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98
“어, 저기 꺽다리 있다. 야, 꺽다리!”
열두 살 무렵, 살이 붙을 겨를도 없이 키가 커 버린 그녀는 또래의 놀림거리였다.
“어이, 너! 우리랑 놀면 돈 줄게. 같이 갈래?”
치안 또한 엉망이어서 인신매매범들이 대낮에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잘해 줄게. 같이 가자고.”
“…….”
그럴 때마다 보르보르는 가느다란 몸을 구긴 채 거리를 관찰할 뿐이었다.
‘무섭지 않아.’
가장 무서운 건 집이니까.
그녀는 나쁜 의미로 시장의 명물이 되었고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은 것이다.
‘나를 보는 게 아니야.’
사람들이 자신을 구경하는 것과, 자신이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보르보르.”
차갑게 식어 가는 보르보르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시로네는 손을 붙잡았다.
‘부디 편히 쉬기를.’
그 순간 손끝에서 짜릿한 전류가 느껴지더니 머릿속에 음성이 퍼졌다.
-중요하게 전할 말이 있습니다.
‘미카?’
거대조정 (5)
시로네가 묻자 다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보르보르는 그렇게 불렀죠. 하지만 제 진짜 이름은 미카가 아니에요.
‘그럼?’
-저는 보르보르입니다.
시로네의 미간이 구겨졌다.
-물론 조금 전에 사망한 육체도 보르보르입니다. 저는 그녀의 분석적 사고예요.
‘스스로 너를 만들어 냈다고?’
-네. 그녀의 뇌파에 가해진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제가 분리된 것입니다.
열두 살의 보르보르는, 거리의 사람들을 지켜보며 또한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아. 나를 보는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거야.’
피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때부터 보르보르는 사람을 관찰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내면으로 향했다.
-그날의 깨달음은 보르보르의 인생에 도움이 됐어요. 그녀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모든 인간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나를 아는 것이 인간을 아는 것. 오랜 사유와 깊은 통찰이 있어야 가능한 일.’
-하지만 삶은 행복하지 않았어요. 여전히 그녀는 약했고, 일에 지친 어머니와 시도 때도 없이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의 눈치를 봐야 했죠.
“술! 야! 술 가져와!”
보르보르는 어머니의 기분이 괜찮을 때만 약간의 돈을 얻을 수 있었다.
타인의 감정을 꿰뚫는 눈을 가졌기에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이런 싹수없는 것이!”
날마다 가해지는 폭언과 폭행에 보르보르의 마음은 점차 병들어 갔다.
‘인간 혐오.’
새아버지의 성향조차 내 안에 있기에, 인간에 대한 혐오는 곧 자신에 대한 혐오.
“이 거지 같은 가족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어머니와 깨진 술병. 보르보르는 그날 무참히 얻어맞았다.
“죽어! 죽어!”
의식이 점차 희미해지는 그때 갑자기 새아버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너…… 누구야?”
마치 바닥에 깔린 사람이 자신처럼 느껴져서, 그는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글쎄. 내가 누굴까?”
“이, 이런 미친 꼬맹이가…….”
벗어나려는 새아버지를 두 팔로 끌어당긴 보르보르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던 속마음이 남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기분은.
“흑! 흐윽!”
그리고 아침이 되었을 때, 그는 천장에 줄을 걸고 스스로 목을 매었다.
정신을 차린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술을 마셨고, 보르보르는 구석에 웅크려 생각했다.
‘사람을 죽였다. 아니, 죽은 것은 나인가?’
피아의 경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그녀의 정신은 빠르게 죽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그녀의 뇌에 스파크가 일어나더니 눈앞에 푸르스름한 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보르보르가 물었다.
“너는 누구야?”
어머니가 고개를 돌렸으나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관심을 껐다.
-글쎄요? 뭘까요? 안녕하세요?
“…….”
보르보르는 활짝 웃었다.
“미카.”
시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직전, 너를 만들어서 탈출한 거란 얘기지.’
-네. 실제로 저는 아주 약한 전기적 신호예요. 보르보르의 뇌에서 탄생한.
‘그런데 왜 이런 얘기를 해 주는 거야?’
미카는 본론을 말했다.
-보르보르는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당신을 존경했어요. 늘 돕고 싶어 했죠.
‘그래…….’
시로네는 울적했다.
-본체는 사망했지만, 저는 남았어요. 아마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겁니다.
‘응?’
-이 전기적 신호가 현실에서 어떻게 정의되는지는 모르지만, 아주 특이한 현상일 거예요. 이제 저는 다시 세계에 스며들어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겠지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요.
‘흐음.’
세상의 전부를 들여다보는 전기가 현상을 넘어 실체로 존재한다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보르보르 외에는 누구에게도 깃들이지 않을 겁니다. 존재라는 것은 저에게 큰 의미는 아니에요. 다만 당신을 돕고 싶어요.
‘어떤 생각이지?’
-제가 필요해질 순간이 올 겁니다. 보르보르가 그랬으니 맞을 거예요. 물론 그녀가 직접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제 그건 불가능하니까요.
착각일 테지만, 미카는 슬퍼 보였다.
-제 도움이 필요하면, 미카라고 불러 주세요. 당신의 목소리에 반응할 것입니다.
‘하지만…… 너는 보르보르잖아.’
어쩌면 미카를 통해서 보르보르의 생명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미카라는 이름이 좋아요.
짧은 대답에서 긴 여운을 읽은 시로네는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래. 알았어.’
손끝의 전류가 사라지자 시로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들은 보이지 않았고 삼천세계가 만든 구멍을 통해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미카라고.”
갑자기 몸에 약한 전류가 흘렀다.
-네. 불렀어요?
“…….”
눈을 깜박인 시로네가 헛기침을 했다.
