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72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의장이 말했다.
“하지만…… 시라노 씨마저 사임하면 발의를 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임할 때는 하더라도 안건은 제시하는 게 각국에 대한 예의가 아닐는지.”
“발의.”
시라노가 내뱉었다.
“강한 놈이 먹는다. 이상.”
그렇게 단상을 내려가 버리자 정치인들은 황당했으나 미소를 짓는 자들도 있었다.
마법사들이었다.
‘특유의 고집이 있지. 자신에게 역한 것은 절대로 삼키지 않는 인종이니.’
문 왕국의 왕, 문룡이 일어났다.
“참으로 황당하군!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자리에서 약육강식의 기치를 세우다니!”
의장이 말렸다.
“진정하십시오. 일개 부장의 발언일 뿐입니다. 게다가 이제 부장도 아니니…….”
“그런 말이 통할 거라고 보오! 국제재판부는 성전의 모든 규정과 법률을 총괄하는 조직이 아니오!”
확실히 발언의 강도는 셌다.
“천하의 악당 하비츠를 성전에 참석시키지 않나, 이제는 강한 놈이 먹는다라니. 성전은 피비린내를 맡고 싶은 겐가? 말 그대로라면 국왕의 목이 베인다고 해도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오!”
“말이 너무 심하군요!”
왕에 대한 암살이 입에 담기자 여태까지 지켜보던 자들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평화를 위해 모인 자리입니다. 그런 질 나쁜 생각을 하는 문 왕이야말로 노리는 바가 있는 게 아닙니까?”
“뭐가 어째? 감히……!”
화두가 화두인지라 너도나도 들고일어났고, 성전의 분위기는 전투적으로 변했다.
‘암살은 어쨌거나 시도된다. 여기에서 밀리는 쪽이 가장 먼저 매를 맞게 돼.’
과시, 허세, 위협 등 수많은 워딩이 난무하는 가운데 회의장의 문이 열렸다.
출입문이 열렸다는 사실만으로 모두가 놀랐고,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뭐, 뭐야?”
외팔이 검사가 고개를 숙였다.
“방해했다면 죄송합니다.”
이어서 절뚝거리며 계단을 내려오자 지켜보는 자들의 황당함은 더했다.
‘쿠안 씨.’
시이나가 복잡한 감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의장이 쿠안의 행동을 저지했다.
“잠깐. 누구십니까?”
“토르미아 왕국 특무대 파르카 쿠안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늦게 출석했습니다.”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쿠안을 꾸짖는 것보다 궁금함이 앞선 의장이 말을 멈추고 다시 물었다.
“어떻게 여기 들어왔죠?”
일단 총회의가 열리면 각국 근위대가 유일한 출구를 지키게 되어 있다.
문을 돌아본 쿠안이 답했다.
“걸어서…….”
“그게 아니라! 어떻게 들어왔냐고 묻는 거요! 본청의 문은 전부 폐쇄되었고 근위대를 지나지 않으면 절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그 순간 의장은 깨달았다.
“설마?”
12개 국가의 근위대를 전부 뚫고 왔단 말인가?
그 순간 쿠안의 한쪽 귀에서 핏물이 왈칵 터지더니 땅바닥에 떨어졌다.
시이나의 눈이 커지고, 그를 알고 있는 모두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압력. 귀 하나를 버렸군.’
더욱 기울어졌다.
그 사실을 직감한 좌중이 침묵을 지키는 동안 쿠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멈춘 곳은 토르미아의 교사회였다.
“죄송하지만.”
“아, 네.”
눈치 빠른 사드가 자리를 옮겨 주자 쿠안이 그의 의자에 천천히 착석했다.
시이나의 옆자리였다.
“어째서……?”
“여기가 제 자리입니다.”
알비노와 우오린이 예상하는 것을 당사자인 쿠안이 모를 리가 없었다.
‘시이나를 건드리는 국가가…….’
