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315
시로네는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테스가 울먹였다.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였구나.’
그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 리안은 자신의 심장에 신념의 왕국을 세웠을까?
“가.”
테스가 말했다.
“가게 해 줘, 시로네. 알잖아. 네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는 거. 나도 아니까 이런 말 하기 싫지만, 너무 무섭지만…….”
그녀는 울음을 참으며 내뱉었다.
“시로네 너는, 리안의 긍지란 말이야.”
“후우!”
시로네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든 그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래.’
같이 책임진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끝까지.
“리안, 난 이번 준동경계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리안은 미소를 되찾았다.
“맡겨 둬.”
남은 한 팔로 대직도를 끌며 리안은 일행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천천히 하체를 낮추고 허공을 올려다보는 순간, 세상이 진동했다.
시로네는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에.’
친구를 사귀었다.
작은 깨달음에 기뻐하고 좌절도 많이 했지만, 모든 것이 그때부터였다.
‘항상 내 곁에 있었던 것 같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옆을 달려 준 친구의 이름은.
‘오젠트 리안.’
리안의 육체가 연기로 풀어지고, 대직도가 굉음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자.’
리안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대직도의 섬광이 하늘 전체를 가득 채웠다.
‘바로 나.’
시로네는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시로네의 검이다.’
펑! 펑! 펑! 펑!
빛의 폭발이 준동경계를 밀어내면서 세계 각지의 괴형체들이 사라졌다.
복구할 여지도 없는 완전 파괴.
동시에 세상 전체가 구겨지더니 여태까지의 일들이 하나의 기억으로 빨려 들었다.
“어어?”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시로네 일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슈카 성문 앞이지만 위치가 전과 달랐다.
토르미아 군대도, 리퍼의 군대도 각자의 기억을 더듬느라 멍한 표정이었다.
테스가 주위를 살피며 소리쳤다.
“리안! 리안!”
아무리 둘러봐도 없었다.
앞이 깜깜해지면서 식은땀이 온몸에 퍼지는 그때.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테스는 황급히 돌아섰다.
리안이 대직도를 어깨에 걸치고 서 있었다.
팔도, 다리도 정상이었다.
“너, 너.”
“표정이 왜 그래? 혹시 뒤로 돌 수 있다는 걸 까먹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테스는 때릴 듯이 다가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마음이 있었다.
“무서워 죽는 줄 알았잖아.”
리안은 품에 안기는 테스를 한 팔로 감쌌다. 그리고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아직 남아 있는 게 있지?”
“응.”
시로네는 지평선을 살폈다.
한 남자의 이야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준동경계가 깨지는 순간 루피스트와 플루는 곧바로 사태를 파악했다.
신체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굴종의 낙인도 사라진 상태였다.
“잘 처리됐군.”
“네. 건물도 복구됐어요. 아마 괴형체 출몰 이후부터 초기화된 거겠죠?”
“그쯤을 최초의 준동 시점으로 보고 있기는 하지. 뭐, 그건 나중에 분석할 일이고…….”
루피스트는 걸음을 옮겼다.
준동경계에서 사망했던 강철 마법사 로암이 무릎을 꿇고 배를 잡고 있었다.
“크윽.”
“꽤 좋은 꿈이었어. 안 그래?”
로암이 고개를 들었다.
그도 대마법사이기에 사태 파악은 순식간이었다.
“흥, 너의 무모함에는 질릴 뿐이야. 그런 식으로 어떻게 대마법사가 됐는지.”
“그게 너와 나의 차이지.”
루피스트를 중심으로 철의 파동이 뿜어져 나와 거칠게 회전을 시작했다.
“어때, 한 번 더 기회를 줄까?”
“……쳇.”
로암은 패배를 인정하듯 고개를 숙였다.
굴종의 낙인도, 순위도 없다.
남은 건 법적인 절차뿐.
성음은 멀쩡한 두 손을 살폈다.
폭발로 잃은 신체 부위가 전부 복구되었고, 사건 또한 기억에 불과했다.
‘시로네가 해냈구나.’
기뻐하는 것도 잠시,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본관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숨이 찰 지경이었다.
어느 순간 걸음이 우뚝 멈췄다. 건물 입구에서 에이미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생소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에이미가 성음을 발견하더니 한쪽 눈을 찡긋하며 검지와 중지를 모아 눈썹 끝을 살짝 찍었다.
성음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힘차게 팔을 흔들며 전력으로 달려간 그녀는 에이미에게 몸을 던졌다.
뺨에 얼굴을 비비며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리자, 마치 강아지가 덮친 듯 꺅 소리를 지른 에이미의 입가에 함박 웃음꽃이 피었다.
아직 남아 있는 것 (6)
***
준동경계는 사라졌다.
굴종의 낙인도 해제되었고, 마침내 인류는 깊은 공겁 속에서 깨어났다.
물론 기억은 남는다.
