀었다.
엘리나가 주첨기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엘리나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주첨기는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스승과 수하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황제로써 만인의 앞에 통곡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여인은 자신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려주고 있었다.
“으아아앙”
엘리나는 주첨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주첨기는 당황하여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를 몰랐다.
“엘리나님!”
당황한 건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장로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이분은”
엘리나가 눈물을 훔치며 장로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울고 있는 저분을 보실 수 없으신 건가요…….”
엘프들의 시선이 주첨기에게 쏠렸다.
주첨기는 험험 하고 헛기침을 하였다. 괜스레 엘프들의 시선을 피했다.
“이리오세요. 제가 여왕폐하께 모셔다 드릴게요.”
엘리나는 눈 끝에 맺힌 마지막 눈물을 훔쳐내고선 미소 지었다. 엘리나가 주첨기의 손을 잡아끌었다. 주첨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사그라 들었다.
주첨기는 엘리나에게 끌려갔고, 엘프들은 자신도 모르게 길을 터주었다.
“엘리나님. 지금 무슨…… 여왕 폐하께 데리고 가서는 안 됩니다!”
“제 맘이에요.”
엘리나는 혀를 반쯤 내밀었다.
“허…….”
주첨기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뭐라 말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주첨기가 엘리나를 곁눈으로 보았다.
엘리나는 분명 엘프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미녀였다.
활엽수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때마다 향긋한 향이 불었다. 주첨기의 성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아름답다……
주첨기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간간히 엘리나는 주첨기를 돌아봤다. 그때 엘리나의 두 뺨은 붉어져 있었다.
엘프들이 주첨기에게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뒤따라갔다. 힐과 다른 장로들은 아직까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없었다. 저자가 갑자기 돌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주첨기는 엘리나가 눈이 마주칠 때 시선을 피했다.
엘리나는 아름다운 미녀고, 주첨기는 건장한 청년이다.
주첨기도 한낱 여인의 눈빛을 피하는 자신이 익숙하지 않았다.
“바로 여기예요.”
엘리나가 여왕의 집을 가리켰다.
큰 황성이 아니다.
영주의 저택만한 곳도 아니다. 주변의 다른 가옥들과 다를 바 없는 지극히 평범한 곳이었다. 주첨기는 그곳에서 맑은 기운을 느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왕의 집에서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맑고 경쾌한 목소리는 메아리 울리듯 주위로 퍼져 나갔다.
“모두 이분에게 경계를 푸세요.”
여왕이 말했다.
엘프들은 그제야 시위를 천천히 풀었다. 활을 등에 매고 화살도 화살 통에 넣었다. 장로 들이 문 옆에 가로로 늘어서 주첨기의 앞을 막았다.
“괜찮습니다.”
여왕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비켜주세요. 장로님들.”
“하지만 저자는…….”
“여왕 폐하께서도 말하시고, 저도 말하잖아요. 이분은 나쁜 사람이 아녜요.”
엘리나가 주첨기의 손을 잡아끌어 계단을 올랐다. 주첨기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 오세요”
“그럼 무례를 범하겠소.”
집안은 밖에서 보는 것만큼 작지 않았다. 나무줄기로 이어 만들어진 의자에 엘프의 여왕은 앉아 있었다. 청초하게 피어 있는 물망초처럼 가지런히 앉아 있는 여왕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의자 주위에는 나비 같은 여러 요정들이 앉아 조용한 노래 ― 알아듣지 못하지만 듣기에 부드러운 ―를 불렀다.
“나는 신명국의 황제 주첨기라 하오. 엘프들의 왕을 만나기 위해 무례를 범한 점 이렇게 사과하리다.”
주첨기는 고개를 숙였다.
엘리나는 빙그레 웃으며 여왕의 의자에 기대앉았다. 여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절박한 일이 무엇이나요?”
“발록의 채찍에 부상을 입은 수하들이 화마에 시달리고 있소이다.”
“발록……!”
여왕의 눈이 커졌다.
