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ctious Disease Survival RAW novel - Chapter 44
44화 요새 확장 (2)
“태경아, 우리도 그만 들어가자!”
“네! 잠깐만요. 메모 좀 하고 따라갈게요.”
오피스텔 건설현장의 손봐야 할 위치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을 메모해 둬야 나중에 까먹지 않고 작업할 수 있다.
-가림막에 비계 파이프 덧대기.
-가림막 지지용 비계 파이프에 시멘트로 보강하기.
-가림막과 지면 사이를 시멘트로 메꾸기(현장 전체).
-건설현장 반쪽은 식량 재배를 위해 땅 일궈 놓기.
-출입구를 제외한 3면에 망루 설치하기
대략 앞으로 작업해야 할 것들을 메모한 후에 철민 아저씨를 따라 원룸 건물로 돌아왔다.
“철민 씨, 고생했어요. 저녁 차려 놨으니까 얼른 손 씻고 오세요.”
“하하, 저녁 차리느라 수고했어요. 얼른 씻고 가겠습니다.”
“나는……? 나도 고생했는데?”
희윤 누나와 철민 아저씨는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자기들끼리 하하호호 대화를 나누며 누나는 부엌으로 아저씨는 화장실로 향했다.
지난 2주간 희윤 누나와 철민 아저씨의 관계가 부쩍 가까워졌다.
희윤 누나가 다친 철민 아저씨를 유독 살뜰히 챙겨 줬는데, 내가 봤을 때는 그저 순수한 호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철민 아저씨는 희윤 누나의 정성 어린 간호에 반응해 마음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기 시작한 것 같았다.
부인과 사별하고 홀로 서연이를 키우느라 자신을 돌아볼 겨를 없이 바쁘게 보낸 시간이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부인과의 추억이 쌓인 집을 떠나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살아가게 된 상황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란 지극히 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둘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소외된 느낌을 받는 건 단순히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일기 시작한 철민 아저씨는 희윤 누나를 위한 석궁도 만들어 주고, 희윤 누나와 아이들이 불편해하는 편의 시설들을 고쳐 주는 등의 행동을 보였다.
그런 행동들이 고마운 희윤 누나는 철민 아저씨를 더욱 친절히 챙겼고, 둘이 친절함 배틀이라도 하는 듯 수도 없이 티키타카를 했다.
희윤 누나는 아이가 둘이나 있지만 좀 일찍 결혼한 셈이라 아직 34살인 데다 제법 참한 스타일의 여성이다.
철민 아저씨는 42살의 제법 호리호리하고 준수한 외모의 성격 좋은 아저씨.
8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지만 서로 아이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에 대화도 잘 통하고, 짧은 기간이지만 서로 친절함 배틀까지 하는 중이니 관계가 가까워지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어휴…… 진짜 모르는 건지. 아니면 그냥 썸 타는 걸 즐기는 건지.’
역시 ‘될놈될’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구는 지금 생존하느라 정신없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서로 알콩달콩 재미가 좋으니, 그걸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속이 살짝 울렁거리는 건 내 착각인가 싶다.
“누나…… 내 밥은?”
“어! 내가 하나 덜 데웠나?”
“이거야 원…… 서러워서 살겠나?”
“뭐가 서러워? 그리 배고프면 이거 먼저 먹어라. 희윤 씨 새로 데우는 건 저한테 주세요.”
철민 아저씨는 자신 앞에 있던 밥을 나에게 주고는 희윤 누나에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저녁을 먹고 나니 희윤 누나와 철민 아저씨가 서로 설거지를 하겠다고 우기기 시작했고, 그 모습이 보기 싫은 나는 서둘러 옥탑방으로 올라왔다.
‘그래도 둘이 꽤 잘 어울린단 말이야…….’
사실 태어나서 연애를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나로서는 연애라는 감정이 어떤 느낌인지는 잘 모른다.
그저 책에서 보고, 남들이 하는 얘기를 귀동냥으로 들은 정도의 수준이다.
뚱뚱한 나의 모습에 대한 타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고부터는 나를 아무런 편견 없이 대해 주는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나에게 있어 마냥 어려운 존재였다.
‘아니다, 리아 만큼은 날 편견 없이 대해 줬었네…….’