가장 먼저 죽는다.
그 무언의 협박이 장내를 무겁게 짓누르는 가운데 알비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킬 수 없다면 전부 베어 버린다. 진실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라면…….’
쿠안은 이제 검귀였다.
거대한 꿈 (2)
장내는 조용했다.
자국의 무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만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다.
‘12개 국가의 근위대를 전부 뚫고 들어왔다. 막을 수 없다고 보는 게 옳아.’
각국 수뇌부의 머릿속에서 쿠안의 위상이 하비츠의 레벨로 격상되었다.
‘괜히 나서서 주목을 받을 필요는 없겠지.’
현실적인 암살의 위협 앞에서 조심하는 것은 아무리 과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물론 자존심과는 상관없는 일.
“흥.”
문룡의 코웃음을 시작으로, 각국의 왕들은 지금의 상황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그저…… 귀찮은 화살은 자신보다는 남에게 향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다.
우오린은 하비츠를 돌아보았다.
“드르렁.”
신의 주파수는 여전히 작동하고, 쿠안의 소리도 잠결에 수집되고 있을 터.
‘역시, 일어나지 않네.’
한때 자신의 목을 벤 인간이 사탄에게는 딱히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런 거였어.’
우오린은 잠시나마 하비츠에게 마음을 의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에게도 삶이 있었을 것이다.
태어나기 이전부터 축적된 원인들이 지금의 사탄을 만든 것이겠지만.
‘생각하지 않아. 원인은 있으나 원인에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 가장 인간답지 않은 것.’
그래서 극악이다.
“드르렁.”
사탄도 꿈을 꾼다면, 그 꿈속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지 사뭇 궁금했다.
코로나 왕국의 케이라가 물었다.
“신경 쓰여?”
쿠안이 장내에 들어온 뒤부터 아르민의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아르민은 말을 바꿨다.
“사실은…… 그래.”
시이나에 대한 감정을 접은 그였지만 소중한 사람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해하지 마. 그런 의미로 신경 쓰인다는 건 아니니까. 쿠안 씨 때문이야.”
케이라는 쿠안을 살폈다.
“한쪽 귀를 버렸네. 자르지는 않은 것 같지만.”
“육체 밸런스를 붕괴시키는 이유는 정신적 비대칭을 만들기 위해서야. 처음 팔을 자를 때는 스키마를 도려내야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정신의 문제라는 거지. 한쪽 눈을 베었을 때도 형태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어. 이제는 감각을 차단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 같군.”
“다행이네. 솔직히 남의 일이지만, 시이나 씨 입장에서는 너무 끔찍할 것 같거든.”
“오히려 그 반대야.”
아르민이 신경 쓰이는 이유였다.
“이제 무언가를 베는 것으로는 기울 수 없을 거야. 그런데도 시이나의 옆에 앉았다.”
“……더 이상 뭘 도려낼 수 있는데?”
“모르지. 당사자만이 알고 있을 테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결정을 내렸다는 거야.”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무언가의 절반을 도려냈을 때…….
‘쿠안은 무엇이 될 것인가?’
좌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시이나는 계속 옆자리를 흘끔거렸다.
쿠안은 딱히 표정이 없었다.
‘종잡을 수가 없어.’
교사회의 파견단으로 발탁된 이후로 쿠안을 만날 생각에 들떠 있던 그녀였다.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으면서.’
일부러 피하는 게 분명할 정도로, 그는 시이나가 있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왜 이제 와 생각이 바뀐 거예요?”
대답은 없었다.
“계속 피해 왔잖아요. 이유라도 말해 줘야 할 거 아니에요? 나도 자존심이 있어요.”
쿠안의 입이 열릴 생각을 하지 않자 시이나도 분통이 터져 내뱉고 말았다.
“됐어요. 돌아가세요. 솔직히 나도 쿠안 씨에 대한 감정을 접으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
쿠안이 슬그머니 일어섰다.