발록의 일은 잘 알고 있다. 발록이 킹스켈레톤과 마족 아르메이스와 함께 강림하여 대륙을 피로 물들이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들은 바 있었다.
이는 곧 인간세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대륙에 터전을 잡고 있는 엘프들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엘프들은 마족 아르메이스의 침입을 막는 것으로도 벅찼다.
“지금 대륙은 어떤 상황이나요?”
엘리나가 끼어들었다.
“발록은 내가 죽였소. 수많은 망자들 또한 킹스켈레톤이 사라짐과 동시에 쓰러졌소. 그리고 남은 것은…… 부상 입은 내 수하들이오.”
“에? 정말요?”
엘리나가 말했다.
“그……그렇군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발록은 인간은커녕 드래곤들이 힘을 합쳐야 겨우 이길 수 있는 존재다. 그런 발록을 눈앞의 인간이 죽였다니.
그러나 여왕은 주첨기를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진솔했고, 눈빛에도 거짓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절박해 보였다.
반면에.
“재미있으신 분이시네요.”
엘리나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엘프들에겐 치유의 샘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소. 치유의 샘이라면 발록의 화마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소. 치유의 샘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가고 싶소.”
“엣?”
엘리나가 놀란 토끼눈을 떴다. 주첨기가 그녀를 바라보자 엘리나의 두 뺨이 붉어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여왕은 살포시 웃음소리를 흘렸다.
“가지고 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네요.”
“어떠한 조건이든 다 수용하겠소. 목숨을 원한다면, 보석을 원한다면, 힘을 원한다면. 뭐든지 말이오.”
“죄송해요.”
“샘이야 떠도 다시 솟아나오는 것이 아니오.”
“평범한 샘은 그렇지만…… 치유의 샘은 그렇지 않답니다.”
여왕은 여전히 엘리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게도 엘리나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난…… 어떡해야 하지.’
엘리나가 생각했다.
주첨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주첨기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꼭 필요하외다. 나의 스승님과 수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부탁하오.”
“어쩔 수 없군요. 주첨기님이라 하셨죠? 주첨기님. 그럼 치유의 샘에게 물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답니다.”
주첨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샘은 주첨기님의 요청에 대답을 해 줄 것입니다. 주첨기님을 따라갈지…… 아닐지…….”
“감사하오. 샘은 어디에 있소?”
주첨기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문밖으로 고개를 훽 돌렸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눈썹이 꿈틀 거렸다. 이 기운은 익숙하지만 좋은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주첨기의 몸에서 갑자기 살기가 뻗치자 엘리나와 여왕은 긴장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여왕폐하!”
장로 엘프가 문밖에서 다급하게 외쳤다.
“무슨 일이나요.”
“마족 아르메이스가 쳐들어왔습니다.”
“옛?”
엘리나가 벌떡 일어섰다. 엘프들에겐 발록이 사라졌다는 말보단, 마족 아르메이스가 쳐들어온 것이 더욱 놀랄 일이었다. 그것이 현실적이기 때문에……
“마족?”
주첨기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족 아르메이스는 얼마 전부터인가 나타나, 마계의 문을 봉인한 봉인물을 노렸다. 틈틈이 기회를 보고 단신으로 쳐들어와 장로들과 청년 엘프들의 힘을 쏙 빼놓고는 위급할 만 하면 도망쳤다.
그 결과 장로들과 청년 엘프들에겐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여왕 폐하. 아르메이스는 제가 해치우고 올게요!”
엘리나는 레이피어를 뽑아 들었다.
“그럴 필요 없소.”
주첨기의 강인한 목소리가 엘프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주첨기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저……저기.”
엘리나가 주첨기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례를 예로 받아준 보답이라 생각하시오.”
주첨기는 주먹을 쥐었다.
“아…….”
엘리나가 넋 잃고 주첨기를 보았다.
장로 엘프 힐과 몇몇의 청년 엘프들이 피를 흘린 채, 걸어 나오는 주첨기를 발견했다.
주첨기는 말없이 엘프들을 지나쳤다.