어렸을 적부터 고향 소꿉친구였던 리아는 언제 만나든 나를 한결같이 대해 준 유일한 여자 사람이었다.
다만, 남자와 여자에 대한 개념이 생기기 전부터 친구였기 때문에 서로를 이성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는 대학에 가기 위해 도시에 나와 살았다.
그렇기에 1년 중 명절에 한두 번 정도 리아를 보는 게 전부였고, 고등학생이 된 이후부터는 서로 무슨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지는 잘 모른다.
아무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직접 연애를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인지 연애라는 건 내게 있어 먼 나라 이야기 같은 것이다.
하지만 희윤 누나와 철민 아저씨를 보고 있자면, 둘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든다.
생존에 필요한 계획들은 단계별로 착착 잘 진행되고 있으며, 서로 많이 배려하고 의지하며 큰 문제 없이 지내는 지금에 감사할 뿐이다.
친가족은 아니지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안전한 거주지가 있으며, 충분한 식량이 있는 이곳이 지금은 내가 살아가야 할 곳이며 지켜야 할 곳이다.
온종일 잔뜩 긴장한 채 일을 한 후, 저녁 식사로 배가 든든해지자 갑작스러운 피로가 몰려온다.
털석- 푹-
노곤한 몸을 침대에 눕히니 의식이 끊기는 건 시간문제였다.
드르렁- 푸우- 드르렁-
* * *
흔들- 흔들- 흔들-
“일어나세요. 오늘은 오피스텔 건설현장 작업해야죠.”
“…….”
철민 아저씨는 5층 점장의 집 거실 소파에 누워 죽어 있었다.
“어제 늦게 주무셨어요?”
“…….”
“희윤 누나랑 뭔 일 있었어요?”
벌떡-
“희윤 씨랑?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느닷없는 내 질문에 당황했는지 철민 아저씨는 조금 전 피곤해 죽으려는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벌떡 일어나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서연이, 지훈이, 지연이가 있기에 희윤 누나와 철민 아저씨가 뭔가를 할 틈 따위는 없다.
하지만 희윤 누나와 엮어 철민 아저씨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 딱 잡아떼는 아저씨의 반응이 너무 웃기다.
“그럼, 얼른 아침 먹고 오피스텔 현장에 일하러 가시죠.”
“그래, 가자.”
거실에서 나와 철민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리자 안방에서 희윤 누나가 나왔다.
“일찍 일어났네? 잘 잤어? 철민 씨도 잘 주무셨어요?”
“응, 난 잘 잤지. 누나도 잘 잤어?”
아침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나서는 가볍게 아침을 챙겨 먹은 후 작업에 필요한 공구들을 챙겨 오피스텔 건설현장으로 향했다.
원룸 건물에서 오피스텔 건설현장까지 펜스를 설치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감염자를 크게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어머? 저거, 감염자인가?”
“흐음…… 감염자 맞는 거 같은데? 내가 처리하고 올게. 누나랑 아저씨는 여기 계세요.”
“그래, 희윤 씨랑 여기 있을 테니 조심히 다녀와라.”
대로에서 원룸 건물 앞 사거리로 들어오는 초입부에 설치된 감염자 하나가 얼쩡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철컥-
석궁을 겨냥한 채 한 발짝 한 발짝 감염자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다가갈수록 감염자는 슬금슬금 나를 피했다.
하지만 내가 무작정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다시금 바리케이드 가까이 다가왔다.
‘뭐야? 감염자가 아닌가?’
입고 있는 옷에는 검붉은 피가 묻어 말라비틀어져 있었고, 머리는 몇 달 동안 씻지 않은 사람처럼 산발한 채 떡이 져 있었으며, 무엇보다 팔다리가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얼굴도 가려져 있어 언뜻 보기에는 감염자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누구냐? 더 접근하면 쏜다.”
“…….”
내가 가까이 접근해도 무차별적인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감염자는 아닌 것 같았다.
“생존자입니까?”
“……네”
가까이 접근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감염자가 아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오랜 시간 동안 떠돌아다닌 생존자인 것 같은데, 나의 말에 그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바리케이드 앞에 서 있기만 했다.
“괜찮으십니까?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먹을 것 좀…….”