“아, 진짜.”
다급해진 시이나가 쿠안의 손목을 붙잡고 거세게 아래로 끌어내렸다.
“후우.”
어쩌다가 이런 고집불통하고 엮이게 되었을까.
“알았어요. 이유는 안 물어볼 테니까, 이따가 얘기해요. 또 도망가지 말고.”
한쪽 귀를 잃은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다.’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 쿠안에게 부담이 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시이나 씨.”
쿠안을 돌아본 시이나는 멍해졌다.
독기만이 전부였던 그가 이런 표정으로 미소를 지은 적은 처음이었다.
“좋아합니다. 진심이에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시이나의 얼굴이 붉어지고, 교사들이 헛기침을 했다.
시이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왜 이러지?’
쿠안의 얼굴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차올랐다.
‘뭔가 결심했구나.’
초조한 마음에 약속을 걸었다.
“알았어요. 그럼 하나만 약속해 줘요. 다시는 그런 식으로 떠나지 마요. 내가 쿠안 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면, 만날 수 있어야 해요.”
죽을 각오를 한 것인가, 또다시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리는 것은 아닌가.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떠돌았으나 의외로 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뭘 잘못 먹었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확신을 담은 쿠안의 외눈이 보였다.
“시이나 씨 곁에 있을 겁니다.”
“…….”
한참이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이나는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깨달았다.
“아.”
수줍은 얼굴을 감춘 그녀가 다시 차가운 이미지대로 안경을 올렸다.
“지켜보겠어요. 마지막 기회니까…….”
쿠안도 고개를 돌렸으나, 미소는 마치 여운처럼 오랫동안 입가에 머물렀다.
의장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했다.
“조금 전 전임자의 발언은 성전의 모토에 반한다고 판단, 무효 처리하겠습니다. 성전은 세계 평화를 위해 존재하며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공식적인 발의를…….”
찝찝한 상태로 일단락이 되었고, 성전 산하 기구의 대표들이 세계정세를 브리핑했다.
세계기후기구의 아미라가 큰 화면에 각국에 열린 마계의 상황을 보고했다.
“감정병, 돌연변이, 해일, 폭염 등 전 세계가 재앙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각국은…….”
수많은 잡담이 마이크 소리에 파묻혔다.
“75점. 얼굴은 예쁜데 눈빛이 좀 그래. 난 저런 여자는 무서워서 싫더라.”
“에이, 왕자님. 저런 스타일이 화끈하다니까요. 일단 몸매 보세요. 죽이지 않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뒤에서 들은 비서가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엄지손톱을 긁적였다.
‘아, 씨. 보석 또 떨어졌네. 비싸게 주고 한 건데. 지금 찾으면 이상하게 보려나?’
아미라가 화면을 넘겼다.
“엄마! 엄마!”
해일이 집을 쓸어버린 자리에 아이가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전쟁고아가 수십만 명에 이르고, 구호 물품은 태부족입니다. 무엇보다 고아원 건립에…….”
“아, 맞다. 자정 무렵에 아라크네 쪽에서 왕족 연회를 연다고 하는데요. 참석하실 겁니까?”
“아우, 가야지. 인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데, 큰일 한번 해야 하지 않겠어?”
“물론 그렇지요. 요즘은 도무지 쉴 틈이 없다니까요. 왕자님께서 고생하십니다.”
세계보건기구의 세리엘이 올라왔다.
“호오?”
왕자의 눈빛이 바뀌었다.
“안녕하십니까. 각국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 서게 되어 영광입니다. 화면에서 보셨다시피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세계보건기구의 연구원으로서 특별한 설명보다는, 감정병의 한 가지 케이스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85점. 합격이야.”
세리엘이 파일을 열었다.
“불과 10일 전에 일어났던, 한 가정의 끔찍한 참극입니다.”
감정병 케이스, 넘버 9-674.
“으아아아!”
남자는 의자에 묶인 채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