장로 엘프 힐이 주첨기에게 말을 걸려 했을 때, 주첨기는 마족 아르메이스의 기운이 느껴지는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팟!
엘프의 안력으로도 주첨기의 이동을 확인한 자가 없었다.
“굉장하군…….”
엘프들은 부랴부랴 봉인물이 있는 결전지로 내달렸다.
“후후후.”
아르메이스는 기분이 좋았다.
두 번째 작업이 신명국의 왕 주첨기에게 저지당했을 때는 한동안 기분이 최악이었다.
한낮 인간에 상위 마족인 자신이 당했다는 자괴감은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검은 군주와 킹스켈레톤이 신명국의 왕에게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어제부터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더군다나 기분이 좋아질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엘프 장로들이 더 이상 자신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르메이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엘프들을 내려다보았다. 엘프들의 화살은 위협적이지만, 그것은 예전의 일이다.
“이렇게…….”
아르메이스가 실드를 펼쳤다.
검은 마기로 이루어진 실드는 화살을 튕겨 냈다. 실드에는 조금의 충격도 가해지지 않았다. 엘프들의 힘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것을 뜻했다.
“그만 포기들 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잖아. 너희들이 그만 포기하고 여왕의 곁에서 노래나 부르고 있다면 얼마나 좋아. 나는 아름다운 당신들을 죽이지 않아서 좋고, 당신들도 노래를 부르고 생명을 유지해서 좋고.”
“헛소리 집어치워라! 마족!”
엔플러스가 외쳤다. 그는 끝가지 잡아당긴 시위를 놓았다. 화살에는 엔플러스의 마나가 씌워져 있었다. 마나가 담긴 화살은 질풍처럼 날아갔다.
“히힛.”
아르메이스는 장난이라도 하듯 실실 웃었다. 실드를 거둬들였다. 아르메이스는 화살을 노려보았다. 화살은 아르메이스의 미간까지 당도 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턴(Turn)!”
아르메이스가 외쳤다.
화살은 아르메이스의 미간에서 멈춰 서더니 엔플러스 쪽으로 방향을 비틀었다.
슈욱!
화살이 엔플러스에게 날아갔다. 가속도가 붙은 화살은 엔플러스의 나무방패를 꿰뚫고 지나갔다. 엔플러스의 심장에 정확히 박혔다.
“엔플러스!”
장로들이 손을 쓸 틈도 없었다.
“저런…… 아무래도 나보다 너희들을 더 좋아하나 봐. 주인이라고 따르기는. 하핫.”
“크…….”
장로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 졌다.
“아름다운 엘프들은 얼굴을 찡그리지 마. 주름살이 생겨나면 추하잖아.”
아르메이스는 작사 작곡 미상인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나뭇가지에서 일어났다.
긴장한 엘프들의 식은땀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르메이스가 고개를 좌우로 꺽었다. 두둑거리는 뼈 마찰음이 울렸다. 아르메이스는 빙그레 웃더니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긴장들 풀어. 그럼 꼭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잖아.”
아르메이스가 말했다.
“이…….”
장로들은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두 손으로 모으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장로들이 일격을 준비하고 있음에도 아르메이스는 천하태평이다.
“난 착한 마족이야. 내 미소 좀 봐 바. 이 얼굴을 보고도 나쁘다고 할 수 있겠어?”
아르메이스는 히죽거렸다.
결국 장로들의 일격의 준비를 끝냈다. 장로 힐이 크게 외쳤다.
“마족 물러가라!”
장로 힐의 손에서 어른 거렸던 마력덩어리가 아르메이스에게 날아갔다. 다른 다섯 장로의 마력 덩어리도 아르메이스를 타겟으로 날았다.
청년 엘프들도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시위를 놓았다. 모두 일격을 노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마족 아르메이스는 피하지 않았다. 좋아해야 할일인데도 불안했다. 결국 불안은 현실로 벌어졌다.
쿵!
화살들과 마력은 애꿎은 지면에 박혔다.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뿌옇게 올라왔다.
그곳에 아르메이스는 없었다.
“하하하!”