감염자와 같은 행색을 한 생존자는 나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들릴 듯 말 듯 조그만 목소리로 먹을 것을 요구했다.
“뭐라고요?”
“먹을 게 있으시면, 조금만 나눠 주세요.”
“먹을 거요?”
“아주 조금이라도 좋습니다……. 저희 아이가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어요. 흑흑.”
난데없이 나타나 식량을 구걸하는 사람.
처음엔 미친 사람인가 싶어 쫓아내려 했지만, 지금 같이 법과 도덕이 무의미한 사회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생존자에게 식량을 구걸한다는 점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
“제발 부탁드려요. 아주 조금이라도 좋습니다. 제발…….”
“알겠습니다. 바리케이드 밖은 위험하니까 잠시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먹을 만한 걸 좀 챙겨 올게요.”
쭈뼛- 쭈뼛-
온몸이 삐쩍 말라 성별도 짐작할 수 없는 생존자는 먹을 것을 나눠 줄 테니, 안전한 바리케이드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나의 말을 듣지 않은 채 계속 바리케이드 바깥쪽에 서 있었다.
“들어와서 기다리시죠. 이 안쪽은 안전합니다. 먹을 것도 나눠드릴게요.”
비록 상태가 멀쩡해 보이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만난 생존자이기 때문에 안전한 곳에서 조금은 쉴 수 있는 호의를 베풀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정체 모를 생존자는 결코 바리케이드 안쪽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 순간, 이 생존자가 나의 호의를 순순히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따라 들어오는 게 무서운 거구나.’
바리케이드 바깥쪽에 가만히 서 있는 생존자를 안쪽으로 들이는 것은 포기하고, 가방에 챙겨 온 음식과 물을 꺼내 생존자에게 건네주었다.
“이거라도 받으세요.”
내가 건네주는 음식과 물을 건네받은 생존자는 앙상한 몸으로 거듭 인사를 하고는 주변을 살피더니 어디론가 쏜살같이 뛰어갔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얼마나 험한 꼴을 당했으면…… 쯧.’
꾀죄죄한 행색, 덥수룩하고 지저분한 머리, 삐쩍 말라 앙상한 몸.
성별도 연령대도 알 수 없었던 생존자는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생존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 행색이었다.
바깥의 수많은 생존자 역시 조금 전 생존자처럼 힘들고 어렵게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조금 전 생존자와의 만남을 통해 다른 생존자들에 대한 상당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감염자를 피해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 하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생존자들 사이에서도 서로를 도우며 함께 생존하는 호의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같은 생존자끼리 서로에게 못 할 짓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새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생존자에게 음식과 물을 챙겨 보내고, 철민 아저씨와 희윤 누나에게 돌아왔다.
“뭐야? 감염자가 아니었어?”
“응, 감염자가 아니라 생존자였어.”
“그래? 그럼 이쪽으로 데려오지 왜 그냥 보냈어?”
“내가 보낸 게 아니라 조금 전 그 생존자가 들어오기 싫어했어.”
“어머! 왜? 왜 안 들어오겠대? 바깥에 감염자들이 얼마나 위험한데.”
생존자와의 짧은 만남에 대한 나의 추측을 희윤 누나와 철민 아저씨에게 얘기했다.
철민 아저씨는 나의 추측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며, 일리가 있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반면에 희윤 누나는 나의 추측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누나, 앞으로는 외부에서 접근하는 생존자들도 조심할 필요가 있어.”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무작정 호의를 베풀면 안 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건물 안으로 들이지 말고.”
내 의견에 동조하듯 철민 아저씨도 희윤 누나에게 신신당부했다.
“태경이 말이 맞습니다. 희윤 씨. 다른 생존자들의 생각과 상황이 저희와 같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알았어요. 감염자 말고 다른 생존자들도 조심할게요.”
나와 철민 아저씨 둘이서 심각하게 얘기하니 희윤 누나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는 감염자 외에도 생존자까지 경계해야 한다.
한정된 음식, 늘 부족한 식수.
경작을 통해 식량을 생산할 수 있더라도 같은 생존자들에게 약탈당할 위험이 존재한다.
이제는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고 경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동족을 해치는 행위조차 서슴지 않는 시대가 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