전범을 색출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테지만, 적어도 이번 사태를 주동했던 핵심 인물들은 토르미아 군대에 의해 속속들이 체포되고 있었다.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가는 전범들의 행렬에는 리퍼 또한 있었다.
“빨리 걸어, 이 자식아!”
리퍼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자 뒤를 따르던 남자가 엉덩이를 걷어찼다.
“빌어먹을! 너 같은 놈을 따르다니!”
앞으로 고꾸라진 리퍼는 흐느적거리며 일어섰다.
싸울 의욕도 없고, 깨진 안경알 속에 담긴 것은 김빠진 상실감뿐.
“……거지 같은 꿈이네.”
그들이 연행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시이나는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쿠안이 오지 않고 있었다.
‘어디 간 거야?’
그때 누군가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놀란 그녀가 쿠안을 보고 경직을 풀었다.
“여보.”
“다녀왔습니다.”
학생들이 그 모습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얼굴이 빨개진 시이나가 짐짓 성난 표정을 지으며 쿠안의 손을 뿌리쳤다.
“뭐 우주 끝이라도 갔다 온 거예요?”
“일을…….”
쿠안이 평소와 달리 미소를 지었다.
“일자리를 구한 것 같아요.”
바깥 세계를 최초로 탐험했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시이나와 함께하는 삶이었다.
10년 동안 두문불출한 남편을 기다려 준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기도 했다.
쿠안이 다시 그녀의 허리를 당겼다.
학생들이 다시 호들갑을 떨었으나 이번만은 시이나도 못 이기는 척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쿠안이 미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행복합시다.”
***
제르비스의 생각 속.
풍경도 배경도 없는 곳에서 시로네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세계가 여러 번 흔들리더니 제르비스가 단말마를 지르며 모습을 감추었다.
‘의식이 끊어진 거야.’
위저드가 해냈다는 뜻이고, 따라서 현재 제르비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
그럼에도 시로네가 머물 수 있는 이유는.
‘무의식.’
제르비스의 무의식이 여전히 시로네를 붙잡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흐으으으.”
아픈 신음 소리를 내며 땅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제르비스…….”
일까?
얼굴의 반쪽이 무너졌고 팔다리는 뒤틀렸으며 고개는 90도로 꺾여 있었다.
전신에 박힌 수십 개의 눈동자가 이곳에서 그의 존재를 알려 주고 있었다.
‘슈퍼에고.’
무의식에서 제르비스의 의식을 지배하는 절대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야훼여.”
제르비스가 말했다.
“말해 봐라,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난 그냥 태어났을 뿐이야. 내 어미는 갓 태어난 아기의 목을 여러 번 졸랐지. 그게 내 최초의 기억이다.”
‘뇌에 문제가 생겼던 건가?’
공포, 죽음, 쾌락 같은 것에 대한 극단적 노출.
“늘 충동에 시달렸지만, 최선을 다했어. 살아가고 싶으니까. 인간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도 세상이 나에게 준 것은 사슬뿐이야. 사지가 묶인 채 할 수 있는 건 오직 생각, 생각만이 전부였어. 그런데 이제 그것도 하지 말라고? 왜?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지?”
시로네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참았으니까.”
제르비스는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무의식에 스며들어 영향을 미치게 된다.
“너는 어떤 만족도 얻지 못했으니까. 그게 바로 앙케 라 프로그램이야.”
신은 인간의 가장 큰 비극에 깃든다.
“앙케 라는 다중 우주 사용자 중에 프로세스가 가장 약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 같아. 생명 활동이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사용자의 사고를 율법과 연결시켜 공겁 시스템을 만드는 거야.”
눈이 내렸다. 닿는 순간 얼어 버리는 차가운 눈이 지상을 뒤덮고 있었다.
“고작, 고작 그거야? 필사적으로 참은 대가가 앙케 라가 되는 것뿐이라고?”
“아니. 시스템은 너를 이용하는 거야. 율법을 연산하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프로세스가 필요하니까. 다중 우주를 통제하기 위해.”
“크크.”
제르비스는 어깨를 떨었다.
“차라리 잘됐군. 앙케 라가 되어 전부 다 죽여 주마. 그것만이 유일한 복수야.”
“그건 네가 바라던 게 아니잖아.”
“너 따위가 뭘 알아? 그럼 평생 고통받다가 죽는 게 나인가? 그 하찮은 인생이 나란 말이야? 난 태어날 때부터 사람을 죽이고 싶었어! 뼛속까지 살인자라고! 내가 참은 건 오직 이날을 위해서야!”
시로네는 떨어지는 눈을 만졌다. 먼지만큼 작은데도 손이 얼어붙는 듯했다.
“오래전에…….”
울티마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떤 분이 나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 너 자신을 지킬 수 없을 만큼 강한 악과 싸워야 한다면, 악의 방법론을 따라도 좋다고.”
제르비스는 입을 다물었다.
“또 이런 말도 하셨지. 가족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다면 선악의 중립에 서고, 더 많은 사람을 지킬 수 있다면 선을 수호해라.”