아르메이스의 웃음소리가 활엽수 높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진짜 아르메이스가 땅으로 내려왔다. 엘프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재미있네. 모두들 다람쥐를 싫어하나 봐. 이렇게 귀여운 다람쥐를…….”
아르메이스는 짓 이겨진 다람쥐를 집어 들었다. 엘프들이 공격한 아르메이스는 이미지 마법에 걸린 다람쥐였다. 다람쥐는 형체만 남아 있었다.
“다람쥐야. 이 오빠가 잘 묻어 줄게.”
아르메이스가 말했다.
엘프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르메이스는 엘프들의 수많은 화살 앞에서 다람쥐를 묻었다. 엘프들은 그런 아르메이스의 모습에서 분노를 느꼈다. 장로들은 헉헉 거렸다.
“아무래도 이 다람쥐의 복수를 해줘야 할 것 같네. 그렇지?”
아르메이스가 빙그레 웃었다.
“이 추악한 존재!”
“그럼 시작할게. 내가 두려운 자들은 지금 돌아가시는 게 좋을 거야. 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착한 마족이거든. 난 아름다운 너희들을 죽이기 싫어…… 다섯을 셀게.”
“으…….”
엘프들은 일순간 숨을 멈췄다.
여기서 아르메이스가 들어오면 막기가 어렵다. 모두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도망칠 수 없었다. 엘프들은 다시 한 번 화살을 퍼부었다.
“하나.둘.셋.넷”
아르메이스는 비웃기라도 하듯 엘프들의 뒤쪽으로 순간 이동하였다.
“다섯!”
아르메이스의 이마에 박힌 마신의 인이 붉은 빛을 발하였다. 아르메이스는 빠르게 엘프들의 진형 쪽으로 뛰어들었다. 아르메이스가 쏘아 보낸 마기가 장로들의 전신을 덮쳤다. 장로들은 비명과 함께 뒤로 튕겨 날아갔다.
파파파팟!
그것을 시점으로 아르메이스는 엘프 진형 속에서 종횡 무진 하였다.
오직 아르메이스의 독주였다.
아르메이스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엘프는 없었다.
한 명 한 명. 아르메이스의 손에 의해 죽어 나갈 때마다, 아르메이스는 빙그레 웃었다.
순식간에 아르메이스는 엘프들의 피를 뒤집어썼다. 아르메이스가 청년 엘프 리프에게 검을 휘둘렀다. 쾌속한 검은 리프의 어깨를 베었다.
리프는 비명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아르메이스가 리프의 가슴을 밟았다.
마지막으로 리프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으려고 할 때 한 목소리가 울렸다.
“너였군!”
주첨기다.
아르메이스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서 엘프들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주첨기는 아르메이스의 주위에 쓰러져 있는 엘프들을 보며 혀를 찼다.
“아…… 오랜만이네.”
아르메이스가 말했다.
피를 잔뜩 뒤집어쓴 잔혹마의 목소리라기엔 너무나 발랄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주첨기의 목소리가 무겁게 깔렸다.
“보시면 모르나? 가냘픈 다람쥐의 복수 겸 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지. 솔직히 말하면 너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어쨌든 반가워.”
주첨기의 미간이 접혔다.
“난 임무를 수행해야 하니 방해하지 말아줄래?”
“바,로 그놈이오!”
장로 엘프 힐이 뒤늦게 도착했다. 주첨기와 아르메이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주첨기는 아르메이스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얼마 전 설령을 노렸던 자다. 도망가는 솜씨가 워낙에 좋았던 터라, 그때 잡지 못했었다.
“오. 어딜 그렇게 가신가 했었더니. 이제 돌아왔네. 그런데 이걸 어쩌지. 검을 들 수 있는 자는 이제 몇 안남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마…… 원래 인생사가 다 그런 거잖아. 흉겁이 있으면 복도 오니까.”
부상 입은 많은 엘프들을 본 장로 힐은 안색이 푸르락 붉으락 하였다. 아르메이스가 주첨기와 장로 힐이 도착여부에서 상관없이 리프를 심장을 향해 검을 찔렀다.