‘아니, 그냥 중얼거린 건데. 미안. 이제 막 헤어졌는데, 되게 민망하네.’
-괜찮아요. 보르보르는 인간이었지만, 이미 세계와 동화된 저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으니까요. 몇 가지 알려 주자면 현재 바알은 76층까지 올라왔어요. 다른 상아탑 별들의 위치는…….
미카는 현재 상아탑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핵심적인 정보를 뇌파로 전달했다.
‘이건…… 정말 대단하다.’
보르보르의 유산 미카는, 세계의 모든 정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었다.
-또 필요하면 불러 주세요.
몸에 흐르는 전류가 사라진 것으로 미카가 다시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그 느낌을 음미하던 시로네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초상감.”
마법학교 시절,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에서 친구들과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세상의 끝에 와서야…….’
시로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찾았다, 네이드.”
***
교황청 외곽의 숲.
시로네 일행과 에덴은 마을 회관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의식을 지켜보았다.
그중 한 사람이 존경하던 막시무스라는 것에 세이나는 분노를 느꼈다.
‘사탄에게 영혼을 팔다니!’
하지만 성안은 발동되지 않았고, 성검 아스타시아도 지금은 빛나지 않았다.
‘그래…….’
세이나는 시무룩해졌다.
‘나는 악을 벌할 자격이 없어. 처음부터, 내가 가진 신앙은 가짜였던 거야.’
그녀를 살핀 에덴이 말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적진 한복판에서 말하는 것도 불안한 일이니까.”
마을 외곽으로 몸을 숨긴 시로네 일행은 그늘에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에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하비츠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는 길을 잃었어. 그래서 스승님을 찾아갔지.”
그녀의 눈에 푸른빛이 감돌았다.
“성안. 이 눈으로 악의 기운을 쫓아온 거야. 이곳에 엄청난 악이 있어.”
세이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라미교의 팰러딘만이 열 수 있다는 성안을 요라가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돼! 크리아를 믿는 건 라미교야! 요르교는 믿는 신도 없잖아.”
에덴이 말했다.
“악에 대항하는 건 똑같으니까. 하지만 방법이 잘못된 거야. 라미교에서는 신의 사자에게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성스러운 무기, 신성력, 훈련된 조직.”
“…….”
“하지만 당신도 여기까지 오면서 봤을 거 아냐. 단지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니까 비틀리는 거야. 팰러딘은 세뇌당했고, 이단 심판관은 남을 고문하기 위해 자신부터 고문하지.”
“부분만 가지고 단정 짓지 마. 실수를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오랜 세월 악을 물리친 교단이야.”
“그러던 어느 날 사탄교가 라미교에 침투했어.”
에덴이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야. 제아무리 성직자라도 감정병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지킬 것이 많기에 더 힘들었겠지. 마족들은 그 마음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온 거야.”
세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만 있는 게 아니야. 각 국가의 추기경 중에도 사탄교에 넘어간 사람이 많아. 라미교는 세계 최대의 종교, 그러니 그 밑에 사탄교를 믿는 사람들의 숫자는 얼마나 많겠어? 조만간 전 세계가…….”
“그만해!”
세이나가 소리쳤다.
“세계 최대의 종교가 잘못이야? 그렇다면 요르교는? 분명 요라 중에도 사탄교에 넘어간 자가 있을 테지.”
“아니, 그런 요라는 없어.”
“거짓말!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사탄교에 넘어간 순간부터 이미 요라가 아닌 거니까. 그렇다면 네가 말해 봐. 지금 저곳에 있는 사제들은, 너에게 있어 지금도 사제야?”
“…….”
세이나는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알겠어? 눈에 보이는 것. 직위, 계급, 순결, 신성력. 물론 그것을 얻으려면 숭고한 신념이 필요하지만, 그 자체가 선의 척도는 되지 않아. 오히려 악은 그런 경직성의 빈틈을 노리지.”
한때는 에덴도 그랬다.
“내가 들었던 사탄의 마음의 소리는 끔찍했지만, 그건 결코 희귀하거나 특별한 게 아니었어. 오히려…… 가장 인간에 가깝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울림.”
“나도 알아.”
세이나는 솔직히 시인했다.
“성기사가 되어 악을 물리쳤지. 하지만 그럴수록 더 알 수 없게 되었어. 선이란 대체 무엇일까? 악을 해치우면, 마족을 베면, 그것이 선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손은 피에 물들어 있었다.
“요르교의 창시자, 제1대 요라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 선의 힘이란 악을 없애는 게 아닌, 악을 선하게 바꾸는 능력이라고. 따라서 그 힘은 결코 무언가를 파괴하는 형태가 될 수 없고, 오직 자기희생으로만 이룰 수 있다.”
“희생…….”
에덴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나도 스승님에게 전해 들은 말이야. 물론 아직은 다 이해하기 어렵고 흉내조차 내기 힘들지만, 내 힘의 근간이 되는 구결이지. 당신에게는 선의 힘이 느껴져. 분명 신성력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세이나는 미소를 지었다.
비록 다른 교단의 요라에게 위로를 받았지만, 이제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마음이다.
“아, 그리고.”
에덴이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네가 여기에 있을 줄 알았어. 굳이 내가 교황청에 특파된 이유도 전할 말이 있어서야. 300명의 요라가 모여서 토의한 내용인데, 앞으로 요르 교단은 야훼의 뜻에 따라 전 세계의 사탄교와 맞서 싸울 거야.”
“하지만 나는 종교를 만들 생각은…….”
“알아. 하지만 요르는 종파를 구분하지 않아. 그래서 도울 수 있는 거지. 홀로 일어서는 사람만이 세상 전부를 사랑할 수 있다, 이게 제1대 요라의 가르침이거든.”
이루키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