주첨기가 손가락을 튕겨 탄지력을 날렸다. 아르메이스의 레이피어는 매우 빠른 속도였음에도, 채 심장에 닿기도 전에 탄지력에 튕겨 날아갔다.
아르메이스는 당황하였다.
“이런…….”
아르메이스가 주첨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주지 않을래? 저번에 방해한 걸로 만족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정말 나 화날지도 몰라.”
아르메이스가 두 손을 마주 대었다.
주첨기의 입끝이 실룩였다.
“알았지? 엘프들하고 인간하고는 상관이 없잖아. 그냥 두 눈 감아주면, 후에 보답을 하지. 뭐가 좋겠나. 아…… 막강한 마력이 들어 있는 보검은 어때. 그것도 싫다면 친히 그분께 말씀드려 네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도 있어.”
“재미있군.”
주첨기가 말했다.
“그렇지?”
“재미있긴 뭐가 재미있어! 이 살인마.”
주첨기의 뒤에서 뺴악 소리가 났다. 엘리나가 레이피어를 뽑아든 채 씩씩 거렸다. 엘프 장로 힐이 엘리나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오! 우리 아름다우신 엘리나 공주마마잖아. 뭐 미안하게 됐어. 나도 이렇게 죽이고 싶지 않은데. 인생사가 다 그런 거잖아.”
아르메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인생사! 너 따위가 일생에 대해서 논하는 건 닭살스러워.”
“닭……닭살!”
아르메이스가 대소를 터트렸다.
“공주마마. 이럴 땐 혐오스럽다고 하는 거야. 그렇지? 주첨기. 이봐. 대답 좀 하지?”
아르메이스는 주첨기에게 친근한 어투로 물었다. 주첨기는 대답 대신 내력을 토했다. 주첨기의 전신에서 솟구친 내력은, 흡사 마법 헬파이어처럼 겁화의 열기와 함께 아르메이스 전신을 쇄도해 들어갔다.
아르메이스는 주위에 실드막을 펼쳤다. 강한 마력이 담긴 실드막은 진한 흑빛색을 띄었다.
팡!
주첨기의 내력과 아르메이스의 실드막이 충돌했다.
어김없이 아르메이스의 실드막은 닿는 순간 소멸하였다.
아르메이스는 멀리 튕겨져 나갔음에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주첨기의 애검 청강검이 주인의 손을 떠났다.
아르메이스에게 날아갔다.
물찬 제비처럼 지면 위를 스치며 날아간 청강검이 아르메이스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잠……잠깐. 주첨기.”
아르메이스가 입가에 붉은 피를 흘리며 손을 들었다. 바로 아르메이스의 목 앞에서 검이 멈췄다. 주첨기는 싸늘한 시선으로 아르메이스를 보았다.
“죄인.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주첨기가 말했다.
“멈추지 마요. 주첨기님. 단숨에 저놈의 목을 베어버려요.”
엘리나가 외쳤고, 장로 힐과 청년 엘프들도 같은 마음들 이었다. 주첨기의 검은 당장에라도 아르메이스의 목을 베어버리고도 남았다.
“어째서 날 죽이려는 거지? 난 너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그 말 잊지 않고 있었다. 다음에 만날 땐 죽음을 선사하겠다는 말…… 아무래도 그쪽은 내가 되겠군.”
“이런! 한방 먹었잖아. 주첨기. 네가 그렇게 소심한 사람일 줄이야. 아직도 그 말을 맘에 두고 있는 거야? 이봐 이봐. 진정하라고. 이런 날카로운 검은 치우고 좋게 좋게 대화를 나누는 게 어때.”
아르메이스는 입가의 피를 쓰윽 훔쳤다. 자기 딴에는 발랄하게 말했을지 몰라도, 남은 자들에겐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비단 주첨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첨기의 얼굴이 굳었다.
청강검의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번에 날 막지 않으면. 다음에 한번. 내가 네 목숨을 살려 주겠어. 괜찮은 조건 아니야? 저런 이기적인 엘프들 편 따위는 들어주지 말라고”
“이,이, 혐오스러운 존재!”
엘리나가 거칠게 외쳤다.
“아주 우리 공주마마는 학습능력도 뛰어나시지.”
아르메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바로 목 앞에 떠 있는 검이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아르메이스는 기회를 엿보다가 흑마법을 시전했다.
원혼이 아르메이스의 발밑으로 흘러나와, 그림자처럼 지면에 붙어 엘리나에게 다가갔다.
원혼들은 엘리나의 발을 붙잡았다.
꺄악!
엘리나가 비명을 질렀다.
주첨기가 잠시 엘리나를 돌아본 사이 아르메이스는 자리를 이동했다. 한순간 방심으로 애꿎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아르메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첨기가 원혼들을 짓밟았다. 원혼들은 괴상한 비명 소리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주첨기! 저번일 가지고 사소하게 그러지 말라니까. 꼭 속 좁은 사람 같잖아. 저번에도 말했듯이 난 주인 있는 것을 탐할 정도로 탐욕스럽지 않아. 애완식물 같은 건 포기한 지 오래야. 정말이라고!”
“……주위를 둘러보라. 피를 뒤집어쓴 너는 사형을 당해야 하는 한낱 죄인에 불과하다. 내가 너를 포박할 터이니, 네 죄질에 대한 심판은 이들이 내려줄 것이다.”
주첨기는 말을 많이 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청강검을 움직였다.
청강검은 나무위 아르메이스를 향해 날아갔다. 범인의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청강검은 순식간에 아르메이스의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아르메이스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비튼 덕분에 가까스로 심장을 빗겨나갈 수 있었다.
“죽을 뻔했잖아. 검은 군주님께서 네게 패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없이 좋아했는데. 이런 내게 너무 하지 않아? 난 네 승리에 환호성을 질렀어. 이얏호. 이얏호 하고 말이야. 하하하”
“입만 살았군.”
주첨기가 말했다.
“입? 거참…… 아무래도 오늘은 피곤해서 가 봐야겠어. 갑작스러운 괴생물체의 등장은 정신적인 공황을 가져오니까 말이야. 말이 좀 어려웠지? 한마디로 주첨기. 오늘 이후로 널 보고 싶지 않다는 거야.”
“볼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이후로…….”
싸늘한 한마디가 허공을 찔렀다.
청강검이 방향을 바꿨다. 아르메이스가 임시로 발출한 마력을 가뿐하게 갈랐다. 아르메이스는 당황하지 않고 마력을 손에 모았다.
주첨기는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전력을 다하고 나서면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도망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다.
“하자드!”
아르메이스가 허공에 외쳤다.
환상 마법.
하늘에서 온갖 악귀들이 내려와 죽은 엘프들의 몸을 짓밟았다. 주첨기는 청강검의 방향을 돌려 악귀들을 베었다. 주첨기에게 있어 환상 마법은 처음이었다. 악귀 한 마리를 베고 났을 때, 이는 실물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주첨기가 아르메이스 쪽을 노려보았다. 아르메이스는 주첨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 다음에 보자. 나 아르메이스의 적. 아름다운 엘프 여러분…… 다음에 보자. 내 적 주첨기가 언제까지나 이곳을 지켜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는 바쁜 사람이거든. 하하하!”
아르메이스는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경공술이 아니다.
환상을 보여준 사술과 일맥상통한 마법이란 것이다. 주첨기는 청강검을 거둬들였다.
주첨기는 사라진 아르메이스를 쫓지 않았다.
부상당해 쓰러져 있는 엘프들을 보니, 황성의 수하들과 스승님이 생각났다.
“이들에게도 치유의 샘이 필요한 듯 하외다.”
주첨기가 부상 입은 엘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 것 같아요.”
엘리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엘프들 쪽으로 걸어갔다. 개중에는 이미 숨이 멎은 자도 있었고, 간신히 생명의 끈을 붙잡고 있는 자도 있었다.
엘리나의 머리칼이 나풀거렸다. 향긋한 꽃냄새와 함께 엘리나의 머리색이 푸른색으로 변하였다. 눈동자도 푸른빛을 띠었다. 엘리나의 몸이 두 팔을 벌린 채로 떠올랐다. 그녀의 손끝으로 물방울들이 맺혔다.
이윽고 그 물방울들은 부상당한 엘프들에게로 뻗어 나갔다. 느리게 날아간 물방울은 엘프의 몸에 부딪쳐, 몸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신음을 흘리고 있던 자들의 눈에서도 엘리나와 같은 푸른빛이 발광했다.
신음이 멈췄다.
심했던 외상은 말끔히 사그라들었다.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엘리나님.”
그러나 이미 죽은 이들은 일어나지 못했다. 엘리나는 죽은 엘프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죽은 이들을 한곳에 모으고 땅에 묻었다.
이제 그들은 숲의 거름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엘프들은 주첨기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주첨기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첨기는 부상당했던 자들이 완치되어 일어나는 것을 본 후, 엘리나를 응시했다.
치유의 샘은……
“그대였소?”
“네?”
엘리나가 대답했다.
“치유의 샘이라는 것은 그대를 칭한 말이었소?”
“아마도 그런가 봐요.”
엘리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보시는 바와 같이…… 죽은 이들을 살릴 수는 없어요. 전 신이 아니거든요.”
슬픈 미소였다.
주첨기는 엘리나의 손을 붙잡았다. 엘리나가 눈이 휘둥그레져 주첨기를 올려다보았다.
“부탁하오. 나와 함께 가주시오.”
“전 떠날 수 없어요. 마족이 또 돌아올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갈수가 있죠?”
“어째서 마족이 그대들을 노리는 것이오?”
주첨기가 물었다.
“봉인물. 마계의 문을 봉인한 네 개의 봉인물 중 하나를 우리가 지키고 있어요. 아마도 마족은 그 봉인물을 파괴하여 마계의 문을 열려는 것이겠지요. 그럼 세상은 종말이에요. 마신의 강림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거예요. 그걸 막아야 하죠. 봉인물이 온전한 이상 마족은 또다시 와서, 동족을 해칠 거예요.”
엘리나는 말을 마쳤다.
엘프들은 요 몇일간 지속된 상위 마족과의 전투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부상이 낫자마자 봉인물이 묻힌 지역을 지키고 섰다. 당당하게 섰으나 주첨기는 그들에게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을 알수 있었다.
“이 이상은 무리요. 내가 그 마족을 해치운다면, 나와 함께 가주시겠소?”
“마족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고 계신가요?”
“……모르오.”
“그럼 이렇게 하죠. 그대의 절박한 마음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죠. 이렇게 대화 하고 있는 시간도 그대는 수하들이 걱정스러워 안절부절못하고 있어요. 제가 먼저 가서 치료를 하고 있는 게 어떠나요? 그동안 그대는 이곳을 지켜줘요.”
엘리나가 말했다.
“그대가 그곳에 가기엔 먼 곳이오.”
“어딘데요?”
“드래곤의 평원이오.”
“엑?”
“왜 그러시오?”
드래곤의 평원엔 흉악한 레드 드래곤의 레어가 있는 곳이다. 엘리나는 드래곤이라면 질색이었다. 이곳에 결계를 치고 숨어 지내는 것도 드래곤 탓이 컸다.
“그곳에는 레드 드래곤이 있잖아요.”
“내가 해치웠소만.”
주첨기는 담담히 말했다.
“아…….”
검은 군주 발록까지 해치운 사람이다. 실로 인간이라고 보기 어려운 존재. 레드 드래곤을 해치웠다는 소리에 의심이 가지 않았다.
“그곳이라면 텔리포트로 갈수 있어요.”
“마법말이오?”
“네.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대는 마족으로부터 이곳을 지켜줘요. 저는 그대의 수하들을 치료하겠어요.”
“좋소. 그대만 믿겠소.”
주첨기는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믿어도 좋아요.”
엘리나가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